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교회의 정치화, 위험하다'라는 주제입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든지 소위 말하는 정교분리문제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교회의 욕망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했고요. 성경과 현실 양자에 촉수를 예민하게 들이대고 있을 때 제대로 발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기에 교회가 제대로 정치화되기를 바라면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 편집자 주 |
북한 주민이 우선이다
손봉호 교수
(고신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1. 복잡해진 상황
최근 한국의 우파 기독교인들 가운데 반(反) 북한 열풍이 불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북한과의 긴장관계를 화해무드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반공사상과 반북한 정서에 익숙해 있던 우파 기독교인들을 매우 놀라게 한 것이다. 거기에다 정부와 상당수 국민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는 우파 기독교인들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처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에 합세해서 한국 사회와 교계에 우파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공산주의가 무신론이며 북한이 정권을 세습하고 김씨 3대 우상화를 계속하며 인권을 유린하고 국민을 굶기면서도 핵무기를 개발하여 남한과 세계를 위협하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를 싫어하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정권이 하루라도 빨리 바뀌어서 북한 주민의 인권과 자유가 회복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어떤 원칙에 입각해서 북한 문제를 보는가에 따라 비판의 내용이나 구체적인 대응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의견이 좌우 이념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고 한국 기독교도 이런 이념 논쟁 혹은 이념 투쟁에 휩쓸리고 있어 걱정스럽다.
최근 세계 문화가 급격하게 변하고 강대국들의 정치풍토와 상호관계가 크게 요동치고 때문에 종교와 정치, 이념과 신앙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기독교계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냉정하고 섬세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도 필요하겠지만 특히 다종교 사회이면서 동시에 이념으로 분단된 우리의 경우에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를 지시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올바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2. 북한에 대한 기독교의 원칙적 입장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현 상황에 대해서 다른 종교나 집단과 같이 대응해서도 안 되고 임기응변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은 무시할 수 없고 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필수적이지만 성경과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기독교의 전통에 입각해서 대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매우 복잡한 북한 문제를 한국 기독교는 어떤 원칙에서 바라보며 어디에 초점을 두고 대응할 것인가? 선교, 통일, 핵무기, 안보, 평화, 경제적 이익, 중국과의 관계, 북한 인권, 북한의 식량사정, 북한의 환경파괴 등 수 많은 문제들이 모두 중요하여 평화롭고 합리적인 해결을 요구한다. 모두가 서로 얽혀 있지만 남한의 그리스도인이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북한관계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 같이 보이는 출발점은 우리의 이익이다. 우리의 안보, 우리의 평화, 우리의 경제적 이익 같은 것이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일반적이고 당연하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안보가 중요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적화통일을 외쳐 왔기 때문이다. 한기총과 한국 우파 대부분이 이를 가장 심각하고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다른 이익은 양보하더라도 안보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과연 북한이 실제로 우리 안보에 그렇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으로나 남침할 능력이 없고 적화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초미 관심사는 남침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보장이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힘은 핵무기나 생화학무기고 그것들은 물론 심각한 위협이지만 위협용일 뿐 실제로 사용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사용하는 순간 북한 정권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과 자유세계가 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이 그런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넣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는 현 정부의 긴장완화정책은 그렇게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물론 그런 이해가 절대적이란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명과 관계되어 있는 안보문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북한이 남침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가이다. 가능한 한 평화롭게 갈등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 기독교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종교의 능력과 권한을 초과하는 것이다.
안보문제를 제외하고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이익을 너무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북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보다 불리한 입장에 있으므로 북한에도 도움이 되지 않은 한 우리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한국 기독교의 대(對)북한 입장은 북한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여기서 “북한의 이익”이란 북한 정권의 이익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이익이다. 북한 주민이 굶지 않고 인권을 존중받으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통일 등 다른 모든 관심사에 우선한다. 그래서 만약 북한의 현 정권이 주민의 이익에 역행한다면 그 정권이 사라지거나 바꿔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고 거기에 국가의 의의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고수해야 할 대 원칙이고, 그것은 북한 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경제를 비롯한 제반 상황이 아직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통일을 늦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이지만 기독교적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통일이 북한 주민의 고통을 결정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라면 이는 우리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 정권을 제거하는 것이 그대로 두는 것보다 북한 주민에게 더 이익이 되는 것인지, 북한 정권 제거가 실제로 가능한지, 어떻게 제거하는 것이 북한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고 현실 판단과 방법의 문제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의견을 제시할 능력도 없거니와 제시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다만 남북한 주민들에게 치명적인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주장만 할 수 있다.
3. 식량원조와 인권침해 비판
“북한 주민의 이익”이란 원칙에 입각해서 한국 기독교는 구체적으로 적어도 두 가지의 임무는 당장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북한 주민들이 굶지 않도록 식량을 보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정권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항의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전자는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후자는 보수적인 교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한 기독교적 원칙에 따른 것이므로 진보, 보수 모두가 같이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임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의 생명은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이 고귀하고 기본 인권은 기독교가 인류 사회에 제공한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북한 주민의 생명보전과 인권보호는 통일보다 더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먹어야 하고 주린 자는 누구든지 무조건 먹여야 한다. 굶는 자를 먹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우선한다. 이런 주장에는 우파 기독교인들도 원칙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우파인사들은 식량을 보내면 그것을 당 간부나 군인들이 차지하고 실제로 굶는 사람에게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담을 담구지 못해서는 안 된다. 옥수수 같이 고위급 인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곡식을 보내든지, 분배를 감시할 수 있는 국제기구를 통해서 보내면 대부분 필요한 주민들에게 분배될 수 있다. 음식 쓰레기 처치문제를 걱정하면서도 지척에 있는 북한 동포들은 굶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기독교인이 변명할 여지는 더더욱 없다. 좌파든 우파든 남한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굶는 북한 주민들을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좌파 기독교인들은 남한 정부나 기업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하면서 북한 정권의 인권윤리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들도 북한 정권이 주민들의 인권을 무시한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것은 일관성도 없고 성경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다. 물론 비판해 봤자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그렇게 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북한 당국과의 교류가 완전히 끊어질 것이란 현실적 판단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과연 북한 주민들에게 이익이 될지 의문이다. 침묵이 인권 침해를 막는데 도움이 된다면 몰라도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오히려 침묵이 인권유린에 동조한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식량 원조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인권침해를 맹렬하게 비판함으로 한국 기독교는 지금 우리 정치계와 사회에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념 갈등에 휩쓸리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것은 우파도, 좌파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확신으로 무장된 좌. 우 이념은 우리 사회의 단결을 크게 훼손하여 우리의 안보도 위협하고 통일도 방해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초월적 세계와 가치를 제시하고 사랑을 지고의 목표로 삼고 실천함으로 지금 우상으로 변질된 이념을 상대화하고 극복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균형 잡힌 입장이 그 임무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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