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최재호 성도
실로암교회 교인
“십일조 안하면 구원이 없다. 십일조 안하면 암에 걸린다.”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서 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에서 나온 이야기다. 또 다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출신의 한 목사는 “솔로몬이 일천 번 예물을 드려 하늘을 놀라게 하고 하나님의 관심을 끌었기에 응답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여러분도 그렇게(예물로 하나님을 놀라게) 하면 자식이 잘되고 건강해진다”고 설교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한국교회에는 연보(헌금)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이해들이 난무한다. 알고도 짐짓 그리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강단에 선 상당수 목사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해도 너무하다 싶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들은 거의 연보와 관련된 ‘돈 문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화려하고 거대한 예배당 건물, 고액연봉을 받는 대형교회 목사들, 투명하지도 올바르지도 않게 쓰이는 교회재정, 빈부 차별 문제, 의도적으로 왜곡된 설교, 직분을 사고파는 문제, 권징의 편향된 시행 등. 한마디로 돈 문제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영역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
따라서 어그러지고 왜곡된 연보의 원래 의미를 짚어보고 바로 잡는 것은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 있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 오늘날 잃어버린 연보(捐補)의 의미
예전에 한국교회는 ‘연보’란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연보’란 말을 ‘헌금(獻金)’이나 ‘예물(禮物)’이란 용어로 바꾸어 사용한다. 주지하듯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이) 고백적인 의미로 자기 재물을 내어 형제와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다. 헌금이나 예물이라는 용어에 비해 수평적 의미가 강하다. 이웃사랑 혹은 교회 안에서 공평하게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교회를 공평하게 한다는 고백적 의미의 연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재물이라는 수직적 의미가 강한 용어로 변한 것이다.
연보를 드리던 믿음의 선배들은, 일이 잘되고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복이 없이는 우리에게 불행과 재난밖에 올 것이 없음을 고백했다. 동시에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탐하거나, 우리의 능력이나 부지런함을 믿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식을 가졌다. 또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 요행을 기대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께서 베푸시는 것에 자족하겠다는 고백을 담아 연보를 드렸다. 그리고 그 의미에 잘 참여하는 가운데 이를 분배하였다.
칼빈 선생은 『기독교강요』에서 연보에 대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은 우리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위탁물이므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교회 공통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대교회에서는 성찬을 앞에 두고 서가로 입을 맞추며 구제물을 내어놓는 행위를 통해 서로간의 사랑을 선포했다. 의미상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윤리 혹은 박애적 차원에서 구제물을 내놓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수직적 사랑을 알고, 그래서 그것을 받아 거듭난 사람에 의해서 드려진다. 즉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이 자신의 고백을 담아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드린 것이 수평적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연보는 자원하여 드림과 은밀하게 드림의 성격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입은 내게 맡겨진 것들을 감사와 자족의 고백을 담아 드리는 것이며, 또 내게 맡기신 것을 필요한(원래 소유해야 할)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일이므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 것을 내놓는 것이라면 자랑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달하는데 드러내고 자랑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2. 왜 연보의 의미가 퇴색됐는가?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과연 몇 가지의 헌금이 있을까.
어떤 이는 50여 종, 심지어 90여 종의 헌금이 있다고도 한다. 그 많고 다양한 헌금 명칭을 살펴보자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땅 한평 봉헌헌금’, ‘일천번제 작정헌금’, ‘채우시는 축복헌금’, ‘사모님 용돈헌금’ 등. 어쩌다 오늘날 연보 항목이 이렇게 다양하고 세분화되기에 이르렀을까.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 시대 교회들이 그릇된 물량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맘몬”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화와 풍성과 번영, 다수(多數)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거룩함과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입증해줄 가시적 근거(물질과 숫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조사된 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교회 연보는 주로 교회의 운영과 유지(54.8%), 구제 및 사회봉사(18.8%), 선교 및 전도(16.8%), 교육(9.6%) 순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한목협, 「2013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 주목해서 볼 것은 다른 항목에 비해 교회를 운영하고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금액이 눈에 띄게 높다는 점이다. 교회운영 및 유지에 사용되는 금액에서 목회자 생활비(16.9%)를 제외한다고 해도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예배당 건물의 유지비용(혹은 부채상환비용)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많은 한국교회가 빚을 얻어서라도 화려한 교회당 건물을 짓고 연보의 상당액을 건물유지비와 대출금 상환에 쏟아 붇고 있다. 인구가 감소하니 당연히 기독교인 수도 줄어들었는데 예배당 건물은 더 크고 화려하게 짓고 있는 추세다. 사람들이 편리한 시설,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을 충족시켜줄 화려한 기물,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해낼 수 있는 웅장한 건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려면 빚을 얻어야 하고, 매달 돌아오는 막대한 금융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연보를 낼 더 많은 교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이웃교회 교인을 수평 이동시켜서라도 교세를 늘리려 안간힘을 쓴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이같은 노력은 다르지 않다. 연보를 예물과 헌금으로 바꾸어 교묘하게 ‘축복’의 개념과 연결시켰다. 사람에게 쓴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바치고 드려진다고 하면 더 효과가 높았다. 연보의 종류도 90여 개의 항목으로 쪼개고 나누어 더 많은 액수를 내놓도록 하며, 주보에 헌금자 이름을 게시하고 예배시간에 ‘주의 종’이 긴 시간을 할애해 소리 높여 호명(呼名), 광고하고 축복기도까지 해 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연보를 하기 않는다는 핑계로 자원함과 은밀함이란 원래의 의미를 지워버렸다.
때로는 교묘하게 교인들 간에 충성경쟁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교회당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때, 시설을 확충할 때 직분자 선출이나 임직식을 넣어 필요경비를 각출하게 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에는 이미 ‘장로 되는데 얼마, 권사나 안수집사 되는데 얼마 하는’ 식의 직분 사고팔기는 공공연한 이야기가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직분자의 자격은 뒷전이고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얼마인가, 그가 교회재정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가가 먼저 고려된다.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교회의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가 진리 위에 서있을 때에는 교회가 소유한 모든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이라 여겼다. 그래서 감독들은 교회의 재산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거나 낭비하게 되면 피를 범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다. 집사들은 교회의 소유를 마치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것처럼 신중하고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잘못된 목적을 가진 교회의 요구 앞에 나를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것이 아닌 내 것을 교회 앞에 기부하기 때문에 청지기 정신이나 공평케 함이라는 연보의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다. 사역자의 생활과 교회의 유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연보가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당 건축과 화려한 예식이 거행되는 시설의 치장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3.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 연보의 회복도 복합적인 교회의 문제이며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어 해법이 쉽지 않다. 하지만 해답은 당연히 원리에서 찾아내야 한다.
근본은 성경이 계시하는 바른 신학의 회복이다. 연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이가 무슨 고백을 담아 드리는지에 대한 의미를 서로가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목사, 장로, 집사 세 직분이 바르게 세워져 교회적 섬김의 사역이 있어야 한다.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은혜를 바르게 알고 거듭난 자를 교회의 회원으로 받는 절차를 엄격히 해야 한다. 말씀의 기준에서 어긋난 자에게는 합당한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바른 원리를 가르치고 전하여 교회가 복음의 원리와 교회의 어떠해야 함을 잘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연보의 회복을 위해 특히 목사들은 사도교회와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검소한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 당시에는 교회가 사역자들의 생활을 책임지는데 있어, 오늘날처럼 화려함과 사치로 재물을 허비할 정도가 아닌 ‘필요한 것을 채우는 정도로만’ 소유하도록 적절히 지원하였다. 만일 이에 지나쳐 목사가 사치나 과소비를 하면 동료들로부터 책벌이 뒤따랐고 정도가 심할 경우 그 직분을 빼앗기도 했다.
오늘날 대형교회 목사들의 생활비(아니, 연봉)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더하여 각종 편법을 통해 은밀히 주어지는 엄청난 특혜는 그들을 하나의 특권층으로 만들었고 값비싼 집과 차량에 신처럼 떠받드는 교인들의 존재는 실상 서로를 지속적으로 타락시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세 로마교회의 타락상은 전 범위에 걸쳐 일어났지만 특히 교리적 타락, 교권주의자들의 탐욕과 사치, 교회의 화려한 건축과 치장,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잘 알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당시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두렵게 받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연약하고 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막기 위해 교회의 재산을 적절하게 분배하며 구제품을 나누어주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공공자금을 맡은 청지기로서 집사 직분을 교회 안에 세워주셨다. 집사들은 교회의 수입을 원리를 따라 성직자, 가난한 자들, 교회의 건물 수리, 해외와 국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잘 분배해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타락을 막기 위해 집사들은 지나치게 교회당 건물을 거대하고 웅장하게 짓거나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목사에 대해 지나치게 많거나 적은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공교회적 관심과 지원, 살핌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겠다.
개혁교회에서 직분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동등하게 세워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충실히 사역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교회는 바르게 세워지고 든든히 서갈 수 있다. 다른 인위적인 제도개혁이나 구호로는 교회를 근본적으로 바르게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