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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와 바젤에서 바라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 그의 두 성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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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수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교장)

2021년 10월 31일 종교개혁기념일

 

 

   케임브리지의 틴데일하우스는 영국의 개혁자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경-1536)의 이름을 딴 연구소입니다. 1524년 봄에 헨리 8세의 박해를 피하여 독일로 피신한 틴데일은 거기에서 1525/6년에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토대로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1536년에 소천하였는데, 틴데일하우스의 한쪽 출입문 비번은 그의 사망 연도와 같아서 그 문을 열 때마다 그의 생애를 생각하게 합니다.

 

   틴데일하우스에서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려면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를 지나는데, 거기에서 2-3분을 더 걸으면 캠강이 나옵니다. 폭이 20미터 정도 되는 캠강의 양편에는 퀸즈 칼리지가 있고 수학자의 다리라고 불리는 목조 다리가 두 건물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캠강에서 보트를 타고 캠브리지 시내를 구경하는 것[펀팅]은 필수 관광 코스가 되어서 그곳은 항상 사람들로 붐빕니다. 그들은 그 길을 걸었던 과거의 인물들에 관하여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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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 길로 에라스무스가 걸어다녔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저 건물에서 그가 헬라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거나 라틴어로 번역하였겠구나’ 하고 상상하면, 캠강을 지나는 느낌이 다릅니다. 캠강의 오른편에는 에라스무스가 머물렀던 건물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캠브리지 대학 신학부에서 잠시 가르치다가 퀸즈 칼리지로 옮겨서 1511-1514년에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고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에 그는 바젤로 가서 다른 헬라어 사본들과 비교하여 『헬라어 신약성경』을 1516년에 유럽 최초로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기존의 라틴어 성경 번역과 자신의 번역이 다른 지점을 해설한 첨주(annotation)를 붙여서 출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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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성경을 출판한 후에 『해설 신약성경』(Paraphrase New Testament)도 집필하였습니다. 성경을 설교하는 것처럼 풀어서 설명함으로써 평신도도 성경을 친숙히 읽도록 하려는 의도로 저술한 책입니다. 그의 해설 신약성경은 그의 사후에 영어로 번역되어 154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에드워드 6세(1547-1553 재위)의 명에 의하여 각 교구의 교회에 비치되어 일반 교인들이 읽도록 하였습니다. 시내 중앙에 있는 헌책방에서는 그 해설 신약성경을 낱장으로 분리하여 한 장에 10파운드씩에 팔고 있었습니다. 그중 요한복음 한 장을 기념품으로 사고서 그것을 계기로 에라스무스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이 전문가를 위한 책이라면 『해설 신약성경』은 대중을 위한 책으로서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경 원문의 정확한 번역과 일반 회중의 성경 읽기를 위하여 수고한 에라스무스의 노력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는 비텐베르크의 관점에서 루터가 비판한 에라스무스에 관하여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케임브리지의 관점에서 에라스무스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9년 10월 신학교에서 “종교개혁사 탐사 여행”을 할 때에 바젤에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한 인쇄소와 그가 묻힌 바젤 대성당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위스에서는 에라스무스가 긍정적으로 수용된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인문주의적인 노력이 바젤, 취리히, 제네바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루터와 논쟁한 부분을 중심으로 에라스무스를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케임브리지와 바젤의 시각에서 그를 바라보면 조금 더 온전하게 그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기념품으로 산 한 장의 해설 신약성경이 생각의 실마리를 타고 마치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게 하였습니다.

 

 

 

1.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1466[혹은 1469년]년에 네덜란드 로테르담[혹은 하우다]에서 어떤 사제와 그의 정부(情婦)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라 불리고 지금도 그곳에는 에라스무스 대학과 에라스무스 병원이 있어서 그를 기념하지만, 그는 로테르담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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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가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에 그는 친지에 의하여 네덜란드 중부에 있는 데이벤트르(Deventer) 라틴어 학교에서 8-15세까지 공부하였습니다. 그 학교는 공동생활 형제단(Brethern of Common Life)이라는 수도원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세의 다른 수도원과 달리 이 수도원은 고전과 성경 교육을 강조하고 성경을 필사하여 팔아 기금을 마련하였고 그 기금으로 수도원을 운영할 뿐 아니라 그 사회의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운동을 ‘오늘의 헌신’이라는 뜻을 가진 ‘디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틀에 갇힌 것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강조하였기에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에서 시작한 공동생활 형제단이라는 수도원은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13세 무렵에 막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디보티오 모데르나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다닌 데이벤트르의 라틴어 학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로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경-1471)가 다닌 곳이기도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이곳에서 원전 읽기의 중요성,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을 체득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487년에 어거스틴 수도회에 입문하여 1488년에 수도사 서약을 하고 1492년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독립적으로 공부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496년에 수도원을 떠나 파리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때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라는 라틴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 뜻은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2. 옥스퍼드, 이탈리아, 케임브리지의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1499년에 파리에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존 콜렛(John Colet, 1478경-1535)이라는 젊은 강사로부터 바울 서신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나중에 영국의 개혁자들이 될 사람들과 교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다시 대륙으로 돌아와 여러 곳에서 독립적인 연구가로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헬라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로마서 주석을 집필하여 1502년에 4권으로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504년에 벨기에 루뱅에 있는 어느 수도원에서 로렌조 발라(1407-1457)가 쓴 “신약성경 첨주”(Adnotationis Novum Testamentum)의 원고를 발견하였습니다. 로렌조 발라는 “콘스탄틴 기증서”가 사실은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첨주”에서 중세에 널리 읽히던 불가타 번역과 헬라어 사본의 차이점들을 적시하였습니다. 불가타 성경을 매우 높이 평가하던 중세의 상황에서 불가타 번역의 오류를 지적한다는 것은 인기 있는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비판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로렌조 발라는 성경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헬라어 사본을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원고에서 큰 자극을 받은 에라스무스는 1505년에 서문을 써서 로렌조 발라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 서문에서 에라스무스는 성경의 참된 원문을 회복하는 것이 참된 영성을 얻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505년에 잠깐 영국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서 1506부터 1509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학자들과 교류하였고,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온 그리스 학자들에게서 헬라어를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506년에 토리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부패하고 죽은 것과 같은 교회의 현 상황은 오직 그 원전인 성경으로 돌아갈 때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성경 번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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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무스는 1509년에 세 번째로 영국을 방문하여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을 출판하였고(1511년), 이후 신약성경을 헬라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1511년부터 케임브리지의 퀸즈 칼리지에서 강의하면서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고 기존의 공인 라틴어 번역본(Vulgata)를 대체할 새로운 번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은 1516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출판한 헬라이 신약성경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는 헬라어 성경과 라틴어 번역을 대역본으로 마련하여서 두 본문이 나란히 읽히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가진 사본에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의 여섯 구절이 없었는데, 그것을 라틴어 번역에 근거하여 헬라어로 작문하여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헬라어 본문을 사본학적으로 확정하는 것에 있기보다는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살려서 재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사용하던 공인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와 자기의 번역이 다른 곳을 적시하여 “첨주”(annotationes)라는 제목으로 인쇄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는 구절을 불가타에서는 ‘고해성사를 행하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에라스무스는 ‘마음과 행실에서 근본적으로 돌이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불가타의 번역에 근거하면 고해성사를 주장하는 교회가 평신도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을 알았기에 그 점을 지적하면서 새로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32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 하는 구절을 불가타 번역본에서 ‘사크라멘툼’(sacramentum)이라는 라틴어로 번역한 것도 지적하였습니다. ‘사크라멘툼’에 ‘비밀’의 의미도 있지만, 헬라어의 ‘비밀’을 모두 ‘사크라멘툼’으로 번역한 것도 아니어서 번역에 일관성이 없음을 에라스무스는 지적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이 구절에서 더 주목한 것은, 혼인의 비밀을 ‘사크라멘툼’이라고 말함으로써 혼인이 곧 ‘성례’(사크라멘툼)라고 가르칠 근거가 된 사실입니다. 그가 보기에는 그릇된 성경 번역이 교회의 권위를 높이는 데에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성경 번역으로 교권이 더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중요하게 보면서 에라스무스는 원전으로부터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3. 바젤의 에라스무스

 

   케임브리지에서 기후와 음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에라스무스는 1514년에 다시 벨기에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의 작업에 반대하는 것을 느끼고 그해 8월에 인쇄업자 친구가 있는 바젤로 갔습니다. 라인강 상류에 위치한 바젤은 당시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구텐베르크 활자의 발명(1452-6년경)과 함께 인쇄술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536년에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이 인쇄된 곳도 바로 바젤이었습니다.

 

헬라어 신약성경 (라틴어 대역과 첨주 성경.1516년)

   에라스무스는 친구 프로벤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영국에서 참조할 수 없었던 다른 헬라어 사본들을 보면서 헬라어 신약 본문을 완성하고 자기의 라틴어 번역을 대역으로 붙여서 출판하였습니다. 짧은 기간에 인쇄공과 함께 집중적으로 일하면서 1516년 3월 1일에 유럽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서문을 썼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가 쓴 문자들을 보존하였고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고 이리로 운반해 왔고 그 글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면에서는 학식이 있다고 하는 많은 신자들이라도 그의 생애 동안에 복음적이고 사도적인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출간되는 이 책은 그분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마음의 생생한 이미지를 여러분에게 전달할 것이고, 친히 말씀하시고 치유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분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온전히 제시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눈으로 직접 뵙는 것보다도 덜 분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문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에라스무스는 단지 헬라어 판본을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작업을 하였던 것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는 동시에 뱀처럼 지혜롭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을 당시 교황이던 레오 10세에게 헌정하고 출판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교황의 허락을 받음으로써 자기의 번역에 대한 불필요한 공격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였습니다.

   1516년의 초판 1,200부와 1519년의 제2판 2,100부가 빨리 팔렸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미미한 부수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급하게 인쇄되었기 때문에 헬라어의 철자, 부호, 구두점 등에 오류가 많이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계속하여 자기 번역의 오류나 오식 등을 수정하면서 5판까지 출판하였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신약을 자기의 언어로 번역할 때에 모두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출판한 헬라어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성경 출판과 함께 생각할 것은 그가 교부들의 책에 관심을 갖고 출간하였다는 점과 바젤의 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가 에라스무스의 밑에서 일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근원으로’(Ad fontes)라는 인문주의의 표어에 맞게 기독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성경과 교부, 달리 표현하면 교부들이 이해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그에 따라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해설 신약성경』- 라틴어본과 영어 번역본

   에라스무스는 1516년에 그리스/라틴어 성경을 출간한 후에 친구들의 간청을 듣고 로마서에 관한 해설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일 년 정도 쉰 후에 고린도전후서의 해설을 1518년 12월에서 1519년 1월 사이에 완성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해설 신약성경』(paraphrases of the NT)을 집필할 의도는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한 권씩 쓰기 시작한 것이 1523년까지 계속되어 1524년에 『해설 신약성경』을 출판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본문의 의미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본문을 대화체로 바꾸어서 설명하기도 하고 청중의 형편에 목회적으로 적용하면서 해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기본 골격은 고대 교부들의 성경 해석 방식이었습니다.

   성경 본문을 직접 읽지 않고 어떤 학자의 해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에라스무스와 대척점에 있던 루터는 바로 이 점에서 『해설 신약성경』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헬라어 본문과 라틴어 번역을 출판한 후에 더 많은 독자를 위하여 해설 성경을 쓴 점은 취할 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장점은 라틴어로 출판한 그의 『해설 신약성경』이 1530년에 독일어로, 1533년에는 헝가리어로 번역되었고, 그의 사후에도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1543년에는 프랑스어로, 1548년에는 영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영어 번역본은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였던 캐더린 파르(Catherine Parr)가 후원하였고 왕비도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의 번역에 참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후에 유혈의 메리라 불리는 공주 메리(Tudor Mary. 1553-1558 재위)도 요한복음의 번역에 일부 참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헨리 8세를 이어서 즉위한 에드워드 6세는 각 교회에 성경과 함께 에라스무스의 『해설 신약성경』을 비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왕비와 공주가 번역에 참여하였고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튜더 왕조가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유혈의 메리가 즉위하였을 때에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는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책들은 모두 불태우도록 하였는데 『해설 신약성경』은 그대로 두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번역에 참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끝까지 로마교회에 남았던 에라스무스의 태도 때문에 그냥 두었을 것입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참화를 피한 그 책이 바로 지금 낱장으로 분리되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는 책입니다.

 

 

4. 에라스무스에 관한 다양한 평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에라스무스는 데이벤트르, 파리, 옥스퍼드, 벨기에, 이탈리아, 케임브리지, 바젤 등을 여행하면서 독립적인 연구가로 활동하다가 1536년에 바젤에서 소천하였고 바젤의 대성당 안에 묻혔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당시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가 출판한 헬라어 성경은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루터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나 개혁의 방향에서는 루터와 논쟁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특히 ‘자유의지’ 문제를 놓고 루터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루터의 동역자인 멜란히톤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개혁의 관점에서 보면 에라스무스에게는 중요한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지만, 루터와 논쟁한 주제만을 가지고 에라스무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일면적이 될 것입니다. 루터와의 논쟁 이후 그는 더 로마교회 쪽으로 가게 되었고 평생 로마교 사제로 남았으나 로마교회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를 조금 더 균형 있게 보려면 그가 다른 개혁자들과 맺은 관계를 16세기의 맥락에서 간략하게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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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에 바르트부르트(Wartburg) 성에 피하여 있으면서 1521년 4월부터 1522년 3월까지 융커 왜르크(Junker Jörg)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경을 헬라어 원문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522년 9월에 출판된 루터 번역의 대본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2판이었습니다(1519년).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원문과 자기의 라틴어 번역을 양단으로 편집하고 긴 주석을 붙인 그 책을 토대로 루터는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독일어 번역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품은 것을 루터가 부화시켰다’는 말이 잘 적용되는 예가 됩니다.

   루터의 독일어 번역은 세 달 만에 3,000부가 팔렸고 그해 12월에 재판을 출판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시장의 언어로 번역된 독일어 성경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르틴 부써(1491-1551)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이었고 에라스무스의 책을 거의 읽었습니다. 그는 에라스무스를 통하여 로마교회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를 만나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1525년 이후 스트라스부르에서 개혁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부써는 에라스무스와도 교제가 있었으나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자유의지’를 주제로 논쟁하자 루터의 편에 섰습니다. 그는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빈을 초청하여 프랑스 난민 교회를 돌보도록 하고 또한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에서 강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외콜람파디우스(1482-1531)는 1515년에 바젤의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였던 그는 1516년에 출간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편집에서 조교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제롬이나 다른 교부들의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는 일도 함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외콜람파디우스가 루터에 동정적이 되자 에라스무스와 간격이 생겼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외콜람파디우스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1522년에 다시 바젤로 돌아와서 고대 교부들의 책을 출간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성 마르틴 교회(St Martin Church)의 목사가 병으로 설교할 수 없게 되자 그 교회에서 성경을 연속으로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설교를 사용하여서 1523년 8월에 스위스에서는 최초로 바젤 도시 전체가 개혁교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들이 매주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게 하였고, 이것은 취리히와 제네바의 목사회로 이어졌습니다.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1484-1531)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고대 교부들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1514-15년경에 바젤에서 에라스무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에라스무스의 글을 읽고 성상에 경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를 지향하였고 연속적인 강설의 방식으로 개혁의 길을 갔습니다. 츠빙글리는 마태복음부터 강해를 시작하였는데 그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신약성경이었습니다. 취리히의 목사들이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할 때에 대본으로 사용한 것도 역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이었습니다.

   폴란드의 개혁자 얀 라스코(1499-1560)는 25세 때에 에라스무스를 만났습니다. 1525년에는 에라스무스와 함께 살면서 그의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하고 프로벤에서 출판하는 책의 비용도 감당하였습니다. 얀 라스코는 후에 엠덴의 개혁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핍박 기간에는 런던에 머물면서 피난민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영국의 개혁자 크랜머(Cranmer), 에드워드 6세 등과 교제하였습니다. 그가 작성한 요리문답이나 교회법에 관한 주장은 오늘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얀 라스코는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박해를 피하여 영국을 떠났습니다. 다시 폴란드로 돌아간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폴란드 성경 번역의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신약의 대본은 물론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이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에라스무스에 관한 평가는 항상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개혁이 뿌리를 내리면서 종교개혁 2세대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몽주의가 꽃을 피우면서 에라스무스가 다른 의미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들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일들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찬반으로 갈리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찬반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가 훨씬 논쟁적인 사람이 되지만, 케임브리지와 바젤의 시각에서 보면 그가 기여한 것도 적지 않으므로 조금 더 너그럽고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케임브리지 시내의 한 헌책방에서 관광 기념품으로 산 에라스무스의 『해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을 한 쪽이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 여러 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어떤 인물에 관하여 평가할 때에는 논쟁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그가 한 활동의 동기와 그가 기여한 점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성경 읽기와 경건한 삶을 강조하였으나 교회에서 목회하여 교회적인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점은 성경 읽기와 경건을 강조하면서 교회를 세운 개혁자들과 중요한 차이를 냅니다. 그렇지만 1516년에 출간된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원전으로 돌아가서 생생한 복음을 듣고 전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하려는 점은 오늘날에도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으나 다양한 사람을 사용하여서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여와 부족한 점도 균형 있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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