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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본문: 욥 42:7-9

(이 설교는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 교회 강연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행한 설교입니다)

서론

지난 한두 주간 동안 문창국 국무총리 지명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도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이 대중 매체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면서 한국 사회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당사자인 일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발언은 매우 폭발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나 진의와는 상관없이 여러 논의들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이미 성도들도 자신들만이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마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셔도 틀렸다고 할 정도로 한국에서 정치는 거의 종교적인 차원으로 격상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일에 대해서 일일이 설교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그런 일에는 일체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특히 온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개혁교회가 무기력하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이와 관련된 설교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총리 지명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발언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오류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목사들이나 신학교수들조차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문후보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잖아?” “틀렸다고 해도 그렇게 문제가 있는 발언이야?” “교회 안에서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는 거잖아?” 라는 식의 발언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한국 개신교가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졌습니다. 일반인들이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바로 전하더라도 거부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오해를 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삶을 사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이 우매하게 말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크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변화된 환경

이번 사건은 우리 한국 기독교가 이제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명을 우리에게 주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잘 살펴야 합니다. 이전과 달리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독자적으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발언을 주시하고 있고 문제가 되면 거기에 대해서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현상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앞으로 보다 신중하게 세상과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았을 때 사도들이 죽은 직후인 속사도 교부시대와 그 이후 100년이 지난 제2세기 변증가 시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속사도 교부시대에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에 대해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교회 내적인 일에 대해서 도덕적 교훈을 주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여 비판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2세기가 되면 이런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교회가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비중 있는 큰 단체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 헬라 종교의 모순을 지적하였습니다. 헬라 철학가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입장에서 기독교 교리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교회가 예전처럼 그냥 열심히 복음 전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면 되지 굳이 그런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세기에 있었던 뛰어난 변증가들이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복음은 그처럼 왕성하게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헬라 사람들에게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하였고 그 설명들은 기독교에 대한 많은 오해들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반인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강연을 하는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제대로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강연을 한 사람이 국무총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여 그 강연이 동영상으로 녹화가 되어서 얼마든지 배포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전보다는 훨씬 더 주의 깊게 그리고 정확하게 우리의 생각을 발표해야 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예전처럼 우리끼리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따지느냐는 식으로 반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봅니다. 그리고 그 진노가 어떻게 풀어졌는지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욥의 친구들에게 노하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노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정확하게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두 번이나 동일한 말씀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시켰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주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아주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물론 옳은 말도 있습니다. 문창극 씨의 말도 전부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은 개인의 견해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인들의 인식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쉽게 혹은 무책임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너희의 우매한 대로 갚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욥의 친구들의 궁극적 잘못은 우매함에 있습니다. 무식은 죄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미련은 아주 큰 죄며 하나님의 큰 진노를 촉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얼마나 진노하셨는지는 그들에게 요구한 제물의 크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한 제물은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입니다. 레위기서를 참조해 보면 이 제물의 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우매하게 말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욥기를 읽어보면 욥의 친구들은 대단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욥기라고 하면 앞부분만 주로 생각하는데 실제로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서로 변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거의 대부분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 구절은 엘리바스가 한 말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22:2) 하나 더 볼까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2:21). 이 구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큰 잘못일까요? 

일본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도 유사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아멘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특별히 개혁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개념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신앙고백이 잘못 적용될 경우에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도 동시에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위험성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그리고 그 뜻의 실행에 대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성경의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친구들의 우매함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욥과 그의 친구들은 모두가 다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점에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욥은 더 나아가 그런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정말 대단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욥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욥의 고난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주셨다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고난을 주신다면 하나님의 신실함이 어떻게 증명될 수가 있겠습니까? 욥의 고난을 함께 슬퍼하고 나서 친구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 이유가 바로 욥이 뭔가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욥의 죄가 아니더라도 그의 자녀들이라도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욥은 강하게 자신을 변론하였습니다. 자기가 죄인은 분명하지만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에 왔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향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이것을 욥의 교만으로 이해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욥이 하나님을 아주 무책임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유가 없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욥도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에서는 친구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들과 반대로 욥은 그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알려 주시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알려 주시면 자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가 때문일까요?

욥과 친구들은 그 당시 최고의 지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논했습니다. 결국 그 논의는 해결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논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 사이에 판결을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다음에 하나님은 폭풍처럼 수많은 질문들을 쏟아 내었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하여 욥은 한 마디도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모든 질문을 듣고 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인수분해도 못하는 학생들이 미적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알려 주신다고 해도 무능력한 인간이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그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결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이 아니라 고난을 계속 주십니다. 그 이유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하나님을 계속 붙잡아야 할까요? 그것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 의로우시며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결론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르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도 잘못이 있었으니 자신의 능력을 너무 크게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설명하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는 즉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습니다.”(42; 6)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욥이 회개한 직후에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대해서는 질문도 없이 바로 자신의 진노를 쏟아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욥과 같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 나름대로 풀이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권선징악의 관점에서 풀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될 수가 없고 일반 이방신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문창극 씨와 그를 가르쳤던 목사들의 우매함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풀려고 하였습니다. “식민통치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게으름과 타성에 젖은 국민성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뜻은 함부로 단정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최종적이고 궁극적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욥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입을 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하나님의 명대로 제사를 드리고 욥은 자신에게 그토록 집요하게 말꼬투리를 잡았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친구들로부터 당했던 정신적 고통이 욥에게는 더 컸을 것입니다. 욥이 그들의 말로 인해 입었던 상처는 치유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욥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위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은 욥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욥이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욥의 의로움을 친구들에게 변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변증해 주셨기 때문에 욥은 더 이상 그들과 싸워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욥의 미약함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회개는 친구들에 대한 욥의 용서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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