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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지난 10월 13일부터 16일까지 독립개신교회 강변교회당에서 열린 제5회 개혁교회들의 아시아태평양 대회(Asia-Pacific Conference of the Reformed Churches. 약칭 AP-CRC, 주제: 세례와 성찬)에서 있었던 공개강연에서 발표된 모한차코 목사(인도개혁장로교회)의 논문입니다. 주최측인 독립개신교회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개혁정론에서 소개합니다. 논문이 길어서 2차례에 걸쳐 나누어서 싣습니다.

      개혁교회들의 아시아태평양 대회(AP-CRC)ICRC(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국제 개혁교회 협의회, http://www.icrconline.com)에 속한 교회 중 아시아와 호주, 뉴질랜드에 있는 교회들이 각 지역별로 4년에 한 번씩 서로 교제하고 선교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모이는 회의로, 고신교회도 회원교회입니다.

 

 

Towards a Reformed Understanding of Sacraments

in the Asian Context

아시아의 상황에서

성례에 대한 개혁신앙적인 이해를 도모함(2)



Mohan Chacko

모한 차코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India)





3. 말씀과 성례

 

말씀과 성례의 관계도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개혁신학은 성례를 부차적인 것으로, 혹은 심지어 비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개혁 신앙의 전통에서 성례의 역할을 말씀과 관련하여서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가치를 저하시켰다는 주장인데,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한 비평가에 따르면, 예배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이 치른 대가는 “예배의 성례적 차원을 완전히 없애 버렸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괄호 안에 넣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청각적인 것이 되었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그들에게) 구원은 신비를 기념하는 일에서 예배 의식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통해 확증되기에 앞서, 말씀을 통해 생겨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1]

표면적으로 보면, 말씀과 관련하여서 성례의 가치를 떨어뜨렸다는 이러한 비난이 사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테면 루이스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은 성례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완전한 반면, 성례는 말씀 없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2] 말씀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성례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믿음을 만들어 내고 또한 강화시키지만, 성례는 오직 믿음을 강화시키는 역할만 합니다.[3] 칼빈은 또한 성례가 약속을 확증하고 인 치는 것으로서, 약속에 “일종의 부록처럼”(『기독교강요』, 4.14.3)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록”이라는 말은 ‘성례가 말씀에 종속적인가’ 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질문을 어떻게 접근하여야겠습니까? 그와 같은 견해는 종교개혁과 로마 가톨릭이 성례관을 놓고서 대치하였던 역사적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의 상황은 말씀이 본질상 제거되어 버리고 성례가 말씀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개혁자들의 관점은 로마교회의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대한 반작용이었는데, 아마도 그 반작용이 지나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칼빈과 또 그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는 신앙고백서들에서는 성례가 ‘말씀의 불충분함’ 때문에 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제정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례를 “부록”이라 지칭한 의도는 성례를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례는 우리의 비틀거리고 흔들리는 믿음을 위한 버팀목이고 도움입니다(『기독교강요』, 4.14.3). 칼빈의 입장은 창세기 15장에서 보게 되는 패턴으로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그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고, 자신을 아브라함의 방패로 선언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큰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후사로 주시지 않는다는 불평에 대한 응답으로,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15:1-5).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지만(15:6), 그럼에도 여전히 의심을 떨쳐 낼 수 없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15:8)”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신 시점은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주저하고 망설일 때였습니다(15:8 이하). 따라서 성례는 선포된 약속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한 확증입니다.

개혁 신앙의 전통 안에서부터 본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다른 패러다임에 놓고서 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과 성례를 ‘대치시켜’ 두는 데에 있습니다. 그보다는 설교와 성례 둘 다를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로 생각하는 것이 낫습니다. 즉 설교는 말로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례는 비준(批准)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예를 들어 성찬 제정의 말씀이나 서약 등) 비준 절차의 한 부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칼빈 자신이 이러한 비준의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례가 약속에 붙어 있는 “목적은 약속 자체를 확증하고 인 치며, 우리에게 그 약속이 더욱 분명한 사실이 되게 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 약속을 비준하기 위해서”(『기독교강요』,4.14.3)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는 바를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설교와 성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성례는 말씀에 결코 종속되지 않습니다. 살아계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두 가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하십니다.

 

 

4. 성례의 필요성

 

이러한 논의는 또한 성례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가’ 하는 질문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개혁 신학자들은 성례들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필요하다기보다는 다만 ‘의무’와 ‘명령’이라는 면에서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왔습니다.[4] 즉 성례들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례들이 없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성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5]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흔히 내놓는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닌) 증거는, 성례의 유익을 받지 못한 채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고전적인 예로는 ‘십자가 위의 강도’를 들 수 있습니다). 다시금 전체 논의를 로마 가톨릭의 교훈의 맥락, 곧 성례적 은혜가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이라는 교훈의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비록 개혁 신학자들의 위와 같은 논증이 어느 정도 옳은 면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과거의 스콜라적,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의 흔적(잔재)입니다. 이러한 논증에서 다시금 (아마도 그들의 논증을 잘못 이해함으로 인해) 얻게 되는 인상은, 성례에 참여하는 일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사안이며 선택 사항일 뿐이라는 인상입니다. 즉 마치 ‘우리는 성례를 행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며, 성례가 구원의 과정에 어떠한 실제적인 기여를 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고 말하는 듯이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칼빈은 성례를 해석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을 돕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성례를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 해도 상당히 절실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즉 성례의 필요성은 스콜라적 구분(명령이냐 절대이냐)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현실 곧 우리의 “미약한”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동안에는 –그리고 사실 항상 우리의 믿음은 약합니다 – 우리에게 성례가 필요합니다. 칼빈이 지적하듯이, 성례는 “땅에 붙어서 늘 느릿느릿 진행할 뿐인 피조물들”을 위해 맞추어 주신(accommodation) 예식입니다. 또는 한 현대 작가가 설명한 대로, “성례는 사랑이 많은 교사가 배우기에 더딘 학생들을 위해 고안한 특별한 수단”[6]입니다.

성례를 언약적으로 이해한다면 성례에 참석할 필요성을 더욱 강력히 뒷받침할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세례와 성찬은 그것들만이 언약의 표이므로 독보적인 의미에서 성례입니다. 성례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언약에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성례 참여를 거절당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언약 공동체 밖으로 퇴출되는 것에 상응합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7:14). 출교의 성경적 개념은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의 회원이 회개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출교시킵니다. 그 말은 곧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례의 유익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사람들이라 해도 교회는 그들이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지도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의 그 어떤 죄인에게도 말씀 듣는 일을 열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례가 구원의 과정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출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타락한 성도에게 성례를 불허하는 것은 그를 주님의 언약 공동체로부터 끊어 내었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성례에 참여하는 일은 선택 사항도 아니고 무관심해도 되는 사항도 아닙니다.

 

 

5. 표징으로서의 성례

 

개혁 신앙에서는,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성례를 흔히 표(signs)라고 이야기합니다. 존 칼빈에 따르면 성례는 “외적인 표”입니다(『기독교강요』,4.14.1). 성례를 “표”라고 부르는 것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그 용어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의미에 대하여서는 모두가 동일하게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최근까지 인도에서 제 동역자로 활동하였던 스티브 그리핀(Steve Griffin)은 이것을 가지고서 표를 해석하는 사중적 모델이라는 매우 유용한 설명을 제시하고는, 더불어 자신만의 접근법인 “도구적(instrumental)” 관점이라는 것을 제안합니다.[7] 첫 번째 접근법은 ‘등가’(equivalence) 이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표를 그 표하는 대상과 ‘동등한’ 존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적용하면,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상응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찬의 떡은 축성되면 그리스도의 몸과 동등하며, 그리스도의 위격에 해당하는 영예와 모든 경배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두 번째 접근법은 ‘그릇’(container) 모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표가 그 표하는 대상을 담는 ‘그릇’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동방 정교회의 이콘(icon)에 대한 견해와 루터파의 공재설(성찬의 요소 안에, 요소와 함께, 그 아래에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있다)이 이러한 모델의 예입니다. 셋째는, 표를 단순히 그 표 너머의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델에서 표란 단지 외적인 것이고, 그 어떤 영적 실체와도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실제로 성찬을 그저 기념하는 예식으로만 지키는 데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관점입니다. 넷째 관점은 표들이 실체를 왜곡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재세례파와 그 외에 성례를 부정하거나 극단적으로 변형시키는 전통에서 볼 수 있습니다.[8]

이러한 견해들과 대조하여서, 그리핀은 자신이 “도구적” 관점이라 부르는 것을 주장하며, 그것이 칼빈이나 그 외 몇몇 개혁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봅니다. 표는 외적인 사물로서, “그것이 ‘외적으로’ 가리키는 바를 우리 안에 ‘내적으로’ 작용하도록 하는”[9] 실제적인 방편들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표를 도구적 관점으로 보면, 성례는 단순히 외적으로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역할만을 한다는 견해(위에서 말한 셋째 견해)를 넘어서, 그 가리키는 도구가 또한 그 실체에 ‘내적으로’ ‘실제로’ 참여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성례를 좀 더 균형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외적인 표를 공경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표에 공경하는 태도로 접근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이 표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표를 통하여서 우리 안에 어떤 일들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10] 이 점은 우리가 성례의 신성함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아래를 참조하시오)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6. 아시아의 상황에서 성례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도모함

 

끝으로 오늘날의 상황들과 관련하여서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시아의 상황에서 (성례에 대한 이해 차원에서) 개혁 신앙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신학과 목회 활동에 대한 그의 이해와 관련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간단히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해결책들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특정 상황들에 대하여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처한 종교적인 상황입니다. 아시아에는 수많은 고대 종교들이 존재합니다. 셈족의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역주)을 제외하고도, 아시아에는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 신도, 도교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적 종교들에는 온갖 상징과 특별 예식과 일반 예식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성례를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에 참석한 힌두교도들에게 아무리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고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도 막상 성찬이 시행될 때에는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려고 앞으로 나오는 일들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찬의 요소들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무례하게 받아들이곤 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 떡과 포도주를 곧잘 ‘프라사드’(Prasad)라는 우상의 제물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전에서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인 ‘프라사드’는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성례는 이처럼 당황스럽고도 불쾌한 일이 되기도 하고,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복음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성찬 상의 (울타리를 쳐서) 배타적인 성격을 잘 보존할 수 있습니까? 인도의 어떤 (개혁교회 밖의) 목사들은 아예 대놓고, 성찬을 ‘프라사드’로 설명해야 하고 또 성찬 상을 누구에게나 구별 없이 열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하여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은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들입니다. 다른 종교들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개혁/장로교인들로서 우리는 두 겹의 도전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찬에 그 어떠한 마술적인 요소도 들어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를 원합니다.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 고교회적 전통에서는 그들의 예식과 관련하여 이러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나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예식들 중 상당수는 예식을 잘 아는 이들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마술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은 그들이 성찬의 요소들을 극진히 대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찬의 요소들을 오직 사제들만 만질 수 있고, 성찬의 상에서 봉사하는 일에 지극히 주의를 기울이며, 무릎을 꿇고서 성찬에 참여하는 등의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 놓인 더 큰 위험성은, 우리가 성찬의 요소들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경향일 것입니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이 또한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에서 지나치게 행하였던 것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들 중 일부가 성찬을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하는 모습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것이며 우리의 신조들에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앞서 논의한 대로 표징을 도구로 보는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의 자세로 그러나 미신적이지는 않은 태도로 성례에 대하여 생각하고 행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아시아의 현 상황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은, 박해입니다. 아시아의 전 영역에서 개종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으며, 특히 인도 같은 지역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한 지역에서 세례는 종종 개종의 표식으로 간주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그리 나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세례의 경우는 개종하였다는 표시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세례의 예식은, 특히 시냇가나 강가에서 공개적으로 시행되는 경우에는 극히 위험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세례를 베푸는 유익이 그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앞서 논의한 대로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들면서)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굳이 세례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위험에 직면하여서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지적할 것입니다.

성례, 특히 세례는 너무 배타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아시아의 일부 사회에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마치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가 그러했듯이 세례도 일종의 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세례가 단지 사람들을 그들의 가족과 카스트와 공동체로부터 ‘소원해지도록’ 만들기만 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례는 지나치게 특정 집단을 강조하는 (편협하고 광신적인 부류) 표지이므로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그러한 벽들을 무너뜨리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공동체와의 연대를 추구하기 위해 세례를 완전히 폐지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세례가 전혀 필요 없다는 생각을 표현은 않더라도 마음으로나마 품고 있는 신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지만, 그들은 박해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회적 문화적으로 고립될까 두려워 세례를 기피합니다.

이 발표문에서 우리는 대체로 성례에 대한 좀 더 개혁신앙적이고 성경적인 이해를 그려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비록 성례의 교리는 심지어 종교개혁 시대에서부터 논쟁적인 주제였지만, 그럼에도(혹은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이 주제는 오늘날에도 계속하여 숙고해 보아야 할 주제라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대체로 세례와 주의 만찬에 더 구체적으로 적용이 될 것입니다.

 

 

숙고하고 논의하기 위한 질문들


 

1. 이 시간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의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례의 어떠한 면들을 더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까?

2. 여러분의 교회에서 성례를 시행할 때에, 기쁨과 슬픔 중 어떠한 면이 더 두드러집니까? 성례의 자리에 두 가지가 모두 있습니까?

3. 여러분의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얼마나 자주 시행합니까? 그 횟수를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4. 성례를 오직 복음 사역자들만 시행할 수 있다는 견해는 그 정당성을 입증할 근거가 충분합니까?

5. 성례와 주의 깊게 구별하기만 한다면 교회 안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례’와 같은) ‘의식’들을 더 갖는 것이 좋은 생각입니까? 거기에 어떠한 위험이 있겠습니까? 임직이나 혼인, 공적 신앙고백과 같은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6. 교회가 그 지방에서 만드는 방식의 빵을 사용하고(이를테면 인도의 ‘로티’ 빵 같은) 또 숭늉을 사용하여 성찬을 시행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7. 성찬의 성례에서 예비적인 절차들을 두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그렇다면 거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8. 만일 세례를 주는/받는 일이 (가족이나 사회 혹은 국가의 박해로 인해) 위험한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세례를 그대로 계속 시행하도록 주장하겠습니까, 아니면 혹시 세례가 선택 사항이라고 조언해 주겠습니까?




[1] Bruno Burki, The Reformed Tradition in Continental Europe: Switzerland, France and Germany, in The Oxford History of Christian Worship, Geoffrey Wainwright and Karen B. Westerfield Tucker, eds. (New York, et al: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438.

[2] Berkhof, Systematic Theology, 616.

[3] Ibid.

[4] Ibid., 618. See also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repr. 1977), III:516ff.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세례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세례에 은혜와 구원이 나뉠 없게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세례 없이는 아무도 중생이나 구원을 받을 없는 것도 아니고……(38 5).

[6] Andrew Kuyvenhoven, Comfort and Joy: A Study of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MI: CRC Publications, 1988), 169. 그렇지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것은, 성례는 어떤 해설이나 예시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7] Steve Griffin, The Gift and Promise of the Reformation, mss of a lecture delivered at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Dehra Dun, India, on 31 October 2012, pp. 3-4.

[8]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지적한 것처럼, 일부 재세례파 그룹은 자신들의 신비주의적인 성향에 따라 외적인 방편들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성신의 내적 사역을 강조한 결과 성례들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퀘이커 교도들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Pilgrim Theology: Core Doctrines for Christian Disciples (Grand Rapids: Zondervan, 2012), 355.

[9] Griffin, The Gift and Promise of the Reformation, 3-4.

[10]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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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제68회 총회상정안건분석'입니다. 총회는 교회의 가장 넓은 치리회인데 총회회의야말로 교회의 자태를 잘 드러냅니다. 총회에 상정된 안건 하나 하나가 현 교회의 모습과 우리 시대의 도전을 잘 담고 있습니다. 총회를 통해 교회의 ...
    Date2018.09.06 By개혁정론 Views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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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68회 총회 상정안건분석] 결혼, 잔치지만 가벼워서도 안 되는 거룩한 예식

    이번 기획기사는 '제68회 총회상정안건분석'입니다. 총회는 교회의 가장 넓은 치리회인데 총회회의야말로 교회의 자태를 잘 드러냅니다. 총회에 상정된 안건 하나 하나가 현 교회의 모습과 우리 시대의 도전을 잘 담고 있습니다. 총회를 통해 교회의 ...
    Date2018.09.04 By개혁정론 Views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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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68회 고신총회 상정안건 분석

    이번 기획기사는 '제68회 총회상정안건분석'입니다. 총회는 교회의 가장 넓은 치리회인데 총회회의야말로 교회의 자태를 잘 드러냅니다. 총회에 상정된 안건 하나 하나가 현 교회의 모습과 우리 시대의 도전을 잘 담고 있습니다. 총회를 통해 교회의 ...
    Date2018.09.03 By개혁정론 Views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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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갈등,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번 기획기사는 '데이트'입니다. 청년들이 데이트를 통해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파란만장할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데이트, 데이트과정과 그것을 끝장내면서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요. 당사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
    Date2018.09.03 By개혁정론 Views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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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이성교제의 꽃이 꺾여 버린 기독 청년에게

    이번 기획기사는 '데이트'입니다. 청년들이 데이트를 통해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파란만장할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데이트, 데이트과정과 그것을 끝장내면서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요. 당사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
    Date2018.08.16 By개혁정론 Views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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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누구와 데이트 할 것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데이트'입니다. 청년들이 데이트를 통해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파란만장할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데이트, 데이트과정과 그것을 끝장내면서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요. 당사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
    Date2018.08.06 By개혁정론 Views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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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공동체 내에서의 이성교제

    이번 기획기사는 '데이트'입니다. 청년들이 데이트를 통해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파란만장할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데이트, 데이트과정과 그것을 끝장내면서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요. 당사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
    Date2018.07.30 By개혁정론 Views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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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결혼 결심, 무엇을 고려해야 하나?

    이번 기획기사는 '데이트'입니다. 청년들이 데이트를 통해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파란만장할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데이트, 데이트과정과 그것을 끝장내면서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요. 당사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
    Date2018.07.25 By개혁정론 Views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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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무엇이 다른가?

    이번 기획기사는 '데이트'입니다. 청년들이 데이트를 통해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파란만장할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데이트, 데이트과정과 그것을 끝장내면서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요. 당사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
    Date2018.07.23 By개혁정론 Views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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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우리가 세우려는 교회] 개혁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

    개혁교회 건설 두 번째 기획기사는 ‘우리가 세우려는 개혁교회’입니다. 요즘 시대는 교회론의 혼란이 극심한 시대입니다. 교회에 대한 다양한 실험들을 하고 있고요. 개혁한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의 백성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불러 ...
    Date2018.07.09 By개혁정론 Views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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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우리가 세우려는 교회] 교회의 4가지 속성

    개혁교회 건설 두 번째 기획기사는 ‘우리가 세우려는 개혁교회’입니다. 요즘 시대는 교회론의 혼란이 극심한 시대입니다. 교회에 대한 다양한 실험들을 하고 있고요. 개혁한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의 백성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불러 ...
    Date2018.07.06 By개혁정론 Views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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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우리가 세우려는 교회] 교회 세우기, 어떻게

    개혁교회 건설 두 번째 기획기사는 ‘우리가 세우려는 개혁교회’입니다. 요즘 시대는 교회론의 혼란이 극심한 시대입니다. 교회에 대한 다양한 실험들을 하고 있고요. 개혁한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의 백성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불러 ...
    Date2018.07.02 By개혁정론 Views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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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그리스도인의 혼인] 혼인과 교회

    혼인과 교회 : 혼인하는 청년들을 위한 교회의 역할 조재필 목사 (부산 연합교회) 오늘날 혼인은 다분히 사적인 문제로 여겨집니다. 혼인을 결정하는데 개인과 개인의 의사가 거의 유일한 토대입니다. 과거에는 혼인이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라는 전통적 사고...
    Date2018.05.28 By개혁정론 Views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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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기획-교회개척프로세스] 교회개척사례

    이번 기획기사는 교회개척 프로세스입니다. 지금도 교회개척이 필요하냐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를 개척할 필요가 없다고요. 있는 교회도 정리해야 할 판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이제는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
    Date2018.05.17 By개혁정론 Views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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