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관점으로 본 전체 성경

by 개혁정론 posted Nov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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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기독교세계관학교(교장 노천상 목사)가 발행하는 Knowing the Times 19호에 실린 글입니다. 영상은 글에 기초하여 설교한 내용입니다. - 편집자 주


 

 

 

 

 

땅의 관점으로 본 전체 성경

 

 

손재익 프로필4.PNG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서론

 

통일성 속 다양한 주제

   성경은 66권으로 된 한 권의 책이다. 수많은 저자가 기록했지만, 단 한 분 성령 하나님이 참 저자시다. 그렇기에 다양성 안에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이야기와 수많은 사건은 나름의 일관성을 따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성경은 방대하다. 그렇기에 성경이 다루는 주제를 하나로 말하기 어렵다.[1] 하나님 나라, 언약, 예수 그리스도 등 그 어떤 것도 구약 전체를 다 포괄할 수는 없다.[2] 

 

땅이라는 주제

   앞서 언급한 주제들은 그나마 많이 취급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주제가 있다. ‘땅’이다.[3] 

   성경에는 땅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성경은 땅 이야기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땅’이 나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즉, 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 2절도 ‘땅’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0절에도 ‘땅’(뭍)이 나온다.[4]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 땅에 관해 명령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구속사의 중심인물인 아브라함 이후로는 땅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후에는 누가 어떻게 언제 땅을 소유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시 37:11).[5]

   이렇게 성경에는 땅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들이 서로 아무런 상관 없이 마구 나열된 것은 결코 아니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는 점점 발전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간다.[6] 하나님께서 땅을 약속하시고, 백성이 땅을 차지하고, 땅을 빼앗기고, 다른 땅으로 옮겨가고, 원래의 땅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성경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성경에는 왜 땅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 성경에서 말하는 땅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본론

 

I. 창조부터 아브라함 이전까지

 

에덴의 동산과 땅에 대한 명령

   창세기는 땅 이야기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 1:1).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2:7). 이렇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땅에 두시는데(창 2:8), 그러면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고 명령하신다(창 1:28). 이것이 하나님께서 땅에 대해 첫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요 사명이다. 

   이 땅이 어디일까? 창세기 2:7에서 아담을 지으시고 2:8에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나서 사람을 거기에 두신다. 2:22에서 여자를 지으시고 나서 1:28에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니 1:28에서의 땅은 동산이다.[7]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장소이자 또한 동시에 사람이 거하는 장소인 동산이라는 땅에서 시작한다.[8]  

   창세기 1~2장에서 ‘땅’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대상이요 장소였다. 사람은 땅을 잘 가꾸고 지키고 충만하고 정복해야 했다. 동산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교제하는 장소다. 그래서 에스겔은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고 표현한다(겔 28:13; 참조. 사 51:3).[9]

 

타락

   사람은 땅을 잘 가꾸고 지키고 충만하고 정복해야 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히 맛보면서, 그 임재를 누려야 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그 일에 실패한다. 땅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아담은 땅에 죄가 들어오게 만든다. 

 

땅이 저주를 받음

   이로 인해 하나님은 아담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그 벌의 내용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것이었다(창 3:17-18). 땅, 즉 동산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아담의 실패로 인해 동산이 더럽혀졌다. 땅은 이제 더 이상 복의 통로나 도구가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땅은 이제 복이 아니라 고통을 낳는 묘지가 되었다. 사람이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사람을 정복하게 되었다(창 3:17-19; 롬 8:18-25).[10] 

 

땅에서 쫓겨남

   하나님은 사람을 땅(동산)에서 쫓아내신다(창 3:23-24).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물인 땅에서조차 죄로 인하여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신다.

   아담이 쫓겨난(창 3:24)[11] 이후,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이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는다(창 4:10-12). 가인은 땅과 관련하여 벌을 받는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流離)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이와 유사한 일은 창세기 11장의 바벨 사건에서도 반복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땅)에서 흩으시는 것으로 마무리하신다(창 11:8-9).

 

땅을 회복하는 것, 구원

   아담은 동산에서 쫓겨났다(창 3:24). 실낙원(失樂園/Paradise Lost)이다. 실낙원은 복락원(復樂園/Paradise Regained)으로 향해야 한다. 창세기는 동산에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에서 마친다. 성경은 동산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사이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구약교회의 역사를 담고 있다.

   동산에서 추방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간다. 약속의 땅은 태초와 종말을 연결한다.[12] 동산과 새 예루살렘이라는 역사의 시작과 끝 사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사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신다.[13] 성경에서 땅을 회복하는 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낸다.

 

 

II. 아브라함부터 솔로몬 시대까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 후 땅을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람은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다(창 15:7). 이제 창세기 12장 이후의 이야기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야기다. 

   첫 사람 아담이 땅을 받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땅에서 쫓아내셨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신다.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이 땅에서 추방되었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면서 땅을 약속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간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14]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은 땅 위에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성취다.[15] 아브라함은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땅의 상실이라는 아담의 타락 이후 계속된 저주를 되돌리고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다.[16]

 

아브라함에게 계속되는 약속

   아브람이 이집트를 지나서(창 12:10-20), 요단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때 조카 롯이 함께 했다. 두 무리가 땅을 선택하게 된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으로 간다(창 13:10).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13:14-15). 이에 따라 아브람은 헤브론으로 간다(창 13:14-18). 헤브론은 가나안 땅 마므레 곧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다(창 23:2, 19). 

   하나님은 창세기 12:1-2에서 주셨던 약속을 계속해서 반복하신다. 15장에서 횃불 언약을 맺으실 때도 주신다. “내가 이 땅을 ...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17장에서 할례 언약을 맺으실 때도 주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어지는 약속

   이 약속은 아브라함 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아들과 자손, 즉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어진다.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이 살 동안에 흉년이 들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창 26:2)라고 하신다. 

   야곱에게도 약속하신다. 창세기 28:4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시고, 창세기 28:13-15; 35:12에서도 같은 약속을 반복하신다.

 

막벨라 굴을 구입하여 매장함

   약속의 땅에 대한 족장들의 소망은 무덤을 통해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자기의 시체를 매장할 장지(葬地)를 구입한다.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다(창 23; 25:9-10).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다(창 23:19). 그게 아브라함이 얻은 가나안 땅의 전부다. 이는 약속의 땅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낸다. 

   그곳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 되었고(창 23:19), 아브라함을 장사 지낸 곳이 되었으며(창 25:7-10), 이삭(창 35:27-29)과 야곱을 장사 지낸 곳이 되었다(창 50:12-13).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요셉을 비롯해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다(창 47:27). 그 땅은 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땅이다(창 47:6, 11). 나일강의 풍요로움이 있는 땅이다. 그러나 그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다. 그곳은 그들이 거주(居住)할 곳이 아니라 우거(寓居)할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출 1:7). 한편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성취되었다(참조. 창 1:28). 그런데 그곳은 진정으로 충만할 장소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번성하여 가득 해야 할 땅은 이집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충만해야 할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요셉의 유언

   요셉은 이집트에 살다가 죽을 때 유언을 남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자신의 해골을 매고 올라가라는 것이었다(창 50:25).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창 50:24). 그 이유는 이집트는 약속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 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약속의 땅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출애굽

   그들은 출애굽을 해야만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출 3:8, 17;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14; 신 6:3; 11:9; 26:9; 렘 11:5; 32:22; 겔 20:6, 15 등등)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을 인도하실 것을 알리신다(출 3:7-8, 17; 6:2-8).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줄기로 맹세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으로 데려가려 하노라”(출 3:17; 6:8).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그 땅이 풍요롭다는 말이다. 실제 열두 정탐꾼이 에스골 골짜기에서 갖고 온 포도송이는 장정 둘이 채를 꿰어 메어야 할 정도로 거대했다. 석류와 무화과도 그 땅이 정말로 비옥하고 좋은 땅임을 입증했다(민 13:23-27; 신 1:25). 모세도 그 땅에서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등이 날 뿐 아니라 철과 동 등 지하자원도 많아 모자람이 없는 땅이라고 소개한다(신 8:7-10). 

   그런데 가나안의 풍요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풍요와 달랐다. 성경은 과일이나 곡식이 어디서 나는지, 지하자원은 어디에 있는지, 젖과 꿀은 또 어디서 어떻게 흘렀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 땅이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관심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나안을 풍요의 땅이라 부를 때는 유독 한 가지를 강조한다. 그 땅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기후에 달려 있다. 그 땅에서 누리는 풍요의 가능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었다(레 26:4-12; 신 11:11-17). 그들이 떠나온 이집트에는 ‘나일’이라는 거대한 강이 있어서 그 옛날에도 언제든지 물을 공급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나안은 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호 6:3; 욜 2:23).[17] 그리고 엄밀히 말해, 가나안 외에도 전세계에는 훨씬 좋은 땅이 많다. 그럼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해 이동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신명기에는 여호와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정복할 것에 대한 명령으로 가득하다(신 9:5; 11:8-12).[18]

   반면, 약속의 땅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하다(출 16:8; 민 14:1-3). 그들은 땅에 대한 약속이 주는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한다. 이때 첫 관문은 여리고 성이다. 여리고 성은 전쟁으로 쟁취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얻는다. 힘이나 책략으로 땅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선물로 땅을 받는다.[19] 땅이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며, 구속사의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가나안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수 11:23). 여호수아서는 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수 21:45). 여호수아서는 땅의 약속을 현저히 진전시키며, 땅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보여준다.[20]

 

요셉의 유언 성취

   앞서 요셉의 유언에 대해 언급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자신의 해골을 매고 올라가라고 했다(창 50:25). 그 예언에 따라 모세가 출애굽 할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간다(출 13:19). 마침내 이집트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가나안 땅 세겜에 장사지낸다(수 24:32). 요셉은 죽어서 해골이 되어 비로소 가나안 땅을 얻게 되었다.

 

사사 시대

   여호수아 때에 가나안 땅을 정복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이들을 몰아내고 완전히 정착하는 사명이 이스라엘에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땅을 선물로 받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다. 사사기는 바로 그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사사 시대를 살던 한 집안의 일이 룻기에 나온다. 엘리멜렉 가정이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버린다(룻 1:1). 결국 이 엘리멜렉 가정은 아버지도 죽고 아들도 죽고, 나오미의 말대로 비참한 형편에 처한다(룻 1:3, 5). 하지만 다시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비참함이 풍요로움으로 바뀐다(룻 1:19; 4:11).

 

왕국 시대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국 시대가 임한다. 사무엘이라는 마지막 사사를 끝으로 사울-다윗-솔로몬이라는 왕의 시대가 열린다. 다윗의 때에 어느 정도 평안이 임하고, 궁극적으로는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다. 

   솔로몬 시대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땅을 차지한다(왕상 4:2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다(왕상 8:56).

 

 

III. 바벨론 포로 시대

 

땅을 빼앗기다

   땅을 선물 받았다면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 거저 받은 땅이라도 잘 돌봐야 한다. 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참조. 창 2:15).[21] 이를 위해 순종이 요구된다(사 1:19-20). 그렇지 못할 때 땅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아담을 통해서 이미 보았다(창 3:24).

   레위기 18:24-30과 20:22-24에서도 이미 경고하셨다(참조. 신 28:58-66; 왕상 9:4-7). “너희가 범죄하면 약속의 땅도 너희를 토해 내리라”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레 20:24). 약속의 땅은 언약의 복이 임하는 장소다. 그러나 저주가 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미 암시되었다. 거룩한 땅은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다. 땅이 그들을 토해 버릴 것이다(레 18:24-30; 20:22-24; 신 28:58-66).[22]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에 겨우 도착하여 정착하려 한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 땅의 토해냄으로 인하여 땅을 빼앗긴다. 이스라엘은 아주 잠시 땅을 얻었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은 땅을 선물 받았음에도 땅을 더럽혔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겔 7:2; 33:28).[23]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하고, 남쪽 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 당하여 포로로 끌려간다.[24]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을 토해 버린다.[25]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건은 단순히 땅을 잃어버리게 된 위기가 아니다. 죄로 인해 더 이상 약속의 땅에 살 수 없게 된 것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26]

 

땅을 빼앗긴 것의 의미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단순한 거주지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와 언약의 복이 임하는 장소다. 그렇기에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냥 단순한 땅의 상실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을 잃게 되는, 심지어 땅에 대한 소망을 잃게 되는 포로 됨이란 모든 언약이 공허한 것으로 되는 영점(null point)이었다.[27] 시편 137편은 땅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마음을 잘 드러낸다.

 

상실 가운데도 희망이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가운데도 희망의 여명은 그들을 비추었다.[28]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기도 하셨지만, 또한 동시에 약속의 땅을 회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셨다(사 65:17; 사 66:22; 렘 16:15; 29:14).

   그러는 중에 아주 특이한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라고 하신다(렘 32:7).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터인데, 이 땅은 사서 무엇할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렘 32:15) 바빌론 포로 생활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언하신다. 포로 시대에 에스겔을 통해서도 땅의 회복을 예언하신다(겔 36:33-36; 37:24-28). 

 

약속대로 회복되는 땅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신 대로(렘 25:12-13; 29:10-11), 포로 생활 70년을 마치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대하 36:21-22; 스 1: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다시 얻게 된다. 그러나 포로 귀환 이후 차지한 땅은 선지자들의 약속에 못 미쳤다.[29] 이 부분은 신약을 통해 해결된다.

 

믿음과 순종으로 얻는 땅

   구약에서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땅을 얻는 방식은 믿음과 순종이다.[30]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그들의 믿음과 삶의 중심에 있었다.[31]

   구약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약속-소유-상실-회복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언제나 땅의 소유에서 상실, 상실에서 소유, 삶에서 죽음,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화 도상에 있었다.[32]

 

 

IV. 신약과 땅

 

사라진 땅 이야기

   신약으로 와서 땅 이야기가 현저히 적어진다.[33] 구약에는 ‘땅’을 가리키는 단어나 단어들이 1,600회 이상 나오지만, 신약에는 50회 미만이다.[34] 심지어 ‘가나안 땅’이라는 말도 신약성경에는 딱 2번 나오는데(행 7:11; 13:19), 그것들 모두 다 구약의 이야기를 설명할 때 사용된 말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곳저곳 이동하시지만, 그 장소에 대해 중요한 의미 부여를 많이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땅에 대한 열망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침묵하신다.[35]

   신약의 대부분을 기록한 바울 역시 로마제국 전역을 누비지만, 지리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지역을 언급하지 않고, 중요한 복음 사건을 말할 때도 지역을 드러내지 않는다(참조. 고전 15:3-8).[36]

   바울 다음으로 신약의 중요한 인물인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흩어진 나그네로 묘사한다(벧전 1:1; 2:11). 어느 한 지역을 중요하게 여긴 구약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땅의 약속

   왜 그럴까? 구약의 땅은 사실상 예표요, 그림자였다. 구약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약속의 땅은 구약의 다른 주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연결된다. 약속의 땅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결과로 성취될 것이다. 땅과 그로 말미암는 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취될 것이다(사 65:17; 66:22; 벧후 3:13; 계 21:1).[37]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바라본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새 땅, 새 예루살렘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을 주시는 분이다. 

  

히브리서, 땅, 안식

   이 사실을 히브리서가 설명한다. 히브리서 4:8을 보면 헬라어로 예수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과 연결시켜서 말한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히브리서 4:8-9

8 만일 1)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 헬. 예수

 

   여호수아 21:43-45에 보면 분명히 여호수아가 안식을 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나안 땅은 아직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모형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훨씬 위대한 것을 가리킨 것임을 말하고 있다.[38] 그 모형의 본체는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의 복을 누리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을 누린다.

 

스데반의 증언

   이 사실을 스데반도 증언한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증언은 아브라함과 땅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7:5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은 땅을 받지 못했다. 약속만 받았을 뿐이다.[39] 

   아브라함이 받은 땅은 고작 그가 매장된 막벨라 굴이었다(창 25:9-10). 히브리서 11:13이 말하는 대로 약속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요한복음 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땅을 못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땅을 받았으니,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롬 4:3; 갈 3:8-9, 14). 영원한 하나님 나라다(히 11:10). 

 

그리스도; 약속의 실체

   이처럼, 구약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약속의 땅은 예표였고,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장차 가져다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사 65:17; 66:22; 벧후 3:13; 계 21:1). 구약교회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고 소유했던 땅은 장차 모든 시대의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관련해 새 창조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더 위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40]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흩어진 나그네(벧전 1:1; 2:11)라고 표현하는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13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히브리서 11:8-10에서도 약속의 땅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한다.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창 12:1)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히 11:8). 그런데도 그가 간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간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는 법을 배웠다(히 11:10).[41]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나안 땅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상징하는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도성(히 12:22), 흔들리지 않는 나라(히 12:28),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도성, City of God, 하나님 나라(de Civitate dei)를 꿈꿨다.

 

가나안을 넘어 온 세계로

   신약에 와서 땅 이야기가 사라진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런데 땅의 개념이 조금 다르게 나타나는 곳을 볼 수 있다.

 

로마서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구절은 분명 구약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분명 아브라함에게 땅의 상속자라고 했지, 세상의 상속자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의 상속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없다.[42] 그런데 바울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이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바울은 구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고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은 표면상 가나안 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통해 성취될 온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 구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 전체에 근거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언약을 바르게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이라고 표현한다. 구약에는 분명 ‘가나안 땅’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세상’이라고 바꿈으로써 구약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의미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받은 약속은 장차 그의 후손인 교회를 통해 성취하게 될 세상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단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 곧 온 우주를 상속받는 것이다.[43] 하나님은 옛날 아브람을 부르심으로 그를 통해 아담의 저주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복이 온 세상에 미치게 하셨다.[44] 

 

   예수님의 부활 이후 신자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 개념은 가나안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나안 땅이 ‘세상’으로 바뀌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하신 대로, 땅 개념은 이제 땅끝까지 확대된다.[45]

   이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때 유대인들이 각국에서 몰려온 것을 볼 수 있다(행 2:8-12).[46] 

   그리고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1:8은 나중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졌다(행 8:1, 5, 25; 9:31; 11:19-22; 롬 15:28). 그리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됨으로써 가나안 땅의 언약적 의미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렇게 되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한 땅의 약속은 가나안 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롬 4:13).[47]

 

 

V. 성경에서 땅의 의미

 

성경이 말하는 땅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땅은 예표였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5절). 옛 언약 아래에서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는데 있어 그림자나 예표에 속하는 것이었다.[48] 

   가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이요, 장차 우리에게 임할 새 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49]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분을 통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였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땅을 못 받았지만(행 7:5), 사실은 받았다(히 11:13). 그들은 믿음으로 땅을 상속했다(히 11:9). 

 

모든 땅이 거룩하다

   개신교는 성지(聖地)가 없다. 성지순례를 하지도 않는다. 어느 특정한 땅을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20세기에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다시 탄생한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50] 

   모든 땅이 거룩하다. 우리가 상속받는 것은 땅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으로부터 누리는 은혜다. 하나님 나라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영토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느 땅을 차지할 필요도 없다. 어디에 있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오늘날 신자들의 성취와 기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 약속의 땅이 바라보는 최종적인 운명,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51]

   구약의 성도들이 가나안 땅에 소망을 두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며 장차 우리에게 허락하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영원한 도시를 바라본다(계 21:1-2).[52]

 

 

결론

 

   성경은 하나님의 땅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야기다.[53]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은 동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장소를 진척시키며,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모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결과로 임할 더 위대한 땅,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비된 땅을 예기(豫期)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약속의 땅과 그로 말미암는 복은 그리스도가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취된다.[54]

   땅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초월적으로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새 예루살렘을 지칭한다.[55]

   구약교회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고 소유했던 땅은 장차 모든 시대의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관련해 새 창조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더 위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56] 땅에 관한 약속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 온 땅을 채우고 거주하는 때에 완전히 성취된다.[57] 

 

 

※ 위글과 관련하여 다음 영상링크를 참고하십시오. - https://youtu.be/3k53TlF-g4w

 

 

참고문헌

 

Walter Brueggemann(월터 브루그만), The Land: Place as Gift, Promise and Challenge in Biblical Faith (Philladelphia: Fortress, 2002), 정진원 옮김, 『성경이 말하는 땅: 선물, 약속, 도전의 장소』(서울: CLC, 2005).

Oren R. Martin(오렌 마틴), Bound for the Promised Land, NSBT (London: IVP, 2015), 전광규 옮김, 『약속의 땅 성경신학』(서울: 부흥과개혁사, 2021).

Gary M. Burge(개리 버지), Jesus and the Land: The New Testament Challenge to Holy Land Theolog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0), 이선숙 옮김, 『예수와 땅의 신학』(서울: 새물결플러스, 2020). 

O. Palmer Robertson(팔머 로벗슨), The Israel of God: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Phillipsburg: P&R, 2000), 오광만 옮김,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서울: CLC, 2003).

David E. Holwerda(데이비드 E. 홀베르다), Jesus and Israel: One Covenant or Two? (Grand Rapids: Eerdmans, 1995), 류호영 옮김, 『예수와 이스라엘』(서울: CLC, 1995).

 

 

 


[1] 구약에 하나의 중심주제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구약이 사상적인 통일성이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와 직결된다. 신득일, “구약 중심주제의 논쟁점과 신학적 주석관점으로서의 구속사,” 『고신신학』, 통권 4호 (부산: 고신신학회, 2002), 39-64. 폰 라트는 구약을 어떤 특정한 하나의 신학으로 보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Gerhard von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Ⅱ (München: Kaiser Verlag, 1975), 446f.

[2]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의 통일된 주제가 있지만, 또한 동시에 다양한 해석방법이 있음을 잘 보여주는 책으로 다음을 참조하라. John Goldingay, Approaches to Old Testament Interpretation (Downers Grove: IVP, 1981), 김의원, 정용성 공역, 『구약 해석의 접근 방법』(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3] “놀랍게도 땅 주제는 성경 신학 전체 측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신학의 주제로 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교회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Oren R. Martin(오렌 마틴), Bound for the Promised Land, NSBT (London: IVP, 2015), 전광규 옮김, 『약속의 땅 성경신학』(서울: 부흥과개혁사, 2021), 17. 

[4] 1, 2, 10절에 나오는 땅은 히브리어로는 다 같은 ‘땅’(אֶרֶץ)이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땅이다.

[5] David E. Holwerda(데이비드 E. 홀베르다), Jesus and Israel: One Covenant or Two? (Grand Rapids: Eerdmans, 1995), 류호영 옮김, 『예수와 이스라엘』(서울: CLC, 1995), 121.

[6]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34.

[7] 구약 전체에 흐르는 핵심 주제인 약속의 땅은 가나안이 아니라 동산에 신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William R. Osborne, Divine Blessing and the Fullness of Life in the Presence of God, SSBT (Wheaton: Crossway, 2020), 강대훈 옮김, 『하나님의 복 성경신학: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의 충만한 삶』(서울: 부흥과개혁사, 2022), 74.

[8]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 땅이라는 개념은 원래 낙원에서 시작되었다.” O. Palmer Robertson(팔머 로벗슨), The Israel of God: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Phillipsburg: P&R, 2000), 오광만 옮김,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서울: CLC, 2003), 12.

[9]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43.

[10]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46.

[11] “아담이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후속하는 모든 추방의 전형이다.”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22.

[12]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5.

[13]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6.

[14] “성경을 이해하려면 아브라함 언약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아브라함 언약이 성경 및 성경이 밝히는 구속사를 해석하는 기본 틀이기 때문이다.” Craig A. Blaising and Darrell L. Bock (eds.), Dispensationalism, Israel and the Church: The Search for Defini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92), 135.

[15]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6.

[16] 아담이 상실한 땅과 씨와 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땅과 씨와 복에 대한 약속이 해답이 된다(창 1:28; 9:1; 17:2, 6).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90.

[17] 권수경, 『번영복음의 속임수: 번영복음에 대한 성경적, 철학적 비판』(서울: SFC, 2019), 63-64.

[18]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99-100.

[19] Walter Brueggemann(월터 브루그만), The Land: Place as Gift, Promise and Challenge in Biblical Faith (Philladelphia: Fortress, 2002), 정진원 옮김, 『성경이 말하는 땅: 선물, 약속, 도전의 장소』(서울: CLC, 2005), 106, 114.

[20]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11.

[21] Brueggemann, 『성경이 말하는 땅』, 139.

[22]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20; Holwerda, 『예수와 이스라엘』, 132.

[23] Gary M. Burge(개리 버지), Jesus and the Land: The New Testament Challenge to Holy Land Theolog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0), 이선숙 옮김, 『예수와 땅의 신학』(서울: 새물결플러스, 2020), 43.

[24]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23.

[25] Holwerda, 『예수와 이스라엘』, 132.

[26] Burge, 『예수와 땅의 신학』, 31.

[27] Brueggemann, 『성경이 말하는 땅』, 52.

[28] Brueggemann, 『성경이 말하는 땅』, 52.

[29] Holwerda, 『예수와 이스라엘』, 140-141.

[30]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80, 82, 84-85; Holwerda, 『예수와 이스라엘』, 126, 128; Brueggemann, 『성경이 말하는 땅』, 348.

[31] Holwerda, 『예수와 이스라엘』, 124.

[32] Brueggemann, 『성경이 말하는 땅』, 59.

[33] Holwerda, 『예수와 이스라엘』, 142.

[34] Naim Ateek, ‘Zionism and the Land: A Palestinian Christian Perspective,’ in Philip Johnston and Peter Walker (eds.), The Land of Promis: Biblical, Theological and Contemporary Perspectives (Leicester: IVP, 2000), 209.

[35] Burge, 『예수와 땅의 신학』, 79.

[36] Burge, 『예수와 땅의 신학』, 161.

[37]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209.

[38]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88-189 .

[39]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22.

[40]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6.

[41]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22.

[42]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77.

[43]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18, 35, 40;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77; Holwerda, 『예수와 이스라엘』, 145.

[44]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56.

[45]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38.

[46] 1세기에 존재했던 파르티아(바대, Parthia) 제국,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갑바도기아(터키),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까지 당시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사도행전 2:8-12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47] Burge, 『예수와 땅의 신학』, 135.

[48]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22.

[49] 앤서니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387.

[50]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34.

[51]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7.

[52]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209-210.

[53] Brueggemann, 『성경이 말하는 땅』, 58.

[54]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211.

[55] Bruce K. Waltke with Charles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Grand Rapids: Zondervan, 2007), 560.

[56]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16.

[57] Martin, 『약속의 땅 성경신학』,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