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시대에 교리문답 설교하기1)
저자: 스탠 매스트 (Stan Mast, 미국 칼빈 신학교 설교학 겸임교수)
번역: 박재은 목사 (Ph.D. cand., Calvin Theological Seminary)
나는 이런 질문들을 자주 접한다. “설교자인 저도 잘 알아요. 비록 세상은 포스트모던 시대지만 여전히 교리문답 설교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근데 선교적 교회를 의도적으로 지향하는 현대 교회에서 교리문답 설교가 효과가 있을까요? 시카고 도심 중심부에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로스엔젤레스의 다인종 도심 한복판에서 설교할 때 과연 어떻게 교리문답을 설교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들은 몇 년 전 칼빈 신학교에서 설교학 워크샵을 했을 때도 흔히 나오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때 만났던 8명 정도의 교회 개척자들의 눈 속에서 교리문답을 잘 설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하는 열망을 보았다.
요즘 교회는 왜 교리문답을 설교하지 않는지에 대해 3가지 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현대적 이유, 후기 현대적 (포스트모던) 이유, 그리고 최근의 신생적 이유가 바로 그것들이다. 첫째, 현대적 이유란 내가 10대 혹은 20대 정도 때 들었던 설교 스타일을 내포한다. 그 때는 설교자들이 교리문답 설교를 많이 했었다. 설교 제목 자체도 “삼위일체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두 본성” 같은 식의 제목이 많았다. 설교자들은 의도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대해서 청중들에게 선명한 지식을 전달해 주기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문답형 설교들은 딱딱하고 건조한 설교가 되기 쉬웠고 점점 교인들도 그런 교리 설교를 듣길 원치 않았다.
둘째, 후기 현대적 혹은 포스트모던적 이유는 아마도 워크샵에 모였던 한 교회 개척가의 말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저희 교회에 나오는 청중들 중에 많은 이들은 성경 자체를 믿지 않은 채 그냥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성경과 교리의 권위를 세우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외부적 권위에 복종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복음 전파의 수단을 가로막는 행위처럼 보일 여지가 있다고 혹자는 지적한다.
셋째, 최근의 신생적 이유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편승하여 최근의 청중들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적 신앙을 진리의 한 형태로 여기기보다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또 다른 하나의 원리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진리이기도 하고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혹자는 우려하길 “이것은 진리다”라고 할 때 이 말이 배타적인 장애물이 되어 진리를 가진 사람과 진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 사이를 가로막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사고 가운데서 기독교는 “벽을 세우는” 종교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들 모두 어느 정도 타당성은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검증된 더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를 읽는 독자라면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을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법은 규칙적으로 교리문답을 사용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여러 가지 “개인적” 상황들로 인해 최근 들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언약 안에 묶여 있는 공동체이므로 어떠한 “개인적” 상황 때문에 언약 공동체가 꼭 해야 할 일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실 교파를 초월해서 교리문답을 사용하는 설교의 필요성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많은 성경신학자들은 신약 성경 곳곳에서 언급되는 교리문답적 설교에 대한 표현들에 주목한다. 젊은 목회자에게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딤후 1:13). 일찍이 교회사 가운데 많은 훌륭한 선교사들은 독특한 개별 선교 현장에서 복음을 “들은 바 바른 말을 가지고” 잘 전해왔다.
교리문답을 설교에서 사용해야 하는 보다 실제적 이유는 바로 설교를 잘 조직화하여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고민하는 부분 중 하나는 다음 주일날 설교는 뭘 할까 혹은 내년에는 어떤 설교 시리즈로 설교강단을 채워나갈까에 대한 고민이다. 교리문답의 순서를 따라가며 설교하는 것은 기독교 믿음의 핵심 가치들을 빠트리지 않고 잘 설명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핵심 교리들을 자신의 목양 스타일을 가지고 교인들 실제적 삶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런 소리들을 듣는다: “나이 지긋하신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겠어요. 근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것들이 먹히겠어요?” 그러나 나는 워크샵에서 만났던 8명의 교회 개척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실제적으로 교리문답 설교는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도 적절하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포스트모던주의는 기본적으로 반 체제주의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주의는 이미 설립되어 체계가 잡힌 교회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의 가르침 그 자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교리문답은 이런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 교리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던주의는 반 체제주의적일 뿐 아니라, 반 권위주의적이기도 하다: “나한테 뭘 믿으라고 말하지 마세요! 뭘 믿을지는 내 스스로가 결정해요.” 그러나 비록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초월적 존재를 갈망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이다. 그래서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외부 권위에 대한 거부로 인해 포스트모던주의는 자연스럽게 다원주의로 흐를 경향이 크다. 즉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 스스로가 선택한 믿음이 있고 그걸 다 진리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에 있어서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은 그것이 과연 얼마나 실용적이고 경험적인가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진리인가?” 보다는 “이것이 얼마나 실효적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고, 바로 이것이 어떤 것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교리문답은 우리의 가치관 형성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만약 교리문답을 최대한 정중한 방식으로 교리적 색채를 좀 옅게 해서 지혜롭게 설명한다면, 복음을 잘 모르는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킴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교리문답은 매우 실제적이고 경험적이다. 교리문답의 충실한 이해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교리문답에 나타난 3가지의 중요한 교리적 주제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첫째, “죄”라는 주제는 과연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무엇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죄는 인류에 들어왔는가,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내려줄 수 있다. 둘째, “구원”은 죄에 대한 신적인 해결책이다. 죄로 가득 찬 세상이 어떻게 구원되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가르쳐준다. 셋째, “예배”는 구원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기도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는가, 이웃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대답을 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개인주의에 찌든 왜곡된 삶 속에서 참된 공동체를 찾고 싶어 한다. 교리문답은 우리가 속해야 하는 참된 공동체에 대한 해답을 준다: “내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어떤 교회 개척자들은 교리문답을 사용한 설교가 과거에는 꽤 적실성을 발휘했지만 현대적 상황 가운데서 얼마나 그 효과가 발휘될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이제는 전통적으로 해온 방식 즉 성경 본문을 읽기 전에 교리문답을 읽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설교자들은 교리문답을 개인적인 설교 도움 정도로써만 활용하고 그 필요성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때로는 예배 예식과 더불어서 교리문답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제는 더 이상 과거 설교자들이 그랬듯이 교리문답 자체를 텍스트로 사용하여 설교를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교리문답을 소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교리문답은 성경이라는 큰 정경 속에 나타난 기독교 핵심 교리들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지침이다. 교리문답 그 자체가 성경은 아니다. 또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이 성경말씀을 설교하는 것의 대체가 되어서도 안 된다. 사실 초심자에게 성경은 처음 발을 내딛는 땅과도 같다. 교리문답은 익숙치 않은 성경이라는 땅을 거님에 있어서 어디가 높은 지대고 어디가 낮은 지대인지 알려준다. 또한 무엇이 핵심 진리이고 무엇이 감추어진 진리 혹은 이해하기 힘든 진리인지도 알려준다. 교리문답 자체가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다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교리문답은 개혁주의적 삶과 진리의 중요한 특징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놔두지 않는 힘이 있다.”
기독개혁교회의 설교자로서 우리는 즐거움과 짐을 동시에 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룩한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바로 권위의 정점이라는 덜 성숙한 개인주의에 뿌리를 내린 포스트모던 사회 가운데서 개혁주의 신조와 고백들은 우리에게 상호관계와 공동책임에 대해 설교해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 과연 공동체를 지향하는 설교는 개인의 자유를 허무는가?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 점은 바로 이러한 설교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불만거리나 문화적 변덕으로부터 해방하여 좀 더 본질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워크샵에서 만났던 교회 개척자들은 교리문답에 바탕을 둔 훌륭한 설교와 심지어는 교리문답 순서에 맞춘 설교 시리즈까지 서로 공유했다. 미시건 앤아버에서 사역하고 있는 피터 최 목사는 “집으로 향하는 여행”이라는 매력적인 교리문답 설교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이 시리즈는 “앤아버의 노숙자들”이라는 영화 제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죄와 함께 하는 도로,” “구원의 거실,” “예배의 부엌” 으로 진행 한 후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함께 집에 거함”이라는 제목으로 마친다. 이 훌륭한 설교 시리즈를 살펴보면서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약간의 창의력이 버무려진 생각과 꾸준한 연구로 인해 빚어진 교리문답 설교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청중들에게 꼭 필요한 설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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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15년 봄 호에 Preaching the Catechism in a Postmodern Age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 허락을 맡고 게재 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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