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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의 삶과 고신 교회

 

 

권수경 목사

(일원동교회 담임)

 

 

도입

 

   ‘고재수의 삶과 고신 교회’라는 제목을 받았습니다. ‘고재수의 삶’은 ‘고재수 교수님의 삶과 신학’을 함께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앞서 유해무, 최승락 두 분 교수께서 고재수 교수님의 삶과 신학을 한국교회와 연결해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두 분 전공이 마침 교의학과 성경신학이라 고재수 교수님의 학문 전반을 다 다루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도 많이 갔고 하니까 개인적인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어 볼까 합니다.

   고 교수님의 삶도 신학도 정말 소중하지요. 저한테도 그렇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한국교회 특히 고신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오셔서 10년 동안 엄청난 영향을 끼치셨고 그 결과 교수님께 배운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개인은 정말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만, 적어도 총회 차원에서는 교수님이 한국에 계시는 동안에도 물론이지만, 캐나다로 이주하신 뒤에는 특히 공적 교류가 거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국을 떠나신 뒤에는 오히려 독립개신교회가 교수님 신학에 관심이 많아 모셔서 강의도 듣고 책도 내고 했는데, 우리는 교수님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가 돌아가시기가 무섭게 갑자기 관심을 쏟으니 다소 당황스럽습니다.

   교수님과 고신 교단은 두 가지로는 엮여 있으리라 봅니다. 하나는 10년 동안 교수님께 배운 제자들이 현장으로 나가 배운 것을 목회로 또 삶으로 실천해 고 교수님의 삶과 신학을 이었다고 봅니다. 그 영향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통계로 낼 수도 없으나 교수님께 배운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큰 배움을 얻었다 했으니 그 고백과 이후의 삶이 명확한 증거라고 믿습니다. 또 하나는 교수님 제자 가운데 몇 사람이 신학교 교수가 되어 강단에서 또 삶으로 교수님의 신학을 계승했다고 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최승락 원장을 비롯해 몇 분의 제자가 신대원 교수로 가르쳤으니 그분들을 통해 고 교수님의 신학도 전수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정보와 자료에는 한계가 있어 교수님의 십 년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의 참 열매는 주님 앞에 가서 확인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교수님이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는 박사학위를 받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사후보생에 해당하는 독토란두스 Doctorandus라는 학위를 갖고 계셨는데 그걸 약자로 Drs.라 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영어식으로 읽어 Doctors, 즉 박사학위를 여럿 가지신 분이라 불렀습니다. 전공인 교의학과 성경신학 외에도 철학, 고전학, 교부학, 교리사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걸 학생들이 수업 시간마다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저 개인적으로 고재수 교수님은 저에게 신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영어로 “by far the strongest influence”를 남기셨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재학 시절 수업을 통해서도 많이 배웠지만, 교수님 개인 조교로 2년 이상 댁에 함께 살면서 연구하시고 집필하시는 일에 참여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배워, 이후로는 유학할 때나 또 지금까지 목회자로 또 신학자로 연구할 때도 교수님 흉내를 내면서 연구와 집필에 많은 열매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고재수 교수님의 삶 가운데 단편적으로 몇 가지가 기억납니다. 제가 함께 사는 동안 사모님과 두 분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재미있게 읽으시는 걸 보았고, 한국 음식 가운데는 비빔밥을 좋아하신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때 온 식구가 송도에 있던 ‘정득 분식’이라는 조그만 식당으로 가서 비빔밥으로 외식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집에서는 디니 사모님이 준비하신 식사를 늘 함께 먹었는데, 잡곡밥도 많이 먹고 네덜란드 사람 아니랄까 감자도 많이 먹었습니다. 아침에는 빵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아이들이 빵에 버터를 잘 바르기에 무슨 비결이 있느냐 물었더니 “한국 아이들은 젓가락질을 잘하지 않느냐?” 하셨습니다. 문화가 상대적이라는 걸 그때 느껴 보았습니다. 사모님께 화란어를 잠시 배우면서 In Holland Staat Een Huis하고 Daar Bij die Molen이라는 노래도 배웠습니다. 아이들 생일 때는 Jarige Job이었나, Jarige Jos였나, 책도 읽어 주시던 일도 기억납니다. 비행기도 교수님과 함께 처음 타 보았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였는데 무슨 일로 서울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말 기억에 남는 것, 제 뼛속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은 당연히 교수님께 배운 신학이지요. 제가 고재수 교수님께 뭘 배웠을까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그거 하나는 고 교수님께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재미있지요. 고 교수님과 같이 있으면서 구속사적 설교에 관한 책을 번역했는데, 제 생애 처음 번역한 시드니 크레이다누스(Sydney Greidanus)의 그 책 제목이 또 “쏠라 스크립투라”입니다. 그 책을 번역하고 또 고 교수님과 성경도 함께 연구하면서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속사적으로 보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배웠습니다. 제가 앞으로 출판할 책 가운데 구약성경에 대한 구속사적 연구와 설교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비스케르커(J. R. Wiskerke) 목사님의 에스더 강해인 『부림』도 함께 번역했는데, 교수님이 고재수, 권수경 공역으로 하자 하셨는데 제가 그냥 교수님 이름으로만 하시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과 나란히 이름을 새길 기회를 놓쳤으니 후회가 좀 되긴 합니다만 그 과정에 또, 성경 본문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방법을 많이 연습했으니 훨씬 소중한 것을 얻었지요. 제가 출간하려는 책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무대에서”라는 제목인데, 사람의 일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풀어 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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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수 교수님은 전공이 교의학입니다. 박사 논문 제목이 “De Geestelijkheid van God”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을 하는 분들은 시스템 곧 architectonic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빈자리를 메꾸려는 유혹을 쉽게 받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다 보면, 이를테면 1번, 2번, 4번은 나오는데 3번은 성경에 안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경 구절 가운데 비슷한 게 있으면 그걸 슬쩍 인용하고는 1, 2, 3, 4가 다 있다 하고 말하는 거지요. 한 보기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3항에 보면 “선택된 아이들은, 어려서 죽어도,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으로 거듭나고 구원받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1] 그런데 인용한 성구를 보면 예수님이 아이들을 환영하셨다는 구절(눅 18:15),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한 베드로의 설교(행 2:38), 거듭나야 천국 간다는 주님 말씀(요 3:3), 아들을 믿어야 생명이 있다는 말씀(요일 5:12) 등인데 아이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언약 신학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빠진 3번을 슬쩍 끼워 넣은 경우지요.

   고재수 교수님은 언약 신학과 유아세례에 대해 글도 많이 쓰시고 강의나 설교도 하셨는데, 책으로 나온 자료를 보아도 비슷해 보이는 구절을 적당히 끼워넣기보다 본문을 철저하게 연구해 활용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추정된 중생 이론을 조심스럽게 비판하면서 일관성 있게 언약론적으로 접근합니다.[2]

   어린아이의 중생 문제에 대한 칼뱅, 우르시누스 등의 설명을 분석하는데 한 마디로 성경의 지지를 받느냐 안 받느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이의 중생 문제는 성경이 전혀 말하지 않고 있으며, 모태에서 성령이 충만했던 세례요한이나 태중에서 구분된 예레미야를 활용하는 것도 잘못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철저하게 성경적이면서 또 철저하게 논리적입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게 언약 신학 아닙니까? 하나님이 믿는 사람의 가정을 내 백성으로 약속하셨고 그 가정에는 어린 자녀도 포함된다는 사실, 다시 말해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는 내용만으로 든든한 언약 신학을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사변을 하나님 말씀과 섞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하신 그 정신을 제가 잘 배웠고, 기독교 복음과 세상 사상을 구분해 설명한 첫 책 『질그릇에 담은 보배』를 고재수 교수님의 영향 아래 썼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는 정말 중요하면서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참 어려운 원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한 단편적 지식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원어를 잘 알아서 본문을 잘 분석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 전체를 짜임새 있게 파악하되 바른 교리와 고백의 체계 안에서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교회사에서 그 본문과 그 교리를 다룬 사람들의 관점을 분석해 정리하면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참 죄송한 말씀이지만 고신에서, 아니 우리 한국교회 역사에서, 교의학을 이렇게 성경 본문에 충실하게 정리하고, 또 성경 본문을 이렇게 바른 교리와 고백의 체계에서 해석한 분은, 고재수 교수님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고재수 교수님에게 그런 교의학을, 체계를 정리할 건강을 안 주신 하나님의 뜻은 아직도 미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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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것들

 

   제가 고 교수님께 배운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보려 합니다. 저 말고도 영향을 받은 분이 많겠지요. 앞으로 몇 년 동안 제가 계속 낼 책을 보시면 제가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구약에서 톨레도트를 기록할 때처럼 덜 중요한 것부터 몇 가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마태복음 16:23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파게 오소 무 사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여기서 헬라어 “사타나”는 ‘사타나스’의 호격인데(Vocative), 고 교수님이 한국말하고 헬라어가 똑같다 하셔서 그때 처음 그런 줄 알았습니다. 물론 헬라어는 ‘사타나스’에서 시그마가 떨어져 ‘사타나’가 됐고 우리는 ‘사탄’이라는 히브리어에 ‘아’를 붙여 ‘사타나’가 되었으니 과정은 다릅니다만 어쨌든 결론은 같아졌습니다. 우리는 한국어라 별 느낌이 없는데 교수님은 처음 한국어가 외국어였으니까 호격이 똑같다는 게 재미있게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사타나”를 생각하면 교수님과 유머를 좀 더 나누었더라면 하고 생각합니다. 대화는 항상 즐거웠고 웃음이 넘쳤는데 내용이 다 기억나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교수님과 사모님이 대화를 나누실 때는 웃음이 더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제가 일기를 쓰기 전이라 기록이 없고 아직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사진도 거의 없습니다.

 

2) 교수님이 한국에서 ‘여호와’라는 이름 사용하는 것을 부러워하셨습니다. 영어나 서양 언어에서는 70인역을 따라 ‘여호와’ 또는 ‘야웨’를 ‘주님(Lord, Heere)’으로 옮기는 게 관례처럼 되었는데, ‘야웨’도 ‘Lord’, ‘아돈’도 ‘Lord’가 되어 성경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 뒤에 한국에서 표준새번역이라는 성경이 나왔는데 서양 전통을 따라 ‘야웨’도 ‘Lord’로 번역한 걸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 110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하고 시작하는데, 영어는 “The Lord says to my Lord”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도 신약 마 22:44의 인용이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로 되어 벌써 헛갈리지요? 그런데 우리말은 이인칭 ‘You’에 해당하는 말이 없어 하나님을 ‘You’로 지칭할 때도 거의 ‘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2절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보내시리니”로 되어 있는데, 원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You의 권능의 규를 보내시리니”입니다. 공동번역은 여호와를 쓰니까 혼동이 안 생겼지요. 표준새번역은 “주께서 시온에서부터 임금님의 권능의 홀을 보내시리니” 해서 ‘You’를 “임금님”으로 옮겼습니다. ‘주’가 중복되는 걸 막긴 했는데 “임금님” 곧 ‘King’, 또는 ‘Your Majesty’라는 엉뚱한 말을 써 더 큰 혼동을 부릅니다. 그래 놓고 시편 다른 곳에서는 ‘You’를 또 전부 ‘주’로 옮겼습니다. 하여간 대한성서공회는 뭐 하는 단체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만약 ‘야웨’를 ‘주’로 번역하는 서양 전통을 따른다면 시 110편에서는 ‘야웨’도 ‘주’, ‘주님’도 ‘주’, ‘You’도 ‘주’, 해서 3가지 서로 다른 단어가 ‘주’라는 한 낱말로 번역이 됩니다. 총 7절로 된 이 짧은 시편에 ‘야웨’가 3번 (1, 2, 4절), ‘아돈’이 두 번 (1, 5절), ‘You’가 10번 나옵니다. 열다섯 번이나 나오는 주가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번역을 이렇게 헛갈리게 만들면 성경을 읽으라는 말인지 읽지 말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지요. 저는 고 교수님 희망대로 한국이 ‘야웨’라는 이름을 잘 간직하길 바라고, 2인칭을 가리키는 말도 속히 하나 만들어 내어 특히 시편을 번역할 때 혼란을 피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3) 예수께서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헬라어 문법 분석을 통해 기적의 순간을 정확하게 짚어 주신 것도 기억납니다. 막 8:6에서, 사람들을 앉히시고(παραγγέλλει... ἀναπεσεῖν), 떡을 가지시고(λαβὼν), 축사하시고(εὐχαριστήσας), 떼신(ἔκλασεν) 것은 전부 아오리스트인데, 제자들에게 주신(ἐδίδου) 것 하나만 미완료로 되어 있어서, 한번 떼신 다음 나누어 주시는 동작을 반복적으로 하신 거기 기적이 나타나 있다고 분명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 낱말의 시제 하나도 대충 넘기면 안 되겠다는 것을 이때 알았습니다. 마 15:35~36과 막 6:41~42, 눅 9:15~16 등 본문도 아오리스트와 미완료 구성이 똑같습니다. (마 14:19와 요 6:11은 주신 것도 미완료가 아닌 아오리스트를 쓰는데, 아마도 기적 자체를 강조하고 어느 순간이 기적인지는 관심을 안 둔 것 같습니다.)

   고재수 교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성경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성경 영감에 대한 확신이 잘 안 서지요. 축자 영감은 말도 못 합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꼼꼼하게 하나하나 분석하고 거기 담긴 뜻을 파악하고 나면 낱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정말 점 하나, 획 하나도(ἰῶτα ἓν ἢ μία κεραία)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신 말씀이 피부에 와닿습니다(마 5:18).

   고 교수님이 캄펀 신학교 판 브루헌(Jacob van Bruggen) 교수님의 책 『The Future of the (English) Bible』을 주셨는데 미국 가서 잃어버렸다가 내용이 좋아 아마존에서 다시 구매했습니다. 성경 본문 몇 곳을 골라 영어 번역을 두루 비교한 책인데, 킹 제임스 번역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깨달은 내용이 제 첫 책 『질그릇에 담은 보배』에서 성경적 겸손 개념을 설명할 때 활용했습니다. 지금도 ‘황금률’을 주제로 원고를 완성해 곧 출간할 예정인데, 참고한 영어 성경 가운데는 언제나 킹 제임스 번역이 가장 좋았습니다. 물론 저도 킹 제임스 번역의 원본인 Textus Receptus의 권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성경을 원문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성경 원문을 약간만 잘못 번역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흐려진다는 것을 보면서 고재수 교수님 아래서 말씀을 꼼꼼하게 보는 법을 훈련한 것에 대해 날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형편없는 개역개정을 졸속으로 출간해 한국 교회의 말씀을 흐려놓은 대한성서공회가 한국교회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지 않나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교수님이 보시던 Blass와 Debrunner의 헬라어 문법책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을 저한테도 추천하셔서 1986년에 말씀사에서 구입해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정말 유용하게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4) 저도 교수님과 같이 지내다 보니 성경을 꼼꼼하게 살피는 게 몸에 조금 붙어서 어느 날 창세기 14:14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러 318명을 데리고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공격했는데 아브라함이 “단까지” 쫓아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단’은 사사시대에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해 이름을 ‘단’으로 바뀌었는데,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에 어떻게 ‘단’이 나올 수 있는지 질문을 드렸지요. 교수님은 며칠 연구를 하시더니 저한테 “미스터 권, 그것은 프라블럼이예요.” 하셨습니다. 현재의 사본으로는 확실한 답을 얻기 어려운 문제라 그런 말씀이었지요. 캐나다와 미국에서 만났을 때는 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쯤은 주님을 만나 직접 해결하셨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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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졸업 후 교수님을 두 번 뵈었습니다. 1991년 봄 미국으로 유학을 간 직후 뉴욕에서 편도 여덟 시간 차를 몰고 캐나다로 가서 해밀턴의 교수님 댁에 며칠 머물며 말씀도 나누고 관광도 했습니다. 그리곤 제가 사는 게 많이 힘들어 몇 년간 연락도 못 드렸습니다. 한인교회 담임 목회를 하면서 공부하다 보니 박사학위를 늦게 2007년 5월에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보고를 드리고 두 달 뒤에 고 교수님 내외분을 제가 살던 코네티컷 그리니치로 모셨습니다. 제가 경제적으로 아직 어려운 시기였는데, 마침 교인 한 분 아파트가 비어 거기 모셨고 토요일에는 가까운 뉴욕 맨해튼도 구경시켜 드렸습니다. 주일 예배도 함께 드렸는데, 설교를 부탁드렸더니 한국말을 많이 잊었다며 사양하셔서 좀 아쉬웠습니다. 그 뒤에 집사람과 함께 캐나다를 두 번 방문했는데, 교수님 건강이 안 좋아 사모님도 못 뵙다가 2019년 6월에 사모님만 겨우 한 번 뵐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마침 제가 미국에 있던 기간이라 집사람과 함께 이번에는 뉴욕 아닌 인디애나에서 또 편도 8시간 거리를 운전해 장례식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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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세 개

 

교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배운 것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사례 1 - 행 11:17 번역

첫 보기는 출간된 책에도 나옵니다.[3] 지금 보아도 논리적으로 참 치밀하고 철저하게 성경적인 논의라 생각합니다. 개역개정은 본문을 이렇게 옮깁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εἰ οὖν τὴν ἴσην δωρεὰν ἔδωκεν αὐτοῖς ὁ θεὸς ὡς καὶ ἡμῖν πιστεύσασιν ἐπὶ τὸν κύριον Ἰησ οῦν Χριστόν, ⸀ἐγὼ τίς ἤμην δυνατὸς κωλῦσαι τὸν θεόν)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이방인과 교제했다며 베드로를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이 오시는 순간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행 11:16)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 다음 이 구절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어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입니다. 복수 3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경은 대부분 이 구절을 베드로에게 연결해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다”라고 번역합니다.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 교수님은 이 번역에 역사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성경 여러 구절을 살펴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순간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에 비해 고넬료 집안사람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처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베드로를 청해 주 예수님에 관해 듣는 순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때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라는 구절은 베드로 아닌 고넬료 집안사람들에게 연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리적으로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바른 설명이 되지요.

   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합니다. 단 하나의 문제는 구조상 “우리”는 이 구절에 붙어 있는데 “그들”은 약간 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고 교수님은 사도행전 18:18에 비슷한 구문이 나오는데, 거기도 멀리 있는 대명사에 연결해야 뜻이 통한다고 설명하십니다. “서원이 있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내용인데,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이 구절과 붙어 있고 문법적으로도 연결이 되지만 전부 이 어구와 조금 떨어져 있는 “그” 곧 바울과 연결합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보면 이 구절은 고넬료 집안이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을 때 하나님이 이전에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주셨던 성령을 그들에게도 선물로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주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성령을 받는다는 교리를 강조하려고 그렇게 번역했을 수도 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단회적인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 전에 믿었던 제자들은 당연히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았겠지요(요 7:39). 고 교수님이 가르치시던 무렵 한국교회가 성령 세례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교수님은 성령 세례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받는 성령을 가리키며 오순절파 사람들의 주장처럼 2차적 축복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은 것과 성령을 받은 것 사이의 시간적 차이는 성령이 오시는 그 시대에 살았던 제자들에게 국한된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오늘날 믿은 이후에 다시 성령을 체험하는 일을 성령 세례라 부르는 일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례 2 - 행 18:2 번역.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개역개정)

(“καὶ εὑρών τινα Ἰουδαῖον ὀνόματι Ἀκύλαν, Ποντικὸν τῷ γένει, προσφάτως ἐληλυθότα ἀπὸ τῆς Ἰταλίας καὶ Πρίσκιλλαν γυναῖκα αὐτοῦ διὰ τὸ ⸀διατεταχέναι Κλαύδιον χωρίζεσθαι πάν τας τοὺς Ἰουδαίους ⸀ἀπὸ τῆς Ῥώμης, προσῆλθεν αὐτοῖς”)

 

여기서는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의 연결 문제입니다. 모든 번역이 이 구절을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이탈리아를 떠난 이유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고 교수님은 ‘바울이 두 사람을 만난 이유’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연결하면 번역이 이렇게 됩니다.

“(바울이) 아굴라라 하는 본도 출신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막 온 사람이다.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까닭에 바울이 그들에게 갔다.”

   근거는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을 로마(도시)에서 나가라 했지 이탈리아(지역)에서 나가라 한 게 아 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나가라 했기 때문에 수도 밖으로만 나가면 됐지 이탈리아를 떠날 것까지는 없었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렇게 바꾸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바울에게 이탈리아 본토 그리고 나아가 로마에서 전도할 마음이 이때 이미 있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행 19:21에서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했는데 그건 3년 6개월 이후의 일입니다. 세계 중심부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한 바울의 열망이 훨씬 더 일찍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셈이지요.

   (물론 반론도 가능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나중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로마의 교회를 인도합니다. 따라서 이 부부는 이전에도 로마에 있었을 가능성 큽니다. 로마에서 나가라 하니 아예 이탈리아를 떠나 고린도 지역에 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기존 번역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사례 3 - 행 18:5 해석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 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개역개정)

 

   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의 뜻 해석 문제입니다. 대체로 실라와 디모데가 전해준 데살로니가 빌립보 두 교회 소식을 듣고 바울이 은혜를 받아 더욱 말씀에 붙잡혀 열정으로 전도했다고 보는데, 교수님은 두 사람이 선교헌금을 갖고 왔기 때문에 이제는 장막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전도에만 애썼다는 뜻으로 보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교회가 교역자의 생활비를 전액 부담하여 전적으로 말씀 사역에만 애쓰게 하는 것이 매우 성경적이라는 결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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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고재수 교수님은 우리 한국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큰 선물이었습니다. 십 년의 가르침이 많은 열매를 맺었고, 또 지금도 제자들을 통해 풍성한 열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을 너무 일찍 떠나신 것도 아쉽고, 캐나다에 계시는 동안 더 배우지 못해 아깝고, 병 때문에 너무 일찍 은퇴하신 것이 가장 안타깝지만, 하나님의 일은 오늘도 또 내일도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교수님을 선물로 보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함께 와 많은 고생을 겪으신 디니 사모님과 가족들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1] Elect infants, dying in infancy, are regenerated, and saved by Christ, through the Spirit.

[2]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1992), 273~288.

[3]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계와 신자의 체험』(1989), 6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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