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후보자 개인의 면면보다는 정당이 선출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보다 더 정의로워지고 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할 이들이 당선되기를 바란다. 이번 기획이 유권자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바른 선택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바르게 투표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가장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 편집장 주 |
하나님 나라, 체제 그리고 4.15 총선
김중락 교수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선거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한 국가의 시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두 국가는 분리된 국가가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참정권 행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우리 스스로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르는 다른 국민에게도 가장 선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기독교인이 통치하는 세상이라고 오해하는 이는 없길 바란다.
또한 선거는 악한 통치자들을 바꾸는 제도이기도 하다. 장로회 교회의 ‘두 왕국 이론’에 따르면 교회는 세속정부의 통치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관료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교회를 통치하신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영역을 지켜야 한다. 교회가 현실정치에 관여하는 수준은 꼭 필요한 경우 조언으로 국한되어야 한다.
과거 일부 종교개혁가들은 악한 정부에 대한 무력저항을 허락하기도 했다. 정부가 심히 악한 경우, 교회지도자들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책임 있는 선한 관료를 따라 새 정부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하였다. 역사적으로 칼뱅파 교회가 세워진 곳에는 무력저항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가 혁명을 일으켰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도들이 봉기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전쟁은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가 말했듯이 “열린 창이 없을 때”만 허용된다. 칼뱅파 교회들이 무력저항을 하였을 당시는 선거가 없고 지위가 세습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선거는 그리스도인에게 “열린 창”이다. 그리스도인은 통치가 악하다고 여기면 선거를 통해 심판하는 것이다. 이 세대의 교회 지도자가 구성원들을 이끌고 광장으로 나가거나, 물리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선거는 체제를 바꾸고, 통치자들을 바꿀 수 있는 기회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이들이라면 굳이 바꿀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한국정치의 바벨론 포로
민주주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한국정치는 정당, 국회의원 그리고 유권자 모두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실로 한국정치는 3중적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먼저 정당의 바벨론 포로이다. 어느 나라든지 대개 정치 세력은 두 개의 주류 정당, 즉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과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나뉜다. 영국의 경우는 아예 정당 이름이 ‘보수당’이고 ‘노동당’이다. 대개 보수 정당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지속적 가치를 중시하며, 진보 정당은 빈민층을 대변하고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다. 둘 다 유용한 가치를 가지며, 정치는 이들 간의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보수나 진보 모두 정직을 기초로 하고 국민을 위한다면 성경적인 정당일 수 있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신념에 충실하고 정직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민이 아니라 행복한 선택권이 두 개나 주어지는 것이다. 어느 정당에게 표를 주어도 나쁠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특정 정당의 정치인들은 과연 그 정당이 표방하는 정치적 신념들을 ‘신봉’하는 자들일까? 불행히도 한국에서는 자신들이 설정한 신념을 일관성 있게 지키는 정직한 정당은 찾아보기 어렵다. 간혹 신념의 대변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신념이란 유권자의 표를 구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신념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이권에 따르는 집단이 무슨 구심점이 있겠는가? 선거 때마다 급조되고, 정치두목에 따라 이리저리 이합집산하는 정당에 우리가 무슨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심지어 위성정당도 생기는 상황이니 어찌 한국정치가 바벨론 포로가 아니겠는가?
두 번째는 정치인의 바벨론 포로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을 보면 신념이란 것이 있을까 싶은 이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어느 정치인이 특정 정당에 소속되었지만 그 정당의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경우를 너무 많이 목격한다. 신봉이란 어떤 사상이나 신념을 옳다고 믿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행동으로 받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기야 정당이 내세우는 신념과 향하는 정책이 다르니 신념을 지키는 정치인이 된다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우리의 정치인들은 특정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한 자유롭게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기 어렵고, 지역주민의 뜻을 대표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당론과 반대로 행동하는 의원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는지 잘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물을 보고 선택을 하는 것이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선거철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기본적인 자질의 문제를 지닌 후보자들이 많은 것도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후보가 도덕적인 인물인가, 후보가 정직한 인물인가의 문제는 그가 내세우는 공약이나 그가 속한 정당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하는 문제다. 기본적으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교회에서 직분자를 선출하는 것과 유사하다. 아무리 유능해도 도덕성에서 흠결이 있는 자를 지도자로 세울 수는 없다.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자와 신념이 없는 자들로 가득한 정치계이니 어찌 한국정치가 바벨론 포로가 아니겠는가?
세 번째는 유권자의 바벨론 포로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참정권을 통해 대의를 위해 봉사해왔다. 참정권을 통해 자신의 사회가 올바른 트랙 위에서 운행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유권자들은 많은 경우 국가라는 대의보다는 지역의 발전이라는 소아(小我)를 위해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다. 후보의 도덕성이나 정치적 신념보다는 누가 더 많은 정부예산을 가져올 것인가, 누가 더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지역의 현안문제를 지원할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국회가 예산편성이나 법안을 만들 때마다 벌거벗은 욕심이 난무하는 것은 이러한 왜곡 때문이다. 오늘날의 동서분열도 결국은 이러한 소아주의가 낳은 폐단이다.
게다가 일부 유권자들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심리학적 질병을 앓고 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으로 정의된다. 진보나 보수의 이념에 대해서는 이론적 소양도 없고, 일관성 있는 입장을 견지하지도 못하면서 특정 정파는 무조건 지지하고 다른 정파는 배척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냥 내 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빠지게 되면 가족도 적이 되고, 오랜 친구도 적이 되고, 오랜 신앙의 동지도 적이 된다. 이로 인해 사회도 교회도 분열되었으니 어찌 한국정치가 바벨론 포로가 아니겠는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나?
이같이 왜곡된 정치상황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투표해야 하나? 대한민국에서 총선은 우리를 대표하는 자를 선출하는 선거인 동시에 정당을 선택하는 선거이다. 인물도 뽑고, 정당도 투표할 수 있으니 좋은 제도이다. 인물은 좋은데 정당이 싫은 경우에도 편리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편리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에게, 그리고 어떤 정당에 표를 주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가장 도움이 되는 자와 정당을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도움이 되는 인물인가 또는 정당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당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물을 선택해야 하나 정당에 매이게 되니 어렵고, 정당을 선택하고자 하나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앞장설 정당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우리의 입장이 난처하다. 그래도 선택은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나마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당이 내세우는 신념이 평가기준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들의 행위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선은 각 정당과 구성원이 지난 4년 동안 입안한 법률과 시도했던 법안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국회는 입법기관이니 그들이 도입한 법률이 성경적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정치적 신념이자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정당의 어느 법과 법안이 하나님의 뜻과 가깝고 먼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만들어진 제정된 법이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따르고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인권을 존중하는가, 약자를 배려하는 것인가 등의 질문해야 한다. 개개인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법들을 모두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절한 연구보고서가 없는 상황이니 주요한 법들이라도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어느 시대에나 여당과 정부는 한 몸이니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는 것이다. 결국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야당이 아니라 여당이 아니겠는가? 위와 같은 기준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정부의 주요 정책 즉 경제정책, 외교정책, 복지정책, 교육정책 등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 평가는 그 정책의 방향이 성경적이었든가, 그 속도는 적절했던가, 성과는 얼마나 있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종합적으로 여당과 정부의 공과를 평가하고 계속 지지 할지 말지를 판단해야 하고, 만일 계속 지지를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야당 중에서 어느 정당이 가장 가능성이 있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역시 말씀이 기준이어야 한다.
4‧15총선은 체제선택을 위한 선거인가?
최근 한국교회의 큰 지도자 중 한 분인 홍정길 목사가 “이번 4‧15 선거는 체제를 선택해야 하는 선거”라고 언급하면서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기독교계 내에서 뿌리 깊은 분열이 표면화되고 있다. 홍 목사의 주장은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이 언급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대적들과 싸우는 자들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모든 선거가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이들과의 체제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체제를 위해 이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 선거가 사회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를 선택하는 선거일까? 우선 용어정리를 해보자. 민주주의의 반대는 왕정 또는 전제정(tyranny)이고, 사회주의 또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반대는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liberalism)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더 강조점을 주며, 공동체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더 강조점을 두는 철학이며 체제이다. 자유주의가 지나치면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극단적 자유방임(extreme laissez-faire)이 되며, 공동체주의가 지나치면 개인을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고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된다. 아마도 사회주의냐, 자유주의냐의 선택이라고 했으면 더 정확했을 물음이다.
그러면 과연 한국사회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인가? 무의미한 질문이다. 오늘날 국가들은 사회주의를 기본으로 하나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나 서로 수렴되는 모습을 보인다. 비록 사회주의나 자유주의 중 어느 하나를 기본으로 하나 다른 요소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의문의 여지없이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나라지만 사회주의 요소도 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 정부에 들어와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이 도입되기도 했고, 스스로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이가 내각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우리나라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국가라는 기본 틀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현 시점을 이데올로기 선택의 순간이라고 보는 것은 과장이다. 그러나 현 정부의 정책이 방향이 옳다고 해도 그 속도가 적절한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아무리 좋은 약도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사용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나날이 심해지는 교회의 분열이 안타깝다. 한국의 오염된 정치계를 바로 보지 못하고 어느 정파의 홍위병 노력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특정정당에는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고, 다른 정당들에는 무조건적인 야유와 저주를 퍼붓는다. 정치권의 명백한 ‘내로남불’에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잣대는 물론이고, 스스로도 동일한 잣대를 가지지 못하는 이들이 지천이다. 이들에게 말씀은 자신의 진영을 보호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영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네 다리는 친구요, 두 다리는 적이다”라는 주문만 외우는 양들과 다르지 않다. 그럴수록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더욱 멀어져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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