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신자의 장례입니다. 어느 문화나 마찬가지겠지만 동양문화는 생노병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독특한 축하 및 애도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장례문화는 전통적인 장례문화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상호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이 장례와 기타 애도문화로 인해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고요. 토착화도 필요하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장례에 관해, 그리고 장례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차분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 편집위원장
로마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된 교회적 관행이다.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이 항목을 찾아보면, 이 로마교회의 관습이 연옥(煉獄)교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교회의 반동종교개혁을 제도적으로 확립한 트렌트공의회(1545-1563)는 제25회기에 이르러 연옥의 존재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연옥은 존재하며, 연옥에 갇힌 영혼들은 신자들의 기도에 의하여 도움을 받으며, 특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제단의 희생에 의하여 도움을 받는다.”
신조학자 덴징거는 이런 규정의 역사적 선례로서1210년 교황이 노켄티우스 3세가 개종한 왈도파를 위하여 규정한 내용을 지적한다(Denzinger, Enchiridion, n.373). 이 관례는 서방의 로마교회뿐 아니라 동방교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랫동안 단절 되었던 교제를 재개하기 위하여 동방과 서방의 교회 지도자들이 1439년 피렌체에서 제2차 피렌체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열었을 때, 희랍정교회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한 규정을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렇게 정의한다: 참 되게 참회하는 자들이, 그들이 저지르거나 빠뜨린 죄악들에 대한 합당한 참회의 열매들로써 보속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죽으면, 그들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연옥의 고통에 의하여 정화된다. 그리고 이런 고통에서 건짐을 받기 위하여 그들은 이생의 신자들의 기도에 의하여, 즉 미사와 기도와 시주, 그리고 교회가 정한 관례에 따라 서로를 위하여 수행하는 신자들의 여타 자비의 직무들에 의하여 유익을 얻는다”(Denzinger, n.588).
이 규정을 보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라는 표현 안에 단순히 기도뿐 아니라 그들을 위한 갖가지 선행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교회가 말하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해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로마교회는 이런 관습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직무’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그러한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 한다:
“전승에 따라 교회에서 성인들은 영예를 받으며 그들의 참된 유골들은 존경 받는다. 왜냐하면 성인들을 위한 축제들은 그 종들 안에서 행해진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들을 선포하는 것이며, 신자들이 따라야 할 적절한 모범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들을 그 죄악에서 해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거룩하며 유익한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근거에서 로마교회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공적인 예배 행위로 받아들이는가? 로마교회 신학자들은 다음의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1. ‘성도의 교제’라는 포괄적 기초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성도들은 서로 유익을 주고받는데, 이런 교제는 죽음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로 제기되는 주장이다. 로마교회는 사후에 곧장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 할 수 있는 신자의 기준을 대단히 높게 설정한다. 임종 시에 완전한 거룩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간주한다. 거기서 곧장 따라 나오는 ‘합리적인’ 의문은 ‘그런 극소수의 완전하게 거룩한 자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존전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말인가?’ 혹은 그것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좀 더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조그만 가능성도 박탈당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며 또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과 분리된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과연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연옥(purgatory)의 존재를 ‘합리적인 이성에 따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연옥의 존재를 받아들이면, 그곳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이 땅의 성도들은 기도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성도의 교제라는 기초 위에서 ‘이성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논증방식에 로마교회는 그리스도를 덧붙인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실뿐 아니라, 또한 연옥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나라의 일부인 연옥에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막지 않으신다.”
로마교회의 신학자들도 이런 교리의 성경적 근거가 그다지 튼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연옥 및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한 뒷받침을 우선적으로 특별계시가 아니라 일반계시, 곧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 감정에서 찾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점에서 로마교회가 개신교회 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자랑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전통을 더함으로써 개신교회가 누리지(?) 못하는, 강력한 한 가지 위로의 수단을 더 가질 수 있다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개신교회의 사람들 중에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그와 연관된 ‘연옥’ 교리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는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확고하게 서지 않으면, 그리고 그 계시의 정신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각은 쉽사리 로마교회와 같은 사고방식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성경의 궁극적 권위와 충족성을 강조하는 ‘오직 그리고 모든 성경으로써’(sola et tot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근본적 원리가 올바르고 풍성하게 가르쳐 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게 된다.
2. 성경과 외경으로부터의 논증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시대에 나온 외경들에 이르게 된다. 고전적인 사례로 제시되는 근거는 마카비후서(2 Maccabeus) 12:40-46이다. 기원전 163년 시리아에 대항하여 유대군대를 지휘한 유다tm 마카비우스는 전투에서 죽은 유대 병사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유대병사들은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들에서 신명기의 규정에 어긋나는, 이방 신전에서 노략한 부적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유다스와 그의 군병들은 이 전사한 병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로마교회는 외경들도 영감 받은 계시의 말씀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마카비후서의 이 구절들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뒷받침하는 더할나위 없는‘성경적’ 증거가 되었다. 마카비서를 기록한 ‘영감된’ 그 저자는 이 구체적인 사례에 있어 유다스 마카비우스의 행동을 명백하게 승인하며, 따라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관습을 일반적으로 추천한다고 해석 하는 것이다.
칼빈은 1547년에 ‘트렌트공의회의 행적과 그 치료책’(Acta Synodi Tridentini cum antidoto)에서, 외경의 권위를 인정한 결정과 관련하여 특히 이 마카비서의 영감을 문제 삼았다. 칼빈은 정경의 기록자들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당당하게 ‘선지자 아무개에게 임한 야웨의 말씀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이 마카비서(Maccabees)의 저자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대조한다: “만일 자료들이 아름답고 적절하게 정돈되어 있다면, 나의 소원이 성취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미력하게 혹은 중간 정도로 성공하였다면,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마카비후서 15:38). 자신의 부족함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는 기도와 함께, 그래도 훌륭하고 적절하게 서술하였기를 소원하는 이 마카비서의 저자의 모습은 ‘얼마나 성령의 위엄과 동떨어진 것인가!’하고 칼빈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명백한 성경적 뒷받침은 없으나, ‘함축적’으로 연옥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로 로마교회가 제시하는 구절들은 (1) 복음서에서 마 12:31-32(“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 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 하리라”)과 눅 12: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2) 서신서에서는 고전 3:14-15(“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15: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를 들 수 있다. 이 구절의 해석에 관하여, 사도바울이 성도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미신을 언급한 것이라는 해석 대신에, 문제의 그 관습이 그 자체로 합법적인 것이었고, 사도바울이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 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그리고 딤후 1:16-18; 4:19에 언급된 ‘오네시포루스의 집’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면서 사도바울이 오네시포루스 자신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가 틀림없이 이미 죽은 상태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바울의 기도는 곧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런 구절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특별히 개혁주의 전통에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원리, 곧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되, 명확한 부분들에 근거하여 애매한 구절들을 해석하는’ 접근방식을 따라 바르게 해명하고 가르치고 실천함으로써, 신앙생활의 가장 어려운 부분, 힘든 순간에도 복음의 빛을 따라 갈 수 있는 든든한 기초를 다져야한다.
3. 교회의 전통으로부터의 논증
(1) 묘비에 새겨진 글들 (특히 카타콤의 묘비명)
가장 고대의 근거로 제시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묘비명은 사실상 기도라기보다는 짧은 선언 형식의 글들이다. 많은 경우 그런 묘비의 글들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형식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라는 간단한 소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간혹 공식적인 성격의 기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살아있는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혹은 그리스도께나 심지어 천사들에게, 혹은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에게 청원을 드리는 글들이다.
그런 간구들의 내용 중에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간구하는 것도 이따금 포함되어있다. 어떤 묘비명은 그 묘지의 방문한 사람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기도 한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런 무덤을 방문하여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때로는 묘비에 그들의 기도를 새기기도 하였다. 이런 증거들을 근거로 로마교회는 초대기독교인의 묘비들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옹호하는 압도적인 증거라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보편적인 관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과거의 증거들을 과연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중요하게 대두한다. 네덜란드의 교회사가 루이스 프람스마(L. Praamsma)박사는 카타콤의 묘비명에 나타난 초대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후대의 연옥사상과 뚜렷하게 대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순교자를 기념하고 숭배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건이라는 주장(히 13:7)이 고대 교회 시절부터 대두하여,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무수한 교회적 축일들이 만들어지고 지켜지게 되었지만, 순교기념일 축제, 성유골 숭배, 성인들의 중보기도(代禱, intercession) 등, 그렇게 생겨난 많은 교회적 축일들과 축제들과 관습들은 결국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훨씬 벗어난 잘못된 관습으로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2)고대의 예전들과 교부들의 가르침
로마교회뿐 아니라 동방정교회, 그리고 고대교회의 이단으로 간주되어 로마교회와 분리된 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네스토리우스파, 단성론파 까지도 모두 미사에 죽은 신자들을 기념하는 예전을 가지고 있다. 또한 평화와 빛과 회복을 구하는 기도 및 사죄와 죄악 된 흔적들을 씻어버리기를 간구하는 기도도 종종 그 미사에 포함되어있다. “우리는 참된 신앙 안에서 죽은 모든 신자들을 기념 합니다 …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자신에게로 데려가신 우리의 하나님 그리스도께 간청합니다. 그분의 많은 자비하심으로 그들의 모든 허물이 용서받고 그들의 죄가 사해지기에 합당한 자들로 만드실 것입니다.” 시리아 교회의 예전에 나오는 이 기도는 고대 기독교회의 예전에서 ‘죽은 자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로마교회는 존경 받는 교부들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고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중요한 증거로 제시한다. 대표적인 사례들로서,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의저자이자 최초의 대립교황(anti-pope)으로 여겨지는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c.170-235)와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c.160-220)를 비롯한 초기교부들도 죽은 자들을 위한 공적·사적 기도의 관습을 언급하며 인정하였다. 고대교회 교회론의 발전에 큰영향을 끼친 순교 자키프리아누스(Cyprianus, d.258)도 로마의 주교 코르넬리우스(Corneli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은 다음에도 서로를 위한 기도와 선한 직무들이 지속되어야 할 것을 말하였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우스(Amborsius, 212-250)는 죽은 동생 사티루스를 위한 장례연설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형제적이고 사제적인 제사의 섬김을 자비롭게 받아주시기를 탄원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보편 교회는 교부들로부터 전해지는 이법을 준수한다. 즉 미사(Sacrifice)의 적절한 자리에서 죽은 자들이 기념 될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교제 안에서 죽은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가 드려져야한다”(Serm. Clxxii, 2. P.L., XXXVIII, 936).
그와는 반대로 이런 ‘유서 깊은’ 관습을 반대한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단으로 간주 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증거로 제시한다. 4세기 후반 폰투스의 사제였던 아크리우스(Acrius)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합법성과 효력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그의 견해를 기록하고 논박한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관습이 ‘전통에 의하여 부과된 의무’로 간주하였으며,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관습을 ‘사도들에 의하여 부과된 법’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Hom., iii, in Philip.m i.4, P.G., LXII, 203).
로마교회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이런 증거들을 살펴보면, 우선 이런 관습을 단순히 ‘미신적’이라고 치부하여 간단하게 무시하는 것은 별로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회의 역사에 오랫 동안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관습에 근거한 교리이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확고하게 서서 그런 관습과 교리가 왜 잘못 된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또한 그런 것이 없어도 계시의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와 확신을 누릴 수 있도록 복음의 분명한 메시지를 선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개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고 깊이 깨달은 터 위에서 가능한데, 그 대표적인 역사적 실례를 우리는 1526년의 바덴논쟁과 1528년의 베른논쟁에서 개혁주의 신학자츠빙글리(Zwingli, 1484-1531)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바덴과 베른 논쟁에서 ‘성모 마리아 및 성인들의 중보’에 관한 논쟁
1519년 라이프치히논쟁 이래로 루터의 주된 논적이자 로마교회의 교리의 옹호자로 각광을 받고 있었던 잉골쉬타트 대학의 요하네스에크(Johannes Eck, 1486-1543)는스위스의 종교개혁운동을 잠재우기 위하여 바덴 논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가 제시한 논제들 가운데 세 번째가 바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의 중보사상’에 관한 것이었는데,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개혁의 초창기에 이르면,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사상이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인들의 중보 사상’과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죽은 자를 위하여 이생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옹호하였던 고대교회의 관습이, 이제는 죽어 천국에 가있는 성인들이 땅위의 그리스도인들 및 연옥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해주는 관습으로 발전해 있는 것이다. 고대의 참회의 권징에 기원을 두었던 ‘면벌부’(Indulgence)가 1457년에 이르러 죽은 자들에게도 공식적으로 적용되었다. 로마교회는 공식적으로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해방(absolution)할 권한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죽은 자를 위한 기도’라는 오랜 관습을 활용하여 면벌부를 죽은 자들에게도 이용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바덴논쟁에서 그를 비롯한 로마교회 신학자들은 성인들의 중보사상과 관련하여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압도할 정도로 준비가 잘 되어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마교회 신학자들은 1526년 이전에 이미 성도들의 중보에 관한 새로운 교리를 다듬어 두었는데, 그 핵심적인 요지는 (1) 그리스도의 독보적인(unique) 중보의 직분을 강조하면서, (2) 욥기를 비롯한 성경 본문들에서 증거하는, 다른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사례들에 근거하여, (3) 성인들에게 호소하는 관습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라고 강조하는것이었다. 바덴 회담에 대표로 참석한 외콜람파디우스를 비롯한 개혁파 신학자들이이런 체계적인 논증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 한 반면, 회담장 밖에서 그 논제들을 전해들은 츠빙글리는 ‘살아 있는 성도들’과 ‘이미 죽은 성도들’사이의 차이를 성경적으로 분명히 제시하였다. 바덴 회담에 대한 답변서에서 츠빙글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용해 주신 기도의 대상은 살아있는 성도들이며, 죽은 성도들에 대해서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확실히 선언하였으며, 그러한 관습의 기원과 본질을 따져보면, 신성 모독적인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이미 죽은) 성자들의 중보를 호소하는 까닭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논제와 관련하여 츠빙글리는 성경이라는 진리의 기준과 교회라는 전통적 기준의 차이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교회는 무엇이며, 그 궁극적인 권위는 무엇인가?’ 이것이 2년후 베른 논쟁의 핵심 논제가 되었고, 그 논쟁을 통하여 개혁파 신학자들은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분명한 교리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유명한 베른 10테제의 첫 3가지논제들은 ‘교회가 성경에 의존하지, 성경이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는 근본 선언 위에, ‘참된 구원과 만족은 오직 그리스도한테서 나오며, 따라서 다른 모든 형태의 중보들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해가 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베른 논쟁의 의의는, 그 이래로 개혁파 종교개혁이 든든하게 설 수 있었던 토대로서 ‘오직성경으로써’(sola scriptura) 원리를 실제로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 근본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우리는 로마교회가 ‘인간의 이성과 자연스런 감정’에 입각하여, ‘외경의 증거들에 의하여’ 그리고 ‘유서 깊은’ 전통에 의하여 뒷받침하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교리를 올바르게 배격하여야 한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 제3권 5장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관습을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이것이 교회가 지켜온 극히 오랜 관습이라고 한다… 나의 반대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과거 1300년 동안 있은 관습이라고 항변하나,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하여, 어떤 전례에 의하여 그렇게 했느냐고 반문한다…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합법적인 전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을 감행했는가? 그들은 인간 본성의 약점에 굴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한 일은 모방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베른 논쟁에서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명확하게 선포한 열매가 칼빈의 이 글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아무리 유서 깊은 전통과 관습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의 척도’에 비추어 보아서 분명한 뒷받침이 없으면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다! 이것이 계시의존적인 자세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의 대답이었다.
웨스트민스터대요리문답(WLC) 183문답에서는‘누구를 위해 기도할 것인가’를 묻고 대답하면서, 기도하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언급하는 두 부류들로서 이미 죽은 자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삼하 21:21-23의 다윗 왕의 고백을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아야 할 강력한 증거구절로 제시한다: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 구절은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원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분명한 구절로써 애매한 구절의 뜻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긍휼하심과 더불어 성경은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또한 분명히 가르친다. 다윗 왕의 태도는 신하들에게는 놀랍게 보였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너무나 잘아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개신교 목회자들의 목회적 현실과 성경적인 지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하여 우리는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논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말씀에 붙잡힌 신앙의 선진들이 분명하게 가르쳐 준 유산이 우리에게 풍성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성경적인 교훈을 목회적 현실에 적용하는 일에서는 좀 더 깊이, 그리고 치열하게 묵상해야 할 바가 남아있다.
로마교회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냉정한 교리가, 신앙의 확신 밖에서 사망한 자의 유족들을 위로하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라는 그들의 교리는 소위 자연계시의 기초 위에서 인간의 이성과 감정에 합치하는 것이므로, 훨씬 더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목회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개신교 목사들 중 왕왕 유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혹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까지) 로마교회의 이런 관습에 동조한다. 서울의 유명한 어떤 목사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목회적으로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적용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들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망한 불신자의 가족들에게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목회자는 어떤자세로 다가가야 할까? 일선에서 목회하는 동역자들의 지혜를 서로 깊이 나누기를 기대하면서, 필자는 근본적인 마음자세와 구체적인 메시지 한 가지를 제시하려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신앙
인간적인 접근이 사람의 마음을 잠시 위로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을 참으로 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근본 진리를 우리 마음에 굳게 세워야 한다. 슬퍼하는 마음을 참되게 위로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보혜사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거룩한 계시의 말씀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신뢰해야한다. 당혹스런 질문들이나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을 우리의 제한된 머리로 풀어 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접근 보다는, 위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증거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자세가 더 지혜롭다. 설혹 몇몇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를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불유쾌한 경험이 신실한 복음의 사역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든든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한다. 아우구스티누스교부의 비유처럼, 결국사람들은 우편배달부에 불과한 우리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메시지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장례식에 참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남은 유족들에 대한 위로와 전도의 기회로 적극활용 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간구하고 그분의 지혜의 말씀에 호소해야한다. 이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대처하는 목회자들이 추천하는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메시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다. 앞서 언급 하였듯이,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목회적인 곤란함을 해소하고자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현실에서, ‘거지 나사로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과 부자가 있는 음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우리 주님의 분명한 메시지는 확실한 태도를 갖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비유는 ‘음부에 있는 부자의 간절한 요청’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한다. 이 생에 있는 그의 형제들에 대한 그의 염려는, 신앙 밖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메시지이다. 참된 사랑은 자신의 잘못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답습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주님의 비유에 나타난 이런 마음을 우리는 유족들에게 잘 전달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의 엄중한 답변 역시, 우리가 지혜롭게 그러나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 생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 곧 영생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있다. 심지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증거한다고 하더라도, 이 말씀을 듣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선언은,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우리 주님께서 선포하신 영생의 길이다. 이 길을 타협 없이,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지혜롭게 전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목회 일선에 있는 많은 동역자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지혜를 구하고, 그 결과 어려운 목회적 상황에 적용 할 귀한 교훈들을 풍성히 받아 활용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번 기획을 통하여, 그런 주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는 성도의 교제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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