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지명은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고덕길 목사
(이슬라마바드 한인교회 담임)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는 ‘이슬람’과 ‘아바드’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슬람은 복종의 의미를 갖는 종교 이슬람을 뜻하는 아랍어 اسلام 에서 아바드는 ‘도시’ 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اباد 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이슬라마바드를 ‘이슬람의 도시’라고 번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명은 인명과 마찬가지로 고유명사이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이란 국명도 문자적으로는 ‘정결의 땅’을 의미합니다. pāk는 ‘정결’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이고. -stān은 ~의 장소, 땅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인데 sthāna 라는 산스크리트어와 동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āk와 stān 사이에 발음을 쉽게하기 위해 보조모음 아이(i)를 첨가하여 Pakistan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하여 ‘정결의 땅’으로 번역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한글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지명이 번역된 경우를 보게됩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면, 창세기 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여기 남방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네게브(נגב)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남쪽이라는 뜻도 있고 마른 땅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네게브는 브엘세바 이남의 지역인데 물이 없는 광야지대입니다. 그러나 지명임으로 의미번역보다는 그냥 소리번역을 해야 합니다. KJV, NKJ은 the south로 LXX은 광야(ερημος)로 번역하였습니다. LXX 역자 역시 성경의 땅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1은 같은 말을 정확하게 소리 번역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이 경우는 애굽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 있는 네게브를 남방으로 번역하면 우스운 번역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KJV는 into the south 로, NKJV는 to the sout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남쪽으로 가면 절대로 네게브에 도달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south앞에 정관사가 있어서 특정 지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좀 무리한 번역으로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에 네게브(נגב)는 110회 나오는데 방향을 나타낼 때도 있고 지명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 문맥을 잘 살피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대개 역사서에서는 지명으로 쓰이고 성막이나 성전과 관련된 구절이나 예언서에서는 주로 남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각의 경우를 다 적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네게브(נגב)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에 ‘남방’으로 번역된 다음 구절들 창 12:9; 민 13:29, 33:40; 삿 1:9, 15, 16; 삼상 30:14, 27; 대하 28:18; 슥 7:7은 ‘네게브’로 고쳐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여호수아 10:40에는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온 땅을 지역별로 나눈듯한 구절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여기에서도 ‘평지’가 지명을 번역한 경우입니다.
평지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쉬펠라’( השפלה )는 지명으로 성경에 모두 20회 나오는데 한글성경에서는 한번도 소리번역을 하지 않고 모두 의미번역을 하였습니다. 물론 ‘하쉬펠라’( השפלה )는 ‘낮추다’란 의미의 ‘샤팔’(שפל)에서 파생하여 ‘낮은 곳’이란 뜻이 있지만 지명임으로 소리번역이 합당합니다. 영어성경의 경우 NRSV는 12회 Shephelah로 소리번역을 한 반면, NASB 는 2회, RSV는 10회 소리 번역을 하였고 그 외는 대부분 lowland로 의미번역을 하였습니다. NIV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western foothills 라고 의미번역을 하였습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15:8입니다.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올라가서 여부스 곧 예루살렘 남쪽 어깨에 이르며 또 힌놈의 골짜기 앞 서쪽에 있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나니 이곳은 르바임 골짜기 북쪽 끝이며” 여기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도 의역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벤힌놈 골짜기’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벤’을 아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면 ‘베냐민’도 ‘야민의 아들’로 번역해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벤힌놈’이 지명이기 때문에 구태여 뜻을 옮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벤힌놈 골짜기로 번역했고 대부분의 영어성경도 Valley of Ben Hinnom으로 음역했는데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번역한 것은 라틴 불가타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불가타가 convallem filii Ennom 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구글 지도를 보면 오늘날도 Gey Ben Hinnom 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Gey 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벤힌놈 골짜기는 간단히 힌놈 골짜기라고도 합니다. 힌놈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גי הנם Gey Hinnom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힌놈 골짜기는 유다의 아하스 왕 시대에 이곳에 바알의 우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분향했으며, 또 유다 사람들이 이곳에 암몬 족속의 신 ‘몰렉’을 위한 산당 ‘도벳’을 짓고 거기에서 어린 자녀들을 산 채로 불살라 제물로 바치는 악을 행했습니다(대하 28:1~4, 렘 7:31~33, 겔 16:20~21).
그 후 요시야 왕이 몰렉에게 드리던 이방 제사를 파하고 골짜기와 도벳 산당 터를 더럽혀(왕하 23:10), 그때부터 이곳은 이방인의 무덤과 쓰레기 소각장으로 쓰여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다 모아 큰 불을 피워서 태워 없앴고, 각종 오물을 버렸습니다. 특히 율법을 어겨서 죽임 당한 사람, 이방인, 반역자, 나병 등 부정한 질병으로 죽은 자, 그리고 오갈 데 없이 살다가 이름도 없이 죽은 거지나 유랑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기도 했습니다.
몰렉에게 바친 아이들을 불사른 강렬한 불과 타는 연기와 고통 소리, 온갖 쓰레기들을 태울 때 그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오른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단어를 이 골짜기의 이름에서 따와 ‘게힌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게힌놈’은 원래 이 골짜기의 이름이지만 지옥이라는 특별한 대명사로 사용되게 됩니다.
신약시대는 이 게힌놈이라는 히브리어가 헬라어로 γέεννα 게헨나로 음역되어 지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에서 지옥을 이야기하실 때 바로 이 단어를 직접 사용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9)
성경에 고유명사인 지명이 번역되는 경우는 이 밖에도 더 많이 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성경에서 지명이 의미 번역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청주를 맑은 고을이나 대전을 큰밭이라고 번역하지 않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제에 이런 오류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지명을 번역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번역어가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여호수아 15장 8절에 보면 벤힌놈(또는 힌놈)과 르바임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골짜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골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골짜기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세 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골짜기는 “벤힌놈 골짜기”에서 쓰인 가이(גיא)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르바임 골짜기’라고 할 때의 골짜기는 가이(גיא)가 아니라 에멕(עמק)입니다. 에멕은 가이와는 다른 골짜기입니다. 사실 내용적으로는 골짜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대부분 이스라엘을 다녀와 아시겠지만 ‘이스르엘 골짜기’는 골짜기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평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멕’이라는 단어가 쓰였기 때문에 골짜기로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에멕’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에멕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넓은 평야라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면 에멕이라고 합니다. 분지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분지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평야라고 할까요? 평야를 가리키는 단어는 미쇼르(מישור)라고 합니다. 넓은 땅이면서 동시에 한 면이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곳을 평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는 ‘블레셋 평야’라든지 ‘샤론 평야’처럼 평야로 불리는 지역은 모두 지중해를 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골짜기로 번역된 단어는 나할(נחל)입니다. ‘기드론 골짜기’ 할 때 이 단어가 쓰입니다. 예루살렘성의 서남쪽에 있는 것이 힌놈 골짜기인데 바로 옆 동쪽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다른 표현을 씁니다. 한글성경에서는 ‘기드론 시내’(삼하 15:23; 왕상 2:37; 왕상 15:37 기드론 시냇가; 왕하 23:4 기드론 밭) 라고 번역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할의 뜻은 건기에는 말라 있지만 우기에는 물이 흐르는 건천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랍어로 와디( وادي ) 라고 하는데 영어성경 가운데는 Wadi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골짜기라는 말이 나오면 반드시 원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지명을 번역하는 경우를 몇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약간은 길고 지루한 글일텐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의 땅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