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환영합니다.
최종편집
조회 수 1604 추천 수 0 댓글 0




종교의 위험: 예레미야의 경고 (7:1-15)[1]

 


IMG_3940-Promo_Headshot_-Michael-Barrett.jpg

저자: 마이클 바렛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학장 및 구약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종교는 가장 기만적일 수 있다. 거짓됨을 드러내는 것은 예레미야의 설교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였다. 그는 무가치하고 깨어진 물통들인 거짓 신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렘 2:13). 그는 하나님의 권위없이 평화가 없는 평화를 설교했던 거짓 선지자들과 끊임없이 충돌했다(렘 8:9-11). 그는 또한 그의 시대를 특징 지웠던 거짓 안전을 비난했다. 역설적이게도, 국가적 재앙을 눈 앞에 둔 바로 그 세대는 아무 걱정 없이 종교가 그들을 심판에서 면제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종교는 안정감을 배양한다. 필자는 예레미야의 탁월한 설교들 중 한 설교에서 이 종교적 위선에 대한 주제를 숙고하려고 한다. 예레미야 7장에 나오고 종종 성전 설교라고 일컬어지는 이 메시지는 매우 위험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발하기에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른다.

 


           위선의 존재


           아마 이 성전 설교에서 가장 현저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가르침들 중 하나는 위선이 가장 좋은 곳들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주의 전의 입구에 서 있으라고 지시하셨다 (2). 여기서 요점은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예루살렘 뒷골목의 폭도들이나 심지어 배교자들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에서 겉으로 가장 종교적인 이들을 향했다. 만약 필자가 다음과 같은 용어들로 그것을 표현해도 괜찮다면, 그것은 도시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교회의 구성원들이었던 존경할 만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향했다. 이 사람들은 바른 장소에 갔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기 위한바른 이유로 그곳에 갔다 (2). 그들은 주님 앞에 절을 하는 허식으로 성전 문에 들어왔고 하나님을 정당하게 대우했다. 겉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보였다. 그들은 옳은 것들을 행하면서 옳은 곳에 있었다. 예레미야가 이러한 예배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는 사실(3)은 그러한 예배 의식이 그 예배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계적인 예배는 그저 위선자를 위한 빈약한 위장일 뿐이고 어떠한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으며 그 예배의식들이 아무리 옳을 지라도 예외일 수 없다.

 


           위선의 표시


           선지자적 정확성과 영감을 받은 통찰력으로 예레미야는 그가 사역하던 지역의 교인들 가운데 나타난 위선의 두 가지 표시들을 인식했다. 우선, 위선적 예배자들은 거짓 교의(敎義)를 지지했다.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문구는 외양적으로는 정통적인 예배자들의 비정통적인 신앙고백을 나타낸다(4). 여호와의 성전이란 문구의 반복은 마치 그들이 그것을 반복해서 말함으로 그것이 실현되고 위험을 막아주는 것과 같은, 혹은 단순히 그들이 그 교의를 지지함으로 자신들의 열의와 열정을 표하는 것과 같은 어떤 미신적인 중요성을 함의 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그것은 성전의 영적인 본질보다는 구조물에 대한 잘못된 신뢰를 보여준다. 그 성전은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었고 그곳엔 하나님께서 모든 적들에 대항해 그분의 거처를 지키심에 대한 긴 역사적 유래가 있었다. 성전 신학은 여호와께서 거하시기 위해 선택하셨던 그 장소에 어떤 마법적인 요소를 부여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전의식에서 원하셨다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을 그분께 드림으로 자신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행복하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나님은 그곳에 머무시고 모든 일들은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전통과 지역적 위치와 의식에 대해 신뢰했다.

           둘째, 거짓 교의는 거짓 믿음으로 표현되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무익한 거짓말을 신뢰했다고 선언했다 (8; 4절도 참조하라). 여기서 신뢰(trust)”라는 단어는 그 대상 속에서의 강한 자신감과 안정감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안정감을 느꼈는 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문자적으로 거짓말”(4, 8)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공허하고 무가치하며 결과적으로 취약한 어떤 것을 나타내는거짓이라는 단어는 믿음과 신뢰에 관한 생생한 교훈, 즉 믿음의 대상은 믿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선언은 구원하는 믿음에 관계되지 않고 구원하는 (믿음의) 대상과 관계된다. 무익한 거짓말을 신뢰했던 이들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이 의식들과 관련해서 의도하신 메시지를 내면화 하는 것 없이, 그 외적 의식들 자체로써 성전을 신뢰했다. 종교는 위험스럽게 기만적일 수 있다.


 

           위선이 드러남


           종교적 삶실제적 삶사이의 분리는 위선의 공통적 특징이다. 위선자들은 종교적 활동이 벌 받지 않고 제약없이 살 수 있는 자유를 자신들에게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레미야의 성전 회중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런 생각을 나타냈다: “우리가 구원받았기에 이런 모든 가증한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10). 성전에서의 지속적인 예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 방식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무시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시를 드러냈다. 그들이 범했던 죄들의 목록은 십계명의 양쪽 부분을 모두 어겼다 (9: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우상숭배, 그리고 다신교). 참된 종교는 마음 속에 거룩하게 살아 가고자 하는 열망을 생기게 한다. 삶은 반드시 고백과 일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항상 그의 종교의 참됨에 대한 지표이다. 순종은 결코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항상 참된 신뢰의 자연적인 산물이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지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존중하는지를 반영한다. 하나님 앞에 서기위해 그분의 성전에 나아오면서 죄를 짓기 위한 구원과 허가를 주장하는 것은 (10) 영적인 무감각과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둔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들이 예배의 행위들을 계속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노골적으로 어긴 바로 그 사실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어떤 분인지에 대한 그들의 과소평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매일을 살아가도록 촉진한다. 참된 예배는 항상 삶과 직결된다.


 

           위선을 폭로함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 11:4).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외적인, 그리고 위선적인 예배는 예배자를 만족시킬 수 있고 보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예배의 실체를 꽤 뚫어 보시고 한치도 틀림이 없는 지식과 불변하는 판단에 따라 그것을 다루실 것이다.

           예레미야 711절은 본문에서 가장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비록 성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기에 그곳은 가장 거룩한 장소여야 했지만, 그곳은 도둑의 소굴, 악한 자들의 은신처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그 본문의 유비(analogy)이다. 이스라엘은 모든 상상 가능한 범죄들을 성전밖에서 저지르고 난 뒤 (9) 성전에 들어와서는 자신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공언했다 (10). 성전은 그들의 은신처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율법의 요구와 처벌로부터 면제받고자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고 선언하셨다 (11). 하나님은 정확히 그들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아셨고, 성전은 그들에게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슬프게도, 이스라엘의 미련한 생각은 시대를 거쳐 지속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은신처로 만들어 왔고 만약 그들이 교회에 다니거나 잠들기 전 기도에서 죄송하다고 말 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이 어떤 일을 행하든지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롱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고 계신다. 종교는 위선자들에게 어떠한 피난처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위선적인 예배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경고하셨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심판하셨다. 여호와는 그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일찍 일어서셔서 말씀해오셨음과 그들이 듣지 않고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그들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다 (13). “일찍 일어서셔서(rising up early)”는 행동하는 시간을 일컫기보다는 행동이 발생하도록 하는 열의와 열정을 일컫는 히브리어 관용구이다. 생명력 없는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모세의 시대로부터 예레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영감 있는 설교의 최우선 순위이자 공통 요소였다.

           위선을 심판하심에 있어 자신의 일관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역사적 가르침을 주셨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예배자들이 실로에 있던 성막 예배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12, 14). 성전과 같이 성막도 예배와 희생제물과 계시의 장소였다. 하지만 이전 세대가 성막을 자신들의 모든 악함에 대한 은신처로 변질시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돌보지 않으셨다. 실로는 단지 성막이 거기에 있었다는 이유로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삼상 4). 실로의 종말은 마법적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불관용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성전 위선자들에게 “(실로에 있던) 그 성막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교회 위선자들에게 그 성막이 어디 있느냐?” “그 성전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종교에 만족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위선을 제거함


        위선자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위선을 그만두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의 서론은 회개를 촉구한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3). 길을 바르게 하라는 말씀은 삶의 습관 뿐 아니라 경향성과 마음의 갈망을 포함하는 삶의 모든 과정을 선하게 만들 것에 대한 요구였다.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말씀은 내적 성향에 의해 양산된 특별한 행위들을 고치라는 요구였다. 이것은 개혁이나 보다 좋게 행동하려는 결심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에 대한 요구였다. 예레미야는 5절과 6절 말씀에서 회개를 삶에 적용하기 위한 특별한 지침들을 내려 주었다. 흥미롭게도, 그 특별한 지침들(고아와 과부에 대한 친절함, 생명을 보호함, 그리고 윤리적 유일신론)은 율법의 양쪽 부분을 포괄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시했다. 사람들을 향한 행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정도의 지표라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성전 예배자들에게 예레미야가 행했던 특별한 적용들에 관계없이, 다음과 같은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요점은 시대를 초월해서 정곡을 찌른다: 참된 종교는 항상 행실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참된 회개를 받으신다는 것 또한 변함없는 진실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만약 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지켜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3, 7). 거기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비록 종교에는 고유한 위험들이 있지만, 마음에 있는 참된 종교는 죄인의 유일한 희망이다. 마음은 항상 해결의 열쇠이다.


  



[1] 헤리티지 개혁교단 (Heritage Reformed Congregations)에서 발행하는 공식 교단 매거진 The Banner of Sovereign Grace Truth 2016 1-2월 호에 The Danger of Religion: A Warning from Jeremiah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 허락을 받고 게시합니다. 저작권은 The Banner of Sovereign Grace Truth와 저자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 [해외칼럼] 집사직에 관한 브라켈의 조언 (2부)

    집사직에 관한 브라켈의 조언 (2부)[1] 저자: 빌헬무스 브라켈 (Wilhelmus Brakel, 1635-1711)[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집사의 자격 사도는 집사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기술한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
    Date2017.05.25 By개혁정론 Views877
    Read More
  2. [해외칼럼] 집사직에 관한 브라켈의 조언 (1부)

    집사직에 관한 브라켈의 조언 (1부)[1] (이 칼럼은 2회에 걸쳐 게재될 예정입니다.) 저자: 빌헬무스 브라켈 (Wilhelmus Brakel, 1635-1711)[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제정하신 세번 째 직분은 집사...
    Date2017.05.18 By개혁정론 Views166857
    Read More
  3. No Image

    [해외칼럼] 장로 심방에 관한 데이빗 딕슨 장로의 조언

    [해외칼럼] 장로 심방에 관한 데이빗 딕슨 장로의 조언[1] 저자: 데이빗 딕슨 (David Dickson, 1821-1885;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 장로)[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장로의 통상적 심방 빈도는 거리, 그의 재량에 맡겨진 시간, ...
    Date2017.03.20 By개혁정론 Views794
    Read More
  4. 칼빈의 일반은총론이 갖는 함의

    칼빈의 일반은총론이 갖는 함의 (“칼빈과 일반은총” 에서 발췌 (4)) 저자: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 영문번역: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미국 구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한글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
    Date2017.03.06 By개혁정론 Views2066
    Read More
  5. [해외칼럼] 칼빈의 예정론과 그에 대한 오해와 실상

    칼빈의 예정론과 그에 대한 오해와 실상 (“칼빈과 일반은총” 에서 발췌 (3)) 저자: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 영문번역: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미국 구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한글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
    Date2017.02.06 By개혁정론 Views2426
    Read More
  6. [해외칼럼]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예정론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예정론 (“칼빈과 일반은총”1)에서 발췌 (2)) 저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영문번역: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미국 구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한글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
    Date2017.01.25 By개혁정론 Views2225
    Read More
  7. [해외칼럼] 칼빈과 일반은총 (발췌 (1))

    칼빈과 일반은총1) (발췌 (1))2) 저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영문번역: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미국 구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한글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는 다양하고, 심...
    Date2017.01.10 By개혁정론 Views1889
    Read More
  8. [해외칼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칼빈신학교 다섯 교수의 대담(2)

    성령의 사역 (2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위한 5인의 미국 칼빈 신학교 교수들(캘덜먼, 볼트, 쿠퍼, 훌스터, 스미스)의 대담[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캘덜먼: 좀더 세계적인 관점에서 성령의 권능에 대해 ...
    Date2016.12.26 By개혁정론 Views1038
    Read More
  9. [칼럼] 연약한 인간, 연약한 교회

    [칼럼] 연약한 인간, 연약한 교회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피조물이므로 창조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마지막 피조물이므로 이전의 피조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타락한 죄인이므로 죄 짓지 않고...
    Date2016.12.22 By개혁정론 Views1166
    Read More
  10. [해외칼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칼빈신학교 다섯 교수의 대담(1)

    성령의 사역[1] (1부) (이 칼럼은 2회에 걸쳐 게재될 예정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위한 5인의 미국 칼빈 신학교 교수들(캘덜먼, 볼트, 쿠퍼, 훌스터, 스미스)의 대담[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캘덜먼...
    Date2016.12.19 By개혁정론 Views1235
    Read More
  11. [해외칼럼] 당신이 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8가지

    당신이 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8가지[1] 저자: 데이빗 머레이 (Dr. David Murray)[2] 번역: 태동열[3] 천국은 지극히 천상적이어서 지상의 피조물들에겐 그곳이 참으로 어떠한 모습일 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은 성경이 왜 자주 천국을 ‘어떤 것들이...
    Date2016.11.18 By개혁정론 Views1277
    Read More
  12. [해외칼럼] 교의의 드라마: 십대 청소년들을 위한 교리문답 부활의 필요성

    교의의 드라마: 십대 청소년들을 위한 교리문답 부활의 필요성[1] 저자: 레오나르드 판데르 지 (Len Vander Zee)[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필자는 북미 기독개혁교단(Cristian Reformed Church)에 있는 목사들과 장로들로부...
    Date2016.11.14 By개혁정론 Views730
    Read More
  13. [해외칼럼] 내가 바르트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

    내가 바르트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 저자: 리차드 멀러 (Richard Muller, 전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지난 한 해 (1986년) 동안 칼 바르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20세기 신학에 기여한 그...
    Date2016.11.07 By개혁정론 Views5828
    Read More
  14. [해외칼럼] 오~ 당신의 율법을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오~ 당신의 율법을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요![1] 저자: 싱클레어 퍼거슨 (Dr. Sinclair B. Ferguson)[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2015년 10월에 있었던 프로 골퍼 협의회 (PGA) 투어 토너먼트 경기에서, 벤 크레인 (Ben Crane...
    Date2016.11.04 By개혁정론 Views687
    Read More
  15. [해외칼럼] 개혁주의 신앙고백들 속의 유아세례

    개혁주의 신앙고백들 속의 유아세례[1] 저자: 라일 비에르마 (Lyle Bierma,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및 박사과정 학장)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침례교 그리스도인들과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동일한 교리들을 ...
    Date2016.10.28 By개혁정론 Views2043
    Read More
  16. [해외칼럼] My Top Ten 청교도 저자들 (2부)

    My Top Ten 청교도 저자들 (2부) 저자: 조엘 비키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총장 및 조직신학 & 설교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4.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 1983년 웨스트민...
    Date2016.09.26 By개혁정론 Views1067
    Read More
  17. [해외칼럼] 유아세례: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

    유아세례: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 저자: 윌버트 판 다이크 (Wilbert M. van Dyk, 전 미국 칼빈 신학교 학장 및 설교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교회에서 드려지는 주일예배의 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세례반(盤)이...
    Date2016.09.19 By개혁정론 Views3635
    Read More
  18. [해외칼럼] My Top Ten 청교도 저자들 1부 (조엘비키)

    My Top Ten 청교도 저자들 (1부) (이 칼럼은 2회에 걸쳐 게재될 예정입니다.) 저자: 조엘 비키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총장 및 조직신학 & 설교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지난 40여년간 필자가 청...
    Date2016.09.12 By개혁정론 Views2033
    Read More
  19. [해외칼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1]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7) 저자: 데이빗 머레이 (Dr. David Murray)[2] 역자: 태동열[3] 필자가 어느 해 여름 영국에 있었을 때, 천장...
    Date2016.08.11 By개혁정론 Views1925
    Read More
  20. [해외칼럼]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선교적’ 신학인가?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선교적’ 신학인가?[1] 저자: 존 볼트 (John Bolt,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오늘날 우리는 교회는 반드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정기적으로 듣는다. 이 주...
    Date2016.07.27 By개혁정론 Views445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
사설
[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