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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방언

 

이성호.jpg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방언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늘 부담스럽다. 한국교회에서 방언에 대한 논쟁은 쉽게 과열이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이 방언에 대한 논쟁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이유는 방언을 이해함에 있어서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방언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되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내용을 말하다 보니 논의가 서로 엉켜서 나중에는 뭐가 무언지 제대로 알 수가 없게 된다. 이 글은 방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하기 위하여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방언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방언=방언기도?

 

   방언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방언을 일종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거의 모든 방언이 기도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다”(14절)는 표현은 오직 한 번만 그것도 가정법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외에 성경은 전부 “방언으로 말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방언은 기도를 포함할 수는 있겠지만 방언의 주된 형식은 기도가 아니라 설교에 가까운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이 기도의 형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14장에서 말하는 기도는 개인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기도를 말한다. 26절에 분명히 기술하듯이 바울이 14장 전체에서 논증하는 문맥은 개인의 경건시간이 아니라 성도들의 공적인 예배이다. 14장은 사적인 방언 기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면 성경을 따라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성경에서 기도라는 단어를 보면 자동적으로 공적인 기도가 아니라 사적인 기도를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그만큼 현대의 개인주의가 우리의 성경읽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이라고 우기기?

 

   일단 방언에 있어서 기도 보다는 설교가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그리고 기도라고 하더라도 개인기도 보다는 공적인 기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한다면 우리는 방언에 대한 수많은 소모적인 논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이 경험한 독특한 언어적 현상을 방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성경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사적인 방언 기도를 옹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방언이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방언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적어도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그것을 확신하는 근거는 자기 자신이거나 그를 지도하는 교역자이다. 간단히 말해서, 본인이나 지도자가 방언이라고 우기면 방언이 되는 것이다. 일단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방언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성경적 논의가 불가능하다. 이들은 “성경에 방언이 있다고 분명히 말하는데 왜 방언이 없다고 말하는가?”라는 식으로 유치하게 질문을 한다. 논의의 핵심은 방언이 있다/없다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방언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진짜 방언, 거짓 방언, 방언처럼 보이는 이언(異言). 특별히 세 번째 구분이 중요한데 방언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 무조건 방언을 사탄이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방언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잘못되었지만 방언을 사탄이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되었다. 오늘날 일어나는 상당수의 방언은 종교적 현상으로 일어나는 방언처럼 보이는 이언이며 그것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방언의 정의

 

   2절이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듯이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정의이다. 따라서 방언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정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언은 기도를 포함하여 공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방식은 “영으로”이고 말하는 내용은 비밀이다. 최소한으로 이 두 요소를 만족시키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영으로”라는 말은 14장에서 시종일관 “마음으로”(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성으로)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핵심적인 뜻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이다. 또한 비밀은 알 수 없는 신비적 내용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구원의 도리를 의미한다.1) 14장 문맥에서 보았을 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나 통역되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께서 계시한 비밀을 공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방언은 예언과 정확하게 대조를 이룬다.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예언과 방언은 전달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전달 방법에 있어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나타내는 결과도 다르다. 예언은 교회를 세우지만 방언은 자신을 세울 뿐이기 때문이다(4절).2) 방언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과 거짓 방언과 방언이 아닌 이언을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이 진짜 방언이 되기 위해서는 전달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되어야 하고,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통역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통역 없는) 방언의 무익성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14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의도는 예언이 방언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1절에서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14장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방언의 무익성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4장을 통하여 어떻게 하든지 방언의 유익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바울의 주된 의도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은 어떤 식으로 방언의 무익성을 증명하는가? 바울에 따르면 예언과 방언의 핵심적 차이는 “알아들음”과 “알아들지 못함”에 있다. 사도바울은 두 가지를 예를 들면서 알아듣는 것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적 근거이다. 첫 번째 예는 악기이다. 현악기와 관악기는 다른 소리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팔도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면 전쟁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말하는 자가 혀로 분명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21절에 나타나는 두 번째 예이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의 성경적 예를 가지고 방언의 열등함을 증명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적이다.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불신자에게 표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이사야 28장과 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이 전한 계시가 너무 쉽고 평이하다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아시리아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셨다. 즉 방언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표적이었다. 하지만 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이스라엘을 전혀 회심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완악함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경험에서 볼 때뿐만 아니라 이사야의 말씀(이스라엘의 역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사도 바울이 예언을 방언보다 그토록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 중 많은 이들이 방언이 예언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목사의 설교보다 방언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언이 방언보다 낫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은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아듣는 언어보다는 알아듣지 못하는 신비한 언어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대단한 은사라고 생각하였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사고방식은 교회 역사 속에서도 계속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유행했던 영지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성경의 분명한 메시지보다는 잘 알 수 없는 신비적인 특별한 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중세시절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반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지만 신비감과 종교심을 고양시키는 라틴어로 드리는 예배가 더 효과적인 예배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 근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결론: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의 중요성

 

   방언과 관련된 논쟁에서 바울은 이해와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방언이라도 소음에 불과하듯이(13장 1절), 통역이 없는 방언 역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14절).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했으나 “교회에서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 보다 낫다”(19절)고 선언한다. “깨달음”은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을 더 강조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aith seeking understanding)”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맹목이며 믿음이 아니다. 오늘날 반지성주의가 만연한 한국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말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준다.

 

 

 

 


1)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 비밀을 계시와 밀접한 의미로 사용한다(엡 3:3). 또한 골로새서 1: 26-27절을 참조하라.

2) 자신을 세우는 이유는 그 전달하는 내용을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기 때문이다(28절).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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