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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호 장로
선교지평 발행인

이슬람에 대한 시각이 확실히 예전같지 않다. 이슬람과 관련된 온갖 폭력사태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것은 여전하지만, 사람들은 무슬림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 왠지 모를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는 ‘의외성’이 적지 않은 몫을 했다. 강한 반감을 가졌던 대상에게서 예기치 않게도 긍정적인 면을 발견했을 때 호감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주로 서양 사람들이 제공한 정보에 떠밀려 이슬람에 대해 거부감 가득한 사회 환경에서 교육 받고 성장한 사람들이 실제로 무슬림들과 만나 생각처럼 폭력적이지 않고 오히려 진정성 있어 보이는 그들의 삶을 경험했을 때 그와 같은 태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발견한 긍정적인 면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슬림들이 시대를 거스르면서까지 간직하고 있는 보수성일 수 있다. 우리네 동양 사람들에게 걸맞은 정감 깊은 감성적 문화일 수도 있다. 외모에서 풍기는 강인함과 달리 오히려 여성스러운 품성일 수도 있다. 개인보다는 가족이나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 지향적인 성향일 수도 있다. 혹은 방문객이라면 분에 넘치도록 환대하는 그들 특유의 친근함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다분히 주관적이거나 일시적인 인상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무슬림에게 다가가게 하는 요인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슬림으로부터 물러서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뜻밖의 친절함 때문에 무슬림들을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그들의 지나친 친절함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에 대해 일어난 우리의 호감이 우리가 사는 사회가 변해감에 따라 비호감으로 변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가지는 이슬람에 대한 감정은 보다 일관적일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주로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지지만, 사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아주 오랫동안 있어온 일이다. 그 정황들을 짚어가다 보면 그저 피상적인 인상을 넘어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구체적 요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넓은 범위의 개념이다.

예컨대 기독교 사회가 이슬람 사회로부터 다양한 문물을 대폭 수용하던 때가 있었다. 거기에는 한 사회의 사상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학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서 이미 천여 년 전 중세 로마교회에서 겪었던 경험을 한 번 살펴보자. 그때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해 호감의 시선을 보낸 구체적 정황이 어떠했으며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대개 역사가 그렇듯 이것도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이슬람에게 손을 내밀다

중세의 절반 정도가 지날 즈음 유럽 기독교사회의 지식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통해 합리적 사고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중세가 시작될 무렵 보에티우스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꿈꾸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서적들을 번역했지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이단척결이나 이방선교 같은 이유를 들어 세속학문을 밀어내는 쪽을 택했다. 학문의 산실이었던 플라톤 아카데미의 폐쇄(529)는 유럽사회에서 세속학문의 쇠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후 수백 년이 흘러 유럽인들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 푹 젖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럽사회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그 철학자의 저서들이 어디서 발견되었을까? 의외일 수 있지만 주로 이슬람 사회에서다. 그 중에서도 스페인 땅의 이슬람 점령지가 대표적이다. 고대 말과 중세 초 유럽사회에서 밀려난 학자들은 국경을 넘어 동방나라로 학문의 터전을 옮겼다. 얼마 후 신흥 이슬람이 그곳으로 밀려왔을 때 이 새로운 종교의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쫓겨난 학문에 매료되어 그 책들을 자신들의 언어로 옳기더니 그것들을 지식문화의 근간으로 삼았다. 칼리프 알마문(813-833)이 설립한 바이트 알히크마, 즉 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학문기관은 번역의 중심지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 사회에 정착하고 발전한 고전 학문이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그때 통로 역할을 했던 장소들 중 하나가 바로 스페인 땅이다.

왜 하필 스페인 땅이었을까? 610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은 팽창의 속도가 워낙 빨라 서쪽으로 북아프리카를 통과해 스페인 땅으로 진입 하는데 고작 백여 년이 걸렸을 따름이다. 그곳에서 무슬림들은 수백 년 동안 이슬람 문화를 꽃피운 후 1492년이 되어서야 마지막 거점까지 유럽인들에게 다시 내어주었다. 그 사이에 기독교 세력은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투쟁을 벌였고 재점령에 성공했던 곳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슬람 군대를 몰아내고 오랜만에 다시 찾은 도시들에서 유럽인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남겨진 이슬람 문화를 접하게 된다. 낯설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은 문물들로 가득 찬 도시의 광경에 유럽인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예술이든 기술이든 과학이든 망라되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들 중에는 장차 유럽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있었다. 굶주린 짐승이 먹잇감이라도 찾은 양 아랍어로 된 그 철학자의 책들을 라틴어로 번역해 내는 자들이 있었고,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것들을 탐독했다. 적지 않은 기독교 지식인들에게 그 책들은 이제까지 고뇌하던 것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로 보였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어서 아는 것과 그 안에 있는 사상을 현실세계에 담아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비록 그의 사상이 세상을 읽는데 탁월하다 하더라도 이미 기독교 세계관이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는 현실에서 그것을 적용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 지식인들이 눈을 돌린 대상은 이슬람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철학이 이슬람 신앙 앞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지 이미 오랫동안 고심했던 터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풀이해 놓은 아랍학자들의 주석서들에 그 고심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기독교 학자들은 그것들을 재빨리 번역해서 학습의 안내자로 삼았다. 결국 아랍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을 통해 코란과 이슬람을 해석했다면, 기독교 학자들은 그 철학자의 눈을 통해 성경과 교회를 바라보되 아랍 주석가들의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이 아랍학자들에게 존경어린 마음을 품은 것은 별로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아랍인의 철학논리가 가톨릭교회에 위협을 가할 만한 것이어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컨대 코란을 해석할 때 이성의 논증을 포기하지 않은 탓에 이슬람 법정에서조차 정죄를 피할 수 없었던 이븐 루슈드(1126-1198)가 기독교 사회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 중 한명이었다. 그의 유럽 추종자들은 성경과 모순되는 내용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 불리거나, 이븐 루슈드를 유럽에서는 아베로에스라 불렀기 때문에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라 불리기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이들 합리주의자들과 논쟁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역설했지만, 그가 아베로에스 추종자들을 비판한 것은 그들이 아랍학자를 의존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공통의 고뇌

기독교 신학자들이 이슬람 신학자들에게 이 정도로 수용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1220-1250)처럼 이슬람에 대해 공공연히 신학적 포용성을 드러낸 인물들도 간혹 있었지만, 유럽의 여느 사람들에게 이슬람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 때가 되면 수학이나 의학이나 기술 같은 다양한 문물들이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 세계로 건너간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학자가 이슬람 신학자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반적인 기술을 받아들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상대가 누구든 더 발전된 것이 있으면 수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슬람을 이교도 집단으로 여기던 기독교 지식인들이 바로 그곳으로부터 사상적 수용을 결심했다는 것은 흔히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했던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기독교 지식인들이 빼앗겼다 다시 찾은 도시에서 이슬람 사회를 경험했을 때 그곳의 진보한 문물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도시의 화려함 뒤에서 자신들의 것과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고뇌했던 무슬림 학자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사실 성경과 코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는 상호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과 코란에서 동일한 이름이 나타나고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창조주 하나님을 입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이 두 종교 사이에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기독교 지식인들은 이슬람 사회에서 뜻밖에도 자신들과 동일한 고뇌의 흔적을 발견했다. 전혀 다른 본질을 추구하는 두 집단이 각각의 ‘신앙’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통스럽게 생겨난 엇비슷한 고뇌이다. 예컨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기 시작한 유럽의 지식인들이 이슬람 사회에서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던 자취를 발견했을 때 예상치 못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아랍인들의 지식을 단지 옮겨와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학습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뇌를 공유한다는 것은 분명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합당한 교제와 분별

기독교와 이슬람은 상호 폭력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폭력은 상대가 이슬람이기 때문에, 혹은 기독교이기 때문에 발생한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어떤 집단들 사이에서든 일단 전쟁이 발생한 곳에서는 예외 없이 억압과 불평등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도 그런 것이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할 때 불평등은 존재했을지라도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사회풍토는 낯설지 않았고, 한 건물을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번갈아 가면서 예배당으로 사용한 경우도 목격된다. 물론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소위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회와 이슬람 사회 사이에 특별한 적대감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특별한 적대감은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색이 없는 곳이라면 그런 식의 적대감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다툼으로 알려진 십자군 전쟁이 유럽의 동쪽 너머에서 일어날 바로 그 때 유럽의 서쪽에서는 기독교 지식인들이 이슬람 학자들을 책을 읽고 있었다.

이제 우리 교회로 눈을 돌려보자.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교회의 일꾼들도 이슬람에 대한 편견에서 점차 벗어나는 중이다. 정치적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허물없이 무슬림들에게 다가가려 애쓰고 있다. 그들 역시 무슬림들에게서 공통의 고뇌를 발견할 것이다. 계시를 통해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내야하는 고뇌, 세상 유행을 좇아가는 종교적 풍토 가운데서 예배를 지켜야 하는 고뇌,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다음 세대로 교리를 상속해야 하는 고뇌, 이런 공통된 고뇌들이 있어 보다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낌 없이 다가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복음을 증거할 기회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하는 교회는 염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벽을 허물고 보니 다가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혹은 문을 열어야 하는 대상과 굳게 걸어잠가야 하는 대상 사이의 경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해 중심을 잃게 되는 경우가 선교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이런 염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 같은 교리서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과 친밀히 교제하면서도 지키고 붙들어야 할 핵심적인 내용들 대부분이 여기에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슬람과 직접 대면하는 일꾼들에게 교회가 요구해야 할 중요한 것 하나는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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