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파리 테러, 그 이후' 입니다. 지난 13일의 금요일에 유럽의 꽃이라고 불리는 파리를 강타한 테러로 인해 전 세계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끔찍한 테러는 미국을 향한 이슬람의 9.11 테러와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이제 이슬람 국가를 향한 무차별 보복과 이것에 대항한 이슬람 국가 주도의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의 전조라고 보아야 할까요? 유럽 현지의 분석글들을 소개도 하고 그곳의 분위기도 전달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잔인하고 혼란스러운 마지막 때를 살아갈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편집장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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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네덜란드의 미디어 매체들은 파리 테러와 관련하여 국내외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인 반성을 찾아 보기는 쉽지 않다. 이는 개혁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신문인 ND(Nederlands Dagblad)나 RD(Reformatorisch Dagblad)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상당 수의 이슬람 교도들이 유럽의 사회 공동체 안에 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시리아 난민 문제가 심각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럽의 교회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해 어떻게 신학적으로 반성하고 대응하는지는 차분하게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이 글은 수년간 ND의 최고편집장으로 일했었고, 지금도 중요한 칼럼을 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는 아드 캄스테이흐가 11월 26일자 ND에 적은 오피니언이다. 독자는 저자가 이 글을 통해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기 보다, 기독교 언론인으로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캄스테이흐는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을 따라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을 위해서도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테러의 시기에 우리는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아드 캄스테이흐 (Aad Kamsteeg)
번역: 이충만
‘강력한 대응’과 ‘유화정책’, ‘정의’와 ‘자비’, 그리고 ‘폭격기를 위한 기도’와 ‘적을 위한 기도’ 등과 같은 상호 모순들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우리는 파리에서 발생한 ISIS의 대학살에 대한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군사적 대응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이 사살되고 프랑스 전투기가 시리아 라카(Raqqa)를 폭격하는 장면에 기뻐해야 하는가? 만일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은 프랑스 테러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인가?
테러리스트가 파리의 한 카페 앞에 엎드려져 있는 무고한 여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장면을 텔레비젼 화면을 통해 목격할 때, 복수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나도 부인할 수 없다. 강간을 일삼고 십자가형과 참수를 자행하는 무자비한 ISIS의 소행을 접할 때면 분노가 치민다. 심지어 그들은 12살의 어린 아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였다.
구분하기
아마도 정부가 해야할 일, 사회가 해야할 일,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써 내가 해야 할 일을 구분한다면 앞서 제기한 질문들을 교묘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사회적 측면을 고려하여 ISIS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들을 재탈환 해야 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지상군도 파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테러리스트들이 다른 도시와 지역들에서 테러를 자행할 수 없을 것이며, 성전(聖戰) 수행을 위한 훈련 또한 불가능 할 것이고, 군사적 용도로 유류과 가스를 획득하거나 판매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해커들을 동원하여 ISIS의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활동을 차단할 필요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시리아 내에서 타협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필요시에는 아사드와 푸틴과의 타협도 성사되어야 한다. 일종의 연방제가 도입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각 지역에서 최대한의 자취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전세계로 흩어져 있는 온건한 이슬람 교도들은 해결책을 찾는 것에 직간접적으로 일조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이맘들과 종교지도자들 뿐마 아니라, 모든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ISIS는 이슬람의 참된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의 보다 가시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이 요청된다. 그들은 코란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구절들이 2015년 현재 지극히 이질적인 것임을 젊은 세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설명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정부나 사회가 해야할 일들과 기독교인으로써 내가 해야할 일을 구분하여 테러와 관련된 모순들에 접근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이 구분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은 아니다. 나는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정부, 국제적 연합,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임무임을 익히 알지만, 동시에 한 개인으로서 나 자신의 무능력 또한 종종 느낀다.
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숙지 하고 있다. 성경은 정의, 복지, 그리고 평화(샬롬)와 같은 시민들의 선(善)을 목적으로 정부가 칼을 사용할 권한을 지님을 가르친다. 살인을 일삼는 단체들이 응당 처벌되지 않고서 활개치는 세상은 공포스럽고 또한 무자비하다. 그러기에 나는 전투기와 쿠르디스탄의 지상군과 함께 최상의 전력으로 ISIS를 격퇴하기 위해 노력하는 위정자들과 당국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부드럽게
그러나 이것이 전부인가? 그렇다면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주님의 말씀은 파리의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구절은 단지 개인적 태도 만을 가르치는가?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미국과 북한, 전 세계와 ISIS 사이의 복잡한 이해 관계와는 전혀 무관한가? 마르틴 루터 킹은 1963년 익히 알려진 한 통의 편지를 적었다. 그것은 “버밍험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 그는 모든 권리의 요구들을 다 수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힘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는 옳지 않은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무엇보다 원수를 부드럽게 대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이 위험천만한 길로 줄곧 걸어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예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읽어 보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우리는 성전(聖戰)을 수행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극히 순진한 것일까? 필립 얀시는 곧 출판될 자신의 책 “은혜의 결핍: 복된 소식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미군 군목 예비역인 토마스 브루스 (Thomas Bruce)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이라크에서 알카에다와 교전 중일 때, 브루스는 ‘기도를 위해 테러리스트를 입양하기 (Adopt a Terrorist for Prayer)’라는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FBI가 제공하는 테러리스트 수배자 명단을 참고하여 그들의 사진을 기도 운동의 홈페이지(www.atfp.org)에 실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는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행동인가? 나는 성전(聖戰)을 위해 시리아에서 테러리스트들을 훈련 시켰던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텍시 운자사를 통해 건네 받은 성경을 통해 회심하였다는 일화를 읽는다. 또한 한 테러리스트가 꿈 속에서 십자가를 보았고, 십자가를 분노하기 보다 호기심을 갖게 되었으며 끝내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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