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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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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기사는 '통합, 그 이후'입니다. 지난 제65회 총회에서 고신총회와 고려총회가 역사적인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통합은 개교회 차원에서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로의 고백과 신앙을 확인하다가 통합에 이른 것이 아니라 총회 임원회를 중심한 통합추진위가 노력하여 전격적인 통합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과제를 많이 남겨놓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려측 교회들의 지나온 걸음들과 상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통합 이후의 과제에 대해 차분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번 기사는 고려교단의 형성과 분열에 관한 역사로 2회에 걸쳐 나누어 싣습니다.  -편집장 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교단의 형성과 분열(1975-20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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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초원교회 담임목사)

   

        1884년 알렌 선교사가 입국한 이래 한국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장로교회의 경우 1901년에 평양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1907년에는 독노회가 출범되고 1912년에는 총회가 결성되어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장로교 총회는 단일총회로 존속해 오다가 해방이후 신사참배 문제로 1차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1946년에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고 이를 기초로 하여 1952년에는 고신교단 독노회가 1956년에는 마침내 고신총회가 결성된다. 고신교단은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로 내홍을 겪다가 마침내 1975년에 교단분립까지 경험하게 된다. 이때 생성된 교단이 반고소고려교단으로 후에 고려로 명명한 교단이다.

        고려교단은 고신교단이 취약함을 보였던 수도권에 포진하면서 나름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석원태 목사라는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지도력이 독선적이고 획일적인 지도력으로 나타날 때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심각한 내홍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고려교단은 분열을 거듭했고 마침내 2015년 고려와 고신교단은 각각 65회 총회를 통해 통합에 이르게 된다. 필자는 고려교단에서 1990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1년 동안 목회를 했다. 2001년에 고신교단으로 와 14년 간 목회자로 살았다. 게다가 한국교회 역사에 관심을 가진 학도여서 고려교단의 형상과 성장 그리고 분열과 고신교단과의 통합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간단하게나마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려교단의 형성

 

1. 1950년대의 교권적 대립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는 고신, 합동, 통합, 기장 등으로 분열됨에 따라 한국 장로교회는 분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각 교회와 노회와 총회뿐만 아니라 각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의 교단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신교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쟁의 핵은 예배당 점유권의 문제 등 재산상의 문제였다.

  고신교단이 공식적으로 조직되기 전인 1951 5월 기존 경남노회 유지재단 이사장 김길창 목사는 부산 초량교회(한상동 목사 시무)와 마산 문창교회(송상석 목사 시무) 그리고 영도, 진주, 거창 등 5곳 교회에 대하여 예배당을 총회의 명의로 명도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1]

  이 명도 소송과 관련하여 고신교단 안에는 현격한 견해차가 나타났다. 당시 고신교단의 지도자였던 한상동은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개척함으로 결과적으로 건덕론의 입장을 보였다. 또 다른 지도자인 송상석은 마산문창교회를 중심으로 법정 소송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자로 인정받았던 박윤선은 송사불가론으로 성경적 신학적 원리를 천명했다.

  한상동 목사가 송상석 목사의 법정소송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여 박윤선의 입장을 취했다면 교단은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으로 일관성을 보여 신사참배를 반대한 전력과 연장선상에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목사는 교단을 이끌면서 표면적으로는 송상석 목사를 지지하지 못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송 목사의 소송 응소에 힘을 실어준 격이 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소송을 피하고 예배당을 비웠기에 건덕론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송상석을 상대로 법정 소송함으로 한상동은 건덕론에서 송사정당론의 입장을 표명한 셈이 되었다.

  1957 9 17일 부산 남교회당에서 모인 제7회 총회에서 당시 경기 노회장 고흥봉 목사의 명의로 예배당 쟁탈전은 비 성경적이므로 중지시켜 달라는 건의안이 상정되었고 총회는 이를 정치부에 맡겼다.[2] 그러나 노회는 이들의 반고소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행정을 보류한 반고소 지지자들은 총회로부터 이탈했다. 

  이 당시 고신교단의 지배적인 견해는 소송을 반대하는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상황에서는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 문제에 대하여는 명확한 결혼을 내리지 못하여 불협(不協)하면서도 화협(和協)하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반고소 논쟁에 대해 성경적인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 결국 1970년대에 고신교단의 또 다른 내분의 불씨가 되었다.

 

 2. 1970년대 고신교단의 내분

 

  7(1957)와 제8(1958) 총회 이후 고려파 교회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앙과 행위, 즉 교리와 행정의 불일치에서 기인했다. 이런 와중에서 박윤선 박사는 급기야 총회에 총회행정의 불법성을 항의하였고[3] 마침내 그는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한상동 측이 건덕론에서 송사정당론자로 변해있었고 오히려 송상석은 송사 정당론자에서 불가론자로 입장을 바꾸었다. 송상석은 1950년대와 같이 교단이 다른 경우는 불가피하게 송사 정당론을 취할 수밖에 없으나 1970년대와 같이 동일교단일 경우에는 치리회가 같으므로 내부에서 처리하고 사회법정 소송은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당시 한상동은 고려신학교 학장을, 송상석은 이사장을 맡아 각기 교단의 중책을 감당했다. 한상동은 부산노회에서 송상석은 경남노회에서 일정 부분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역학적 구도 속에서 한상동과 송상석은 교권쟁탈전에 휘말려 결국 법정소송까지 이르는 불씨를 배태했다.

  1973 23회 총회에서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이 불가하다고 가결했으나[4] 불과 1년 만에 총회는 번복하여 소송이 가능하다고 가결했다.[5] 이처럼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이 가하다고 결정되기까지는 그 원인이 바로 고려신학교 교수회 명의의 신학으로 본 법의 적용 문제란 논문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논문은 신자 간에 교회법을 무시하고 불신법정에 제소한 것이 합당하다고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격이 되었다. 결국 불신법정 소송을 정당화하고 제24회 총회의 결의를 얻어내는데 공헌을 한 셈이 되었다.[6] 이것이 바로 고신 교단에서 반고소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며, 이로써 25년이나 지켜오던 고신교단 본래의 정신, 곧 불신법정 소송은 성경적이 아니며 신앙적인 것도 아니며 건덕상 유익된 입장이 아니라던 그 사상은 완전히 변질되어 불신법정 소송은 때에 따라 정당한 것으로 결론짓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에서 석원태 목사는 1974 9 18일「고려파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과 소송건」이라는 개인문서를 통해 고려신학교 교수회 명의의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라는 논문은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고, 이 문서를 제23회 총회 일주일 전에 전국 교회에 보내어 총대들은 사전에 본 건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참석하게 되어 제23회 총회에서 이미 진행하고 있던 소송을 중지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실제로 1975 10월 경기노회 하찬권 목사가 불신법정소송 문제에 대해 쓴「기독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연구」라는 논문이 신학교와 교단의 호응을 얻었으나 그가 경기노회에서 제명당할 때에는 석원태 목사는 반고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하목사와 함께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불신법정 고소 건에 대한 석원태 목사의 견해는 일관성이 없음을 보인다.[8]

 

3. 경기노회 행정보류와 반고소 운동의 태동

 

  24회 총회 결의와 고려신학교 교수회 명의의 논문에 대하여 경기노회에서는 크게 항의하고 일어났다. 반고소 건으로 인해 하찬권 목사 이전에 박윤선 목사가 1958년 제8회 총회시 총회행정의 불법성을 항의하고 교단을 떠나가기까지 했다. 석원태는 1974년의 소 문서를 통해 반고소의 입장을 밝혔고, 1975 8 17일 주일 오후예배 직후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경향교회 공동의회에서 고신 교단 제24회 총회 결의 제33항인「성도간의 불신법정 제소건」에 대해 이 결의가 고린도전서 6:1-11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석 목사는 이 사건으로 고신 교단의 여하한 분열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예기되는 지 교회의 불화를 방지하기 위해 고전 6:1-11에 대한 바른 해석이 나올 때까지 당회장 목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시에 본 노회와 잠정적인 행정보류를 하도록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석 목사는 공동의회 후 경향교회보 3면에 개인의 의중을 밝혔다.[9]

  석원태 목사는 이처럼 성명서까지 발표했으나 하찬권 목사가 친술에서 주장한 대로 하찬권 목사가 노회에서 반고소 사건으로 제명을 당할 때까지도 침묵하고 있다가 1975 3 12일에 석원태 목사가 최영구 목사를 구타한 사건[10]으로 노회에서 제명을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뒤늦게 반고소의 명분을 들고 나온 것이다.

  경기노회가 행정보류까지 하게 된 반고소 사건의 발단은 제41회 경기노회에서 시작되었다. 1975 3 5일 제41회 경기노회가 서울 성원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때는 교단내의 소송사건으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고려신학교 교수회 명의의 논문에 의거하여 신임이사장인 김희도 목사의 민사 및 형사 소송이 부산지방법원에 제기됨으로 고신 교단은 분열의 위기에 있었다.

  신자간의 고소문제에 대한 교수들의 논문에 대해 누구하나도 반론을 제기 하지 않았고, 불신 법정 하에 소송을 제기한 사실에 대해서도 아무도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발언한 이는 하찬권 목사였다.[11] 이 일로 인해 노회는 정회되었고, 다음날 노회가 속회되었다. 그때 하 목사는 이사장에게 무엇에 의거하여 신자대 신자가 교회의 법을 일체 거치지 않고 불신법정에 민사 및 형사고소를 하였습니까?라고 질의하였다. 이에 고려신학교 교수인 오병세 교수가 그 답변을 하겠다고 말했고 오병세 교수는 자신이 쓴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라는 논문을 그대로 읽었다.

  그러자 하 목사는 그 논문에 대해 구약시대는 신정국가로서 불신법정이 없었으니 해당사항이 없고, 신약시대의 바울은 신자대 불신자였기 때문에 불신법정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했다. 표준문서의 경우에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원문을 가지고 반박하였고, 헌법은  해당사항이 원문에서 잘못 번역되고 빠진 것도 있다고 반박하였다.[12]

  다음날 노회장인 민영환 목사의 사회로 속회되었다. 이 일 이후로 하찬권 목사에게는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13] 그 날 노회가 끝나고 하 목사는 노회장에게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하고 다음날 4시간의 발언권을 주겠다는 노회장의 약속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경기노회가 진행되는 중 하찬권의 언권은 제한되다가 노회가 폐회되기 직전 발언권을 얻었으나 폐회시간이 15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 말할 수 없고 7일 내로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 문제가 잘못되었다는 책자를 발행하여 전국교회에 발송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자 노회에서는 소송문제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서면으로 보고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위원장에 하찬권 목사, 위원에 박성호, 석원태, 김만우, 정승벽 목사 등 5인이 선정되었다. 이 위원회가 연구하여 발표한 것이 바로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에 대한 연구보고이다.

  하찬권 목사는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연구」라는 책자를 7일 내에 발송하겠다는 약속대로 6일 만에 교파를 초월하여 장로가 있는 교회에 발송했다. 

  고려신학교 학생회는 하찬권 목사의 소책자에 대해 교수들이 왜 항변하지 못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했고, 반고소 문제는 전 교회적인 문제로 확산되었다. 하 목사는 함안지방 20여 교회 연합제직회 집회, 김해중앙교회 집회(박유생 목사시무), 서울영천교회 집회 등 여러 지방 교회 혹은 연합집회를 인도하면서 자신의 반고소 입장을 천명해 나갔다.

  이러한 반고소가 성경적이라는 지지에도 불구하고 총회에서는 하 목사의 치리문제를 거론하였고, 마침내 부산 남교회에서 열린 제25회 총회(1975. 9. 25)는 하찬권 목사를 치리하기에 이르렀다. 그 치리내용은 l년 간 공석에서의 발언권 중지였다.[14]

  1975 10 7일에 제42회 경기노회가 다시 개회되었다. 이 노회에서는 하목사를 치리하였다.[15] 하 목사는 발언권중지로 인해 발언을 할 수 없게 되자 큰소리로 성경을 자르고 성경을 치리했으니 여러분이 정죄한 성경으로 노회와 총회를 정죄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노회는 즉시 재판정으로 바뀌어 하 목사에 대해 총회지시 불복, 노회 질서 문란, 총회 및 노회 정죄 등을 이유로 무기정직을 내렸다. 노회법에 따라 다음 날 아침 임원들이 하 목사를 찾아와 권면하였으나 하 목사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은 성경에 어긋난다는 점은 변함 없다. 발언권도 주지 않아 육성으로 크게 나의 주장을 하고 행정보류를 신청했는데도 재판정을 연 것은 말도 안 된다며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자 임원들은 돌아가서 하찬권 목사를 제명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반고소 주장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하찬권 목사 혼자 노회에서 투쟁하다가 제명됨으로 일단락되었다.[16]

  10 8일 경기노회가 속회되었다. 하찬권 목사가 제명 될 때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최영구, 김주락, 오주영, 김주오, 박성호 목사 등이 반고소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행정보류를 선언하였고 노회를 탈퇴하였다.[17] 

  이 노회에서는 최영구 목사 구타 건으로 석원태 목사 치리 건이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하였다. 이때 석원태 목사는 동료 목사에 대한 구타 사건으로 치리를 받으면 불명예뿐만 아니라 목회에도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석 목사는 성명서를 써 가지고 와서 반고소를 주장하고 10 15일 행정보류를 선언하고 노회를 탈퇴했다. 석원태 목사는 권징의 위험을 반고소 주장으로 국면 전환한 것이다. 곧 이미 탈퇴한 목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별도 노회 조직을 시도하였다. 하찬권 목사는 반고소 주장이 별도의 노회를 조직하거나 교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별도의 노회 조직에 주저했으나 반고소 운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노회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저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가담하게 되었다.[18] 즉 석원태 목사를 비롯하여 반고소 주창자들은 1975 10 27일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파 경기노회(반고소측)를 조직하고 경기노회(반고소측) 계승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하 목사가 자신이 담임하던 서울 제일교회당에서 운영하려고 하였던 반고소 정신의 신학교를 저들의 요구에 의해 노회 직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신입생을 즉시 모집하기로 하고 신성종, 차영배 목사를 교수로 청하였고 손명복[19] 목사를 교장으로 초청했다. 반고소가 성경적임을 처음부터 강하게 주창했던 하찬권 목사는 곧 반고소 경기노회를 떠났다.[20] 이상과 같은 과정 속에서 고려파 경기노회는 총회를 따르는 측과 반고소파를 따르는 측이 완전 분리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측 경기노회(반고소파)가 조직되었다.

   

 4. 고려신학교 복교

 

  반고소측 경기노회는 노회 계승과 함께 반고소파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현재 문산에 있는 고려신학교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는 하찬권 목사에 의하면, 자신이 출판한 기독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연구라는 내용에 동의하고, 고려신학교 교수회 명의의 불신법정 소송을 지지하는 논문과 제24회 총회의 결의에 항거하는 고려신학교 학생들의 요구에 의해, 하목사가 자신의 교회에서 운영하려고 시작한 신학교를 반고소 경기노회가 구성되고 노회측에서 학교를 노회 차원에서 운영하여야 된다고 권유를 받고 노회 직영으로 인계한 학교가 그 기원이 된다고 주장하지만[21], 석원태 목사측은 당시 석목사를 따라온 고려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를 복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22](부록 10 참조). 그러나 하찬권 목사는 석원태 목사가 신학교 문제에 깊이 관여한 것은 반고소측이 경기노회측과 마산 법통노회측으로 분열된 이후라고 주장한다.

  석원태 목사는 1975 11 30일자 자신이 담임하는 경향교회의 교회보 3면에 밝힌 개인서신(1975. 10. 9일 기록)에서 성도간의 불신법정 제소건으로 교단의 여하한 분열도 반대하고, 정치적으로 휘말리는 일도 앞으로는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불과 한 달도 못되어 고신 교단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고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반고소측 고려신학교의 첫 입학시험에 전남 광주, 전북 이리, 전주, 충북, 경북, 경남, 부산, 강원도, 서울 등 경향 각지에서 71명이 지원하였다. 고려신학대학(본과)에서 수학하던 학생들 일부가 복교된 고려신학교에 편입해 옴으로 반고소에 대한 자부심으로 신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5. 경남노회의 내분과 반고소 운동

 

  반고소 경기노회 조직과 고려신학교 복교선언과 때를 같이하여 경남법통노회에서는 송상석 목사를 따르는 법통노회측과 총회와 고신대학 교수회의 주장을 따르는 목사들로 양분되었다. 송상석 목사를 불신법정에 고소한 일로 시작된 고신교단 경남노회의 분리를 크게 보면 송상석 목사 지지측과 한상동 목사 지지측으로 분열된 것이었다. 이 대립은 송상석 목사 중심의 경남노회와 한상동 목사 중심의 부산노회의 대립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1974년에는 소위 한상동 목사와 부산노회 목사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송상석 목사를 지지하는 측을 배제한 경남정화 노회가 조직되어 노회가 공식적으로 양분되었다. 1975년 제25회 총회는 소위 경남정화노회를 정통노회로 인준하고 송상석 목사 중심의 경남(법통)노회를 배제함으로 법통노회 총대들은 총회 회원으로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 경남(법통)노회 총대들은 총대노회로 소집하여 총회에 행정보류 할 것을 결의했다(1975 9 26).


 7. 반고소 고려파 총회 조직 준비

 

  이렇게 총회와 행정을 보류한 경남(법통)노회가 반고소 운동을 제창하고 나오면서 경기노회(반고소측)와 행정적 통합을 제안하였다. 이때 경기노회에서는 30년간이나 불신법정 투쟁을 해온 경남(법통)노회와 제휴를 거절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경남노회가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반고소를 주장함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총회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경남노회는 총회대책위원으로 이기진, 손명복, 서봉덕, 김태윤, 손명규, 박윤섭, 지득용 7명과 경기노회 위원 석원태, 김주락, 박성호, 최영구, 오주영와 부산노회(개인자격) 서경준, 권성주, 경동노회(개인자격) 박순대 등이 1976 8월 모일에 경주시 소재, 문화여관에 모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의 반고소측 노회 연합협의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위원을 선정했다. 이때 선임된 위원장은 이기진 목사, 서기 석원태 목사, 위원으로는 각 노회위원 김주락, 박성호, 최영구, 오주영, 손명복, 서봉덕, 김태윤, 서경준, 권성주, 송명규(이상 목사), 박윤섭, 지득용, 박순대(이상 장로) 등이었다.

  동 위원회는 1976 9 1일 자로 제26회 총회를 향한 공개 시정촉구 결의서를 채택하여 송부하되 만일 이를 동년 9 25일까지 시정치 않을 시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려파 반고소측 총회를 조직하기로 대책을 수립하였다. 고신 총회에 공개시정 촉구 결의서를 채택하여 발송했으나 1976 9 25일이 지나도 제26회 총회는 아무 반응이 없었으므로 상기 위원회는 1976 10 5일자로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반고소측 제26회 총회 소집 공고를 위원장 이기진 목사, 서기 석원태 목사 명의로 발송하였다. 1976 10 19(화요일) 19시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11번지 소재 서울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총회를 개회하였는데, 이로써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반고소측 총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 고려교단의 조직과 발전

 

 1. 총회와 노회의 구성

 

  대한예수교 장로회 반고소 고려측 제26회 총회가 1976 10 19일에서 10 21일 하오 10 30분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11번지 소재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목사총대 37, 장로총대 41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총회장에 석원태 목사, 부회장에 이기진 목사, 서기 김태윤 목사, 부서기 서봉택 목사, 회의록서기 오주영 목사, 부회의록 서기 박성호 목사, 회계 지득용 장로, 부회계 박윤섭 장로가 선정되었고, 운영위원으로 위원장 석원태, 서기 김태윤, 회계 지득용, 위원에 이기진, 박성호, 송명규, 서봉덕 목사가 선정되었다.

  고려신학교 학교법인 이사 및 감사도 선정하였는데 이사장에 김주락, 부이사장 이기진, 서기 최영구, 회계 박윤섭 장로, 이사 손명복, 권성운, 송명규, 석원태, 권성문, 우종선 신양우, 김용효, 박순대, 지득용이 선임되었고,[23] 감사에는 박성호, 조인태가 선임되었다. 교단 기획위원 위원장에는 송명규, 서기 박성호, 회계 이호기, 기획위원에 이기진, 권성주, 김태윤, 서봉덕, 서상동, 지득용, 박윤섭 등이 선정되었다. 또한 고소측 총회는 선언문 초안 위원으로 석원태, 이기진, 김태윤, 서봉덕, 오주영, 박성호 목사를 선정하여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경남(법통)노회측 지도자들은 경기노회 반고소 목사들과 반고소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하여 총회를 조직하였으나, 이듬해인 1977년 수적으로 우세했던 경남법통 노회(마산측) 측 지도자들은 고려신학교와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석원태 목사를 신학교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당시 고려신학교 서무과장은 옥치묵이었는데, 그는 1977 3 20일 석원태 목사가 담임하던 경향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으나[24] 마산 측과 석원태 목사 측이 갈라설 때 경향교회를 사임하였다(1977. 9. 4).[25]

  석원태 목사가 신학교에서 쫓겨나가자 재학생 중 일부가 고려신학교 수호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석원태 목사를 복귀시킴으로 결국 반고소 고려 측은 내홍을 겪게 되었고, 석원태 목사를 비롯한 경기노회측과 마산 중심의 경남노회측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석원태 목사를 중심한 반고소 고려 측은 마산 측과 결별할 때 자신들이 주장하는 순수 반고소 운동의 정신을 성명서를 통하여 선포하였다(부록 12. 참조).[26] 이때 마산 측 출신 목사였던 김태윤 목사가 마산 측을 떠나 석원태 목사와 손을 잡음으로 그 이후 반고소 고려 측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반고소 고려측은 마산 측과 결별한 이후 교세확장을 모색하게 되었고,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가진 제28회 총회(1978. 9. 2627)에서는 타 교단 목사 가입 문호를 개방하기로 하였고 그 구체적 절차는 교단 헌법에 정한대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당시 고려신학교의 학생 수는 154(대학부 51, 신학부 103)으로 보고되었으며, 개척교회(설립) 및 가입교회는 50교회로 보고되었다.[27] 그러나 이때 가입한 교회들은 1984년 교단 분열 시 몇 교회만이 남고 다시 고려교단을 떠났다.  

 

 2. 노회의 발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76 9월 반고소 고려 총회가 구성될 당시 노회는 기존의 고신교단에서 행정보류를 선언하고 탈퇴한 경기노회와 경남노회(법통), 그리고 부산노회 등 3개 노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77년에 경기노회와 경남노회(법통)가 결별하게 되자, 고려총회는 조직을 정비하여 경기노회, 수도노회, 영남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28] 그러나 당시 나름대로 체계를 제대로 갖춘 노회는 경기노회 뿐이었고 여타 노회는 노회의 골격만 유지하는 정도였다. 특별히 수도노회는 여러 교단에서 이탈한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존속하다가 1977년에 40여 교회가 고려교단에 가입하여 이루어진 노회였다.[29] 그 후 영남노회는 경북노회로 개칭되어 경기노회, 수도노회, 경북노회, 부산노회로 존속해 오다가[30] 1980년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호남노회가 조직되었다. 1982 9 21일부터 23일까지 부천성문교회당에서 열린 제32회 총회에서 기존의 경기노회, 경북노회, 수도노회, 호남노회 중 경기노회와 수도노회가 합쳐져 서울남노회(서울 한강 이남지역), 서울북노회(서울 한강 이북지역), 경인노회(인천, 부천, 광명시)로 확장 분할되었다. 그리하여 고려교단은 총회산하에 기존 4개 노회에서 5개 노회로 개편되었다.[31]

  그 후 1986 9 23()부터 25()까지 제36회 총회가 창원시민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경상남도 및 부산직할시 지역을 독립하여 경남노회를 설립키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존의 서울남노회, 서울북노회, 경인노회, 호남노회, 경북노회에 경남노회가 설립되므로 6개 노회로 확장되었다.[32] 이렇게 하여 고려교단은 총회산하에 6개 노회 체제로 12년을 유지해 오다가 1998 9 22일부터 24일까지 경향교회당에서 가진 제48회 교단총회에서는 교단의 성장으로 인한 노회 분할의 필요성으로 총회 운영위원회의 노회 분할 연구보고서를 검토한 끝에 장기적인 교단 발전과 대의적으로 교단의 위상을 높이며 지교회들의 원활한 연합활동을 위해 서울 남노회와 서울 북노회, 경인노회를 각각 2개의 노회로 분할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로써 총회 산하 노회는 기존의 6개 노회(서울남, 서울북, 경인, 호남, 경북, 경남)에서 9개 노회(서울남, 중부, 서울북, 서울서, 인천, 경기, 호남, 경남, 경북)로 확장되었다.[33]

  확장될 당시 서울남노회는 34개 교회,[34] 중부노회는 44개 교회[35], 서울북노회는 29개 교회[36], 서울 서노회는 23개 교회[37], 인천노회는 24개 교회[38], 경기노회는 26개 교회였다.[39]

  그 외 기존의 호남노회는 20개 교회[40], 경남노회는 15개 교회[41], 경북노회는 15개 교회[42]로 당시 총회 산하 교회는 도합 230개 교회였다.[43]

  고려교단이 형성될 당시인 1975년부터 1979년까지의 고려파의 교세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당시 고려교단의 모교회인 경향교회의 교세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다수가 체계가 잡히지 못한 미조직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교단 가입과 이탈이 빈번했기 때문에 정확한 교세를 산정하기 어렵다. 1980년대에 들어 어느 정도 교단의 체계가 잡혀가고 질서가 세워지면서 교세통계가 기록으로 남게 되었는데 1984 12 31일 현재 고려교단의 교회 수는 104개 교회이며, 세례교인 6,940명을 포함하여 성도수는 23,614명이었다.[44] 그 후 1992년에는 50,533, 1993년에는 65,277명으로 성도의 수가 꾸준히 성장하다가 1995년에는 52,236명으로 감소하였고 1996년에는 58,176명으로 다시 회복세를 보이다가 2000년도에는 72,108명으로 비로써 교세가 7만 명을 넘었다.[45] 이 숫자는 고려교단이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에 모인 성도수를 포함한 것이다.

  이처럼 고려교단은 총회 산하에 노회가 분할 확장되며 성도 수에 있어서도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왔으나, 지난 2001 4월에 있었던 교단 분열로 교회수가 60개 이상 감소하고 성도 수에 있어서도 1 3천명 이상 격감되었다.[46] 2013년에는 국내 44313명 해외 23718명으로 합 68031명으로 2000년도보다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2001년 분열 이후 교세회복에 어려움을 보인 것을 반증한다.

  고려교단이 형성된 1970년대를 설립기라고 한다면 1980년대는 정착기라고 할 수 있고, 1990년대는 성장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는 분열 및 재정비기로 2010년대는 쇠퇴 및 고신교단과 합동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3. 고려 교단과 석원태 목사의 역할

 

  1975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려교단이 형성 될 무렵 교단의 내 외형적 모습이 질서가 잡히기까지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1976년 제26회 총회에서 석원태 목사가 총회장이 된 이후 교단 내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석 목사는 1975년 경기노회를 조직하여 반고소를 지향하는 고려교단이 출범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부총회장, 혹은 총회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어떤 때는 총회 임원이 아니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총회뿐만 아니라 노회와 지 교회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지도력을 행사해왔다. 석 목사가 교단 내에서 이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은 김태윤 목사였다.

  그는 1977년 제2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잠깐 총회 일을 하다가 그 후 교단 총무, 서기 등으로 봉사하였고, 34회 총회(1984)에서는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김태윤 목사는 고려 총회가 어느 정도 안정된 제36회 총회(1986)시에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92년 이후에는 무려 5년 간 연속하여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교단의 일을 주도해왔다. 김태윤 목사가 이렇게 장기간 총회장 역을 감당한 데에는 석원태 목사의 막강한 영향력이 작용하였고 조석연 목사의 역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조석연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인천 석남제일교회(현재 선두교회) 1992년 당시 재적교인이 2,000명이 넘고 출석수는 1,200명이 넘어 사실상 고려교단에 소속된 교회 중 최대의 교세를 지닌 교회였다. 당시 재정적인 면에서는 교단 내에서 석원태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경향교회 다음이었다. 석 목사는 이런 조목사를 제34회 총회(1984)에서 교단 총무로 피선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조목사는 3년 간의 총무사역을 감당한 후 제38회 총회(1988)에는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런 조 목사를 석원태 목사는 제40회 총회(1990)시에는 총회장이 되도록 지원하였다. 조 목사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2년 동안 총회장으로 교단의 일을 감당하였다. 조석연 목사는 앞의 김태윤 목사나 다른 임원들과는 달리 교단 헌법이 정한 총회장의 권한을 행사했고, 교단에서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석 목사와 의견이 다를 경우데도 소신 있게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47] 조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석 목사는 조석연 목사가 총회장이 되고 난 후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자주 공 사석에서 평했다. 결국 이런 조 목사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교단 일을 관철하기가 힘든 것으로 판단한 석원태 목사는 2년 임기로 제한된 총회장의 임기를 연장하는 헌법 개정을 통해 김태윤 목사를 5년 동안이나 총회장 자리에 있도록 하고 교단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갔다. 이때부터 교단 내에서는 총회장의 실질적 권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교단내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특정인 중심의 교단 행정체계는 마침내 2000 4월 교단 개혁안이 제기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석원태 목사는 제47회 총회(1997) 5년 동안 총회장직을 수행해 왔던 김태윤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북교회가 부흥하지 않고 개척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교회에서마저 사임하게 되자 교단에서도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석 목사 자신이 다시 전면에 나서서 총회장이 되었고 1998년까지 2년 동안 총회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제49회 총회(1999)시 석원태 목사는 교단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자리를 잡았으므로 후배 지도자를 양성할 때가 되었다고 천명하고, 김태윤, 조석연, 목사가 아닌 제3의 인물인 양문화 목사(전주 서신제일교회)가 총회장이 되도록 배려했다. 석원태 목사는 총회 임원 선거 시 교단에 관한 여러 가지 발언을 하면서 특정인에 대한 지지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양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한 것은 2000년까지 2년간이었다. 양 목사는 고려교단 내에서 비교적 신선한 인물로써 총회장이 되었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총회장이 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나는 허수아비 총회장이고 아무 것도 결정 할 수 없다.라고 가까운 목사들에게 말했을 만큼 사실상 석 목사가 총회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1976년에서 2001년까지의 고려교단 총회 임원 현황표를 참고). 이런 상황에서 특정인 중심의 교단의 행정체계는 건실하고도 합리적인 교회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반성과 함께 개혁의 요구가 높아졌다. 심지어 석 목사의 2선 후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석 목사를 중심한 교권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석원태 목사의 2선 후퇴를 포함한 교단 개혁안을 수용한다고 천명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개혁가담자를 교단 전복 세력으로 규정하는 등 교단이 한 개인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일인 중심의 교단으로 심화되었다. 이 점은 고려교단의 특징이자 한계였다.[48]

 

 4. 고려신학교와 그 이후의 신학교육

 

  1975 10 27일 경기노회(고신교단 제24회 총회 결의 제33항인 성도간의 불신 법정 소송 결의가 번복될 때까지 총회와의 행정보류를 선언한 반고소측 노회) 42회에서 고려신학교 복교를 결정하고, 복교 추진위원으로 김주락, 하찬권, 최영구, 석원태(이상 목사), 서환옥, 정채림, 신양우(이상 장로) 제시를 선정하고, 1975 11 25일 복교 추진위원회(상임)가 모여 위원장에 김주락 목사, 서기에 석원태 목사, 회계에 정채림 장로로 결정하였다. 1975 11 25일에는 학교 설립(복교) 이념을 채택하였다.

  또한 고려신학교 학제를 본과, 전수과 3개년, 전예과 2개년으로 결정하였다(1975. 11. 25).

 석원태 목사는 1973 4 15일에 서울에서 자신이 개척한 경향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석목사는 이 교회를 통해 고려신학교 후원운동을 추진하여 복교된 고려신학교의 재정을 크게 지원하고[49] 계속하여 좋은 강사진을 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자신이 직접 강의에 임하는 등 학교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초기에 고려신학교는 범 교단적인 신학교로 발전 육성시키기 위하여 반고소파 지도자들로 구성되는 이사회를 조직하였다(1976. 3. 10).

  그러나 경남노회측과 분리되면서 복교된 고려신학교가 그들의 운영하에 들어가게 되자 석원태 목사는 크게 실망감을 느꼈고 새롭게 강유중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여[50] 고려신학교를 재정비하였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하여 고려신학교 운영권 문제로 강유중 박사측과 석원태 목사 측으로 양분되었다. 결국 석원태 목사는 자신이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직접 학제를 관장하고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장로가 재정을 관장하는 것만이 고려신학교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 경향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던 정겸효 장립집사를 고려신학교 서무과장으로 발령하고 석목사 자신이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실제로 고려신학교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곧 고려교단이 성장하는 하나의 동력원이 되었다.

  1976 1월 학교 임시교사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0번지에 소재한 영천교회당으로 결정하고 수업을 시작한 고려신학교는 1976 3 9일 서울종로구 평창동 11번지에 소재한 삼각산 제일기도원 별관을 구입하여 그 학기부터 그곳에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후 1979 4 9일에 서울 청량리에 소재한 동도교회 교육관을 임차하여[51] 수업을 계속하였으며 1981 3 2일에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376-2번지에 소재한 상아탑 학원 2층 일부와 3층을 임차하여 학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다가 1983 2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53번지에 소재한 경향교회당 교육관을 임시로 임차하여 신림동에 새로운 교사가 완공되기까지 임시 수업하였다. 이때까지는 자 건물을 소유하지 못하여 세칭 보따리 신학교로 불리다가 마침내 1983 9 6일 학교 교사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244-144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고려신학교는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를 꿈구며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 산2번지에 6만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1989 7 17일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건립 기공예배를 드렸다. 1990 8월에는 교사를 완공하여 마침내 1990 9 13일 전교생이 제2학기 개강예배를 드리고 입소하여 수업을 시작하였고 1991 6 20일 아카데미 캠퍼스 준공감사예배를 드렸다. 이 아카데미 캠퍼스는 고려신학교 캠퍼스와 경향수양관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총회측에서 보면 고려신학교 교사이고, 경향교회측에서 보면 경향수양관인데 건립기금의 상당 부분은 경향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졌다. 경향교회 담임목사로서 현재 고려신학교 교장인 석원태 목사는 자신이 죽기 전에 분명하게 선을 긋겠다고 공적인 모임에서 자주 공언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다.

   고려신학교 교장 석원태 목사는 강사위주의 교수진은 학교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임 교수진에 미치지 못한다고 강조하고 전임 강사진 구성을 준비해가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1978년대부터 구체화되었다. 석원태 목사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던 경향교회의 성도 중에 석사학위 소지자를 발탁하여 고려신학교 대학부의 시간 강사 혹은 전임강사로 채용하였다. 그러나 이 교수들 중 대부분이 교단 내 목회자들이나 신학생들에게 영적인 면이나 학문적인 면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신학교는 고신교단의 고려신학대학원 졸업기수를 그대로 이어 1977 2 24일 제31회 졸업생으로 신학원 18명 대학부 3명을 배출한 이후 2001 2 22일 제55회 졸업식까지 신학원 721, 대학부 291, 여자신학원 197, 신학예과 106, 1,31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고려신학교 대학부는 고려신학교 교사가 문산 아카데미 캠퍼스로 이전한 이후 제41회 총회(1991. 9. 18-20)의 결의에 따라 1992학년도부터 신학원 2(야간) 및 대학부(교양 및 전공과정)을 폐지하였다.[52]

  초창기에 고려신학교는 신학교 운영을 위해 각 지교회 월정후원금과 본 노회 산하 남녀교역자의 십일조, 전국의 개인 및 교회, 기타 단체들의 후원금을 받기로 결정하였다(1975. 11. 25). 그 후 1988 9월에 회집한 38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교단 산하 모든 교회의 직영 체제로 운영하기로 하고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학교운영을 위해 교단산하 각 지교회가 모든 학교 운영비 확보에 참가하고 교수 생활비와 학교운영비를 전담하기로 했다. 재학생 전원을 특별장학생으로 하여 등록금, 기숙사비, 그리고 식비 일체를 면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교단 산하 모든 교회가 경상비 중 3%[53] 학교 운영을 위해 납부하기로 결정했다.[54] 그러나 타교단 출신은 특별 장학생에서 제외했다.

  총회는 각 교회별로 고려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여 자발적으로 신학교를 후원하게 하도록 독려했다.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교육 당국에 의해 무인가 신학교 정비정책이 발표되자 고려신학교는 은밀하게 대학인가를 취득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55], 교육부의 인가를 얻지 못했다. 현재의 문산 아카데미 캠퍼스에서도 전문 대학원으로 인가를 받으려고 추진한 적이 있으나, 학교 교사가 고려신학교와 경향수양관으로 공동사용하고 있고 실제로 이 건물을 경향교회가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은행에 담보하였으므로 인가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지연 된 형편에 있다. 고려신학교 대학부 출신들은 학교의 인가를 간절히 바랬으나 이것이 성사되지 않았고 마침내 대학부는 총회의 결의에 의해 폐지되었다.




[1] 송상석, 「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마산;경남법통노회, 1976), 41-51. 이렇게 한 그 배경은 물질에 대한 애착심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총회 측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요 원고보다 피고가 언제나 어려움을 겪는 약점이 있으니 이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요 출옥성도란 아름다운 이름을 재산에 대한 탐욕자란 오명으로 세속화 된 자로 떨어뜨리려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내어주는 자가 있어 저들은 예배당을 얻게 된 것이요 순교자, 성자에 대한 오명을 남기게 된 것이요 특히 고려파 안에 결국 불협화음을 일으켜 마침내는 교단을 떠나거나 수많은 내부적 고통을 가지게 한 것이다. 김태윤, 고려파 운동과 반고소, 「고려신학교 복교 20주년 기념논문집」(경향문화사, 1996), 414.

[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7회 총회 회록」(1957), 128.

[3] 「제8회 총회록」(1958), 172-173.

[4] 23회 총회록」 결의 99(1973), 31

[5] 24회 총회촬요」 결의 33(1974).

[6] 김태윤, 반고소와 석원태 목사에 대한 나의 소고, 「석원태목사 성역50년 기념문집」 (경향문화사, 2004), 521.

[7] 「고려신학교 복교 20주년 기념 논문집」(경향문화사, 1996), 549.

[8] 「경향교회보」, 139(1975.11.30), 3.에서 석원태 목사는 1975 8 17일 주일 오후에 공동의회를 통해 행정보류를 결정했음을 성명서로 밝혔다. 이 성명서에 이 사건으로 인한 우리교단의 여하한 분열에도 반대한다고 결정하였읍니다라고 적었지만 결국 교단분열로 이끌어 감으로 반고소건을 자신을 위해 정략적으로 활용하였음이 드러난다. 또한 어제 밤에(1975.10.8, 하찬권목사 무기정직사건) 진행된 경위들을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경향교회 공동의회 결의가 효력을 발생함을 설명합니다.라고 했다. 공동의회의 결정을 뒤늦게 발효가 된다고 함으로 이 역시 자신을 위해 이용했음이 드러난다. 반고소 문제의 반대 주역은 하찬권임은 경향교회보에 밝힌대로 하찬권만 이 문제로 치리를 받았지 석원태는 어떤 경우도 치리를 받은 일이 없어 석원태가 하찬권의 반고소 산물을 역시 자신을 위해 활용했음이 역사에 노정된다.

[9] 「경향교회보」제139(1975. 11. 30), 3.

[10] 하찬권 목사의 진술(부록 7. 1-8)에 의하면 1975 3 12일 경기노회의 장로였던 현호택 장로와 정채림 장로가 경비를 줘서 석원태, 김주락 등의 목사들이 인천으로 수양을 갔다 오는 길에 안양 모 다방 2층에서 문제가 생겼다. 최영구 목사가 재정을 가지고 사용했는데 이제는 해산하고 집으로 가자 할 때 석원태 목사가 돈이 아직 남았는데 쓰고 가자고 하여 대립되었는데, 최영구 목사가 끝까지 굴하지 않고 가려고 하니 석원태 목사가 최영구 목사의 머리털을 잡고 넘어뜨려 1층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박성호 목사가 하찬권 목사에게 보고해 주었다.

[11] 하 목사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 경기노회에 참석했으므로 가급적 발언을 자제하려 했으나 신자간의 법정소송이 성경을 위배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여 발언을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12] 하찬권, 「기독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연구」, 43-46.

[13] 하찬권 목사는 실제로 발언권을 주지 않은 세력들은 따로 있었다고 보았는데, 총회임원들과 교수 전원들과 이사들이 경기노회장을 조정하고 발언권을 주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았다. 허순길 박사가 밤 11시쯤 하찬권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총회 임원들이 모 호텔에 모여 있다며 두 시간 동안 통화를 했는데, 하 목사만 의지를 꺾으면 불신법정 고소 건이 조용해질 테니 그렇게 해 달라고 했으나 하 목사는 거부하였다고 한다.

[14] 「제25회 고신총회 촬요」 참고.

[15] 하 목사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노회 때는 수요예배 시간에는 목사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돌아왔는데, 하 목사 자신도 서울제일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와 보니 본인도 없는 중에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자신을 치리 했다고 주장한다(2001. 7. 9 면담).

[16] 「크리스챤신문」(1975. 10. 25), 1.

[17] 이들 중 다수는 경남노회의 조정을 받고 이미 제명된 하찬권 목사와 제휴해야 반고소의 명분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결행한 것이라고 하찬권 목사는 말하고 있다.

[18] 하찬권 목사, 친술 증언(인천 뉴스타 관광호텔, 2001. 7. 9).

[19] 송상석, 앞의 책, 9.

    손명복 목사는 출옥성도였을 뿐만 아니라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에 있어서 반고소의 입장을 가진 인사였기 때문에 교장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실제로 손명복 목사는 1976년 경남법통노회의 노회장을 지낸 바 있고 송상석 목사의 「법정 소송과 종교재판」이라는 책의 발행사에서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며 이 일을 위해 투쟁해온 송상석 목사에게 노회를 대표해서 경의를 표한다고 적었다.

[20] 고신교단 경기노회를 탈퇴한 목사들은 하 목사가 교회를 사임하고 신학교 강의에만 충실하기를 원했고, 하 목사가 섬기던 교회 후임을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으로 정하려는 정치적 동기와 이로 인한 문제를 보고 반고소 경기노회 마저도 권징도 없고 비양심적이며 정치적인 노회라고 생각하여 탈퇴하였다. 결과적으로 하 목사는 운영하였던 신학교도, 교회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21] 하찬권, 증언(2001. 7. 9).

[22] 손명복, 「고려신학보」창간호(1976. 8. 1), 고려신학교, 4.

[23] 류윤욱,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2011, 쿰란출판사), 239-240에서 류 목사는 목회자 석원태 목사에 대해 기술하면서, 1976 424일자 크리스찬신문 제751호에 반고소파 고려신학교 교단적 이사회 조직이란 제하에 이사장 김주락 목사 등 이사와 교수를 발표하면서 류윤욱을 경동노회 이사명단에 포함시켰으나 류윤욱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석원태가 포함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류윤욱이 경동노회에서 계속하여 반고소운동을 전개한 인사임을 알아 석원태는 자신에게 동조해 줄 것으로 믿고 발표했으나 류윤욱은 처음부터 이 문제가 교단분열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24] 「경향교회보」제208(1977. 3. 27), 3.

[25] 필자는 석목사가 회고하기를 마산 측에서 신학교를 장악하고 경향교회와 석 목사를 감독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옥 장로를 경향교회로 보냈다고 말한 것을 직접 들었다.

[26] 「고려신학교 복교20주년 기념논문집」, 579-582.

[27] 「경향교회보」제288(1978. 10.8), 3. 가입된 교회는 다음과 같다. 1양문, 한양, 광명, 증산, 동성, 석천, 성수, 가나안, 경성, 무봉, 영광, 제일, 동형, 성도, 위봉, 남산, 서신제일, 산화, 창신중앙, 중흥, 수유중앙, 신생, 신성, 안디옥, 동부, 충신, 광은, 성광, 평강, 휘경중앙, 은성, 영천, 화곡중앙, 영생, 성도, 과은, 군자중앙, 공능삼일, 광명평강제일, 등대, 성흥, 대일, 서대문중앙, 일심, 양문, 일신, 성마을, 일심, 성일제일.

[28] 「경향교회보」제282(1978. 8. 27), 3.

[29] 「경향교회보」제282(1978. 8.27), 3. 고려 교단에 가입한 목사는 신학교육을 이수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78학년도 제1차 계절신학교를 1978 7 4일부터 14일까지 고려신학교에서 개교했는데, 이 때 수도노회 산하에 있는 27명의 목사와 영남 노회의 2인의 목사가 편목교육을 이수했다.

[30] 「경향교회보」제288(1978. 10. 8), 3.

[31] 「한양장로교회보」(1982, 10. 10), 4.

[32] 「경향선교」(경향선교회, 1986. 10), 13.

[33] 48회 총회(1998) 촬요(p. 51)에 나타난 노회분할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노회를 분할키로 함. 교단의 장기적인 발전과 대외적인 위상을 위해 서울 남노회, 서울 북노회, 경인노회를 아래와 같이 분할키로 가결하다.

    서울남노회

      ㉮ 서부시찰과, 동부시찰을 서울남노회로 조직하고 노회 회기는 현재대로 하고 제주양문교회, 제주성문교회는 호남노회에 소속토록 하기로 가결하다.

      ㉯ 중부시찰과, 성남시찰과, 남부시찰을 중부노회로 조직하고 노회 회기는 현 서울 남노회의 회기를 승계하고 서울시민의 교회, 대광교회, 한양교회는 서울남노회에 소속토록 하기로 가결하다.

    서울 북노회

      ㉮ 동부시찰과 중부 시찰을 서울 북노회로 조직하고 노회 회기는 현재대로 승계하고 청원교회는 중부노회에 소속토록 하기로 가결하다.

      ㉯ 서부시찰을 서울 서노회로 조직하고 노회 회기는 현 서울 북노회의 회기를 승계토록 하기로 가결하다.

    경인노회

      ㉮ 인천 남시찰과 인천 북시찰을 인천노회로 조직하고 노회 회기는 현 경인노회 회기를 승계하고 횃불교회는 중부노회에 소속토록 하기로 가결하다.

      ㉯ 부천시찰과 경기시찰을 경기노회로 조죅하고 노회 회기는 현 경인노회 회기를 승계하고 안산시 지역을 경기노회 관할에 소속토록 하기로 가결하다.

[34]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나, 갈보리, 경향, 광성, 동문, 늘푸른, 서울찬양, 알곡, 은혜, 천지, 충신, 평강, 효성, 동산, 동부제일, 목양, 삼일, 새생명, 선민, 수서제일, 언약, 영광, 예신, 은광, 주향, 참빛, 초장, 대광, 서울시민, 한양, 한마음, 번성, 세현, 청목 교회(34).

[35]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동해성문, 로뎀, 만나, 목은, 석천, 선양, 성광, 천곡성문, 천곡제일, 충훈, 한마음, 경문, 낙원, 산성중앙, 성진, 성남만민, 시민, 약속, 영문, 왕남, 임마누엘, 주제일, 늘사랑, 대전동광, 대전한빛, 돌범, 등대, 벧엘, 사랑의, 성림, 성일, 세광, 수향, 수원사명, 신정, 안녕, 예광, 천안성신, 천안소망, 한은, 한마음, 경문, 성남소망, 청원 교회(44).

[36]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남산, 일심, 산성, 대동, 승광, 반석, 선진, 전곡대영, 천성, 동천, 전곡소망, 동두천시민, 동두천 예일, 열린, 에덴성서, 신광, 서울서광, 목원, 부름, 광진, 충인, 신도, 미문, 회현, 한강, 은총, 청송, 대서울, 대창 교회(29).

[37]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좌동광, 경서, 영광, 동서, 대암, 성은, 예일, 성광제일, 광탄제일, 명성, 은평, 예수사랑, 대한, 화평, 동명, 은혜와 평강, 일광, 행신제일, 언약과 빛, 창대, 엘림, 안디옥, 성산선교 교회(23).

[38]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선두, 예일, 운서, 초원, 인천성문, 성등, 주영, 창성, 광성, 관교제일, 새마음, 산곡, 반석, 한빛, 선일, 산곡예광, 영천, 왕성, 헤브론, 계산성문, 선구제일, 주사랑, 주손길, 경성 교회(24).

[39]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머나, 서문, 광천, 광명제일, 양민, 성민, 천성, 성안, 서림, 새소망, 시화제일, 대은, 성문, 의성, 계수제일, 천광, 온누리, 신광, 새힘, 충만, 생수, 천산, 은성, 새생명, 영풍, 동현 교회(26).

[40]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군산서머나, 군산대양, 금상중앙, 남문, 넙도, 담양애령, 대양, 목포가든, 목포건양, 방축, 광성, 서신제일, 선목, 섬김의, 송천성은, 양무리, 전북예일, 전주동산, 전주성도, 하림 교회(20).

[41]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봉림, 부산성광, 부은, 새영광, 양산신동, 옥산, 은평, 정양, 창원만민, 창원시민, 창원염광, 평화, 한사랑, 화삼, 갈사제일 교회(15).

[42] 교회명단은 다음과 같다. 광명, 구미형곡, 금강, 늘빛, 대구성문, 덕산, 동성, 영지, 은향, 창대, 초대, 한마음, 효신, 화목, 도원(15)

[43] 「월간개혁고려」(1998. 10), 32.

[44] 김덕환, 「한국교회 교단형성사」중권(서울: 임마누엘출판사, 1986), 123-124.

[45] 예장고려 총회, 「제50회 총회보고서」(2000 9), 40.

[46] 2001년 제51회 「총회보고서」 59쪽에 의하면 국내외 전체 교인 수 총계를 58,383명이라고 밝힘으로 2000년도 제50회 「총회보고서」 40쪽의 국내외 전체 교인 수 72,108명 보다 13,725명이 감소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47] 조석연 목사는 총회장이 된 후 교단의 건실한 성장을 위해 석 목사를 도와 힘써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우선 총회적으로 은급제도의 실시를 위해 의욕을 보였으나 석원태 목사는 조석연 목사 중심으로 총회 일이 전개되는 것을 원치 않아, 총회장이 된 후부터 자주 조 목사의 입지를 좁히기 위하여 석 목사가 공사석에서 조 목사를 공격하는 발언을 했다고 조 목사는 진술했다(2001. 10. 16, 영종도 서경노회 수련회에서 필자와의 면담).

[48] 2001 9월 고려교단 제51회 총회를 다녀온 조원구 목사(동부제일교회 시무)는 석 목사가 60여 교회가 이탈하여 고신교단으로 가입하는 아픔이 있었는데도 아쉬움이나 반성은 없고 오히려 이들을 반란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며 안타깝다고 했고, 더 이상 고려교단에는 소망이 없는 것 같다고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밝힌 바 있다(1201. 10. 18). 조석연 목사를 중심하여 개혁건의안이 석원태 목사에게 전달 된 후 인천노회 임시노회에서 천 환 목사는 조석연 목사 면전에서 쿠데타 세력이라고 했고, 2000 12 11일 인천노회장 이름으로 총회운영위원회 소집 요청의건 공문 3번에도 조석연 목사의 행위가 교단 분열(쿠데타 행위)이라고 규정하였다.

[49] 석원태, 「인간혁명」설교전집 제10 (생명의 말씀사, 1985), 235-236.

[50] 「경향교회보」제233(1977. 9. 18), 3. / 238(1977. 10. 23.), 4.

    1977 10 18() 오전11시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취임예배를 드렸다. 그는 취임사에서 자신의 계획은 고려파 초창기 이념을 되살림은 물론 고려신학교와 세계 유수한 보수신학교 등과 유대관계를 맺고, 학생들의 학구에 필요한 모든 여건들을 조성하려 한다고 했다.

[51] 당시 동도교회 담임목사였던 최훈 목사는 동도교회당을 건축하고 입당을 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고려학교장 석원태 목사의 요청으로 교육관을 고려신학교 교사로 사용하도록 승낙해주었다.

[52] 「고려신학교 요람」(경향문화사, 1994. 5), 20.

[53] 50회 총회보고서(2000. 9), 242.

    보고서에 의하면, 2000 9월 현재 252개 교회 중 169개 교회가 고려신학교 3% 지원헌금에 참여하여 67.06%의 참여율을 보였고, 매월 48,661,650원의 금액이 작정되어 9개 노회 평균 납입률은 51.22%라고 밝히고 있다.

[54] 이렇게 결정한 배경을 총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도적 신앙과 초대교회의 믿음으로 환원하기 위함 - 오늘의 교회가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타난 본래 교회의 모습에서 이탈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현실이 증거하는 바이다.

고려파 본래로 되돌아가기 위함 - 고려파 50여 년의 역사를 기록할 동안에 순교적 신앙과 생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보고 있는 바이다. 

경건과 학문의 정비례 및 조화를 위함.-한국 교회의 신학적 동향은 신앙과 무관한 사색운동으로 변질되고 있다. 또한 학문을 도외시하고 경건을 빙자한 저질적 영성 운동으로 저급한 신비주의나 현실적 기복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55] 「한양장로교회보」제6 28(1983. 7. 10), 2.「경향교회보」제403(1980. 12. 21), 3.

    대학인가 추진을 위한 대지 2만여 평과 재단재산 4억 확보. 또한 동 종강예배에서는 어떤 성도가 대학인가 추진을 위한 학교부지 2만 여 평을 내놓았으며 재단 구성을 위한 4억 여 원의 재산이 이미 확보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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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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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
현대생물학과 하나님의 창조 (박치...
빅뱅 천문학과 하나님의 창조 (성영...
고통의 신약적 이해
고통의 신학적 의미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래목회 (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