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제목이 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입니다. 교회는 시대속에서 존재하고,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나라를 세우는 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교회와 국가의 관계도 심대한 문제입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모습도 잘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잘 드러내어야 하겠습니다. 이 기획기사를 통해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확인하고, 교회의 나아갈 길을 찾는데 작은 모티브가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장 주
삼위일체 신앙의 회복을 열망하며...
(부제: 한국교회의 신론(일원론)이 과연 과격하고 폭력적인 일부 기독교의 배후에 있는가?)
박강국 강도사
(세종시장로교회)
한국 기독교의 수적 성장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특별한 현상이다. 그런데 성장폭이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는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 최근 코로나19의 위협이 기독교의 침체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꼽자면, 코로나19 확산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방역 지침을 무시한 집회 강행은 이웃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런 강행된 집회로 인해, 소상공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터전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들이 기독교의 침체를 가져오는 하나의 요인인 것은 분명하다.
예배를 비롯한 여러 집회를 강행하려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예배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한 편에 국가 정책에 대한 불신도 있다. 우리는 코로나19의 특별한 상황 가운데 예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느 정도 규범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장로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의 안식일과 예배에 명시되어 있다. ‘부득이한 의무(고백서 21장 10항)’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국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면서 예배를 유지하는 상황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이런 과정 가운데 특정 교회와 열성 단체들은 이런 방역 수칙이 기독교 탄압이라 하여 거부하기도 했다. 뭔가 특별해 보이는 이들의 열심은 국가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했다. 이들 가운데는 기독교의 이념과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권의 이념 간의 대립이라는 틀로 상황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념을 뛰어넘는 기독교를 이념 간 대립에 대한 투쟁으로 변질시키려 한 것이다. 이념 간의 갈등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형태의 말과 행동을 나타나게 된다.
왜 이와 같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형태의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성도의 가치관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성도가 예배에 참여할 때 삶이 변화된다. 특히 설교는 하나님에 관하여 귀로 듣는 시간으로 예배 시간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매주 들려지는 설교는 믿음을 갖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설교에서 선포되고 있는 내용은 어떤 내용인가? 우리는 설교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역, 그분이 하신 구원 역사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듣기보다 주관적으로 해석된 설교자의 훈화 또는 유교적 가르침을 들을 때가 많이다. 성경 본문은 봉독하지만, 그 본문을 근거로 하는 설교보다 자신의 생각으로 치장된 사람의 말을 전할 때가 많다. 그와 같은 설교는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한다. 단순히 주관적인 성경 해석으로 끝나지 않고, 설교가 정치화된다. 설교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사라지고, 정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기독교적인 용어와 혼합되어 가르쳐진다.
기독교적인 용어와 혼합되어 자주 오르내리는 것 중 이념의 잣대들이 은밀하게 녹아 들어있다. 현 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선지자적인 비판보다 이념 기준에 따른 정치적 비판으로 경도되어 있다. 교회 내의 직분자인 목회자의 자격에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라 이념 잣대가 최우선인 경우도 있다. 교회가 앞장서서 이념 잣대로 모든 것에 ‘좌우’, ‘색깔론’으로 편 가르기와 분파주의를 조장한다. 기독교가 모든 가치관을 상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절대화하여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맛을 잃고 발에 밟히는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
설교뿐만 아니라 예배 전체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들려지고, 회중 전체가 삼위 하나님을 부르는 실천적 삼위일체론의 현장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가 갖는 전통적인 약점 중 하나다. 예배 자체가 삼위일체적이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구분이 없는 일원론적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고,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들을 수밖에 없다. 일원론적 하나님이라는 의식은 없더라도, 예배 가운데 길들여진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깊이 묵상하거나 그에 대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기 어렵다. 일원론적 하나님은 홀로 고독하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며,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보다 높이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으시는 분, 곧, 삼위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심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지 못하니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관계성을 흘려보내기 힘들어진다. 각 교회의 예배 가운데 스며들어 있는 신론은 우리의 가치관과 삶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장로교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성부, 성자, 성령 곧, 삼위일체적이다. 하나님 편에서 교제의 방편인 언약을 만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이 초월적인 간극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매워졌다. 예수님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우리는 언약이라는 관계에서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중보자(고백서 8장 2항)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혹은 삼위일체)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구속사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표현은 성경적 교리이며, 우리가 믿는 바의 요약이다. 공교회적 신조로 불리는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론은 이러한 공교회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이면 다 같지 않아?”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론은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참된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치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일원론적 신과는 다른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코 홀로 외롭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고대 교회 교부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관계성을 살폈다. 결코 홀로 계시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홀로 계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발견하면서 성령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들은 기독교가 시작하면서부터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였다. 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 주심은 죄악으로 죽은 우리를 향하여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9).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 이념에 따른 구분이 최우선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민족주의와 혼합되어 변질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맛본 자로서 그 참 사랑을 실천하는 삼위일체론자로 서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드러내셨다. 이 사랑을 본받는 기독교 신자로 살아갈 때 세상은 다시 우리를 향하여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벧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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