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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지난 10월 13일부터 16일까지 독립개신교회 강변교회당에서 열린 제5회 개혁교회들의 아시아태평양 대회(Asia-Pacific Conference of the Reformed Churches. 약칭 AP-CRC, 주제: 세례와 성찬)에서 있었던 공개강연에서 발표된 모한차코 목사(인도개혁장로교회)의 논문입니다. 주최측인 독립개신교회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개혁정론에서 소개합니다. 논문이 길어서 2차례에 걸쳐 나누어서 싣습니다.

      개혁교회들의 아시아태평양 대회(AP-CRC)ICRC(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국제 개혁교회 협의회, http://www.icrconline.com)에 속한 교회 중 아시아와 호주, 뉴질랜드에 있는 교회들이 각 지역별로 4년에 한 번씩 서로 교제하고 선교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모이는 회의로, 고신교회도 회원교회입니다.

 

 


Towards a Reformed Understanding of Sacraments

in the Asian Context

아시아의 상황에서

성례에 대한 개혁신앙적인 이해를 도모함(1)

 

Mohan Chacko

모한 차코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India)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성례’의 교리는 줄곧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개혁자들은 성례에 관한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관행에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개혁자들 사이에서도 그 주제에 관한 견해 차이는 심각하였고, 결국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를 쪼개 놓았습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이 교리는 계속하여 교회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과거의 저명한 신학자들이나 신학 전통들이 취하였던 여러 입장들을 개괄한다든지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할 것은 기본적으로, ‘성례들’에 대한 이해를 개혁신앙(칼빈주의)의 전통 안에서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확인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살아가며 섬기는 동안 직면하는 상황들에 대하여서도 잠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성례에 대한 견해들은, 심지어 개혁 신앙의 전통 안에서도 상당히 다양하게 나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들이 시행하고 있는 수많은 성례의 관행들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찬을 시행하는 방식을 봅시다. 여러 교회들은 성찬을 너무 엄정하게 지키다 보니, 성찬 예식을 축하의 자리로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혹은 타인이) 그 자리에 참석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던지면서, 성찬에 참여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교회 회의들은 성례를 얼마나 자주 시행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하는데, 실제 상황을 보면 매주 시행하는 곳에서부터, 매달, 매분기 혹은 그보다도 적게 시행하는 곳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례에 대한 매우 ‘높은’ 관점을 지니고 있어서, 성찬이 있기 전 주일부터 성찬을 준비하면서 보내고 또한 심방 등을 시행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교회는 좀 더 느긋한 태도를 취하는데, 성례를 정기적인 행사 정도로 여기기도 하고 심지어 단 한 마디의 경고의 말도 없이 시행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성찬 상을 엄격하게 울타리로 두릅니다(이로 인해 때로는 구도자들이나 그 교회 회원이 아닌 신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교회들은 성찬의 요소들을 엄격히 지키고(포도 주스는 안 되고 오직 포도주만 사용), 성찬 상에서 봉사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엄격히 정해 놓습니다. 어떤 교회들에서는 떡을 사람들 사이에서 건네주면서 먹고, 회중이 공용 컵 하나로 포도주를 마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행들의 배경에는 성례에 대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 또는 이해의 결핍이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 각각에 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하나씩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성례 전반에 관한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찾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이 질문들 중 몇 가지는 단순히 우리가 다룰 주제를 개괄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몇 가지는 우리의 현 상황에 비추어서 좀 더 고찰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성례란 무엇입니까? 성례는 말씀과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성례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왜 우리에게 성례가 필요합니까? 은혜가 성례를 통하여 역사합니까? 그 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은혜가 전달되는 일에서 믿음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성례를 시행할 때에, 상황에 따라 그 방식을 조정해도 됩니까? 이외에도 몇 가지 질문들을 이 시간에 함께 탐구해 봄으로써 서로 간에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성례들 – 정의와 구분

 

우리가 다루어야 할 첫째 질문은, 성경에서 성례의 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례’(sacrament)라는 용어는 성경 신학보다는 로마의 관습에서 유래하였습니다.[1] 이 단어는 신약 성경(그리스어) 용어인 ‘신비’(감추어진 일들)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에 사용되었고, 그 결과 이 단어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례’는 ‘성경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성례’든 ‘신비’든 성경에서는 세례나 주의 만찬을 지칭하는 데에 쓰인 적이 없습니다.

성경 자체에 그 용어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신학에는 성경에서 유래하지 않은 다른 용어들도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용어 중 하나는 ‘삼위일체’다), 그 용어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성경에 ‘성례’(sacraments)라고 불릴 만한 종류의 것들이 있는지, 그러한 것들이 몇 가지나 되는지 누가 정합니까? 이 점에서 우리의 논의가 다소 임의적이 됩니다.[2] 우리는 그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그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여 왔는가 하는 데에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임의적이 될 위험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성례의 신학을 세워 가고 그 안에서 세례와 주의 만찬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저는 성경에서 표와 상징, 의식 등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성례의 좀 더 좁은 의미를 끌어내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성례를 정의하는 일에서 임의적인 요소를 줄여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뿐 아니라 초대 교회와 심지어 칼빈도 이해하였던 대로, ‘성례’의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를 나타내어 줄 것입니다.

 

계시의 성례적 구조

 

성경에서 우리는 창조와 관련하여 특정한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와 소통하시며 그분의 특별계시를 나타내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에덴동산 자체도 그러한데, 그 동산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고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이 나무들은 동산 안에 눈에 잘 띄게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상징물로서 그 역할을 하는 동안에,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진리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들과 그 실과들은 단지 외적인 상징만이 아니었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실과들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담긴 약속 혹은 경고가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과 사망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 및 그분이 인간과 교제하시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의 성경 계시 가운데서 우리는 그 성격상 ‘성례적’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표징과 상징들을 보게 됩니다. 노아의 무지개, 할례, 절기들, 광야의 바위, 놋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신약에서는 세례와 성찬 외에도, 애찬이나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일, 임직, 혼인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 행위 혹은 사물 이상의 어떤 것을 가리키며, 영적인 의미와 실체에 교감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성례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창조 세계의, 혹은 생명의 통상적인 부분들이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예외적인 목적에 사용됩니다.

2) 창조 세계의 이러한 요소들(나무, 무지개, 돌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심으로써 그러한 예외적인 기능을 지니게 됩니다. 즉 그러한 ‘영적’ 의미 혹은 기능은 원래부터 그것들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부여하시고 혹은 지정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들 안에 자체적인 신성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이러한 요소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약속 혹은 경고의 말씀을 (하나님 혹은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도구로서 작용합니다.

4) 그런데 이 요소들은 단순히 외적으로 상기시키는 존재이기보다는 그 이상이었던 경우들이 많습니다. 즉 그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이나 그분의 사역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엮이어서, 사람의 참여와 행함을 통하여 그분의 약속이나 경고가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게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일은 죄와 사망을 ‘실제로 초래하였습니다’( 3:6-7). 놋뱀을 본 사람은 ‘실제로’ 회복되었습니다( 21:8). 이러한 의미에서 그 요소들은 복의 (혹은 심판의) ‘방도’(means)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례’(sacrament)라는 용어를 좀 더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들 간에 몇 가지 구분은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구분을 할 것인데, 임의적으로 하기보다는 성경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할 것입니다.

 

창조의 상징과 구속의 상징들 간의 구분[3]

 

무엇보다 먼저 ‘창조’의 상징들과 ‘구속’의 상징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나무 같은 상징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그 구조가 성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상징들은 타락 이전의 것들이고, 따라서 구속 이전의 것들입니다. 이 상징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전달되는 통로이기는 하지만, 은혜가 발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4] 우리는 전통적으로 성례를 ‘은혜의 방도’로 혹은 구속과 관련해서 이해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 상징들을 구속의 성례들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이 발표문에서 우리는 오직 구속의 성례들에 한정해서 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창조의 ‘성례들’이 그 기본 구조에서 구속의 성례들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의 구분

 

(구속의) 성례들이 본질상 은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아가 성례들을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의 관점을 따라 구분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며 공급하시는 은혜는, 택하신 자들을 넘어서 인류 전체와 창조 세계 전체에까지 작용합니다. 그분은 햇빛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주십니다. 그분은 불신자들의 병을 낫게 하시고 몸에 힘을 주십니다. 그분은 성신으로 창조 만물에 생명력을 더하십니다. 그분은 죄 많고 반역적인 피조물을 향하여 진노를 최대한 쏟아 부으시는 일을 자제하시며, 이따금씩 심판을 내리심으로써 죄 많은 인간들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손상을 끼치지 않도록 제어하십니다. 이러한 보편적 혹은 일반 은총은 노아에게 주신 약속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약속에서 무지개가 약속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우신 임재를 택하시지 않은 자들에게까지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함께 언약의 다른 복들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방식들로써, 특히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그분의 언약 백성을 대하여서,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다양한 규례들과 상징들, 특별 예식과 일반 예식들을 정하셨습니다.

 

언약의 표징들과 은혜의 실증 간의 구분

 

또 한 가지 구분을 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분은 수백 년간 교회를 괴롭혀 온 당혹스러운 한 가지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정하신 모든 특별 예식과 일반 예식과 규례들이 성례인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례는 몇 가지나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개신교회들은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들과는 다른 답을 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공식적으로, 일곱 가지 성례가 주께서 정하신 것이고 성신의 능력 안에서 교회가 분별하여 정한 것들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5] 7성례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세 부류는 입문 성사(세례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 치유 성사(고해성사, 병자성사) 친교 성사(성품성사, 혼인성사)입니다.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이 일곱 성사들보다 더 많거나 적은 성례를 가르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였습니다.[6] 개신교도들은 세례와 성찬 이렇게 단 두 개만을 성례라고 단언합니다.

왜 두 개만으로 한정하였습니까? 혹은 왜 일곱에서 멈춥니까? 그 답은 성례의 정의에 달려 있습니다. 성례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질문만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성례의 교리와 관련하여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도들 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상외로, 중요한 사항들에 대하여서는 두 입장 간에 상당한 일치가 있습니다. 두 입장은 성례가 1)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7] 2)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혜의 표징이며 3) 신자들에게 은혜를 전달하고 인 치는 것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8] 이렇게 기본적인 면에서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성례들의 숫자에 대한 불일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에서는 대체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셨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성례를 정하는 기준으로서 강조되어 왔습니다.[9]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점에서 동의하면서도 성례의 숫자는 다르게 제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셨는가” 하는 것만으로 두 입장을 구별하는 충분한 기준이 되는지 여부를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좀 더 고찰해 보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규례들을 검토할 것인데 그 하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례에 넣는) 기독교의 혼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가 성례로 보지 않는) 세족식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혼인은 가톨릭에서 성례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도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무지함으로 인해) 혼인을 성례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개신교도들은 혼인이 단지 기독교인들을 위하여서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제정된 창조의 규례임을 바르게 지적합니다.[10]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확증하시는 신적인 제도입니다.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과 신실함 가운데 서로에게 서약하는 신성한 연합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5장에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처럼 혼인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이 성신 충만한 삶의 표지가 되며, 그러한 가운데 혼인은 은혜가 자라나는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같은 본문에서 바울은 혼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설명하여 주는 심오한 신비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제도 안에 성례적인 면들이 분명히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도( 13)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3:14-15). 외적으로 씻는 행위는 내적으로 깨끗게 됨을 상징합니다. 이 행위는 주의 만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안과 밖의 사람을 나누어 놓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13:8). 성례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일종의 ‘식별 표지’(badge)로 작용합니다.[11] 이 행위는 은혜로 사는 삶을, 특히 겸비함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입니다. 따라서 이 행위 역시 성례적인 면들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셨는가 하는 것이 성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의하거나 성례의 숫자를 둘로 제한하는 유일한 요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양측이 성례의 범주에 속한다고 동의하는 성찬과 세례 이외에 교회에서 행하는 다른 의식들, 예를 들면 대중적인 경건함을 표현하는 다른 예식이나 의식과 함께, 위임이나 축복 혹은 헌신과 봉헌을 위해 안수하는 일도 성례로 간주될 수 있습니까? 가톨릭교회는 자체적으로 ‘성사’(sacraments)와 ‘준성사’(準聖事, sacramentals)를 구분합니다. 준성사에는 성례와 비슷하지만 성례에 포함되지는 않는 다양한 행위와 예식들이 해당됩니다.[12] 개신교회도 자신들 나름의 준성사들을 두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서 살펴야 할 질문은, 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다양한 의식과 행사들을 구분하는 일에서, 그리고 성례를 개신교회 자체의 범주 안에서 세례와 주의 만찬 이렇게 두 가지만으로 한정짓는 일에서, 그 정당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구별이 정당하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차적으로 신적(神的)인 장치들로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행위와 제도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응답으로서 신적인 은혜에 화답하고 그 은혜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행위와 제도들이 있습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을 따로 구분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예식들이 은혜 언약의 표라는 사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례는 은혜 언약의 거룩한 표()와 인()이며……” 하고 진술할 때에, 바로 이러한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을 통하여 전달이 되십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은혜를 설명하여 주는 특별 예식과 일반 예식들, 제도들과는 다릅니다. 그 예식들을 시행하는 것은 곧 언약을 재현 혹은 갱신하는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의 약속들을 선포하시고 (재천명하시고), 그분의 백성은 그분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입니다.[13] 따라서 성례들은 신령한 예배의 가장 핵심이며, 본질상 언약 갱신의 예식입니다. 성례들은 참으로 교회의 예식이며, 예를 들어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과 같이 집에서 사적으로 행하는 것이 분명한 예식들과는 다릅니다( 5:14).[14] 따라서 세례와 주의 만찬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 성례들입니다.

 

 

2. 성례들 – 하나님의 보증인가, 우리의 증거인가?

 

성례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인 질문은,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의 행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혹시는 둘 다입니까? 만약 둘 다라면, 어느 쪽에 더 우선순위가 있습니까?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한 사람이 세례의 자리로 나아올 때에 그것이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과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입니까, 아니면 그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약속입니까? 이 질문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만일 세례가 ‘우리의’ 헌신이나 믿음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의지에 대한 보증이라면, 그러한 헌신 혹은 응답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성례들을 은혜의 방도로 보기보다 그저 단순히 규례로서만 대하는 사람들은, 성례를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나타내는 보증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15]

‘성례’에는 언약적인 함의들이 담겨 있습니다. 성례의 성경적 토대를 보더라도 그렇고, 그 용어(sacrament)의 라틴어 기원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성례’라는 용어가 유래한 라틴어 단어는 ‘의무를 지우는 것, 매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사크라멘툼(sacramentum)은 일종의 묶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민사 소송에서 두 당사자는 자신들의 진실성에 대한 금전적 보증으로서 예치금을 내어서 그 소송에 자신들이 매이도록 하였습니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Cornelius Plantinga)의 말에 따르면 ‘매이고 보증하며 표하고 인 친다고 하는 말들의 함의’는, 신자들을 그리스도께 매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표하도록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16]

우리가 (앞에서 주장한 대로) 성례의 언약적 성격을 따른다면 성례들을 본질상 하나님의 보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보면 쌍무적이기보다는 일방적(monergistic) 혹은 편무적(unilateral)입니다. 이 점은 특히 창세기 15(하나님께서 홀로 맹세하심)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며, 더욱 중요한 본문은 할례의 언약이 세워지는 창세기 17장입니다. 이 언약들에서 일차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행하시려는 일들에 관한 것이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행하여야 할 의무가 일차적인 것은 아닙니다. 개혁 신앙이 성례에 대하여 이해하는 내용 안에는 바로 이러한 강조점이 여전히 존재합니다.[17]

이러한 개혁 신앙의 균형 있는 관점이 아시아에 있는 우리의 신앙과 실천을 위하여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을 집중 조명하는 것은 적절한 일일 뿐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제가 관찰해 본 바로는, 침례교도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서 아르미니우스와 츠빙글리의 신학이 성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세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수단이라는 점을 아이의 부모들에게 지적해 주는 일을 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의무로 짐을 지우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찬양하며 기리는 행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녀를 믿음의 순종으로 양육할 이 즐거운 의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언약의 한쪽 당사자를 강조하면 또한 우리가 성례를 ‘은혜’의 방도로 보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언약에는 ‘약속’과 ‘경고’의 말들이 붙어 있습니다. 성경의 언약이든 성경 밖의 언약이든, 언약이 체결될 때에 우리는 거기서 약속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경고 혹은 저주의 말도 함께 보게 됩니다. 세례와 할례는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11). 주의 만찬에도 심판의 요소가 있습니다. 이 점은 바울이 성찬에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일에 관하여서 가르치는 데에서 잘 나타납니다(고전 11:27-29). 그런데 이러한 구절들을 보면서 우리 안에는, 특히 성찬과 관련하여, 성경적이지 않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즉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의 의가 어느 정도 상당하게 있을 때에라야 성찬에 참여함을 허락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신뢰하는 많은 신자들이 행여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실까 염려한 나머지 성찬에 참여하기를 주저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할 위험성은 우리 모두에게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참된 신자들이 성례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 (혹은 나아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당연히 목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태도가 결국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신학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에 ‘함께’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겠습니까? 그 해답은 경고 혹은 저주의 요소를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경고의 말씀이 그리스도께 이루어졌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언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한) 일방적인 은혜의 행위이며, 복‘과’ 저주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합당하게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의 무가치함을 인식하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완전무결한 의복에 우리의 넝마 같은 선행의 조각들을 붙여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은 우리를 위해 전적으로 ‘은혜’의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개혁 신앙의 전통 안에도 주의 만찬을 은혜의 잔치로서 즐겁게 참여하는 대신에 오히려 율법주의가 그 자리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찬이 거행되는 동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상기하기보다는 우리의 죄악들과 무가치함을 상기하는 데서 더 안정감을 얻곤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오직 회개와 겸비함 가운데서만 성찬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성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우리의 추함에 시선을 두지 않고 오히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기리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행위를 이처럼 강조한다고 해서 사람의 응답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언약이 지니는 성격에 해당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15:6). 아브라함의 믿음은 은혜를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믿음의 응답은 은혜의 약속을 전제로 하며, 그 반대가 아닙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인간의 반응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존 칼빈의 성례론에는 이러한 균형이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성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례는) 주께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선하신 뜻이 담긴 약속들을 우리의 양심에 인 치시는 외적인 표징입니다.……그러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과 주의 천사들이 임한 가운데 그분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칼빈은 더 짧게 정의하기도 합니다. (성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이고, 외적인 표로서 확증된 것이며, 거기에는 그분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피차 증거됩니다(『기독교강요』,4.14.1).[18]

성례의 유효성과 관련하여서 믿음이 담당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사효적 효력’(事效的, ex opere operato)이라는 개념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이 용어는 “지금 시행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하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성례는 시행되는 그 행위 자체 안에 효력이 들어 있어서, 받는 사람의 편에서 어떤 장애물도 없다면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19] 이러한 견해에 맞서서 개신교도들은 성례의 효력이 인간의 믿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신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신 결과인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만약 성신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그 성례는 햇살이 장님의 눈 위를 비추거나 혹은 소리가 농아의 귀에 울리는 것 이상의 효과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성례는 성신의 능력이 없이는 조금도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기독교강요』,4.14.9).

도널드 베일리(Donald Baillie), 성례가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작용한다”(믿음에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하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20] 이러한 구도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의 행위로서의 믿음이 아니라(물론 믿음에 그러한 것이 있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효력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칼빈도 1538년에 작성한 요리문답에서 성례가 “우리 믿음의 발휘”라는 점을 좀 더 크게 강조합니다만,[21] 믿음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은혜를 받기 위해 사용되는 인간의 의지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유익 가운데 하나로서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1) 라틴어 새크라맨툼(sacramentum) 분쟁에서 당사자가 법정에 맡기는 공탁금의 총계를 가리키는 용어다. 분쟁에서 패하는 사람의 공탁금은 몰수되어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또한 용어는 군사가 맹세하는 충절의 서약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2) 베르까워(G.C. Berkouwer) 교수는 성례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성경에는 특정 성례들로부터 보편 개념으로서의 성례를 유추해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론을 다루면서도, 결국 성례에 대한 보편적인 논의를 시작하기로 정한다. G.C. Berkouwer, The Sacraments (Grand Rapids: Eerdmans, 1969), 9-10. 신약 학자인 배럿( C.K. Barrett) 반대 방식을 따른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신약 성경에서 어떤 성례라도 실제로 말하고 있는가? 질문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답하기보다, 그는 성례 신학이 형성되기 이전 시대인 초대 교회의 전례(典禮)들에 대한 연구를 택한다. 우리는 신약 이후의 시대에 형성된 성례관에서 논의를 시작해서는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임의성이라는 문제를 피하지는 못한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세례와 성찬에만 국한시킨다. 그는 이러한 선택이 임의적이지 않고 오히려 흔히 성례라 불리는 다른 것들 중에는 신약 성경이나 초기 기독교 문헌들 가운데 그에 상응하는 것이 거의 없다 주장한다. C.K. Barrett, Church, Ministry and Sacraments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5), 57. 찰스 핫지(Charles Hodge) 전혀 다른( 정교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나간다. 단어의 기독교적 의미에서 성례라는 개념에 도달하는 유일하게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방식은, 모두가 성례라고 인정하는 의식들을 가지고서 그것들을 분석함으로써 본질적 요소 혹은 성격이 무엇인지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범주를 가지고서, 그와 같은 성격을 발견할 없는 다른 모든 인간적인 혹은 신적인 의식들을 배제하여야 한다. 달리 말하면, 세례와 주의 만찬은 모두가 성례라고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것들이며, 다른 모든 의식은 성례의 본질적인 특성을 가지고서 평가하고, 평가를 충족시키지 않는 모든 것은 배제한다는 것이다.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repr. 1977), III:487.

[3] I am using the word symbol in a general sense. Strictly speaking, a sacrament is more than a symbol. Actions such as pouring of water or breaking of bread are essential to sacraments.

[4] Some theologians talk about grace before the fall. But it is more accurate to see grace as a redemptive category.

[5]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Second Edition (Vatican: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4), $1117. Hereafter CCC.

[6] Jacques Dupuis, The Christian Faith in the Doctrinal Documents of the Catholic Church, 7th ed. (New York: Alba House, 2001), 564.

[7] 구약의 성례들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하나님 그리스도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표현을 사용한다. 신앙고백서에서는 성례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 것이라 말한다(27 1). 그런가하면 소요리문답에서는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92)이라고 정의한다. 성례와 관련하여 독특한 점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성례를 통하여 주어지신다는 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8] 성례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혜의 유효한 표징이다. 성례들로써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분배된다. CCC(가톨릭 요리문답), $1131.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정의하는 것과 비교해 보시오. 성례는 복음 약속의 눈에 보이는 거룩한 () ()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성례가 시행될 , 하나님께서는 복음 약속을 우리에게 훨씬 충만하게 선언하고 확증하십니다.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신다는 것입니다(6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도 이와 비슷하게 성례를 정의합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이고, 예식 가운데 그리스도와 언약의 유익이 눈에 보이는 표로써 믿는 사람에게 표시되고 쳐지며 적용됩니다(92).

[9]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에서 제정하신 성례는 가지……뿐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4). 비슷하게 네덜란드 신앙고백서에서 33조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제정하신 성례의 수로 충분합니다. 성례들은 가지인데……. 벌코프에 따르면 성례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와 성찬 이렇게 가지 성례만을 제정하셨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따라서 다른 것들은 성례가 아니다.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39; repr. 1982), 620.

[10] 혼인이 참으로 일반 은총의 성례임을 보여 가지 사례를 이야기할 있을 것으로 본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서, 예식문이 말하듯이 자녀의 출산을 위하여……죄의 해결책으로서, 그리고 간음을 피하기 위해, 사회를 위해…… 제정하신 것입니다. 혼인의 가지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목적을 가리킨다. 신자들에게는 혼인이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듯, 성례는 교회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 간의 차이를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271) 것이다.

[12] 준성사는 성사와 유사한 성스러운 표징들이다. 준성사는 효력들을 표시하는데, 특히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얻게 되는 신령한 효력들을 표시한다. CCC, #1667-1668.

[13] 케빈 반후저(Kevin Vanhoozer) 말하듯이, 성례란 신적 드라마가 연출되는 예식이다. 과거의 사건이 재현되고 장래의 일이 리허설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재현과 장래 일의 리허설은 지금 현재의 일로서 이루어진다. The Drama of Doctrine: A Canonical-Linguistic Approach to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412.

[14] 따라서 개혁 신앙고백서들이 성례를 기념하는 일에 규제를 것은 적절한 일이다. 성례는 복음 사역자에 의해 시행되어야 하고, 사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회합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등의 규제를 두었다.

[15] 츠빙글리와 바르트,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16] Cornelius Plantinga, Jr., A Place to Stand: A Study of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Grand Rapids: Bible Way, 1981), 114.

[17] 다니엘 하이드(Daniel Hyde) 자신의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해설서에서, 츠빙글리 등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성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맹세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맹세임을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With Heart and Mouth: An Exposition of the Belgic Confession (Grandville, MI: Reformed Fellowship, Inc., 2008), 442.

[18] 칼빈에 따르면 성례는 또한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징이기도 하다. 충성의 서약으로 우리를 그분께 매어 두는 일종의 충성 맹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언약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성례는 믿음을 촉진하고 세우며, 그리고는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게 한다(『기독교강요』 4.14.19).

[19] 그러나 가톨릭 요리문답의 관점은 전적으로 마술적인 이해는 아니다. 성례의 효력을 그리스도와 성신의 구원하시는 사역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례를 받는 사람의 성향 성례를 받은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다음을 보시오. CCC, #1128. 로마 가톨릭의 트렌트 공의회(1547) 사효적 효력(ex opere operato) 배격하는 자는 누구든 저주를 받을 것이라 선언하였다. Jacques Dupuis, The Christian Faith in the Doctrinal Documents of the Catholic Church, 565.

[20] Donald M. Baillie, The Theology of the Sacraments and Other Papers (London: Faber and Faber, nd.), 53. 강조는 저자의 . 칼빈은 트렌트 공의회의 조항에 반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성례에서 믿음을 분리시키는 자는 마치 몸에서 영혼을 분리시키려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Tracts and Treatises, vol. 3, as quoted by I.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142.

[21]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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