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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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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기사는 성령론입니다. 시대마다 신학주제에 대한 관심이 달라졌는데 현대는 성령론이 가장 핫한 이슈입니다. 오순절운동과 오순절파 교회의 거대한 성장이 성령론을 뜨거운 이슈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불건전한 성령운동과 은사운동이 교회를 망치거나 신앙생활을 왜곡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바른 성령론 정립이 필수적입니다. 성령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고, 최종구원의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 편집장

 

 

재 창조자, 성령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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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성령이 하나님인가?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임을 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나는 성령을 믿으며......”라고 고백한다. “성령을 믿으며”라는 간단한 고백이지만 분명히 성령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다. 

 

  그렇다면 정말 실제 생활에서 성령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과 동행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님을 부르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 혹은 “주님!”, “예수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하지만, “성령님!”을 부르며 기도하지 않는다. 평소에 성령님과 대화하며 사는 것 같지도 않다. 어려움을 당해도 성령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라고 안다. 성령님은 성도에게 진리를 생각나게 하고 가르치신다. 또 그 진리로 성도를 위로하시고 도우신다. 바로 그 ‘진리의 영’께서 성령 하나님 자신에 대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워보자.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성도가 그 분을 잘 섬길 수 있다.

 

 

1. 창조에 함께 하신 성령 하나님

 

  성령님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첫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오심으로 지금까지 이 세상에 성도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 이 성령님은 신약시대에만 계시고, 구약시대에는 계시지 않았을까?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이 계셨다.

 

창조에 함께 하신 성령님

 

  성령님은 창조 전에도 계셨고, 세상을 만들 때도 계셨다. 창세기 1장 1-2절을 읽어 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직 구체적으로 우주와 세상을 만들기 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계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의논하시고 토론하시고 결정을 내리셨다. 이 때 성령님도 함께 계시고 의논에 참여 하셨다. 천지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이다. 성부 성자 성령님이 만드신 걸작품(masterpiece)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갑자기 “우리”가 사람과 온 세상과 생물을 만드시겠다고 하셨을까? 하나님이라고 시작하고는 갑자기 “우리”라고 말씀하셨다. 당황스럽지 않은가? 하나님 옆에 다른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여러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은 표현이다. 이 ‘우리’를 천사들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천사가 창조에 참여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우리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지구와 생명을 어떤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성도에게 ‘참’, ‘진리’,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세 위로 계시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께서 함께 의논하시고 사람과 온 세상의 생물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님의 주요 사역으로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적으로 일하시지는 않으신다. 함께 협력하신다. 천지창조에 성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지만, 성자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도 함께 동역하셨다. 다윗도 이것을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여기에서 ‘말씀’은 성자 하나님을, 그의 ‘입 기운’이란 바로 성령님을 의미한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성령님

 

  또 성령님은 온 우주에 계시며 다스리시고 유지하신다. 욥은 그런 성령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욥 26:12)

 

  ‘능력’, ‘지혜’, ‘입김’은 성령님을 말한다. 또 여러 시편 노래를 들어보자.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 147:18)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4)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시 18:8) 

 

  ‘폭풍’과 ‘바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지신 영광의 과시이고 ‘바람’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바람에는 힘이 있다. 해방하고 생기를 주는 힘이다. 동시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파괴적인 능력도 있다. 또 바람은 움직이고 볼 수 없으며 측량할 수도 없으며, 동시에 구석구석 스며드는 파워도 있다.

 

예수님과 함께 하신 성령님

 

  성령님은 성자 하나님과도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마 1:18) 되셨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이 강림하셨다(막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성령님에 의해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시험을 받으신 후 성령님에 충만하여 돌아오셨다(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예수님 스스로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며 성령님으로 충만했음을 증거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일하시며 늘 성령님과 함께 계셨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눅 10:21)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귀신도 쫓아 내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심지어 성령님은 예수님의 부활에도 함께 하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롬  8:11)

 

  이렇게 성령님은 하나님으로 그 활동 영역이 무궁무진하시다. 성령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유지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다. 동시에 성령님은 성자 하나님과도 함께 하시며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케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계시면서 죄의 유혹을 이기며 견딜 수 있었다. 결국 십자가의 잔을 순종함으로 감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성령님은 참 하나님이다. 영광과 찬송을 받으셔야 할 분이다. 성도는 성령 하나님께도 찬송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2. 재 창조자, 성령님

 

  성령님은 창조자이다. 그 창조자 성령님은 이제 세상에 머무시면서 성도와 함께 하신다. 성도의 보혜사 성령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재 창조자이시다. 

 

  바로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밝혀진다.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여러 표적을 보여 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 그 중에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밤에 찾아 왔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 유대 백성들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이끌었던 종교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율법과 그들이 만든 율법의 해설과 규범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걸출한 학자, 가말리엘이라는 분도 있고, 바울은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니고데모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마도 바리새인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니고데모는 아마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뽑혀 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니고데모가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우리’라는 표현은 바리새인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일치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별히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쳐준 사건 때문에 바리새인 가운데 두 입장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부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다른 부류는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니고데모는 후자의 입장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한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곧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인정한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신기한 말씀을 해 주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니고데모는 ‘거듭 난다’ 혹은 ‘다시 태어나다’, 곧 ‘중생’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몰라 다시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다. 사람이 죽어 다시 태어날 수 있나? 한 번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고 신비한 얘기를 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씀은 사실 비밀이다. 니고데모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5-8)

 

  이 말씀을 들어보면 공통점이 있다. ‘물과 성령으로 나다’, ‘육으로 나다’, ‘영으로 나다’, ‘거듭나다’, ‘성령으로 나다’. 모두 하나같이 ‘나다’, 곧 ‘태어나다’, ‘출생하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다’라는 한국말은 능동태이지만, 본래는 수동태이다. 아기는 스스로 태어날 수 없다. 엄마가 아기를 낳아야 태어난다. 낳는 주체가 있고, 태어나는 객체가 있다. ‘태어나다’라는 영어는 ‘be born’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중생’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냥 태어날 뿐이다. ‘영으로 태어나느냐’, 아니면 ‘육으로 태어나느냐’를 인간이 결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생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날 부흥사들이 ‘중생’해야 한다고 자꾸만 부담을 주곤 했다. 중생하기 위해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다. 낳는 분이 있어야 태어날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주문처럼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반복하고 마음 속으로 각오를 해도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세상의 종교는 자기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단들도 인간이 구원을 위해 뭔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로마 천주교회도 인간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가르친다(신인협동). 그러나 중생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성령으로 난 사람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 혹은 ‘영으로’ 태어난다, 또는 ‘성령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육으로’ 태어난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138:14-17)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본다. 성령님은 인간을 영적으로 다시 낳으신다. 중생케 하신다.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때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작정하시고,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심으로 인간을 영으로 다시 낳으신다. 이렇게 거듭나게 하는 일을 성령님이 하신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낳으신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러니, 인간을 낳으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르며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일

 

  이런 성령님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어난다. 인간이 중생을 위해 아무런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바람이 자기 마음대로 부는데, 그 소리를 인간이 듣기는 하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님의 역사가 그렇다. 성령님은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다. 소리를 지르고, 구르고, 넘어지고, 춤추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잠잠히 일하신다.

  신자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었다. 성령님이 성도를 알지 못하는 순간에 낳으셨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성도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낳았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분명 중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래서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님이 성도를 새롭게 낳으셨다. 곧 새롭게 창조하셨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옛날에는 죄인이고, 사탄의 종이며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성령님이 성도를 다시 새롭게 낳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 성령님이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낳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에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 장애물이 없어졌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졌다. 이 놀라운 소식이 바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성도에게 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성도가 자신의 구원과 중생을 위해 한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성도는 어느 날 보니 태어나 있었다. 중생은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성도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기 전에 행하신 일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성도의 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이다.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기쁜 소식’, ‘굿 뉴스’, ‘복된 소식’, ‘복음’이라 부른다. 

 

우리의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한 일 

 

  중생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 성령님의 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반응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2장 23-25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유대인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다(요 2:23).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인간에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믿는 행위가 먼저가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이것이 진리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말씀만 보면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다음 13절을 보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육정+사람의 뜻으로 출생 <==> 하나님으로부터 출생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이 ‘하나님으로부터 난’에서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를 재 창조하셨다. 새롭게 만드셨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중생한 자이다. 이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게 된다. 놀랍고 기이한 창조, 곧 재창조가 성도 가운데 일어난다. 이 진리를 알 때 성도는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다. 성도가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이다. 이 복을 누리자. 날마다 매 순간 성령님에게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리자. 재 창조주 성령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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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8 By개혁정론 Views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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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기획-청년멘토] 불굴의 용사 아타나시우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3 By개혁정론 Views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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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기획-청년 멘토] 청년 아우구스티누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1 By개혁정론 Views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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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토인비, 창조성 그리고 코로나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5.08 By개혁정론 Views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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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당회의 역할과 권위를 생각하다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5.02 By개혁정론 Views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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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전염병은 차별과 혐오를 낳지만...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8 By개혁정론 Views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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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교회는 가현설(假現說)을 경계해야 한다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3 By개혁정론 Views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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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코로나와 두려움: 개방성과 투명성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0 By개혁정론 Views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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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기획-총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래 글은 월간고신 생명나무 5월호에 실린 글로서, 이번 주제인 '총선'과 맞아 저자와 잡지사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 편집장 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권수경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국회의원 선거의 의미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
    Date2020.04.14 By개혁정론 Views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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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기획-총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상상과 정치 참여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14 By개혁정론 Views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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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기획-총선] 그리스도인은 어떤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는가?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09 By개혁정론 Views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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