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교회의 정치화, 위험하다'라는 주제입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든지 소위 말하는 정교분리문제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교회의 욕망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했고요. 성경과 현실 양자에 촉수를 예민하게 들이대고 있을 때 제대로 발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기에 교회가 제대로 정치화되기를 바라면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 편집자 주 |
한국교회 내 극우적 주장의 실상과 허상
황영익 목사
(Ph.D. 푸른나무교회)
한국 개신교의 극우화 경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그에 비례하여 극우화에 대한 비판론도 커지고 있다. 기독교 외부에서는 차가운 시선과 모진 비판이, 기독교 내부에서도 우려와 각성의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한국교회 내에 만연한 극우적 주장의 실체에 대해 무지하다. 자신이 늘상 접하고 있는 정보와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철저하게 극우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만큼 극우적 주장이 우리 사회와 기독교 내부에 널리 유포되고 있으며 우리의 귀에 매우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성격의 주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그것이 선입정보로 안착하게 되면 상식적인 판단력이 마비되어 버린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주장의 동조자이자 전파자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교회 내에 만연한 특정한 주장과 논리들이 극우적 담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임을 성찰하고 균형 잡힌 신앙적 판단을 하여야 할 것이다.
개신교 내 극우적 주장의 특징
한국 개신교 내에 자리를 잡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극우적 주장의 핵심 주장들은 의외로 단순하다. 몇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이슬람이 한국을 지배할 것이다’, ‘이슬람 테러세력이 난민으로 위장하여 한국에 침투하고 있다’, ‘현 정권은 종북 정권이다’, ‘현 정권이 한국교회 말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좌파가 대형교회를 죽여서 기독교를 붕괴시켜려 한다’, ‘동성애로 에이즈가 창궐하게 된다’, ‘신좌파가 동성애를 통하여 교회를 말살하려고 한다’ 등등.
이들 이야기는 우리의 귀에 매우 익숙하여 친숙하기조차 한 논리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얼마나 허술하고 빈약한 말들인지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주장들은 분명한 근거나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 추정과 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논리의 비약이 심하고 주장이 극단적이다. 언어가 단언적이고 거칠다. 그 논리 구조는 거의 가짜 뉴스에 해당되는 요소와 아미지가 다분하기조차 하다. 이들 개신교 내 극우 주장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극단주의
극우(極右)라는 말은 이들이 극단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이슬람 원리주의자처럼 극단성을 지닌 것이다. 사실 극우가 주목을 받고 힘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러한 극단성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의 상식이나 담론의 흐름에서 벗어난 이론적 이념적 극한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기업의 노이즈 마케팅이나 정치적 테러리즘의 주장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극우와 극좌 하는 사회적 담론의 흐름의 선분에서 한쪽 편 극점에 위치한다.
성경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성경의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은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강하고 굳세게 하라는 격려의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마치 개신교 극우 논리에 대해서 날카롭게 책망하는 듯하다. 너무 극단적으로 우파로 경도된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균형을 상실한 극단주의는 예외 없이 극단적 행동과 종교적 광기로 흘러가게 된다.
2) 두려움의 정서
게다가 이들의 주장은 그 어조와 정서가 자극적이다. 포비아를 만드는 자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향하기보다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열정과 신앙을 심어주기 보다는 공포를 심어준다. 이슬람 포비아를 심어주고 동성애 공포증을 자극하고 정치적 증오를 확장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정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평화에 주목하게 하지 않는다. 어떤 원수들을 정하여 타겟으로 삼게 하고 그 적들과 싸우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 듯이 강조한다. 마치 사탄의 모략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막연한 두려움을 유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3) 정치적 편향
개신교 내 극우 담론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즉 신학 담론이나 신앙운동이라기보다 전형적인 정치성을 지닌 흐름이란 것이다. 특히 특정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반대와 증오를, 특정 정치 집단에 대해서는 지지와 호응을 보내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철저하게 현 정부의 정책을 공격하는 데에 초점이 두어져 있다. 이는 어떤 정치적 기획에 의해 개신교 극우 주장이 유포되고 있다는 추정을 하게 할 정도로 정치적이다. 더구나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의 지역적 분포상 지역적 분할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정치적 편향은 이미 개신교가 일련의 정치 세력으로 동원되고 이용당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개신교가 정치 세력으로 분류되고 정치 담론에 묶여버린 것이다. 교회가 종교적 초월성을 지니고 권력이나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의 정치담론 안에 포섭되어 얽혀버리면 그 고결한 영향력을 급속하게 상실하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 부정성
개신교 극우 담론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외치지 않는다. 오로지 무엇인가를 반대하는 데 열심이다. 이념적으로는 반공, 정치적으로는 반정부, 종교적으로는 반이슬람, 문화사회적으로는 반동성애만을 강조한다. 무엇 하나 대안적 방향으로 제시하거나 건전한 생활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반대만을 주장한다. 선교적 열정보다 투쟁의 기세가 강하다. 즉 부정성과 적대성만을 기본 동력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반대논리는 어김없이 영적 전투론의 옷을 교묘하게 입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자극하여 십자군이 되어 성전(holy war) 동원하고 몰아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신앙적 순수함과 열정과 힘을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향하게 하기보다 증오와 대결로 흘러가게 하는 경향은 실로 우려할만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5) 무관용과 시민적 교양의 부재
극우적 주장은 전쟁을 부추기고 그리스도인들을 전사(戰事)로 호출한다. 더구나 이 전쟁은 끊임없는 전투와 공격으로 적들을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치르는 방어 전쟁이 아니다. 일종의 정복 전쟁이자 항시적인 투쟁으로 기독교인들을 호출한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도보다 십자군 정신을 강조한다. 따라서 무슬림을 반대할 뿐 아니라 난민들을 배척하고 기독교적 환대 아니 가장 상식적인 환대조차 거부한다. 정치적으로도 극단적이다. 놀랍게도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지니거나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공격대상이 된다. 극우는 극우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개신교 극우집단은 그 언어가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다. 행동 역시 무례하다.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혀를 차며 외면을 하고 기독교인들조차 불편해 하는데도 스스로 도도한 신념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는 『무례한 기독교』(IVP)라는 책에서 기독교가 시민적 교양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였다. 시민적 교양과 상식적인 지성이 결핍된 극우 주장은 결국 천박한 종교적 광기로 흐르기 마련이다.
6) 정치공학적 선동성
누구나 쉬 인지할 수 있듯이 개신교 내 극우적 주장은 그 논리와 스타일이 매우 선동적이다. 정교하게 그리스도인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타겟이 있다. 반대와 지지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좌파적 정당과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를, 우파 정당과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지지를 보낸다. 결국은 특정한 정치세력의 지지세력으로 포획되어버린 것이다. 아시다시피 극우 정치집회에 주로 동원되는 사람들은 기독교 인사들과 기독교인들이다. 한기총을 장악한 인사는 한국교회의 입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적 극언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이미 한국 개신교는 정치적으로 특정 정치적 세력을 대표하는 듯이 비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정치공학적 구도는 기독교를 정치에 이용당하게 만들고 있다. 극우 기독교 세력은 먼저 기독교인들을 선동하고, 기독교인들을 동원하여 한국 기독교의 이름으로 시민들을 선동한다. 기독교를 등에 업고 기독교의 간판을 달고 마치 자신들이 기독교의 전부인 듯이 행동한다. 사실 그들이 극우적이라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너무나 정치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극우 담론을 넘어 복음으로
개신교 내에서 유포되고 있는 극우적 주장의 핵심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반공주의다. 둘째는 반이슬람이다. 셋째는 반동성애다. 이것은 극우 개신교 세력의 기본 전략이자 기독교인들을 선동하는 슬로건이기도 하다. 사실 세 가지는 신앙의 범주가 아니라 전형적인 ‘이념의 범주’에 해당된다. 즉 역사적 기독교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신앙고백적 흐름이 아니라 21세기 분단구조의 한국사회의 특정한 정치적 지형 속에서 탄생한 사생아와 같은 현상이다. 그 실체조자 아직 불분명한 수준이다. 따라서 신학의 부재가 두드러진다. 즉 신앙 노선이나 신학담론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담론의 흐름 속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 극우이념의 종교적 버전일 뿐이다. 기독교가 극우 정치이념의 숙주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내 극우세력이나 담론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분명한 것은 그것이 교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신앙운동이나 교회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교회 바깥의 정치적 구도 속에서 형성되어 교회 안으로 침투된 흐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정치세력과 집단들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오히려 내적으로 분열되고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는데 이토록 개신교를 몰아가는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가 극우화된 것이 아니라 우파적 정치세력이 기독교를 이용하고 장악하려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극단적 이데올로기적 편향은 기독교에 치명적인 해악이 되고 있다.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극단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러한 극우 주장에 그대로 동의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으로 극우적 집단으로 분류되고 비난을 받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가 극우 정치세력들의 주 활동무대가 된다면 이는 선교에 가장 치명적인 상황이 된다. 그들은 비복음적이다. 복음을 말하기보다 ‘반대’를 외치고, 하나님의 정의를 강조하기보다 ‘전쟁’을 부추기고, 환대와 사랑과 용서를 말하기보다 특정 그룹에 대한 ‘혐오와 배척’을 조장한다. 아울러 그들은 반선교적이다. 그들의 행동방식은 말씀과 인격적 삶과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복음의 증언의 방식에도 부합하지 않다. 정치적 사회적 반대와 압력 집단으로서의 교회의 기능을 극대화시키고 그러한 방향으로 끌고 있다. 반기독교 세력을 척결하자는 그들이 오히려 반선교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개신교 내 극우 담론은 신앙운동이 아니다. 극우적 정치적 운동의 한 현상이자 분파이다. 그래서 신학적 흐름으로 형성될만한 이론적 기초조차 부재하다. 신학적 성찰을 기반으로 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깃발을 들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이미 한국 개신교의 일부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 기독교 세력을 기반으로 몇몇 대형교회 교인들을 정치집회에 동원하고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이 극우 발언의 선봉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맞이하고 함께 나아가야할 우리의 형제인가? 아니면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배제하여야 할 침투세력인가? 그리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이미 극우 정치세력의 숙주가 되어버린 한국 개신교가 그들을 분리하여 떼 내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분리해 내어야 하고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듯이 행동하는 것을 좌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저급하게 만들고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며 복음의 증언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내 극우 주장들을 보면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가 보인다. 그들의 실상은 우리의 실상이고, 그들의 허상은 우리의 허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결코 한국교회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은 결코 한국교회의 입장일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교회의 또 다른 얼굴이자 치부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희망이 하나 있다. 신구약 성경의 스토리나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 살펴볼 때 그러한 극단적 종교적 정치세력은 얼마 되지 않아 소멸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도도한 교회 갱신의 흐름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시 새롭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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