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가인과 아벨 사건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이 일로 인해 가인은 분노하게 되고(5) 그 결과 자기의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된다(8).
질문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고,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가?”
이 주제에 대한 잘못된 견해
이 주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모두 잘못된 견해다.
첫째, 하나님이 양 치는 자를 더 좋아하셨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헤르만 궁켈(H. Gunkel)이라는 비평학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직업을 차별하신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은 제물로서 곡물보다는 짐승을 더 좋아하셨기 때문에 양을 드린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견해다(Skinner, Jacob). 첫 번째와 비슷한 것 같지만, 첫 번째는 사람의 직업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제물의 종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근거가 없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곡식보다는 짐승을 더 좋아하신다는 말씀이 없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다. 게다가 가인이 곡물로 제사를 지낸 것은 그의 직업이 농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아벨이 양을 드린 것 역시 그의 직업이 목자였기 때문이다.
셋째,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곡식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이 주장은 두 번째 견해와 비슷한데 어떻게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9:22에 보면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레위기 17:11에도 보면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잘못되었다. 잘못된 이유를 4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피흘림에 관한 규례는 가인과 아벨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뒤에 주어진 법이다. 나중에 정해진 법 때문에 가인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도덕법이라면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는 법은 가인보다 이후에 만들어졌지만, 가인은 그 법을 어겨서는 안 되었고, 그 법을 어긴 것이 죄다. 도덕법은 영원불변한 법으로서 그 이전에 이미 사람을 지으실 때 주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법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②레위기의 제사에 보면 피가 없이도 드리는 제사가 있다. ③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그냥 감사의 제사를 드렸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래서 ‘피’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④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본문에 보면 아벨의 제사가 피의 제사라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모두 다 잘못된 견해로서 얼핏 보면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른 견해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고,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가?”에 대해 성경 전체를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4가지 견해의 대부분은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일단 창세기 4장을 통해서 표면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차이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의 차이’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두 사람의 차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 말의 뜻은 “네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너와 너의 제물을 열납하고 결과적으로 얼굴을 들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제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요한일서 3:12의 말씀을 통해서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 말씀은 가인이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악함이 나중에 나오지만, 아우 아벨의 의로움은 아예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고 그가 아우를 죽인 이유를 가리켜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라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그가 아우를 죽인 이유는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제사에 담긴 행위가 각각 악과 의로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이다.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는 아벨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의 ‘제물의 종류’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어떠함’을 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제사 중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이유는 흔히 이야기되듯이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제물을 드린 두 사람의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4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과 가인의 차이는 그들의 제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과 삶’에 있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고, 그렇지 않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제사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 본문은 제사 제도가 성립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레위기 10:1-2에 보면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형식도 분명히 중요하다.
우리는 항상 성경 전체에 근거해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 내용과 형식 중 무엇이 중요하냐고 할 때, 둘다 중요하다. 그 가운데 굳이 말하면 내용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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