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신자의 장례입니다. 어느 문화나 마찬가지겠지만 동양문화는 생노병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독특한 축하 및 애도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장례문화는 전통적인 장례문화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상호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이 장례와 기타 애도문화로 인해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고요. 토착화도 필요하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장례에 관해, 그리고 장례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차분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 편집위원장
<장례의 역사>* RE Vol. 24에 기고한 글의 일부분입니다
모든 문명은 죽음에 대한 그들 자신들의 이해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포함한 장례의식을 발전시켜 왔다. 사람은 불멸을 꿈꾸기 때문에 장례의식이 불멸을 희구하는 예식으로 방향을 잡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고대 이집트의 장례식은 대표적인 불멸의식이었다. 우선 죽은 이들의 시신이 썩지 않도록 내장을 빼내어 말려서 따로 보관하고, 시신은 미라로 만든다. 이 미라를 위한 거처를 따로 마련하여 사후에도 그 시신이 살아가는 것처럼 꾸며놓았다. 음식도 마련해 놓고,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들도 같이 매장하여 죽은 후에 그 사람을 섬기게 했다.
어떤 문명에서는 시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기도 했다. 시신을 잘 매장하지 않으면 그 시신이 평화로이 쉴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방황하면서 살아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곤 했다. 어떤 경우에는 시신에 악한 영이 붙어 살기 때문에 매장을 잘 해 주어 그 악한 영들을 시신과 더불어 지하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떤 문화에서는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시신인지를 알려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시신이 이곳 저곳 방랑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신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의 장례식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의 시신과 관련된 것이 제일 자세한 기록이라고 할 정도이다. 유대인들은 날씨도 날씨려니와 시신이 부정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빨리 처분해야 했다. 사체를 만지는 사람도 같이 부정하게 되었다. 성경 외에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애곡의식이 지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는 사람을 불러서 30일동안 애도하게 했는데 이 사람은 일하지도, 씻지도, 성관계도 가질 수 없었다. 주기도문과 비슷한 장례식에서 읊는 기도가 있었는데 부모와 가족들은 장례식 이후 11달동안 매일 이 기도를 하기도 했다.
고대교회는 로마의 풍습을 따라 매장을 했다. 예수님이 친히 신자의 죽음을 잠에 비유하셨기에 신자들은 죽음의 자리에 소망의 사인을 남겨 놓았다. 로마의 핍박시에 기독교인들이 묻혔던 카타콤이나 다른 매장지들에는 기독교인들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 장치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무덤에 양치는 장면, 물고기, 잔치장면들이나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 소경을 고치는 장면 등을 새겨 놓았다.
고대교회의 장례식은 다섯 가지의 주요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는 입관의식이다. 시신을 씻고 기름을 바른 후 흰 세마포를 입혀 관에 누인 후 기도하는 의식을 가졌다. 둘째는 장례행렬이다. 로마풍습은 장례가 악한 징조라고 생각해서 밤에 장례행렬이 나갔지만 기독교회는 낮에 장례행렬을 가졌다. 산 자들은 흰 옷을 입고 소망의 시편송과 승리의 찬미가를 불렀다. 올리브 잎을 들고 등불과 향을 불태우면서 행렬하기도 했다. 셋째는 시신 주위에서 하는 의식이다. 시신 주위에서 성경읽기과 시편송을 포함하여 찬양과 감사의 예식을 간단하게 가진다. 넷째로 성찬식을 가졌는데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여전히 친교가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시신에 평화의 키스를 하기도 했다. 마지막 다섯째는 매장이다. 시신을 반듯하게 누인 후 매장을 하는데 발이 동쪽을 향하게 했다. 의의 태양이 떠오르면 그들이 부활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무덤근처에서 식사를 하던 로마의 관습을 본받아 장례식사를 하던 관습도 있었다. 로마의 관습에서는 그 음식이 죽은 자들을 대접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고대 기독교인들은 그런 뉘앙스를 제거했다. 당시에 시신의 입에 동전을 물려주는 관습도 있었는데 이것은 시신이 스틱스강(저승으로 건너가는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 카론에게 지불하기 위한 노자돈이었다. 교회는 시신의 입에 성찬의 빵을 물려주는 것으로 이런 미신을 대체했다. 한편 고대교회는 장례식 중 철야기도와 금식,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 갔다. 당시에 유행하던 검은 옷을 입고 지나친 애도를 표하는 것이 비기독교적인 것이라 판단하여 그것을 시편송과 찬미가로 대체했다. 기독교인의 장례식은 슬픔의 예식이 아니라 천국을 기대하는 소망스런 예식으로 바뀌었다.
고대교회에서는 세례받은 이후에 짓는 심각한 죄악들(살인, 간음, 우상숭배 등)의 경우에 공적인 고해를 거치도록 했다. 이런 공적인 고해는 평생 딱 한번만 받을 수 있었다. 그 공적인 고해는 혹독했다. 고해과정 자체가 혹독했을 뿐만 아니라 고해를 거친 사람은 평생 공적인 생활의 제약을 받았고 부부관계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신자들은 공적인 고해를 하겠다고 교회에 밝히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되도록 미루는 것이 좋을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많은 신자들은 공적인 고해를 회피하기 시작했고, 임종의 순간까지 미루었다. 그 결과 중세교회에서는 병자성사가 곧 종부성사(終傅聖事)가 되어 버렸다. 종부성사라고 부른 것은 죽을 병에 걸린 자에게 마지막 도유(extrema unctio)를 베푸는 예식이었기 때문이다.
병자성사, 즉 종부성사는 기름을 붓는 예식이었다. 이미 200년경부터 주교들은 기름을 축성했다. 야고보서 5장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장로를 청하여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면 낫는다고 믿었다. 교회는 신자들이 병에 걸렸을 때 미신과 이교도들의 치유방식에 빠지지 않도록 기름을 축성하여 사용했다. 공적인 고해과정을 밟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축성된 기름사용을 금지했다. 처음에는 신자들이 교회에 기름을 가져오면 그 기름을 축성하고 나누어 주었다. 5세기부터는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에만 기름을 축성했고, 주교로부터만 그 기름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병자성사를 베푸는 일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의무였지만 카롤링거 왕조 시대로 접어들면 병자성사 집행을 주교들에게만 제한시켰고, 축성된 기름사용은 임종을 준비하는 절차로 여겨졌다. 축성시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 기름이었고, 처음에는 사제가 병자의 오관(五官)에 기름을 발랐지만 오늘날에는 이마와 두 손에만 바른다.
중세교회는 장례미사를 성대하게 치루기 위한 갖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철야의식, 레퀴엠, 화려한 장례행렬 등이 그것들이었다. 사제는 교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신자의 죽음을 미사로 치루어 주었다. 사제는 장례식에서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이런 관습들의 근거가 바로 연옥사상이었다. 교회는 연옥사상을 만들어 신자들의 죽음 이후를 대비(?)하게 해 주었다. 교회는 죽은 자의 장례미사를 잘 치루어 주었고,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를 위해 면벌부를 사서 연옥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의무가 있었다. 죽은 자를 위해 애쓴 신자는 자신이 죽은 후에는 산 자들이 자기를 위해 동일한 것을 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이런 미신적인 장례식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개혁교회는 장례식을 가족이나 길드, 혹은 시민정부가 주도권을 가지고 치르도록 맡겨 버렸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를 경우를 보자. 그는 장례식이 정당하게 치루어져야 하고 신자의 믿음을 강화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세례와 결혼 예식문을 만들었지만 장례예식문을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이에 루터교회 내에서 다양한 장례식 양식이 나타나 혼란이 가중되었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도 장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모든 미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으며, 교회뜰에서 목사가 적절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말했지만 장례예식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개혁교회는 장례식을 교회적 직무가 아니라 가족의 용무라고 여겼다. 장례식은 교회가 공적으로 취급해야 할 예식이 아니라 유가족의 문제라고 본 것이다. 대륙의 개혁교회 교회정치에 보면 장례식을 다음과 같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말한다. “장례식은 교회적 직무가 아니라 가족의 용무이다. 그러므로 그에 맞게 치루어져야 한다.” 매정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죽은 자는 이 땅에서의 모든 유대가 끊어지고, 그 이름이 교회회원명부로부터 제외된다. 교회는 오직 산 자와 더불어, 산 자와 함께 일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당시 로마교적인 상황 속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우리의 동양적인 관습에 의하면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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