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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기사는 '종말을 말하다'입니다. 끝 날에 대해 무책임하고 신비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신자들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의 거짓말에 속다 보니 종말에 대해 말하면 이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성경적인 종말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또 다시 주님이 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하면서 마지막 때를 사는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편집장 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이성호 교수.jpg







이성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본문: 벧전 4장 7 - 11절


서론

신자들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느 시점에 있으며,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어리석은 신자들도 많습니다. 또는 그냥 건강하고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없이 행복하게만 살아도 족하다는 식의 소시민적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도 하나의 역사관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이 역사관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보통 현재가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을 많이 하는데, 거꾸로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종말 신앙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천년만년 아무런 변화 없이 흘러 갈 것인가? 아니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상 천국을 이루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핵무기, 공해, 자원의 고갈 등으로 인해서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가? 만약에 이 세상이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진보를 믿는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겠지요? 반면, 비극적인 역사관을 가진다면, 그 비극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든지, 아니면 아예 자포자기의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은 독특한 역사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끌고 계신다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역사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기초적인 역사관에 더하여, 한 가지 중요한 역사관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신자들이 만물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역사관이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하나님의 최종 목적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는 신자들에게 분명히 우리들이 세상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인들은 여러 가지 상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가르침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께서 한 참 뒤에 오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쓴 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님이 오신다고 생각하면서 세상 일을 다 포기하고 어떤 장소에 모여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둘 다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담이 살았던 시절은 세상이 처음으로 생겼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세상 역사로 치자면, 중간 쯤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2000년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각각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아담은 주어진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했고, 아브라함과 다윗은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했고, 베드로와 요한 오신 예수님을 전파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마지막은 단순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지막’1)은 최종 목적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셨는데, 그 세상이 이제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세상이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표를 향해 내 인생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내 일을 고집하면서 갈 것인가? 예수님께서 공생에 사역을 하면서 가장 처음 외쳤던 메시지가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기도를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 

성경은 종말이 가까웠다고 분명히 가르치지만, 그것을 가지고 신자들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또는 어떤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종말이 금방 올 것이니까 이 세상의 삶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일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한 채 살아갑니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상충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세상이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신자가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종말론적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가의 여부는 기도생활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들, 합리주의적인 자들은 기도생활을 그다지 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 자체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지침입니다. 종말을 강조하는 집회에 가보면, 그곳에 참석한 이들이 정말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는 방식은 전혀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없이 기도합니다; 근신없이 기도합니다. 실제로 무슨 기도를 하는지도 모르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라는 표현은 거의 같은 표현인데, 미친것, 졸리는 것과 반대되는 뜻입니다. 근신이라는 단어는 5장 8절에 보면, “깨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어 있습니다. 

아주 중대한 일이 가까웠다고 칩시다. 그럴 때 일수록 허둥대어서는 안 됩니다.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면서 침착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마지막, 즉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세상의 목적을 바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마지막일수록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를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일을 앞두고 게세마네에서 제자들과 기도하였습니다. 몇 시간 후면 잡혀서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런 큰일을 앞두고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3명만 데리고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였으나 제자들은 큰 일이 가까이 왔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깨어서 근신하여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밤새도록 여러 차례 기도하였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하였지만,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야 말로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깨어 근신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력 있는 기도야 말로 참된 종말 신앙의 지표라 할 것입니다.

2. 열심히 사랑하라!

두 번째로 사도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 보다 뛰어난 영적 덕목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방법도 언급하고 있는데, “열정적으로” 혹은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1장 22절에 보면, 이미 베드로는 여기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케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열심히”라는 단어가 1장에서는 “뜨겁게”라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들은 이미 진리를 순종함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는 그들에게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좀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지금 베드로는 세상의 마지막과 관련해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갑자기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 해 줄 걸”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 못한 점들을 계속 생각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게 하는 것은 죽은 이와 함께 했던 아름다웠던 추억들입니다. 한 순간이지만, 열심히 사랑을 나누었던 그 일이 자신의 잘못을 다 잊어버리게 하지요. 

이 점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은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순전히 감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명령은 불가능하지요. 얼굴만 쳐다보아도 짜증이 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랑은 감정뿐만이 아니라 의지의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기 쉽지 않지요. 그러나 마지막이 있다는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합니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 앞에는 우리가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봉사하라: 각자의 은사대로 청지기 같이

세 번째로 바울이 권하는 것은 봉사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봉사 혹은 섬김은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여기서 대접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 특히 나그네를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 마다 자기 집으로 들여서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천사를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여러 집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 당시 사도와 복음 전하는 자들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묵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원망없이” 혹은 “불평없이” 서로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이전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집에서 대접하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손님 대접을 너무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옛날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부흥 강사들을 멀리서 모시면, 이들은 보통 성도들의 집에서 묵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자기 친척이나 가족들을 집에서 대접하는 것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부모님들도 멀리서 오시면, 가까운 여관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 하십니다.

심지어 심방도 부담스러워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방학 때 마다 심방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많은 교회에서 심방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접하는 것도, 대접받는 것도 부담스럽게 여기는 오늘날 우리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없는 대접은 “뜨거운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어느 순간엔가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마음이 생기면, 언젠가는 자기 집으로 초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는 봉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별히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은사, 즉, 선물을 받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이 은사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말씀과 섬김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 즉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말해야 합니다. 또한 섬기는 자, 특별히 집사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섬겨야 합니다. 목사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집사는 자기의 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급하다는 말에는 풍성히 주신다는 의미가 함의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자신의 말, 자신의 사상을 전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집사가 자기의 힘이나 재산으로 교회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면, 목사가 영광을 받고, 집사가 영광을 받게 됩니다. 교회가 커지면, 목사가 쉽게 교만해 지기 쉽습니다;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영광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다시 본문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울이 여러 가지 권면을 했는데, 그렇게 권면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가까웠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하고,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하고, 청지기 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만물의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지막은 단순히 종결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최종 목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만약 종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면, 지금부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한 지가 2000년이 넘었으니 이제 세상의 마지막이 훨씬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요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하십시오. 물론 이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 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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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e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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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없는 기독교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예배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예배는 다른 종교의 예배와 어떻게 다를까요? 구약성경 말라기서에 보면 ...
    Date2019.03.10 By개혁정론 Views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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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기획-예배] 공예배를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없는 기독교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예배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예배는 다른 종교의 예배와 어떻게 다를까요? 구약성경 말라기서에 보면 ...
    Date2019.03.07 By개혁정론 Views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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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기획-예배]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없는 기독교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예배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예배는 다른 종교의 예배와 어떻게 다를까요? 구약성경 말라기서에 보면 ...
    Date2019.02.25 By개혁정론 Views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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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기획-기독교인의 일]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

    이번 기획기사는 '기독교인의 일'입니다. 우리는 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항상 사랑을 할 수도 없고, 항상 잠만 잘 수도 없지만 우리는 항상 일하며 삽니다. 이렇게 항상 세상속에서 일해야 하는 우리가 의외로 일하기를...
    Date2019.02.18 By개혁정론 Views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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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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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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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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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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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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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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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