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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수 교수의 가르침과 우리의 나아갈 방향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신약학 교수)

 

 

I. 들어가는 말

 

신학교 2학년 올라가던 어느 겨울날 고재수(N.H. Gootjes)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미스터 최, 저녁 7시에 우리 집에 차 한 잔 마시러 오세요.” 저녁 7시면 통상 식사 시간인데,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말씀인가? 은근히 기대를 하면서 저녁을 굶고 갔더니 그야말로 딱 차 한 잔만 내어주셨습니다. 기도와 말씀 읽기가 곁들여진 가족끼리의 저녁식사는 이미 다 마무리된 뒤였습니다. 배는 고팠지만,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식사보다 더 귀한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교수님의 집에 같이 살면서 한국어를 도와주는 조교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교수님 댁에서의 생활이 졸업할 때까지 2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참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바로 옆방 교수님의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하나님의 영성’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 탈고를 위해 타자를 두드리던 소리를 기억합니다. 학위를 받기 위해 교수님의 온 가족이 화란에 가 있던 시간에는 넓은 빈집을 혼자 지키면서 교수님이 즐겨 듣던 나나 무스꾸리(Nana Mouskouri)의 음반을 허락없이(!)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강의실에서만 교수님을 만난 동급생들과 달리 그의 집에 함께 살면서 저는 개혁파 신자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경건미가 넘치는 식사 시간, 절제와 사랑이 조화를 이룬 신앙적 자녀교육, 가끔씩 방문하는 화란 교수님들(대표적으로 구약학자 오만 H. Ohmann 교수 등)과의 티 타임 토론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작은 풍금으로 바하의 오르간 곡들을 직접 연주하던 교수님의 모습이나, 화란에서 가져온 아끼던 천연석 탁자가 이사하는 과정에서 깨어진 것을 두고 안타까워하시던 모습 등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가슴에 짙게 밴 기억들입니다.

             저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목으로 가기 위해 동급생들보다 먼저 목사안수를 받던 날 고재수 교수님은 일부러 버스로 노회 장소까지 동행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생소한 영어 표현으로 “Do you have a butterfly in your stomach?”(긴장되느냐?)라고 물으시며 긴장을 풀어주기도 하셨습니다. 그해 가을에 결혼을 하면서 주례를 교수님께 부탁드렸고, 40분 가까운 예외 없는 ‘구속사적 설교’를 정자세로 서서 즐겁게(물론 아내의 표현은 다르지만)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추억들을 되새기며 한 번은 웃으면서 옛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바람으로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개인적 기억들을 넘어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살려 나가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되새겨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이 글에서는 고재수 교수님의 삶과 신학 가운데 우리가 계승 발전시켜야 할 점들이 어떤 것인지를 10가지로 간추려 보았습니다. 그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는 작업도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큰 욕심을 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셨던 귀한 스승 고재수 교수님을 회고하면서, 그가 가르치고자 애쓰셨던 핵심 요지들을 되새기고 계속해서 잘 살려 나가는 것이 그의 헌신과 수고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II. 고재수의 삶과 신학의 계승: 10가지 교훈들

 

1.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바른지 늘 질문하라

 

   개인적으로 제가 고재수 교수님에게서 배운 소중한 가르침 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안수받던 날 버스를 타고 저와 동행해주시면서 버스 안에 붙어 있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산아제한 표어를 보고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미스터 최, 이것 어떻게 생각해요?” 이게 성경적 사상인가? 국가가 산아제한을 주도할 때 기독교인은 그대로 따라야 하는가? 신앙고백대로 산다는 것이 그것과 다른 것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많은 질문들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같이 출석하던 교회의 예배에 가족이 다 함께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치즈를 얹어 구운 빵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예배와 관련된 나눔의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고재수 교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미스터 최, 오늘 예배 시간에 불렀던 찬송 중에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라는 찬송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이 질문 속에는 우리가 모여 기다린다고 해서 성령이 오시는가? 성령의 오고 가심이 우리 하기에 달린 것인가? 성령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일반 예배 음악 사이의 일치가 있는가? 예배에 사용하는 찬양의 가사들 하나하나를 잘 검증하고 있나? 등과 같은 연관된 질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은 고재수 교수님의 성령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는 “성령을 받기 위하여 특별한 모임을 실행해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장이나 그 이후의 기록 속에 그런 목적을 위한 모임이 전혀 나타나거나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기다리는 모임[tarrying meeting]과 같은 것에는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힙니다.[1] 기다리는 모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을 구속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에서 예고되고 오순절 날에 실현된 “성령으로의 세례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개개인 신자가 그의 신앙과 생활의 제2단계를 시작하는 표시적 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2] 고재수 교수님은 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해서 다 바른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그것이 과연 바른지를 늘 질문하고 검증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실천지향적 신학을 하라

 

   고재수 교수님의 신학은 항상 실천을 지향합니다. 그는 대단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신학의 논제들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룹니다. 저와 같은 조교들이 그의 출판된 글이나 강의안을 좀 더 깔끔한 한국말로 다듬는 데 도움을 드리기는 했지만, 그 초록은 기본적으로 교수님 자신이 한국말로 작성을 다 하셨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이 어려운 개념들을 어떻게 한국말로 다 표현을 해내었을까 감탄하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때로 개념 전달이 잘 안 될 때는 원서들을 찾아서 공부를 시켜주기도 하셨습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자칫 추상화되기 쉬운 신학적 논의가 실제적으로 목회와 교인들의 삶에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짚어주기를 쉬지 않습니다.

             신학교 시절 저의 관심은 조직신학에 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신학생들의 연구 모임인 조직신학회에서 한번은 고재수 교수님을 청하여 특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강의 주제가 ‘이론신학은 과연 이론적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교의학을 ‘이론신학’이라 부르고 있었고, 고재수 교수님은 이 명칭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그의 주된 논지는 이 이름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며, 이 이름 때문에 자칫 신학의 본질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이론적 요소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근원적 측면에서 신학은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입니다. 그의 논지는 이렇게 압축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 교의학이 단지 이론적이기만 하고 실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3] 고재수 교수님은 칼빈의 『기독교강요』(I.ii.1)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은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명제를 따라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 지식이며, 따라서 신학은 우리를 예배와 순종과 경건과 거룩의 삶으로 이끄는 것이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4] 

             이런 이유 때문에 고재수 교수님은 심도 깊은 교의학적 주제들을 다루면서 그 실천적 함의를 짚어주는 작업을 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오신다는 filioque 논쟁을 다루면서 이것이 목회 현실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를 묻습니다. 얼핏 보면 추상적인 신학 논쟁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가지는 실천적 함의는 매우 큽니다. 만일 성령이 아버지로부터의 성령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성령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독자 활동에 국한되고 말 것입니다. 그 결과 일종의 신비주의에 빠져서 아버지의 창조 세계 및 이를 위한 실천적 사역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성자의 속죄 사역에 대해서도 무관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자신이 만난 한 사람의 구체적인 예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고민 중에서 기도하는 동안 밝은 빛을 보고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20년 동안이나 간음을 범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그 간음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부르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성령은 성자의 속죄 사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5] 이 사람은 신학적 원리를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임의의 방식대로 성령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부와 또한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신학의 원리는 성도의 실제적 삶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고재수 교수님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봅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성부와 창조된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성령님은 성자와 구원사역과도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원리가 목회실천에서 낳는 구체적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목사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자기의 죄와 싸워야 함을 권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6]

             우리의 신학은 실천을 지향하고, 우리의 실천은 바른 신학의 기반 위에서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건강한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와 목회가 오늘 신학 실종의 시대, 사람마다 다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기를 즐겨 하는 시대의 확고한 대안입니다.

 

 

3. 신실한 증언과 선포로서의 설교에 집중하라

 

   앞의 항목과 연관된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선택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고재수 교수님은 “선택이 없다면 모든 것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목사의 가능성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7] 다시 말해서 구원이 하나님의 역할이나 성령의 역사보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언변, 기교 등에 달린 문제가 되고 말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설교는 발화수반행위(illocution) 차원의 증언 또는 선포 행위 범주를 벗어나 효과 산출을 목적으로 하는 발화효과행위(perlocution) 차원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물론 고재수 교수님 자신이 존 오스틴(John Austin)이나 존 설(John Searle) 등이 체계화한 화행이론(speech-act theory)의 전문 용어들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핵심 원리는 이들과 일치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설득의 결과나 효과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 설교자는 재주껏 설득을 잘해서 물건을 많이 팔아먹는 장사꾼처럼 복음을 팔아먹는 사람으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런 설교자가 되지 말기를 당부하면서 설교의 본질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3-4). 하나님의 검증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 받은 설교자는 사람에게 어필하여 사람으로부터 영예를 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모든 것을 검증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설교자는 성령님의 역사를 믿고 신실한 증언 행위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이 설득의 효과까지 다 거두려고 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를 탈진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한국 교회의 설교의 관심이 갈수록 신실한 말씀의 선포보다 교회 성장과 같은 결과지향주의로 향하는 현상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 성장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 방식으로 교회 성장을 이루려는 것을 문제로 지적합니다. 요한계시록 3:7-13에 근거한 ‘적은 능력의 교회’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아타까움을 토로합니다. “한국 교회의 상황을 돌아볼 때 시간이 갈수록 강조가 바뀌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교회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했고 예수님을 고백해야 했읍니다. 대부분은 아니지만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읍니다. 광복 후에 하나님은 특별한 축복, 곧 교회의 성장을 주셨읍니다. ... 그러나 특히 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교회의 성장으로 그 강조가 바뀌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꼭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일이기 보다는 교회의 성장이 되었읍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 인간은 교회를 성장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읍니다.”[8]

             교회의 성장이 마치 인간 설교자의 손에 달린 것처럼 생각하는 자세는 설교의 본질을 오도하게 만듭니다. 설교를 통한 설교의 효과가 설교자의 재량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설교에서 성령님의 역할을 배제하는 일입니다. 만일 그것이 진리라면 설교자는 기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궤변이나 속임수 등을 사용해서라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 할 것입니다. 당연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이유도 없고, 자기의 사역을 하나님께 검증받으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소위 ‘조회수’가 폭발하면 그 인기를 마음껏 누리면 됩니다. 그러는 사이 설교자는 자신이 얼마나 타락하는지도 모르고 하나님과 그의 진리로부터 멀어져 갈 수 있습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우리의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설교여야 하고 또한 하나님과 그의 구원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적 설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본문의 핵심은 설교에서도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강조합니다.[9]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 본문은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중심 주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흔히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예화식 설교나 모범적 설교의 단골 메뉴로 사용되는 이 본문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거짓말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언약적 보호에 놓여 있습니다. 사라의 태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적 위기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본문의 핵심 포인트가 설교에서도 핵심 포인트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자기 목적을 위해 성경 본문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언제나 본문이 우선되게 해야 하고 하나님의 목적이 우선되게 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신실한 증인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입과 나팔이 되어야 합니다. 고재수 교수님에게서 배우는 이런 중심 원리를 우리는 설교의 정의가 허물어지고 인간중심적 설교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타협없이 계속 잘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4. 구속사의 중심 틀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라

 

고재수 교수님은 한국 교회가 성탄절이나 부활절은 떠들썩하게 잘 지키면서 성령강림절은 거의 지키지 않는 일을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력의 문제가 아니라 구속사의 이해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오순절 사건을 구속사적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그가 볼 때 오순절은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야 할 단순 사건이 아니라 구속사적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단회적 사건입니다.[10] 이와 관련하여 고재수 교수님은 이렇게 제안합니다. “한국의 교회도 이 성령의 부으심을 특별한 기념 행사와 함께 지킨다면 좋은 발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은, 오순절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과 같은 계열에 속하고 이 모든 사건들이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서 결정적인 [구속사적] 사건들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11]

             고재수 교수님은 우리의 신학과 목회와 설교가 구속사의 원리에 따라 이끌리는 것이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신학과 설교에서 하나님의 우선되심과 그리스도의 중심되심이 지배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하나님 우선과 그리스도 중심의 원리를 잃어버리면 단순한 흥밋거리나 훈화로 변질되고 맙니다. 구속사적 설교는 결코 낯선 틀을 성경에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우선의 원리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역사 운행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결코 즉흥적이지 않고 그의 장구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설교도 이 하나님의 전체 경영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우리의 설교에 나타나기 쉬운 쏠림 현상을 잘 극복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쏠림 현상은 설교자의 선호나 청중의 요구가 설교를 지배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재수 교수님은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전체 계획 중에 어느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습니다.[12]

             그가 볼 때 우리의 설교가 쉽게 모범적 설교로 변질되는 이유는 본문의 구속사적 맥락을 무시한 적용의 시도 때문입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속사적 설교 운동이 반대하는 것은 역사적 간격을 무시한 채 직접 적용하려 드는 태도이다. ... 이를 막으려면 본문의 역사적 상황을 항상 연구해야 하고, 당시의 상황 속에서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적용은 당시와 우리 시대 사이에 가상된 일치에 있지 않고 문맥상 발견되어진 의미에 의존함으로써 올바른 적용이 된다. ... 적용은 그때와 우리 시대 사이의 평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메시지에서 나온다. ... 적용은 항상 기록된 내용의 목표를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13]

             구속사적 설교는 결코 한 시절의 설교 운동이나 유행으로 지나가 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학과 목회와 설교가 하나님 우선의 원리와 그의 구원행위 중심의 원리를 잃어버리면 교회의 타락과 변질이 신속히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는 고재수 교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구속사의 원리가 지배하는 신학과 설교 사역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5. 성경 석의를 바탕으로 비판적 사고를 훈련하라

 

고재수 교수님은 우리 학교에서 교의학 교수로 봉직하셨지만, 그가 가르친 과목은 라틴어를 넘어 헬라어 문법이나 헬라어 원문 강독 등을 아울렀습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신학 수업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현실 문제에 답을 주어야 하는 ‘조직신학’을 왜 외국인 교수님이 가르치느냐는 ‘삐딱하고’ 건방진 생각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현실 문제를 다루기만 하면 뭔가 멋있어 보였고, 그 답의 기준이나 바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힘들여 성경 원어를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한동안은 ‘불량 학생’으로 지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고재수 교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분이 교의학 교수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성경학 교수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게 되었고, 왜 모든 논의의 출발이 성경 원어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발이 늦다 보니 그의 개인 조교를 하던 시절에도 그가 가르치던 헬라어 원문 강독 과목의 점수가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학기말 시험에서는 훨씬 향상된 점수를 얻었고, 교수님께서 저의 답안지를 펼쳐 놓고 틀린 것 몇 가지를 별도로 가르쳐주시던 기억이 선합니다.

             성경 원문의 석의는 모든 신학적 작업의 기초입니다. 건전한 석의에 기반을 두지 않는 신학적 작업이나 목회의 결과들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의학은 더욱 그렇습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교의학과 석의의 관계를 건물과 벽돌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그의 표현 그대로를 인용해봅니다. “교의학이 성경적으로 튼튼한 교의적 건물을 건설하려고 할 때 주석[석의]은 그 건물을 위하여 주석적 벽돌을 공급하는 것이다.”[14] 집의 무게를 버티지도 못하는 짚이나 잔 나무가지로 집을 짓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원천의 재료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가르침의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로마서 8:16의 성령의 증거와 관련하여 인간의 내적 체험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주장이 본문에 대한 바른 석의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지적합니다. 웨슬리는 접두어 쉰에 이끌리는 토 프뉴마티를 “우리 영에게”로 읽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역처럼 “우리의 영과 더불어”로 읽든지, 보다 좋게는 우리 영이 직접 증거자로 나서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 영을 지지하여”로 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15] 성령이 특별히 우리 영에게 내적 인상이나 체험을 제공한다는 웨슬리의 견해나, 이를 신자가 받는 별개의 ‘성령세례’라고 보는 로이드존스의 입장은 모두가 본문의 바른 석의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이와 관련하여 “웨슬리와 Lloyd-Jones는 성령의 증거의 내적 성격을 본문에서 찾아내지 않고 도리어 본문 안에 밀어넣고 말았다”고 비판합니다.[16] 그들의 해석은 본문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석의(exegesis)라기보다 해석자의 의미를 본문에 밀어넣는 읽어넣기(eisegesis)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읽어넣기는 해당 본문이 요구하지도 않는 내적 체험이나 소위 ‘성령세례’를 요구합니다. 이런 요구가 성도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 눈을 자꾸만 복음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본문에 대한 바른 석의는 오히려 우리를 확신으로 이끈다고 강조합니다. “성령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 중에 누가 의심을 할 수 있을까? 그 증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양자로서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고(15절) 하나님께 유산을 기대할 수 있다(17절).”[17]

             고재수 교수님은 사람들의 신학적 주장이 성경의 석의에 기초하지 않을 때는 대상을 불문하고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합니다. 그 대상이 자유주의 진영의 신학자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칼빈이나 워필드 등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따르기 쉬운 소위 ‘우리 편’ 신학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비판적 사고는 고재수 교수님을 통해 우리가 꼭 배우고 익혀야 할 자세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비판은 그의 스승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와 관련하여 고재수 교수님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가지는 독특한 2인칭 답변 방식(“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당신을] 바르게 알게 하여 주옵시며 ...”)에 주목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신앙고백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기보다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을 무시하고 ‘간구’를 ‘계명’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에 대해 고재수 교수님은 비판을 가하는데, 여기에는 그의 스승인 판 브럭헌(J. Van Bruggen)도 포함됩니다.[18] 그는 “간구는 계명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간구를 마치 그것이 계명인 것처럼 바꿔서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변합니다.[19] 이는 구속사적 설교에서도 배우는 것처럼 “성경의 모든 계시들을 같은 도덕적인 붓으로 칠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와 직결됩니다.[20] 성경의 본문은 그 각각이 가지는 특성이 다르고 다양합니다. 계명(명제적 가르침)은 계명대로, 간구는 간구대로, 송축은 송축대로 그 각각이 가지는 스피치 액트(speech-act)의 특성이나 발화수반력(illocutionary force)의 특성을 잘 고려하여 석의하고 또 설교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 누구보다 예리하고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고재수 교수님의 관점을 잘 배우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6. 언약백성의 가정이 구별되게 되라

 

   화란 개혁교회는 고재수 교수님과 박도호 교수님을 교수선교사로 우리 학교에 파송하면서 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반 교사를 별도로 파송하였습니다. 이를 위한 비용의 지출도 만만치 않았을 테지만,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들로 구별되게 키운다는 정신에 따라 정규 교사를 파송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화란 개혁교회가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우선권을 둔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점입니다.

             무엇보다 교회와 가정 안에서 성도의 자녀들을 교회의 일원이요 언약의 백성으로 보는 시각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아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21]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교회와 가정이 함께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로 교육하는 일에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한국 교회 안에서 성인들만 교인으로 보는 시각이 고쳐져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교인들의 수를 셀 때 흔히 자녀들이 배제되는 것을 그는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의 책임을 교회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교회에는 신자들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도 있습니다. 신자들의 자녀들은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모든 약속들도 받습니다. 신자들의 자녀도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해야 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22]

             이 부분에서 고재수 교수님은 한글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4항의 오역 한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부모가 다 믿거나 한 편만 믿는 자의 유아라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2023년판 개정 헌법에는 “한 편이나 양편이 믿는 부모를 둔 유아도 세례 받을 수 있다”)라는 항목은 “받을 수 있다”가 아니라 “받아야 한다”로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23] 이는 하나의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오래전의 지적이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의 큰 불찰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자녀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쉽게 내던지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고서희 사모님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사실 공적 신앙고백을 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 우리가 우리 자녀를 주일날조차도 공부하도록 하고, 신앙생활보다 시험 준비를 위하여 더 많은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공부나 성공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셈입니다.”[24] 이미 오래전에 이런 지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 교회 안에 이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서처럼(삿 17:1-13) 보이는 신상을 우리 가정 안에 두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우상들을 우리 가정에 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건전한 인성 교육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오늘의 한국의 공교육 현실 속에서 가정과 교회마저 언약백성에게 합당한 교육을 포기해버린다면 한국 교회와 나아가 한국 사회의 내일은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역을 지향해야 합니다. 공교육이 길러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성품의 언약의 자녀들을 길러내어 사회 각 영역에서 그들이 별처럼 빛나는 주의 자녀들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가장 일차적인 수고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7.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

 

   “한국 교회가 약화된다면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게 살지 않고 세속화 되었기 때문이다.”[25] 이는 한참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던 한국 교회에 대한 고재수 교수님의 예언적 진단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가르치시던 시기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한국 교회의 급격한 퇴조는 쉽게 올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된 성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회집 교인들의 숫자가 준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그 본질을 잃고 있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고신교회는 개혁주의 교회의 기조를 잘 유지함으로써 이런 외적, 물량적 부침(浮沈)에 덜 영향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특히 한국 교회 안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던 오순절파의 영향력을 매우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1980-90년대에 조용기 목사의 영향력은 대단했고, 우리 신학교 안에도 그의 독특한 어투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공적인 목회와 능력 있는 사역을 위해서는 소위 성령세례라 불리는 제2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교회 성장이 최고의 가치였고, 교파를 초월하여 무분별하게 오순절파 경향에 이끌려가는 현상이 한국 교회 전반에 퍼져 있던 시대입니다. 이런 현상을 앞에 두고 고재수 교수님은 한국 교회가 양자택일의 길을 가야 한다고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특히 고신교회 일각에서도 신앙고백은 개혁파적으로 하면서 실제적인 목회는 오순절파나 감리교식으로 하고 있는 것을 그는 이상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 교회가, 특히 우리 고신교회가 오순절파 방향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개혁신학의 방향으로 갈 것이냐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나는 한국의 개혁 운동이 이 후자의 지향점을 택하도록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고 그 절박감을 토로하기도 하셨습니다.[26]

             고재수 교수님은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간에도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차이점을 보려면 복음주의가 역설하는 것보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빼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27]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선택적 이해의 문제입니다. “차이는 ‘성경의 완전한 내용을 고백하고 옹호하느냐, 아니면 성경의 진리 가운데 좋아하는 부분만을 강조하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28] 복음주의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그것은 부당합니다.[29] 고재수 교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제2계명의 위배로 보고 있습니다.[30] 복음을 전할 때도 좋은 점만 내세우는 광고식 접근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31]

             하나님에 대한 선택적 이해와 가르침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 속에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편승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관대함이나 포용, 사랑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강조하지만,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우상숭배나 지옥이나 심판, 형벌 등의 용어는 기피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이런 경향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를 다루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브라이언 매클라렌(Brian D. McLaren)이나 스티브 초크(Steve Chalke) 등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일종의 “신적인 아동 학대”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사조에 맞서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체로 다 믿고 따르고 설교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자부심을 더욱 높여가야 할 때입니다.

 

 

8. 사회적 책임을 잊지 말라

 

   에베소서 1:22은 만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가 가지는 지위를 만물 위의 머리로 표현합니다. 좀 더 온전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만물 위의 머리로 교회에게 또는 교회를 위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밝히는 골로새서 1:18의 말씀과는 차이를 가집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한글 성경의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라는 번역이 “오역”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32] 그는 원문을 따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있는 머리로 교회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33]

             우리가 교회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만물 위에 있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위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왜 교회가 이 세상의 정치 형태나 사회-문화적 문제, 환경의 문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요 동시에 만물 위의 머리로 밝히는 이 두 표현의 진리와 강조점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를 있는 그대로 취해야 하며 그 강조점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또한 만물의 머리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놓여 있고, 만물은 그 존재를 통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수님을 높일 책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만물 위의 머리이신 예수님 때문에 만물에 대한 특별한 책임을 지게 되며, 그 보전과 안녕에 더욱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이런 주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덴의 네 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한 면에서는 에덴에서 발원된 네 강이 허구이거나 단지 교훈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을 변호합니다. 또 다른 한 면에서는 에덴의 네 강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강조합니다. 그는 여기에 하나의 동심원적 원리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에 위치한 에덴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은 에덴의 네 강을 따라 더 먼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에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강이 흘러가는 더 넓은 지경을 포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만물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때문에 더욱 중요한 책무가 됩니다. 이런 책무와 관련하여 고재수 교수님은 스킬더의 문화명령 이해에 대체적으로 공감을 표합니다. 그러면서 스킬더의 문화명령 이해가 환경오염 문제를 더 심화시킬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형태로 이와 같은 주문을 덧붙입니다. “그[스킬더]는 땅을 멸하는 것이 문화 명령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세 가지로 분명하게 지적한다. ...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과학 기술과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그 부정적인 결과들은 매우 더디게 나타나던 시기였다. 오늘날 우리는 불법적 성장의 결과들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세계를 남용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스킬더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강력하게 경고해야 한다. 우리도 스스로 환경오염을 예방할 의무가 있고, 우리의 쓰레기더미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것은 정상 궤도를 벗어난 성장, 불법적인 성장, 더러운 성장이다. 창조 자체의 사용과 그것의 개발이 그릇된 것은 아니다.”[34]

             고재수 교수님은 ‘십계명 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지적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위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물질적인 일에 무관심해진다면 그것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물질로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35] ‘거짓 증언하지 말라’(‘거짓말하지 말라’가 아니고)는 제9계명 역시 중요한 사회적 함의를 가집니다.[36] 거짓 증언으로 가득한 사회는 평화와 안식이 없는 사회입니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삶이 교회를 넘어 우리 사회를 평화롭고 밝게 만드는 기능을 가집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사회-문화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나 목소리가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를 그는 스킬더의 표현을 빌려 ‘토르소’ 또는 ‘끝이 잘린 피라미드’(미완성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직접성을 일반 사회 속에서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낙태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정부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낙태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정부에게도 결정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37] 그러면서도 고재수 교수님은 “그것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항상 완전하게 지키도록 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38] 일반 사회나 정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설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또는 더 나쁜 방향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책을 펼칠 때, 이를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현실 정치나 사회-문화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며, 말씀이 규정하는 위정자들이나 정부의 위치가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이런 원리를 제시하고 구현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 또는 현실적인 통로들을 잘 갖추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오늘 우리 고신교회는 어떠합니까? 고신교회는 정치나 사회-문화적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덜한 교단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분야에 늘 깨어 있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머리일뿐만 아니라 또한 만물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순종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뿐 아니라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 세계의 보호와 돌봄에 대한 선도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의 기후 위기에서도 보는 것처럼 가장 고통스럽게 이 현실에 내몰리는 사람들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창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그리스도인의 사회-문화적 책무는 이웃 사랑의 구체적 한 형태이기도 합니다.

 

 

9. 좋은 목사의 자질을 동등하게 함양하고 다 큰 자가 되라

 

   한번은 고재수 교수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미스터 최, 왜 똑똑한 학생들이 다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뒤집어 보면 이 질문은 왜 자질이 좋은 사람들이 목회나 선교를 최우선적으로 선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 역시 유학을 하고 교수가 되어 있어서 할 말이 없습니다.

             고재수 교수님의 경우 화란 레이든에서의 그의 목회 사역과 한국에서의 교수 사역에는 공간과 대상의 차이는 있지만 사역자의 자질 면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는 레이든에서의 목회 사역을 매우 즐겁고 보람차게 잘 감당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국으로 오는 것이나 한국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그가 좇았던 꿈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였고, 교수가 되어서도 늘 “목회 실천”을 염두에 두었습니다.[39]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직무를 맡을 것인지, 또는 누구를 구체적인 섬김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섬김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자질은 동일합니다. 신학교에서 종종 ‘나는 시골 목회를 할 것이기 때문에 공부를 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인식입니다. 누구를 섬김의 대상으로 삼든 우리는 최고로 잘 갖추어진 목회자가 되기 위해 열과 성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개혁 교회의 목사들이 다 비슷한 정도의 실력과 인품을 갖추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배경 속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처럼 목사의 실력이나 인기 여하에 따라 교인들이 쏠려 다니고 교회 규모의 차이를 빚어내는 현상은 매우 비뚤어진 현상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사들 사이에 계급화, 서열화 현상이 생기는 것은 매우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부목사’ 같은 칭호도 결코 합당하지 못합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젊은 목사와 나이 많은 총회장 목사 사이에 차이는 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그들의 위치는 서로 같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 따라서 설교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가 집중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연구하고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하면 그는 큰 자입니다.”[40]

             한국 교회 전반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현상입니다만, 목사 칭호보다 ‘당회장’ 칭호를 더 좋아하고, 노회장이나 총회장 같은 자리를 계급처럼 생각하는 저급한 문화는 얼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고재수 교수님께서 강조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우리를 ‘큰 자’라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인정으로 만족하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소위 스타 목사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사람들을 추종하는 이 땅의 유별난 세속화 현상은 크게 보면 한국 교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교회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독소입니다. 이런 것이 한국 교회의 피하지 못할 대세라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고신교회는 다른 기준, 바른 기준을 끝까지 잘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나 사람의 인정보다 주님의 인정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고, 또 우리 학교가 그런 사역자들을 배출해내는 신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10. 사람을 아끼고 기르는 일에 집중하라

 

   고재수 교수님의 가정에서 보낸 2년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머물 곳 없고 기댈 곳 없던 저에게 당시 그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지금 교수의 자리에 있는 저의 입장에 서서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과연 나라면 내 집에 가족도 아닌 학생을 들여서 함께 생활할 수 있을까?’ 이는 단지 빈방 하나를 내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 사생활의 모든 부분이 다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한 달 두 달 한정된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한국에 거주하시는 시간 거의 내내 고재수 교수님 가족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외국인 선교사 주거용으로 지은 감천의 집은 그래도 방이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집이 매각되고 이사를 한 송도의 집에는 방이 부족했습니다. 그 집에서 다소 독립적인 위치의 좋은 방을 저에게 내어주어 저는 지내기가 참 좋았지만, 어느날 우연히 교수님 부부의 침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단 아래의 창문도 없는 어두컴컴한 창고방을 침실로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실생활 속에서 이분들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잘 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에게 더 좋은 방을 내어주고 자신들은 말할 수 없는 불편을 감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도의 공동생활이 말은 참 아름답고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과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다면 열 사람, 백 사람과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고재수 교수님 가족은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한국 교회와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강의실에서의 교수로서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쪼개고 나누어 주면서 다음 세대를 위한 말씀의 사역자들을 길러내었습니다. 그러기에 신학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위한 그의 조언은 더욱 무게가 서려 있습니다. “목회의 길에 들어서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쏟아서 일을 해야 하며 근로 기준 시간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상적인 대우에 일상적인 직업을 원한다면 목회의 길에 들어서지 마십시오.”[41]

             지금은 이 말 했다가 아무도 신학교에 안 오면 어떡하나 싶어서 이 말 하기가 참 겁나는 시대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말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소를 위해서까지 교훈을 주신 하나님께서 전임으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을” 돌보신다는 약속이 놓여 있습니다.[42] 이런 책임을 교회가 기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말씀 사역자들이 직업의식을 초월하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이런 사역자들이 많이 일어날 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기반 위에 튼튼히 서고 온 세상을 향하여 복음 사역을 힘차게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고재수 교수님을 통하여 가르침 받은 좋은 개혁주의 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신학이 있어도 그것을 계승하고 이어갈 사람이 없다면 그 신학의 귀함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슬픔은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목회 및 선교 지망자들의 감소 현상은 우리의 영적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큰 불안 요소입니다. 말씀의 사역에 헌신할 사람을 발굴하고 고재수 교수님과 그 가족이 하였던 것처럼 자기 삶을 나누고 흩어서 그들을 키워내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III. 나가는 말

 

   저는 요즘도 학교에서 사은회를 맞을 때마다 매 기수 졸업생들에게 고재수 교수님께서 1986년 졸업 사은회 때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말씀 한마디를 꼭 들려줍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교회를 섬길 때 작은아버지 노릇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가 한국어를 배울 때 ‘작은아버지’라는 단어를 신기하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형제일 뿐, 사실은 ‘아버지’는 아닙니다. 이름에 아버지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작은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나 여타 사역자가 ‘작은 주님’ 노릇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종일 뿐, 주의 이름이나 지위를 조금이라도 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높이고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고재수 교수님은 이런 섬김을 그의 학문적 활동과 교수 선교사로서의 삶을 통해 잘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귀한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년에 원치 않는 알츠하이머 질병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으셨고, 이 때문에 고서희 사모님과 자녀들이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런 기회를 통하여 고재수 교수님과 그 가족의 희생과 수고를 기억하고, 작으나마 감사를 표할 수 있게 된 것이 참 뜻깊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는 이 행사가 며칠 전 화란의 교회 신문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고서희 사모님은 이 행사가 “Gootjes 숭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평생 변함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성실하게 그리고 활기차게 그리스도를 섬기셨던 교수님의 그 귀한 발자취를 따라 우리 또한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신실하게 주님과 그의 교회를 섬기기를 다짐할 따름입니다.

 


[1]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40-41.

[2]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35.

[3]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17.

[4]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18, 28.

[5]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41-42.

[6]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42.

[7]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36.

[8] 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191-92.

[9]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179.

[10]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35, 40.

[11]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39-40.

[12] 고재수, 『그리스도를 고백함』, 217.

[13] 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81, 각주 1.

[14]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47.

[15]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228.

[16]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191.

[17]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193.

[18] 고재수, 『그리스도를 고백함』, 271.

[19] 고재수, 『그리스도를 고백함』, 275.

[20] 고재수, 『그리스도를 고백함』, 275.

[21] 고재수, 『십계명 강해』, 18-19.

[22] 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43.

[23] 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43, 각주 2.

[24] 고서희, ‘네덜란드 교회의 자녀 교육’, in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37.

[25]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43.

[26]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45.

[27] 고재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61.

[28] 고재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65.

[29]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177;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11;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201. 이런 점은 그가 한국어로 번역한 J.R. Wiskerke의 책 『부림』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참조, 『부림』, 14.

[30] 고재수, 『십계명 강해』, 36.

[31] 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97.

[32] 고재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67, 각주 5.

[33] 고재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56.

[34] 고재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154-55.

[35] 고재수, 『십계명 강해』, 94.

[36] 고재수, 『십계명 강해』, 104.

[37] 고재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56.

[38] 고재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57.

[39]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24.

[40] 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122.

[41] 고재수, 『그리스도를 고백함』, 336.

[42] 고재수, 『그리스도를 고백함』, 336.

 

 


  1.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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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3.06.22 By개혁정론 Views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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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교회70년과 교회직원(장로, 집사, 권사)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담임) 지난 고신교회 70년 동안 총회는 교회직원 중에서 장로, 집사, 서리집사, 권사에 관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이를 살피며 지나온 고신교회 70년을 돌아보고 평가하며 앞으로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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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2.12.21 By개혁정론 Views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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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고신대학교, 정말 위기인가?

    고신대학교, 정말 위기인가?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 지금 고신대학교가 정말 위기인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예’가 아닐 수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진정한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위기일지도 모른다. 고신대학교는 대한예수교...
    Date2022.12.14 By개혁정론 Views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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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8] 고신교회 70년에 나타난 목사의 지위와 권한(2)

    고신교회 70년에 나타난 목사의 지위와 권한(2)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고신교회 70년 동안 목사의 지위와 권한은 실제로 어떠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또 이는 다음 70년을 내다보고 나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Date2022.12.12 By개혁정론 Views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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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2.11.18 By개혁정론 Views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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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정론이 주최한 '제7차 고신 개정헌법,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성희찬 목사가 발제한 교회정치와 권징조례에 관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싣습니다. - 편집자 주 고신 교회 제7차 헌법 개정안 초안에 나타난 ‘교회론’ -교회정치, 권징조...
    Date2022.08.26 By개혁정론 Views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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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정론이 주최한 '제7차 고신 개정헌법,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안재경 목사가 발제한 교리표준과 예배지침에 관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싣습니다. - 편집자 주 제7차 헌법개정에 나타난 교리와 예배 (교리표준과 예배지침을 중심으로) 안재경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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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2.08.06 By개혁정론 Views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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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C, 여전히 필요한 고신의 학생운동 김동춘 목사 (서울제일교회 담임) 경주에 있었던 ‘SFC지도위원회와 미래정책위원회의 연석회의’ 석상에서 불거진 “SFC 폐지론”과 관련해서 여러 글과 말이 지면과 모임 석상에서 회자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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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2.07.04 By개혁정론 Views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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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우리는 지금 어떤 교회를 꿈꾸고 성찰하며 고신 교회 70년을 맞는가?-헌법 개정 초안(2022년 6월)에 대한 간단한 비평

    우리는 지금 어떤 교회를 꿈꾸고 성찰하며 고신 교회 70년을 맞는가? -헌법 개정 초안(2022년 6월)에 대한 간단한 비평-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교회에 있는 헌법 조항은 ‘법조항들로 이루어진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국내외를 막론...
    Date2022.06.24 By개혁정론 Views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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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이름, 그 의미

    이름, 그 의미 고덕길 목사 (이슬라마바드 한인교회 담임)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
    Date2022.06.06 By개혁정론 Views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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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광화문 집회 논란을 통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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