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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캄펜신학교는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지금껏 해방파 교회와 신학교를 섬겼던 다수의 교수들이 은퇴하고 새로운 교수들이 임용된다. 은퇴하는 교수들은 은퇴강연을 통해 자신들의 세대가 추구했던 개혁신학을 정리하고, 후세대가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한다. 이에 이들의 은퇴강연을 개혁신학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번역, 연재함으로 개혁신학의 현주소와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이들의 강의는 지금의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와 신학의 상황과 깊이 관련있다. 그러기에 한국적 상황에 적실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연재의 목적은 이들의 신학, 혹은 이들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모방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불가능하며, 특히 문제의식 자체를 무분별하게 모방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해방파 교회가 자신들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개혁신학을 발전시키려 씨름하는 자세와 방법론은 배울점이 많다. 역자는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해방파 교회가 각자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상대를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 가르치고 배우기를 희망한다. 또한 교회를 위해 책임있게 가르쳤던 교수들의 지혜를 은퇴강연을 통해 집약적으로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한국적 상황에서도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첫번째 글은 메이스 터 펠더 (Mees te Velde)교수의 은퇴강연이다. 지난 6 26 (2015)에 은퇴한 터 펠더 교수는 캄펜신학교에서 교회사 및 교회법을 강의하고 수년간 학장으로 일했다.


 
 
 

 개혁신학의 과제 I

 

제사장의 나라: 새로운 역동성을 향한 도전

 

 

메이스 터 펠더(Mees te Velde) 교수 은퇴강연

(2015 6 26, 캄펜)

번역: 이충만목사(캄펀신학교 교의학 박사과정)

 

 



1. 삶의 정황


 


신학의 주제들은 특정한 삶의 정황과 관련 있다. 오늘 나의 고별강연도 역시 그러하다. 이 주제에 대한 나의 고민은 지난 2010년 아멜스포르트(Amerspoort) 의 보흐교회(Boogkerk)에서 있었던 인터뷰에서부터 비롯된다. 나는 그곳에서 KASKI연구소[1]의 한 연구원이 인도하는 그룹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다. 이 그룹은 캄펜 신학교를 후원할 이들을 어떻게 모집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두 그룹의 참석자들을 만났다. 한 그룹은 40대 이상으로, 교회와 사회 중 교회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한 그룹은 40대 이하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40대 이상의 그룹과는 달리 교회 보다 일상적인 사회생활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 두 그룹과 토론하면서 나는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직시하였다. 곧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주안점이 교회에서  일상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보다 사회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여 교회의 젊은 세대가 비신앙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관심은 개혁파 전통이 고백하는 성도의 세 직분 (제사장, 선지자, )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교회와 일상의 삶에 대한 일종의 이분법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이 인터뷰 이후로 나는 교회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이 변화를 어떤 방식으로 규명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자문하였다.


이러한 고민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1) 개혁파 교회론은 각자의 신앙과 경험을 가진 신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개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2) 이와 관련하여 교회가 일상의 삶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첫번째 문제의식은 교회론과 관련되고, 두번째의 것은 교회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한 것이다.


나는 본 강연에서 상호 연관된 두 문제점을 살펴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 한다.



 

2. 첫번째 문제의식: 교회론적 약점



교회는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인 회중이다. 이 회중을 직분자들, 특히 목사가 목회한다. 이렇게 모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직분 (ambt van alle gelovigen)”이라는 개념이 적용된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주일( 32문답)이 가르쳐주는 세 가지 직분, 선지자, 제사장, 이다.  이 세 직분은 본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 직분으로 옷 입었다. 그런데 세 직분은 개혁파 교회론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다. “만인제사장직[2]이라는 개념은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었고 교회론을 구성하는 것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이 개념이 어떤 직무를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교회의 직분자에 대한 신학적 해설과 비교하여 만인제상직에 대한 그것은 산만하다.


이는 최근에 출판된 교의학 서적에서도 나타난다. 판 덴 브링크와 판 데르 코우이(Vad den BrinkVan der Kooi)기독교 교의학 (Christelijke dogmatiek, 2012) 14장에서 교회-성례-직분을 다룬다. 여기에서 베드로전서 2장을 인용하고 있지만 은혜의 방편에 대한 논의가 지배적이고, 예배, 직분, 설교와 성례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모두 교회안의 직분과 일에 대한 것이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도 세 가지 직분모델, 즉 감독제도, 회중교회, 장로교 제도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이들의 책은 왕같은 제사장들에 대한 논의를 교회론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2012년 판 더 베이크 역시 400 페이지에 달하는 교회론을 출판하였다 (그리스도의 몸과 영 Lichaam en Geest van Christus). 그도 만인제사장직을 다룬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직이 직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만인제사장직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라는 메타포와 연결시킨다: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나지 않게 기도하고 증거하는 큰 무리이다”.


반면, 미로스라프 볼프 (Miroslav Volf)는 그의 책, 우리의 형상을 따라 (After our likeness, 1998)에서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을 제시한다. 그는 앞의 두 경우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볼프는 흥미롭게도 교회는 독립적인 주체가 아닌 상호 의존적인 주체들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다 (224-28).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명은 동일하지만 은사는 다르다고 강조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삶은 교회 직분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님을 주장한다. 오히려 성령은 직분자들을 통해서 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신다.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구원을 중재하는 직무를 지닌다. 그러기에 평신도들이 교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논의는 볼프에게서도 부족하다.


조직신학적 연구상황이 상술한 바와 같다면, “만인제사장직개념을 역사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미 고대교회가 세 가지 직분(제사장, , 선지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롬은 세례의 관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직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에게서도 이 관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에 견진성사와 관련하여 발전하였다. 견진성사는 성령을 받았음을 표하는 예식으로써 약 6세의 어린이들의 이마에 거룩한 기름을 바른다. 이로써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표하였다.


그런데 중세 교회는 고대교회가 유지해 온 바,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성직수여(사제서품)’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시켰고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이해하였다. 또한 교회는 지나치게 성별되었고 사제화 되었으며 성직자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였고 평신도들은 사제들에게 의존하는 위계질서가 생겨났다.


이러한 중세에 반대하여 루터는 과격한 주장을 제기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자들은 제사장이요 주교이며 교황이다.” 이로써 위계적으로 지배하는 사제집단은 사라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 자유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져야 했다. 실제로 설교와 신앙교육을 통해 근본적으로 교회는 새로워졌다. 하지만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틀은 완화된 형태로 여전히 지속되었다.


칼빈도 루터와 동일하게 만인제사장직을 강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의 온 생애에서의 소명(vocatio)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칼빈 신학의 장점이다. 또한 칼빈은 교회론에서 교회와 행정당국을 원칙적으로 구분하였고, 성경적 토대로부터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도출함으로써 루터와 멜랑히톤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칼빈에 따르면 장로와 집사는 평신도 직분자들이며, 이들 역시 교회가 해야할 바를 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여전히 교회를 직분과 은혜의 방편의 관점에서 생각하였다. 직분은 능동적이고 공동체는 수동적이다.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대안적인 교회론이 16세기와 17세기에 존재했다. 재세례파(1525년 이후)와 메노나이트(1560년 이후), 그리고 침례주의자들(1609년 이후)과 회중교회(1620년 이후)는 일반 성도들이 중요한 영적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당회나 장로회 대신 전체 성도들로 구성된 공동의회가 최종적 결정권을 가졌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교회 형태는 유럽 내조차 국지적으로 남아 있다. 이들의 후예들은 대부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분명한) 교회 형태로 회귀하였다.


현재 개혁파를 위시한 개신교회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지층 위에 서 있다.


첫째, 성경에 계시된 바를 따라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를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생각하며 판단할 수 있다. 당시 예배에 집례하는 자와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자 사이의 확실한 구분(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자들의 시도는 과히 혁명적이었다.


둘째, 17세기부터 개인의 경건이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중요한 요소로 첨가 되었다. 즉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대한 체험이 중요하고 그 체험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독일의 스페너(Spener), 프랑커 (Francke), 그리고 진젠도르프 (Zinzendorf), 네덜란드의 Nadere reformatie (영어로 the Further Reformation, ‘2의 종교개혁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앵글로-색슨족의 청교도, 더 나아가 18세기의 감리교, 19세기의 신경건주의와 각성운동은 개인적인 경건에 대해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흐름 안에서 수많은 경건서적들이 출판되었고, 교회 내 예배 이외의 모임들이 활발해졌다.


셋번째 지층과 네번째의 것은 상호 유사점이 있는 교회사적 운동이다. 이는 모두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다. 하나는 모든 성도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교회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교회건설(gemeenteopbouw)”은사(charismata)”와 같은 개념들이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선교 운동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사도와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선교적 교회와 같은 개념들이 중요하였다. 두 운동은 1870년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비헬른 Wichern과 카이퍼 Kuyper). 평신도들도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45년 이후 크레머 (Kraemer), 후켄다이크(Hoekendijk), 칼 바르트 (Karl Barth), 그리고 다비드 보쉬(David Bosch)와 같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선교와 세속화된 사회 안에의 선교사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제자도라는 개념 역시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이상이 교회가 지나온 역사의 4가지 흐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술한 교회사적 흐름 가운데 하나님의 종 모세가 말하였고 이에 기초하여 사도 베드로가 강조했던 바를 구체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가? 직분에 대해 큰 비중을 두는 신학과 교회론에 충분히 상응할 만큼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교회론적 접근이 이루어졌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강연자 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종교개혁 이후 앞서 말한 교회사적 흐름이 있었으나, 여전히 만인제사장직은 a) 지극히 교회내부적인 요소로 생각되어 왔고, b) 그것도 더욱이 부자연스러게 덧붙여진 것이거나 주변적 요소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경지식을 쌓아 갈 수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은 단지 특정한 소그룹에 국한되어 활동한다.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교회를 건설하고 선교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지만, 이는 직분자가 미처 할 수 없거나 직접 갈 수 없을 경우, 직분자가 해야할 설교나 목회적 활동을 대신 하는 것에 불과한다. 개혁파 교회의 예전이 왕같은 제사장으로의 부르심을 그리스도인들의 일차적인 소명으로 가르지고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현실은 모순적이다.


교회내의 직분과 조직으로써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직 역시 교회를 위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 충분히 다루어 지지 않았다. 공동체가 직분과 은혜의 방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이 옳다. 즉 직분과 은혜의 방편은 출애굽기 19장과 베드로전서 2장에서 말씀하신 바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동체를 양육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상의 삶을 헌신해야 한다. 이는 교회 내 직분이 하지 못하는 일이다. 제사장으로서의 성도들이 일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해야할 고유한 영역,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독립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다. 오히려 평신도들이 교회화된다. 당연히 제사장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내 활동 (앞서 제시한 첫번째 지층)에 참여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측면(두번째 지층)과 세속적인 측면(세번째 지층)이 결코 등한시 되거나 단편적으로 이해되서는 안된다.


이 대목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 신학을 수용하였다. 이는 교회에 대한 공의회의 교의 헌장인 인류의 빛 (Lumen Gentium, 1964)에 나타난다.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 헌장의 출발점은 직분자들과 평신도들의 일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직분자들과 평신도들이 동등하다는 것이 주안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기 위한 봉사는 모든 신자들의 공동임무이다. 동시에 이 헌장은 개념적인 측면에서 직분 혹은 교계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을 구분하다. 헌장은 이 두 사제직 모두 다루지만, 이것들의 실체적 일치가 헌장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나는 후반부에 이 헌장의 내용을 다시 언급하겠다.


우리는 만인제사장직을 칼빈주의 개혁파 신학의 틀 안에서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교회안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을 긍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판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젊은 성도들은 더 이상 조직화된 교회와 직분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교회 내 문제에 깊이 관여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사적인 공간과 세속화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중요성을 둔다. 각자의 상황, 결혼생활, 가족, 자녀양육, 직장, 이웃 및 동료들과의 교제, 운동이나 취미생활, 그리고 경제생활이 그들의 관심사이다. 이러한 일상 속에 젊은 신자들은 종종 교회로부터 소원해 지고 교회를 잊어버린다. 이와 같은 변화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과 관련하여 만인제사장직에 대해 실체적이고 구체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도록 한다.


이제 앞서 제기한 두번째 문제의식을 살펴보자.



3. 두번째 문제의식: 구체적 실천의 취약점


 

두번째 문제의식은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교회의 균형 잡히지 않은 시각과 관련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직을 생각하면, “성전”, “지성소”, 그리고하나님과의 대면 같은 소재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키고, 삶의 제사를 말한다(로마서 12). 벧전 2 9-10 이후의 구절들 역시 우리의 일상에 대한 교훈이다: 다스리는 권세, 결혼, 그리고 노동 . 성전에서의 제사장과 일터에서의 제사장! 시편 65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원론적이지 않으시고 우리도 그렇지 않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 4-5).


하지만 교회는 대체로 소위 거룩한 것에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세속적인 것은 등한히 여긴다. 주일 교회 모임은 세속적인 , 일상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 결혼생활이나 가정의 문제를 얼만큼 주의깊게 다루는가? 흥미로운 점은 세속적인 문제들을 신앙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교회 밖의 기독교 단체들에서는 활발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은 긍정적이라고 있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단체들을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세속적인 문제들을 신앙 안에서 토론하고 해결하고자 노력 있다.


그렇다면 개혁교회는 어떠한가?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감리교가 태동한 이후 개혁교회는 구원론과 성령론 사이의 불균형의 문제, 혹은 좀더 정확하게, 칭의와 성화 사이의 불균형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교회는 구원론, 칭의, 하나님의 자녀가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였다. 이는 무엇보다 개인적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조이다. 하지만 성화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 경건하고 선한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강조되었다. 예배의 설교는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 대해 주의깊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십계명이 주는 교훈과 기독교인의 덕목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오히려 구원역사의 한 대목에 대한 해설과 교의들에 대한 해석이 설교의 주를 이룬다. 나는 교회가 삶 보다 교리, 실천보다 말, 기독교적 영성과 윤리보다 교의학적 적용이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선교학자인 다렐 구더(Darrell Guder)는 이미(2000) 이러한 교회 내의 분위기를 경고하였다. 그는 교회의 불균형한 시각이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풍성함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여긴다. 나도 1992년 이미 이러한 문제를 지적했다. 나는 교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6가지 요소들 중 삶으로의 헌신”, “예전”, “예배”, “일상적인 섬김의 삶을 언급하였다. 이 중 특히 삶으로의 헌신은 이전까지 교회건설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흥미로운 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삼부작인 Pro Rege을 시작하면서 교회 내 삶과 교회 밖의 삶 사이의 구분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조직로써의 교회와 유기체로써의 교회를 구분하면서도 이 두 측면 모두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생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렇지 않을 때, “만인제사장직은 교회라는 옷을 잘 짜고 나서 버려진 헝겊 조각이 되고 만다 


다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생각해 보자. 교회에 대한 교의 헌장인 인류의 빛 (Lumen gentium)은 보편 사제직의 독특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상호관계를 중요하게 다룬다. 뿐만 아니라 보편 사제직의 독창성을 세속적인 삶 (het seculiere leven)”이라는 개념과 관련시키고 있다(LG 30-31): 평신도들은 세속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간다. 평신도들의 부르심은 이 세속안에 있다.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따라 세상의 일들을 보살펴야 한다. 평신도들은 세상을 조명하고 관리하면서 세상 안에서부터 세상의 구원을 위해 누룩과 같이 일한다.


여기에서 세상을 조명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땅의 것이요 인간적이며 피조된 것이지만, 동시에 세상 안에는 은혜의 빛이 스며들어 있고, 이 세상은 하나님께 참여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고 의미로 가득차 있으며 상호간의 신뢰가 존재하기에 우리의 삶이 결코 무의미 하지 않음을 알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관리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응당 있어야 할 관계 안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 말이다. 이러한 관계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파편적으로 만드는 힘들에 대항하면서 세속적인 삶을 하나님의 선하신 계명에 부합하도록 만든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덕목과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정돈한다. 영혼이 육체 안에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있어야 한다.


이로써 세속적인 삶 역시 하나님 외의 다른 권세에게 넘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하나님의 산 제물로 여기는 자들을 통해 세상도 삼위하나님을 봉사하게 된다. 이를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우리의 삶에 꽃을 심어 하나님을 향해 피워나게 하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향해 울리는 자명종 시계를 품고 살아야 한다.


인류의 빛은 평신도의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으로서의 봉사에 대해 언급한다. 선한 행위, 기도, 사도적 임무, 결혼과 가정 생활, 일상의 직업, 경제적,정치적, 사회적 문제, 몸과 마음의 쉼, 종교적 고난 등 삶 전반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평진도들은 이 모든 영역들을 성찬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적인 제사로 바친다. 이로써 세속화된 삶과 세상이 하나님께 받쳐진다. 세상의 성화(Consecratio mundi)” 이다.


이와 같은 헌장의 내용은 공로로써의 선행 개념과 맥이 닿아 있다.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도 보편 사제직세상의 성화를 교회 내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사제 중심적이고 성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헌장의 내용들은 개혁파 전통이 교회론을 재고하고 세속적인 삶을 교회론에 반영시키려 노력할 때 도움이 된다.


삶 전체를 그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받쳐드려야 한다. 하지만 이는 공로로써의 선행이 아니다. 모든 것은 원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나오며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근거한다.



4. 새로운 역동성



이제 이 강연의 제목인 새로운 역동성을 향한 도전를 이야기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역동성이라 하여 이전에 없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미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9장과 베드로전서 2장에서 알려 주신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익숙한 사고와 신학적 결점으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한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라는 출애굽기 19 6절 말씀은 오래전 기록된 말씀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약속이자 도전이다. 이 약속은 왕 같은 기백과 선지자적 정신을 지닌 제사장들로 구성된 새롭고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든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들은 머리와 마음, 그리고 손으로 실천하는 자들이다. 이 약속은 그들의 삶이며 그들의 정체성이다.



이 새로운 역동성을 위해 6가지의 요소들이 필요하다.


  1.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직분”, “조직”, 그리고 예배라는 요소들을 기준으로 교회를 단편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교회 안에서의 삶, 개인적인 삶, 그리고 세상 밖에서의 삶이라는 세 가지 측면과 관련하여 교회됨을 생각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권세 아래에 있는 고유한 영역임을 유념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세 가지 측면이 상호 깊은 관련이 있음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이로써 젊은 세대에게도 적실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구성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제사장직에 참여하도록 돕는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2.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인식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일상의 삶을 등한히 하고 교리에만 집중하고 하나님과의 화해와 하나님의 섭리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부지중 (땅의 육신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는) 가현설이나 (비의적인 가르침에 대한 영적인 지식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가 되고 만다. 세속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없는 복음은 기독교의 강력한 적인 이원론과 다를 바가 없다.

  3. 교회의 직분과 만인제사장직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칭의와 성화, 무리와 개인, 현재의 공동체 문화와 지소적인 혁신 사이의 딜레마와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협력은 마치 이행정 엔진과 같은 것이다. 성도들은 교회의 직분자들로 하여금 설교와 교육과 목회에 최선을 다하도록 돕는다. 또한 직분자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덕스러운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직분자들은 모든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임무, 곧 만인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자극하고 양육한다. 이는 캄펜신학교의 신학교육의 방향이기도 하다. 교회를 가르칠 좋은 목사를 양성함과 동시에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신학적으로 돕는 것이다.

  4. 디아스포라와 교회: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이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그 부르심에 자진하는 순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으로써의 헌신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덤으로 붙는 첨가물이 아니다. 집이나 일터, 혹은 학교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개인적이고 임의적인 문제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인 다운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이며, 사적인 삶이 아니라 교회적인 삶이다. 교회의 예배가 심장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그 심장을 품은 몸이다. 심장이 몸을 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기에 교회는 함께 모이는 일과 파송, 교회에서 디아스포라로 그리고 다시 그 역방향으로의 역동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흩어짐의 구조와 함께 모임의 구조. 교회를 더욱 깊이 고민할수록 세상으로 더 나아가게 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일 뿐 아니라 왕국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두보로써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요 미리 맛 볼 수 있는 곳이며 약속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소금, 누룩, 그리고 빛으로 비유하는 것에서 배울 바가 많다. 이것들은 요란스럽거나 시끄럽지 않다.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며 삶 자체가 중요하다.

  5. 구체적인 구조화: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추상적인 이유는 이 개념이 자체적으로 특정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고할 수 있는 단체와 활동들이 여럿 있다. 마치 수도회와 같이 조직화된 지역 교회에 밖에서 뜻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단체들이 일정한 규율과 고유한 목적을 따라 실천하고 있다. 이들은 지교회들이 해야할 바를 보완하며 직분을 중심으로 이해되는 교회를 자극한다.

  6. 유용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고별강연의 주제에 대한 말과 글들은 넘쳐난다. 이제는 일상의 적용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적절한 지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식사 기도를 위한 지침, 부부 사이의 진실된 대화를 위한 지침,  자녀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가르치기 위한 지침, 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고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에서도 하나님을 뜻을 찾는 방법, 기독교의 지혜를 이웃과의 일상에서 나눌 수 있는 방법 등. 등한히 하기 쉬운 일상의 소상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지침을 만들고 배우고 부지런히 실천하는 시험무대이다.



결론적으로, 전통적인 형태와 새로운 자극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주어진다. 우리는 이 양자를 통해 우리의 삶을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다. “예물을 손에 들고 나옵니다, 주여, 주님의 종이 성전으로 나오는 것을 보소서” (시편 찬송 66 5).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를 지고서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쳐 드리는 세상의 성화(Consecratio mundi)”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끌어모아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그분을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복을 내리시도록 하나님께 간청해야 한다. 말씀의 봉사 후에는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성례가 이어 온다. 시편 40 7-8“ (보소서), 내가 왔나이다하나님이여 주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오니”.


이렇게 될 때 교회의 중심은 성찬상이 된다. 성찬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싸 안고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자신을 구원하신 주께 제물로 올려 드리는 장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희생제사에 화답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다. 모든 것은 모퉁이돌 위에 세워진다. 결코 마르지 않는 샘으로부터 길러내어 진다. 모퉁이돌이시며 마르지 않는 샘이신 그리스도를 늘 의지할 뿐이다.


주께서 다스리신다. 교회는 그분의 것이다. 그분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1] 이 연구소는 네덜란드 네이메이헌 (Nijmegen)에 소재한 Radhoud Universiteit 소속이다. 종교현상과 사회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2] 역자는  “het algemeen pristerschaap (보편적 제사장직)”만인제사장직보편 사제직으로 번역하였다. 첫번째 번역은 개혁교회를 포함한 개신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두번째 번역은 로마 카톨릭의 교회에 대한 교의 헌장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비록 이 단어를 보편적 제사장직으로 직역하여도 무방하나, 통상적으로 역자가 선택한 번역어들이 사용되고 있기에, 편의를 위해 이렇게 번역하였다. 비록 역자가 두 가지 번역어를 사용하였으나, Te Velde 교수가 이 신학용어를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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