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다음세대 어떡할 것인가?(1)
한국교회는 지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고신교회가 가장 앞선 2006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어서 기장교회는 2007년, 감리교회는 2009년, 통합교회와 합신교회가 2009년, 그리고 합동교회는 2012년부터 감소세가 시작되었다. 한국교회의 쇠퇴는 몇 백 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교회의 쇠퇴와는 비교할 수 없다. 겨우 개신교 역사 127년인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교인의 감소는 심각한 문제다. 유럽의 교회당 건물이 카페와 이슬람 사원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20-30년 후의 한국교회를 연상케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세대 후의 한국교회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 안에서 교인의 감소 추세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세대 후의 교회는 지금의 어린 아이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사실 그 시대의 책임은 지금 기성세대에게 있다. 지금 우리 세대는 정신을 차리고 늦지 않은 시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당면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다음교회를 책임질 다음세대를 신앙으로 잘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에만 총력을 기울여 왔지만 질적인 성숙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자녀의 신앙교육과 훈련에 총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교인의 수적 증가와 교회의 수적 부흥에만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제대로 된 신앙교육을 하지 못했다. 세속적 성공의 신학이 교회에 만연했고 그런 신앙이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신앙실조(信仰失調)에 걸린 아이들은 세상의 세파와 유혹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만다. 다음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상은 심각하다. 21세기 상황은 예전과 달린 전도가 잘 되지 않는다. 그나마 열심히 전도해 한 영혼은 교회에 대려다 놓으면, 교회 안의 성도의 자녀가 교회를 떠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의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처절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한국교회 다음세대, 어떡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여러 영역으로 다음세대를 걱정하며 대안을 찾아볼 것이다. 먼저 서론적 접근으로 필자의 두 편의 글을 실으려 한다.
웰빙(Wellbeing)의 삶에서 조심해야!
하나님은 신명기(申命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복된 삶을 살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명령하셨다. 언약 백성은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 말씀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신 6:1-3). 실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지만 신명기 6장 10-11절에서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 6:10-11)
“크고 아름다운 성읍”은 오늘날 빌딩 숲으로 뒤덮인 현대 도시를 생각나게 한다.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은 오늘날 ‘LED Ultra Super HD 초슬림형 TV’와 ‘최신 스마트 폰’과 ‘고급 냉장고’와 ‘편리한 식기 세척기’, ‘예쁘고 고급스런 식기 세트’로 가득한 부요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은 많은 수입을 창출하는 IT사업이나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장을 비유한다.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소유해 “배불리” 먹는 삶은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부유한 삶을 암시한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복지국가의 웰빙(Wellbeing)의 삶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살다가 40년 동안 척박한 광야의 삶을 뒤로하고 가안 땅에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 젖과 꿀이 흐리는 땅의 복을 누렸다. 이 복은 그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조심하라”(신 6:12)는 경고였다. 복지국가와 웰빙의 삶을 살 때 조심해야 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세대가 광야에서 고생하며 살 때에는 특별히 조심할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던 시대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였지만, 풍요의 땅 가나안에는 그런 기도가 필요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번성할수록......범죄......”(호 4:7)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심하며 지켜야 할 것은 다음 네 가지였다. 첫째,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12절)이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13절)이다. 셋째,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13절)이다. 넷째,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14절)이다. 웰빙의 삶에서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지침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복지국가의 부요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 매우 시의적절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부요가 오히려 영적인 빈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하는 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점에서 얼마나 조심하고 있을까?
혼합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조심하다’(shamar)라는 단어는 ‘울타리를 쳐 지키다’라는 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가나안 땅의 세속 이방 신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지켜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in the world)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게(not of the world) 살기 위해서는 울타리를 세워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이름으로 확신 있는 삶을 살며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살도록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롬 12:2). 그렇게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이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명기 6장 4-6절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4-6)
그 유명한 ‘쉐마’ 구절이다. 성인 유대인이면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이 구절을 암송해야 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도 유대인들이 암송했다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했다.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적당히 이방 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칠 수 없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에겐 기본이며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6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연애하는 남녀를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연애편지를 받으면 그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 읽고 또 읽어 머리에 암송할 정도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마음에 새기다”라는 말은 본래 “마음 위에 두다”라는 단어를 의역한 것이다. ‘새기다’고 번역한 성경은 중국어 외에는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쁜 번역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읽고 묵상하는 것과 암송을 생각하게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곧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삶, 그것이 바로 조심하는 삶이다.
만약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질 것이다. 다른 종교도 포용하는 관용(tolerance)의 자세를 취하게 될 수 있다. 만약 부모세대가 이 부분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데, 세속적인 가치와 매력을 따라가면서 점점 영적인 가난에 빠져들어 갈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올곧게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
한국교회의 쇠퇴는 위에서 언급한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까? 만약 부모세대가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면 다음세대는 희망이 없다. 물질적으로 번성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에 처할 수 있다. 성경의 역사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사 시대로 돌아가 보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7-10)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 상상할 수 없다. 출애굽 다음세대가 어떻게 이렇게 한 세대 만에 영적으로 몰락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세대가 도대체 어떠했기에 자녀세대에 이런 처참한 상황이 도래했단 말인가? 부모세대는 웰빙의 시대에 조심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며 다른 신들을 쫓아가며 혼합주의에 빠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삶과 자녀들의 학벌과 직장은 대단했고 소위 성공가도를 달렸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하고 빈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다음세대에 나타났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지금 현재 유럽 교회와 미국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도 그런 조짐이 벌써 시작되었다. 부모세대의 세속적 삶이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쳐 점점 다음세대가 힘을 잃고 있다.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다.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교육의 부재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세속을 겸하여 섬기는 부모세대는 신명기 6장 7-9절을 말씀도 실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언약의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 하나님은 언약의 복을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자녀에게 열심히 가르쳐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을 손목에 매고 눈 사이에 붙여 표로 삼았다. 이것을 ‘테필린(Teffilien)이라고 부른다. 손목에 성경 구절이 쓰인 밴드를 감았는데 이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이마에 붙인 성경구절을 담은 자그마한 상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말씀의 선포라고 볼 수 있다. 집 문설주의 성경구절이 가족 식구들을 위한 것이라면 바깥문의 성경구절은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을 향한 선포였다. 이렇게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웰빙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지 않았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가나안의 다른 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니,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할리가 없다. 결국 부모의 신앙이 나태해 지고 나약해 지자,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도 소홀히 하게 되어 다음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사 엘리이다. 그는 자신의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하지 않았다. 엘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자녀들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긴 결과였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보다 자녀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던 방식 그대로 엘리도 걸어갔던 것이다. 혼합주의에 빠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명령을 잊어버리고 실천하지 않음으로 그는 아들도 잃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하나님의 성직자가 이 정도였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언약의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이다. 웰빙의 삶을 살아가는 부모세대인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부모는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을 배우며 그분이 행하신 일을 예배로 찬양해야 한다. 그런 부모세대는 자녀에게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부지런히 교육한다. 신앙적으로 조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녀의 신앙교육은 꼭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점에서 어떤가? 우리교회 다음세대가 가야할 길은 이상이 없나? 더 구체적으로 우리 아이가 가야 할 길에는 이상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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