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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소리에 홀린 교회(가만히 들어온 세속 유물 1)

강승철장로(대청교회 장로)


북의 영성에 밀린 말씀의 경건 
시대의 가치관을 따라서 교회가 요동을 치면서 교회 내의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이들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세속가치관의 중심은 ‘소비자 만족’과 ‘서비스’, ‘양방향’ 인데 우리가 믿는 성경의 가치관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소비자 만족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 만족’이며 내가 받는 서비스가 아닌 ‘드리는 서비스’이며 ‘I am that I am.’ 들어라. ‘한 방향’ ‘일방적 선포’이다. 따라서 성경의 가치관은 인본주의, 양방향 소통이라는 시대의 가치에 역행하는 신본주의와 하나님의 일방통행이다. 

교회를 좀먹고 있는 세속주의 정신들을 살피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살피는 글을 몇 꼭지 정리 해보는 것으로 ‘가만히 들어온 세속 유물’ 시리즈를 시작한다. 북의 영성, 예수님이 없는 베데스다의 영성, 오도된 5병2어의 영성, 바알의 영성과 소비자 만족의 영성 등의 단어들이 본 시리즈의 핵심 키워드이다. 



북소리에 홀린 교회
북과 관련해서 ‘영성’이라는 ‘가톨릭’적 용어는 어울리는 것 같으나 북과 관련해서 ‘경건’이라는 성경적인 단어를 붙이면 어색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원래 북이라는 것은 세속종교에서 신을 부르는데 사용된 악기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의 샤먼들이 북을 치면서 신과 접신하고 우리의 무당들이 북을 둥둥 치면서 신을 부르는 행위는 익히 잘 아는 풍경이다. 

가톨릭 용어인 ‘영성’이 예배에 사용하기에 어색한 악기인 북엔 붙어도 그만이지만 경건이라는 올바른 용어가 예배에 사용하기에 어색한 북에 붙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면 북은 경건한 악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북의 경건’? 정말 조합 자체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교회의 풍속도는 예배당 마다 북으로 대표되는 드럼이 자리를 차지하고 예배의 중요한 악기로 대접을 받고 있다. 북이 예배당 안에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년 쯤 되어간다. 경배와 찬양이 예배의 중요한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드럼이 예배당의 한쪽 편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경찬 사역자’들이란 집단이 등장했고 그들은 처음엔 강단 바로 아래편에 위치한 성찬대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두 사람으로 시작한 경찬은 점차 마이크 잡는 사람이 늘어나고 거기에 댄스가 가미되면서 널찍한 무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성찬상은 경찬 사역자들에 밀려나 창고 신세가 되었다. 일 년에 한 두 번 성찬을 할 때만 먼지를 털고 끌려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동시에 한쪽 구석에 슬그머니 들어왔던 드럼은 아예 성찬상이 있던 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보여주는 말씀을 상징하던 성찬상이 사라지고 이제는 드럼이 강대상 바로 아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북소리에 취하고 북소리에 홀린 교회가 된 것이다. 



광대놀음으로 변한 예배
예배당에 드럼이 들어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예배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개혁 신앙의 선배들이 중세 가톨릭의 ‘예전’ 중심 형식적 예배를 타파하려고 피를 강같이 흘리면서 만들어준 예배가 지금의 ‘고백’과 ‘말씀’ 중심의 예배 구조이다. 

개혁자들은 기도와 찬송과 성경을 읽으면서 경건하게 예배를 준비하고 사도신경으로 대표되는 신앙을 고백하면서 예배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죄의 고백과 사함의 선언, 그리고 찬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나를 바치는 헌상과 설교자의 말씀을 통해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보내시는, 경건한 예배의 틀을 만들어 우리에게 전승해준 것이다. 이러한 틀이 그냥 기획회의 몇 번해서 나온 게 아니었다. 알다시피 목숨을 걸고 바꾼 대가였고 개혁자들은 그런 경건한 예배를 교회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그 예배는 말씀과 기도의 경건에 압도되던 예배였다. 그런 상황에서 북이 들어와서 둥둥 거리면서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피흘림의 대가로 만들어 준 예배의 구조가 최근 들면서 ‘모자란’ 것으로 홀대를 당하고 무슨 개혁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지면서 더하기 빼기가 횡행하더니 이제는 아예 춤판에 북까지 가세한 괴이한 모습으로 변하면서 경배와 찬양이라는 광대놀음판으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경찬 경찬 하면서 정신줄 놓아버린 한국교회의 모습. ‘두두두둥’에 홀린 교회, 오늘 2015년을 지나는 시점에서 서있는 모습이다. 



말씀선포 가장 큰 피해
그런데 경찬이 강화되면서 예배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부분은 다름 아닌 말씀 선포였다. 말씀사역의 시간적 절대량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경배와 찬양, 댄스까지 가미되면서 예배 시간은 압박을 받았다. 더욱이 공예배가 1부 2부 3부 4부로 쪼개지면서 예배 시간은 1시간 정형으로 자라 잡게 되었다. ‘예배 시간 엄수’가 ‘마치는 시간 엄수’로 바뀌면서 예배 시간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더해진다. 먼저 신앙고백이 가위질 되고 헌상 순서가 날아갔다. 그로 인해 확보한 시간은 경찬이 꿰 차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경찬에 열광하면서 더 줄일 부분이 없는가 살폈고 눈길은 설교시간에 꽂히게 된다. 사람들이 지루해하는 시간이니 설교 시간도 시나브로 줄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20분에서 30분 설교가 대세인 시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시간에 쫓긴 말씀 선포? 당연히 강단의 약화를 불러왔다는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여기에 아무도 가슴 아파하거나 애통해하지 않는다. 참 팔짝 뛸 형편이 되었는데도 변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말씀과 기도로 대표되던 경건의 능력이 북의 영성에 화인을 맞은 탓이다.

북을 치면 우선 흥분이 된다. 큰 북과 작은 북, 징과 꽹과리 같은 타악기들이야 말로 이성을 잠재우고 육신의 본성대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할 때, 시위를 할 때, 이교도들이 인신 공양을 드릴 때, 무당들이 칼춤을 출 때, 혼을 빼 놓아야 할 어떤 일을 할 때 북이 없으면 결코 원활하게 그 일을 할 수 없다. 강한 비트의 북과 드럼은 사실상 사람을 흥분 상태에 몰아넣는데 일조를 한다. 멜깁슨의 영화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를 보면 북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전진한다. 총에 우수수 쓰러지면서도 북소리가 나면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전쟁에서도 혼이 빠진 병사들이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뛰어나가게 하는 것도 북의 힘이다. 둥둥둥둥 하면 심장의 고동이 함께 요동을 치게 된다. 



북의 영성에 화인 맞은 교회 
일전에 코스타 집회에 강사로 섰던 한 강사로 부터 “요란한 드럼의 비트로 혼을 쏙 빼놓는 열광이 있은 뒤 설교를 하러 올라가니 모두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수면 상태에 들어가더라”면서 한탄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요즘 세대의 분위기를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요란한 드럼 소리만큼 성경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도 열정을 가지고 흥분을 하면서 몰입을 한다면 북을 치던 신디를 빵빵하게 연주하던 무슨 상관이 있으랴. 

우습지만 북도 성경을 배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이 가능하다면, 성찬을 하는데 유용하다면 얼마든지 교회에 북이 강대상 중앙에 올라서든지 한 시간 내내 북을 치든지 상관없겠지만 그런데 정말 북소리 내면서 성경을 차분하게 배우고 읽는 환경이 될까? 북을 둥둥 치면서 주의 몸을 먹고 나누는 성찬이 가능할까? 잘 모르겠지만 요란하게 북을 치면서 성경을 치밀하게 배우는 곳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라. 

만일 북이 성경을 배우고 익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경건한 예배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내가 서 있는 곳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드럼의 영성에 빼앗긴 예배의 경건을 되살리고 말씀 때문에 열기가 달아올라 못견디는 예배가 되려면 우리가 선택할 길은 다름 아닌 예배당에 가만히 들어온 북을 쫌 어찌해야한다. 이제는 결단을 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북을 몰아내려니 후환이 두려운가? 젊은 사람 다 놓친다고 저항이 만만 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굴러들어온 북이 박힌 성찬상을 빼내고 예배의 경건을 무력화 시키지 않았는가. 굴러들어 온 돌에 박힌 돌이 뽑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설 자리조차 빼앗겨 버린 현실을 인정 한다면 이제 그 굴러들어온 돌을 들어내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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