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환영합니다.
최종편집
기획기사
조회 수 4928 추천 수 0 댓글 0




    이번 기획기사는 구원론입니다. 구원에 관해 관심이 없는 종교가 있겠습니까? 종교인 중에 구원받기를 바리지 않는 이들이 있겠습니까? 신을 믿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의 구원은 다른 어떤 종교의 구원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는 일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주장하면서 구원과 의로움을 성경적으로 새롭게 이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큰 혼란이 계속되고 있기에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관심가져 주시고 널리 퍼뜨려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장 주-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구원

 


김주만.png 

김주만 선교사

(태국 선교사)

 

 

 

       기독교의 구원론과 다른 종교, 특별히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론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정말 성경에 충실한 구원론인지, 아니면 다른 종교와 유사한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의 나라인 태국 선교사로서 기독교의 구원론과 불교의 구원론을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구원론을 가지고 가르쳐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다.

 

천국에 간다 vs 천국이 온다

 

       구원론에 있어서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는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말을 해왔다. 이와 함께, “이 땅은 죄악으로 가득 찬 절망의 곳으로 다 심판의 불로 태워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 잘 믿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영원히 살면 된다.”라는 것이 기본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어 왔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는 세상은 악한 곳으로 고통이 있으며, 이 땅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고 진짜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불교의 가르침(세상은 고통이 있는 곳이다. 세상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집착은 죄다. 이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참선을 통해 도를 깨닫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므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에 가면 된다는 인생관을 낳을 수가 있다. 이러한 인생관은 결국 이 땅에서는 이 땅의 원리를 따르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이원론적 신앙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것이 천국에 관한 선포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4:17)고 선포하신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8)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7: 20-21에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그런 곳 이전에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하는 천국이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의 임함 임을 가르치신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가지게 되는 회복된 관계를 더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죽어서 들어가는 장소 개념 이전에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개념이 더 강하며, 예수님이 바로 천국이라 표현한다. 따라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저 멀리 있는 어떤 장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 개념이 더 강하다. 천국 혹은 하나님 왕국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더욱 강조한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천국의 개념은 나의 윤리적 노력 혹은 은혜로 인해 미래의 어느 순간에 가게 되는 멀리 있는 어떤 곳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받는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들어가는 천국을 말한다. 성경은 열반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관계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신앙 vs 구도자적 신앙

 

       그렇다면 구원론에 있어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기본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미래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도 있으나 많은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 현재 받고 누리는 구원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관련된 신앙 생활의 목적은 이 땅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신앙 생활은 지금 현재 여기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있으며, 우리의 육체와 영혼과 전 인격이 누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기대하며 성숙과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다. 이에 반하여 다른 종교, 특별히 불교는 구원을 받기 위한 구도의 종교이다. 여기서 구원의 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은혜를 통한 구원 vs 대차대조표식 구원관

 

       불교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통상적으로 대차대조표식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필자가 싱가폴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가졌던 비교종교학 리서치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이다. 선과 악의 대차대조표에서 선이 더 많으냐 아니면 악이 더 많으냐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이 난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신앙 생활의 가장 저변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이러한 두려움은 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기본이 된 하나님과의 관계(하나님은 사랑이시라)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불교, 특별히 민속 종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로서의 불교는 신(귀신, 악귀를 포함해서)에 대한 두려움이 그 관계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스도 중심 그리고 은혜 중심 vs 나 중심 그리고 업보 중심

 

       불교는 사실 석가모니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원래 윤회 사상과 업보(karma) 사상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구원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태국) 불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태도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구원에 대한 열망 보다도, 다음 세대에 짐승이나 미물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이들은 명상(참선)이나 선행을 통해 열반에 이를 수 있는 확신이 없으므로, 이러한 궁극적 구원에 대한 열망은 포기하고, 끝없는 윤회의 바퀴 속에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원관은 이 땅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대한 관심에만 머무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구원관을 가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불교인들의 관심은 저 하늘(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다. 즉 미래에 성공을 하여 부자가 된다든지,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든지, 다음 생애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태국) 불교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지금 여기서의 구원도 없으며, 마지막 날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태국의 한 한 학자는 태국의 불교를 업보 중심적 불교라고 말한다. 이것은 결국 불교에서 버리라고 하는 이 땅을 향한 집착을 다시금 소유하게 만드는 구원론이다.

       또한 불교의 구원론의 중심에는 ’(ego-centered)가 있다. 나의 선한 행위, 나의 참선(명상), 나의 노력이 중심에 있다. 믿음, 은혜와 같은 개념은 저급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구원자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다. 구원은 내가 직접 이루어야 한다. 결국 내가 참선을 통해 ’ ()를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내가 신이 되는 것이다. 즉 내가 해탈하여 열반에 들어가 신(대자아)과 합일해야 한다.

       이에 비하여 기독교의 구원은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다(Christ-centered).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고 가르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 속에서는 인과응보적 혹은 대차대조표적 구원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님의 창조물 vs 고통과 저주의 장소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론은 세상은 고통이 있는 곳이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러야 하고, 대자아에 소자아가 합일 함으로 나의 존재는 사실상 소멸되고 대아와 합일을 이루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모든 고통 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땅(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죄로 인해 고통과 슬픔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으므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며, 이 땅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고통에서 벗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나의 자아가 없어지는 합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자아를 소유한 자로서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내가 소멸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몸으로 새롭게 완성된 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슬픔도 고통도 죄도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바른 구원관에 기초한 교육을 위한 제언

 

       구원에 대한 교육에서 은연중에 우리의 선행을 강조하고, 헌금을 강조하고,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나 중심적 구원론을 세워나가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좀 선하게 살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내가 죄인이며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때는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만드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그리고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나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강조하는 것에 있어서도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의 심장은 사랑이지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죄에 대한 경고와 회개를 가르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 단지 미래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기차표 정도로 여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이 땅, ‘여기 그리고 지금에 있다. 따라서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와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현재적 구원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 온전하여지고 완성된다는 미래의 완성된 구원 또한 강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미래의 구원은 현재의 구원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현재의 구원은 미래의 완성될 구원에 소망을 두고 있다.

 

 

< 저작권자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 [기획-부부의 세계] 사모, 그 아름다운 이름

    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Date2020.07.20 By개혁정론 Views1075
    Read More
  2. [기획-부부의 세계] 부부의 신앙 갈등

    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Date2020.07.15 By개혁정론 Views1099
    Read More
  3. [기획-부부의 세계] 중년의 결혼생활

    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Date2020.07.07 By개혁정론 Views795
    Read More
  4. [기획-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 배우자 부정!? 이해한다고 하니 더 미치겠어요

    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Date2020.07.03 By개혁정론 Views821
    Read More
  5. [기획-부부의 세계] 도대체 결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Date2020.06.25 By개혁정론 Views688
    Read More
  6. [기획-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 무엇이 그리스도인 부부를 흔드는가?

    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Date2020.06.18 By개혁정론 Views704
    Read More
  7. [기획-청년멘토] 개혁주의 교회와 목회를 소개한 허순길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6.06 By개혁정론 Views672
    Read More
  8. [기획-청년멘토] C. S. 루이스 같은 변증가가 나오기를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6.01 By개혁정론 Views394
    Read More
  9. [기획-청년멘토] 영원한 청년 렘브란트에게 배운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25 By개혁정론 Views460
    Read More
  10. [기획-청년멘토] 팡세에 나타난 파스칼의 고민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8 By개혁정론 Views776
    Read More
  11. [기획-청년멘토] 불굴의 용사 아타나시우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3 By개혁정론 Views474
    Read More
  12. [기획-청년 멘토] 청년 아우구스티누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1 By개혁정론 Views584
    Read More
  13.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토인비, 창조성 그리고 코로나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5.08 By개혁정론 Views538
    Read More
  14.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당회의 역할과 권위를 생각하다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5.02 By개혁정론 Views918
    Read More
  15.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전염병은 차별과 혐오를 낳지만...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8 By개혁정론 Views373
    Read More
  16.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교회는 가현설(假現說)을 경계해야 한다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3 By개혁정론 Views636
    Read More
  17.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코로나와 두려움: 개방성과 투명성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0 By개혁정론 Views347
    Read More
  18. [기획-총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래 글은 월간고신 생명나무 5월호에 실린 글로서, 이번 주제인 '총선'과 맞아 저자와 잡지사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 편집장 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권수경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국회의원 선거의 의미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
    Date2020.04.14 By개혁정론 Views584
    Read More
  19. [기획-총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상상과 정치 참여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14 By개혁정론 Views581
    Read More
  20. [기획-총선] 그리스도인은 어떤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는가?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09 By개혁정론 Views43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4 Next
/ 24

기획기사

사설
[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