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우 목사
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제목:『칼빈주의, 가스베가스 공항을 가다』(Calvinism in the Las Vegas Airport)
저자: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 김동규 역
출판사: SFC출판부(2008년 역간)
저자는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교장이면서 기독교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휴턴 대학(Houghton College) 학부를 졸업한 후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을 전공하였고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칼빈 대학(Calvin College)에서 17년 동안 기독교 철학 담당 교수로 지냈고 1985년과 1993년에 각각 풀러 신학교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네덜란드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자랐으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미국의 칼빈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고백대로라면 그는 주로 그의 할머니에게 큰 신앙적 영향을 받았고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의 “선택”이라는 설교에 충격적인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백처럼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카이퍼주의자다.
저자는 이 책을 폴 슈뢰더(Paul Schrader)가 제작한 영화 <하드코어(Hardcore)>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슈뢰더가 칼빈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며 반항적인 재학시절을 보내었으나 영화작가요 감독으로 성공했으며 성공작 가운데 하나로 <택시 드라이버(Tax Driver)>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하드코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할 때 나오는 배경이 라스베가스 공항이다. 탑승 대기실에서 니키(Niki)라는 불신 여성과 경건한 칼빈주의 교회 장로인 제이크 판 도른(Jake Van Dorn)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어떤 종파의 교회를 다니냐는 니키의 질문에 제이크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라고 대답하면서 튤립(TULIP) 교리를 믿는 종파라고 설명한다. 튤립 교리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니키는 이렇게 반응한다. “음... 전부 결정되어버린 거네요.” 이런 반응에 대해 제이크가 그런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 교리를 외부에서 볼 것이 아니라 내부어서 보아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그 장면 소개는 끝난다.
이 장면에 비치는 제이크의 모습을 저자는 마치 신학적으로 무지하고 불경건한 한 소녀에게 17세기 장로교 교리를 엄숙하게 요약하고 전달하는 것과 같다고 평가한다. 한 마디로 시대착오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칼빈주의가 그와 같은 딱딱하고 냉정한 모습이라고 암시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21세기의 칼빈주의자가 되는 법이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에 집중하려고 한다”(23). 칼빈주의라는 호칭은 처음 사용한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이고 그의 시대에도 오늘날 미국처럼 칼빈주의라는 말은 환영받지 못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나는 나를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칼빈주의자’라는 말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24)라고 한 에드워즈의 말에 저자 역시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거칠고 신랄한 언어까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칼빈주의 5대 교리인 튤립 교리(1. 전적부패(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를 21세기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서 순전한 칼빈주의(Mere Calvinism)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먼저 전적 부패 교리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이것이 인간의 상태를 진단한 적절한 교리라고 본다. 즉 구원에 받는 일과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며 죄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적 타락이라는 말을 인간의 본성적 사고와 욕망과 행위 모두가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보는 “절대적(absolute)” 타락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경고한다(43).
두 번째로 저자는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단순한 지적 추상”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실제적 경험을 포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7). 동시에 저자는 이 선택 교리가 “칼빈주의가 스스로 자기의 상황에 만족해버리는 태도”를 갖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며 “책임”을 요구하는 교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49).
세 번째로 저자는 제한된 구원 교리를 “완성된 미션”으로 재해석하면서 이 교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우리의 초점을 고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네 번째로 저자는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를 “하나님을 추구함”이라고 정의하면서 전적 부패 교리와 마찬가지로 “삶 속에서 경험되는 교리”, 즉 “하나님에게 붙잡힌 바 되었다”고 느끼는 교리라고 해석한다.
다섯 번째로 저자는 성도들의 견인 교리를 “하나님의 신실함”이라고 해석하면서 “견인(perseverance. 인내)”이란 단어를 “보존(preservation)”이라는 단어로 바꾸자고 제안한 어떤 칼빈주의자들의 견해에 매력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유는 네 번째 교리까지는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셨는데 다섯 번째 교리에서 갑자기 행위의 주체가 인간으로 바뀌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능력 없이는 인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제공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튤립 교리를 하나씩 해설한 후에 칼빈주의 교리의 가장 큰 암초가 “제한된 구원”과 연관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 교리가 마치 그리스도의 위대한 속죄 사역을 “제한적인” 것처럼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며, 또한 복음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제공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는 “누구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을 주저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는가? 저자는 칼빈주의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로 대답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명쾌하게 모조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에는 탄원과 불평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죄와 죽음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저주를 당하도록 허락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신음하실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도 침묵하신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재난과 고통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근거이고 이유이다.
저자는 환락의 도시, 사악한 도시 라스베가스를 “‘새 예루살렘’의 모조품”이라 부른다. 밤이 없는 도시 “라스베가스는 지갑을 꺼내기만 하면 좋은 삶이 보장될 것이라는 거짓 약속으로 우리를 유혹하면서 인간의 성취에 대한 허구적인 비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2). 라스베가스는 외면적으로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도시이지만 내적으로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도시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환경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환경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두울수록, 이해 불가능할수록 더욱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희망의 전주곡이며 통로이다.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위로, 그리스도의 위로, 성령의 위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위로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교육서가 잘 가르쳐 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의 따르면 <하드코어>에 등장하는 인물 제이크는 바로 이점에서 번지수를 잘못 찾아갔는데, 이유는 그가 16세기 하이델베르크로 가지 않고 17세기 튤립 교리의 도시 도르트레흐트로 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되는 자들이므로 천상적인 선택의 문제는 곧 지상적인 책임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Coram Deo) 선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주권과 왕권의 지배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점에서 카이퍼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이것이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신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124).
하지만 저자는 전형적인 카이퍼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인의 세상 정복과 승리를 위한 구호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저자는 “이런 생각을 좋아하는 것조차도 건전치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나 모든 영역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들에 반응하면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충성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곧 하나님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사명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칼빈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불관용의 모습”이다. “튤립 교리로 요약되는 ‘순전한 칼빈주의’는, 이런 점에서 보다 넓은 신학적 지평을 아우르기에 적합하지 못하다.”(184) 즉 “‘순전한 칼빈주의’는 보다 풍성하질 필요가 있다.” 현대 칼빈주의자들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스펄전의 관대한 정신을 좋아한다. 나는 칼빈주의자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칼빈주의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경험과 관심을 가장 잘 포착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리차드 마우의 『칼빈주의, 라스베가스 공항을 가다』라는 책은 칼빈주의의 기본 정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상과 사고체계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다시 말하면 “순수한 칼빈주의”와 “폭 넓은 칼빈주의”가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책이다.
옹졸한 칼빈주의는 16세기 칼빈주의 정신이 아니라 17세기 칼빈주의 정신이다. 옹졸한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의 왜곡된, 일그러진 모습이다. 오늘날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한국교회들은 칼빈주의 정신이 가르치는 지양해야 할 것과 지향해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로 지나친 옹졸함과 지나친 관용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을 진리로 가르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랑으로 가르치고 진리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을 때는 진리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좋지만 나쁠 때는 사랑의 뿌리까지도 말려버릴 만큼 모든 것이 나쁘다. 사랑 안에서 일하는 진리, 진리 안에서 빛나는 사랑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우리의 칼빈주의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서슬 시퍼런 망나니의 칼이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흐물거리는 장난감 칼이 되고 있다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