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신자의 장례입니다. 어느 문화나 마찬가지겠지만 동양문화는 생노병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독특한 축하 및 애도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장례문화는 전통적인 장례문화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상호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이 장례와 기타 애도문화로 인해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고요. 토착화도 필요하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장례에 관해, 그리고 장례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차분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 편집위원장

이성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죽음>
언젠가는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즐겁지 않다. 죽음은 이별과 슬픔의 대표적 상징이다. 이별을 좋아하고 슬픔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전도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전7:4) 전도서의 말씀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태도는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이다. 결혼이 한 부부의 시작이라면, 죽음은 모든 인간의 종착역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겸손해 진다. 이 겸손이야말로 지혜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며 지혜는 종착역을 바라보게 한다.
죽음에 대해서 불신자와 신자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자세도 궁극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입으로는 신앙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단지 한 인생의 종말이라면 그리고 사후 세계가 없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어떻게 될까? 그야 말로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 것이다. 죽은 뒤에 심판이 없다면 누가 선을 행할 것이며 진정한 정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칸트와 같은 대 철학가도 사후 세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우리 경험 밖에 있기 때문에 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신앙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계시된 증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교훈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우리 신앙에 좋은 지침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성경에서 우리가 꼭 알고 믿어야 할 것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죽음에 대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사도신경을 보자. 사도신경에 따르면 모든 신자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몸이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부활을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는 것 비슷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한국교회의 신앙교육이 부실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현대 신학도 부활을 주님께서 가르치신 희생정신의 부활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진정한 구원은 몸에서 영혼이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이 몸의 부활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활이다.
사도신경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사랑의 예수님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심판의 예수님은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정의로운 심판을 기대할까? 바로 이 세상에서 ‘갑질’을 당하며 억울하게 살아가면서 정의로우신 심판장에게 호소하는 믿음의 자녀들이다. 심판의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기가 그만큼 편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은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7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자가 죽을 때 그리스도에게서 얻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신자는 죽을 때, 그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된 채로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안식하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2문답도 죽음에 대한 중요한 질문과 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우리의 죽음은 죄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범죄함을 그치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개혁주의 신조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에서 주의해야 될 표현은 “즉시”라는 단어이다. 신자의 영혼은 즉시 하나님의 영광 속에 들어간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7문에도 이것이 강조되어 있다. “죽음 직후에 나의 영혼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갑니다.” 이 “즉시”라는 표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제3의 장소를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 교리 때문에 강조되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인들이 죽을 때 큰 위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다수 신자들이 연옥에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순간에 신자에게 필요한 위안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연합(Union with Christ)이 얼마나 중요한 교리인지를 잘 인식하게 된다. 소요리문답은 죽음의 순간에 영혼은 말할 것도 없고 몸조차도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안식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답도 사나 죽으나 신자에게서 유일한 위안이 “몸도 영혼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된다. 성령은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와 신자(몸과 영혼 모두)를 하나 되게 하신다. 이 하나됨은 죽을 때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은 사망조차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구원이란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믿을 때 시작된 이 하나됨은 죽음조차도 끊을 수 없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가르치듯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신자에게서 죽음은 영생과 안식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이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들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이 음성을 모든 신자들이 듣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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