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사랑의 이면(裏面)1)
필자:바런트캄파이스 교수, Prof. dr. BarendKamphuis
번역: 이충만 목사/해외필진(네덜란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통 받으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문제와 씨름하였다. 나 또한 이에 대해 본회퍼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그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십자가로 내 모셨다.”오히려 하나님의 고통을 이야기 하되, 삼위일체론적으로 성부와 성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본회퍼의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고통은 본회퍼의 신학의 중요한 테마이다. 수감시절 본회퍼는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기독교인의 정체성으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 초기 작품부터 하나님의 고통이라는 테마는 중요하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아래에 서서 하나님의 고통에 동참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은 보편적인 신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 오셨던 그 예수님으로부터만 도출된다. 그리스도의 고통에서 우리는 ‘누가 하나님 이신가’를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고통을 짊어지신 분이다.
본회퍼는 저항과 복종: 옥종서간(Widerstand und Ergebung: Brief und Aufzeichnungenaus der Haft)2)에 수록되어져 있는 한 편지에서 하나님의 고통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었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하나님의 고통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구분은 거의 사라진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십자가에로 내모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한다.
또한 본회퍼는 이 서간에서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안에 거하시는 방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보이시는 것으로 세상에 현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의 사역은 훼손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힘없이 거절된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로 이어진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재(不在)이다.
뿐만 아니라 본회퍼는 고통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야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아주 거창한 무엇인가를 기대하지 마라. 우리의 하나님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에 더 가까우시다. 그러나 본회퍼에게 이것이야 말로 참된 위로이다. 이 위로에 힘입어 본회퍼는 교수대로 향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생명의 시작이다.” 순교야 말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하나님의 고통의 관계
본회퍼가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 한 신학자는 아니다. 이 주제는 오래전부터 기독교 사상가들의 글에서 재차 발견되는 주제이다. 속사도 교부들도 이 주제를 다루었다. 이 주제와 관련한 핵심적인 신학적 질문은 “하나님께서 과연 고통 받으실 수 있는가?”, “고통이 하나님의 신성과 어울리는가?” 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은 사라지나 하나님은 영존하신다. 시편 102편의 찬송이다. 그러기에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으실 수 없다고 항변하였다. 개혁파 정통주의 또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2세기의 교부 이그나티우스도 하나님은 고통 받으실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이시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찬송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심과 동시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신 분이심과 동시에 고통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으시지 않으심과 동시에 우릴 위해 고통을 당하셨다.”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신학은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 -하나님께서 자신 외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며, 고로 고통당하지 않으신다-과 달리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 한다. 본회퍼는 이러한 현대신학의 동향에 크게 기여한 신학자다. 하지만 현대신학의 흐름 안에서 하나님의 고통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는 신학자들도 많다. 전통적인 개혁파 신학의 입장에서 클라스스킬더(KlaasSchilder)가 그러하였고, 개혁파 신학 밖에서도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고통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성경에 나타난 고통에 대한 표현들과 이와 상반되는 표현들
성경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감정을 묘사한다: 분노, 긍휼, 실망, 사랑, 그리고 후회. 게다가 성경은 종종 고통과 관련된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고통에 함께 하시고, 영향을 받으신다 (이사야 63장).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십자가의 심연, 곧 하나님의 부재이며 죽음으로 이어진다.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감정에 대해 말한다: 긍휼, 사랑, 그리고 분노. 이사야 63장 10절은 에베소서 4장 30절에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런데 성경은 이와 같은 표현들과 함께, 하나님의 고통의 가능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이 상반된 성경의 구절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달리 후회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쳐 주는 사무엘상 15장 29절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 이다”와 하나님의 후회를 묘사하는 동일한 장의 11절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중에 계신다면, 이러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혹 소중한 것을 빼앗기시어 고통을 받게 되신다는 성경의 묘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여상하시어 (시편102)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약 1: 17)도 없으시다면, 어떻게 악이나 슬픔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전통적으로 신학은 인간의 언어와 개념의 한계로서 답하였다. 곧 인간의 언어와 개념이 하나님을 묘사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이러한 한계 안에서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을 유비와 메타포로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이해의 범위 보다) 더 크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모든 내용에 적용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불변성’과 ‘하나님의 고통’ 이라는 두 개념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 두 개념 모두 충분하지 않다. 이 두 개념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가 이 개념들의 도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보다 항상 더 크다. 이 두 개념이 상호 모순되지만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 (딤전6:16)으로 거하신다. 우리는 이 빛으로부터 흘러나온 광채만을 볼 수 있고, 그 광채마저 굴절되어 있다.
고통과 사랑
그러기에 나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받으실 수 있는가?”가 아니다. 이 질문은 나로서는 불경스럽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것은 하실 수 있고 저것은 하실 수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재단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말할 수 있거나 혹은 말할 수 없는가”를 자문한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우리가 말하지 않아야 하고 또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고통은 항상 사랑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우리에게서 사라지면,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을 그리워하게 된다. 여기에 고통이 따른다. 고통은 사랑의 이면이다. 사랑이 하나의 신비이듯, 고통 또한 하나의 신비이다.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사랑의 이면(裏面)- 하나님의 고통의 능동성
우리가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이 두 단어, “하나님의”와 “고통”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로 인하여 고통 받으신다. 그러나 이 고통은 언제나 “하나님의” 고통이다. 영광스러우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고통. 그러기에 그분은 결코 다른 누군가에 의해, 혹은 다른 무엇인가에 의한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 무기력한 희생양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결코 긍휼히 여기시지만, 무력하고 수동적인 구경꾼은 아니시다.
하나님의 고통은 그분의 사랑의 이면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무력함이나, 죄책에 의해서 고통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 그 분이 사랑이시며 이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고통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타락 후에도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지켜 가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의 위대함을 보이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고난도 용납하신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취약한 부위를 만들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아픔이 된다. 부모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자녀는 기쁨을 주시만, 동시에 걱정, 두려움, 그리고 슬픔도 가져다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거부할 때에 괴로워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의 죄책과 우리의 모든 과오를 짊어지실 때에 고통당하신다.
기독론 적으로 정의된 하나님 수난(Christologischetheopaschitisme)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고난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야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고난을 겪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통은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으로 고통을 당하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단지 인간적이지 않고 오히려 신적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고난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단지 기독론 적으로만?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을 받으신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단, 세 가지의 조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위격적 구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이 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하나님의 부재를 고려할 때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재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하나님의 부재를 받아 들이셨다. 이 성자 예수님의 고통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당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고통과 다르다. 성부 하나님, 곧 성자 예수님과 우리의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내어주시는 바로 이 고통 안에서 세상을 사랑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고통을 받으시되, 그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면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면이기에 하나님은 고통을 자신의 뜻 안에서 능동적으로 수용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의지로 고난을 수용하신다.
본회퍼 신학에 대한 비판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단지 인간적인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으로 올바르게 이해하였다. 이를 그는 신학적으로 사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고통에 동참하였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고통을 따르는 자였던 이그나티우스를 본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본회퍼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였다.
하지만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있어 성부와 성자의 위격의 구분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본회퍼는 성부 하나님의 고통과 성자 하나님의 고통을 동일시하였다. 본회퍼가 성부와 성자의 위격의 구분 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시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십자가에게 내 모신 분’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구분이 그에게는 없다. 이 부분에서 나는 본회퍼에게 동의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고통을 이야기 하면서도 늘 하나님의 불변성과 영광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본회퍼에게 이 두 측면 모두를 균형 있게 견지하지 못했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연약함을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의 힘과 연약함, 혹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영광과 고통은 늘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
본회퍼의 신학에 대한 몇 가지 지적은 신학적인 지적에 불구하다. 본회퍼의 신학이 없었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이론과 신학을 넘어선 문제이다. 본회퍼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겪은 고난은 자신이 견지한 믿음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믿음을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고난 안에서 하나님께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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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을 원문은 캄펜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바런트캄파이스의 논문, "Goddelijklijdenbij Dietrich Bonhoeffer"이다. 지면상, 2015년 4월 2일자 NederlandsDagblad에 실렸던 요약본을 번역하였다.
2) 저항과 복종: 옥중서간, 디트리히본회퍼 지음, 손규태 정지련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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