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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이번 기획기사는 '설교'입니다. '설교하지 마'라는 말처럼 설교가 희화화된 시대입니다. 목사들은 설교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설교에 목숨을 걸라'는 말마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웃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도 목사의 설교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설교여야 합니까? 지금도 여전히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을까요? - 편집위원장


※ 다음 글은 필자 강영안 교수가 SFC 총동문회에서 발간하는 「개혁신앙」 6호에 싣은 글의 원고를 「개혁신앙」의 허락을 받아 편집 후 올린 것입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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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수
서강대 철학과
개혁정론 자문위원

개혁 교회 전통에는 목사와 장로들이 정기적으로 설교 토론을 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 전통에 관해서는 고려신학대학원 원장을 지내신 허순길 목사님이 자신의 호주 개혁교회 목회 경험을 토대로 쓴 『개혁주의 교회의 목회와 생활』(서울: 총회출판국, 1994)에 잘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이런 전통을 알지 못했고, 알지 못하니 실행해 본 적이 없다. 설교는 당연히 목사님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누구도 이러니 저러니 말할 수 없는 성역으로 자리잡았다. 개혁주의 교회를 표방하는 고신측 교회와 합동측 교회조차도 신학은 개혁주의 전통을 따른다고 하지만 교회의 예배와 정치, 신앙고백은 개혁교회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교회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설교토론 전통이 한국교회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설교토론’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여기서 논의할 ‘설교토론’이 얼마 전부터 한국교회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설교비평’과 구별된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두어야겠다. 문학평론가들이 문학 작품을 비평하고, 이른바 ‘정치평론가’들이 정치를 비평하는 것처럼 ‘설교평론가’들이 이름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평가한다. 설교를 지금보다 좀 더 건강하게 하는 데에는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 그리고 설교비평은 설교학을 맡아 가르치는 교수들뿐만 아니라 역사신학이나 교의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참여해야 하고 성경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마땅히 참여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안에서 왜곡되고 있는 설교를 평가하고 바로잡는 일에 신학교수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방송매체를 통해서 전해지는 설교만을 들어보아도 설교가 한국강단에서 어떤 현실로 자리잡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신학교수들이 누구보다 앞서 이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청탁받아 토의하는 ‘설교토론’은 ‘설교비평’과는 구별되는 일이다. 지역에 뿌리를 둔 한 개별 교회에서 매주 시행되는 설교에 대해서 지역 교회 공동체는 설교자가 어떤 설교를 하든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토론에 붙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된다. 나는 이 글에서 ‘설교토론’과 관련해서 세 가지 질문을 해 보고자 한다. 이 질문을 간략하게 다룬 다음 구체적인 제안을 한 가지 할 것이다.

문제 제기

(1) 설교 토론이 필요한가? 학자들은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할 때 토론자를 세워 발표된 논문의 내용에 대해서 질문하고 토론하며 학교에서 하는 강의에 대해서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평가를 받는 일에 익숙하다. 이처럼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서도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필요가 있는가?

(2) 설교 토론이 필요하다고 해 보자. 그러면 누가 토론에 참여할 것인가?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서 토론자로 역할을 할 사람은 누구인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강의 평가를 받는 것처럼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내용에 대해서 토론할 것인가? 당회원으로 함께 참여하는 장로들이 할 것인가? 같은 노회의 목사와 장로가 참여하여 할 것인가? 아니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할 것인가?

(3) 설교 토론을 한다면 토론의 목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다시 묻자면 설교 토론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교수들이 학회에서 발표하는 논문의 경우에는 같은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을 통해서 발표자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나 잘못 본 것을 시정해서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학문 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고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강의의 질을 높이고 평가가 낮은 강의자는 퇴출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설교 토론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해 긍정적인 답이 제시될 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토론하고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가’ 등의 물음이 뒤따라 올 수 있다.

설교토론이 필요한가?

첫 번째 물음부터 생각해 보자. 설교 토론이 필요한가? 찬반의 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반대 입장을 생각해 보자. 반대자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뿐이지 선포된 내용에 대해서 토론할 수 없다. 따라서 설교 토론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설교토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무엇이라 말할까? 다음과 같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설교를 듣는 사람은 말씀의 선포를 수용하고 그것에 따라 순종해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이것은 원칙적으로 옳은 것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들에서 매주일 시행되는 설교가 과연 모두 하나님 말씀의 선포인가?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 자신의 제한된 성경 이해, 그의 가치관과 정치관, 그의 인생관, 그의 신앙관에 따른 주관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가? 이단이라 부르는 교회를 제외하더라도 주류 교회의 설교조차도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하고, 세속 속에서 성도들이 성도로서 제대로 살아가도록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설교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따져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런데 선포는 그냥 선포로 끝나는가?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 동시에 가르치셨다. 설교는 선포임과 동시에 가르침의 요소도 갖추고 있다. 이뿐 아니라 권면과 경책과 위로와 치유와 격려의 기능도 그 속에 담겨 있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설교로 주어진 말씀에 대해서 헤아려보고, 숙고하고, 자신에게 적용하고, 생각해 보고, 의심이 들거나 의문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묻고 따져보고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도 비유에 대해서 어려워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모아 따로 설명하고 가르쳤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주시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묻기도 하였다. 묻고 답하는 과정은 학습 과정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이다.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예배 시간 안에 마치 강의실처럼 묻고 답하는 방식을 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배 바깥의 공간에서는 설교자가 한 설교에 대해서 토론하고 논의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포와 가르침의 경우를 보더라도 열려 있어야 한다.

누가 토론자인가?

두 번째는 만일 설교 토론을 한다면 설교자가 누구와 토론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몇 가지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설교를 듣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원로목사나 협동목사, 노회 소속 목사, 신학교수 등과 토론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일종의 ‘설교 클리닉’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설교 토론의 필요성이 제안되는 공간이 개별 교회임을 전제하면 토론 상대자는 성도들 전체거나 성도들 일부가 될 것이다. 성도들 일부 가운데도 장로들로 한정하거나 권사와 안수집사를 포함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 규모가 작은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성도 전체와 설교를 두고 토론을 하게 되면 성도들의 이해의 정도와 영적 성장의 정도, 그리고 세상 속에서 말씀의 적용과 실제 삶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에게 유익할 수 있지만 성도들의 수가 많을 때는 이것을 시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만일 설교 토론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면 설교 토론의 상대자는 개혁교회에서 해 온 것처럼 장로들로 제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로들이 설교 토론자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한 의견보다는 성도들을 ‘돌아보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소상하게 이해하고 ‘보살피는’ ‘감독’의 입장에서 설교토론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설교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장로들로 한정하더라도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성경과 교회 전통의 가르침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한 지식이 필요하다. 화란 개혁교회 장로들이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네 권을 숙지하고 칼빈의 성경 주석과 개혁교회 전통의 신학자들이 쓴 주석을 갖추고 공부해 온 것도 이러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2) 설교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세속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설교에 대한 이론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는 있으나 실제 성도들의 삶에 유익을 주는 토론이 진행되기 힘들 것이다. (3) 토론자는 지적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열정, 진리 앞에서의 겸손, 타인에 대한 관용과 수용,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잠정적 보류를 할 수 있는 열린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 토론의 목적이 무엇인가?

세 번째 질문은 ‘무엇을 위한 설교토론인가’ 하는 것이다. 설교 토론의 목적이 무엇인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 외에 다른 답을 찾을 수 없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12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사역자를 세운 까닭은 성도를 준비시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가르침을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교회는 막아야 하고 설교자 임의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잘못된 가르침이 성도들을 오도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전달된 말씀 가운데 명확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이해받는 일, 말씀대로 세상에서 성도가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움 받고, 위로 받고, 격려 받는 일,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도록 성도들이 안내 받고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제대로 연구하고 제대로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것 외에 교회 안에서의 설교 토론의 목적이 설정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설교 토론은 학회에서 학자들끼리 하는 토론이나 강의실에서 학생들로부터 교수들이 강의 평가를 받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설교 토론에도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바른 것인지 찾아 더듬어 가는 과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지만 이것들을 분명하는 목적은 설교자와 성도들이 다 같이 유익을 얻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데 기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은 토론 방식과 관련된 것이다. 설교자의 성경 해석을 놓고 따지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1)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질문을 통해서 분명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일차적이 될 것이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설교의 의도, 본문을 그렇게 읽고 해석한 의도를 좀 더 논리적인 언어로 분명하게 드러내 밝힐 수 있을 것이다. (2) 설교를 들은 사람은 자신을 그 말씀에 내어 놓고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일이 그 다음 따라 올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공의 경험보다 실패의 경험이 될 것이다. 어떤 경우, 왜 말씀에 대해서 자신의 삶이 실패했는지, 그것을 찾아내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다. (3) 이어서 올 수 있는 것은 성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를 따르는 이로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지혜와 힘과 기도해야 할 제목들을 찾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설교자도 자신의 설교가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과 어떤 연관을 맺을 수 있을지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이것이 만일 일상화된다면 설교를 그런 방식으로 준비하는 것이 습관이 될 것이다.

설교자 개인기에 맡기는 한국교회 설교의 맹점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설교 토론을 어떻게 생각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여러 분들과 얘기를 나누어 보지 않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쉽게 “좋습니다!”라고 할 분들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설교가 목사님 개인의 고유한 일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자신이 기도하면서 계획하고 준비한 본문을 가지고 목사님들은 대부분 설교를 한다. 어떤 본문을 다룰 것인지, 본문 가운데서도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둘 것인지 이런 것들을 두고 목사님들은 다른 분들과 의논하지 않는다. 설교를 준비해 가는 과정에서 성도들과 의논해 가면서 준비하는 목사님을 나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본 적이 없다. 한국교회의 설교는 목사님의 개인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암묵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는 한국교회 강단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를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어느 교회를 다니든지 성경 전체를 일정한 시기에 따라 모두 설교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성경 가운데서도 자신이 선호하고 자신이 있는 책을 택해서 설교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경우는 구약만 일 년 내내 듣는 경우도 있고 신약만 일 년 내내 하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목사님의 개인의 선택과 취향에 따라 신구약 가운데서 불규칙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방식이다. 3년의 주기로 성경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읽고 설교하도록 만든 성경과정(Lectionary)를 따르지 않더라도 중요한 교회의 절기를 따르면서 신구약 성경을 고르게 오가면서 설교할 수 있도록 적어도 우리 고신교회 안에서라도 그러한 도움이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교단 신학위원회와 신대원이 공동으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학이나 병원 등 동료들의 관찰이나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설교자들 사이에 형성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모 외에는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서 충고를 해 줄만한 사람이 교회 안에 있지 않다. 정신과 의사들이 동료 의사의 분석을 받고 학자들이 동료 학자의 논평을 받는 것처럼 목사님들도 정기적으로 자신이 하는 설교에 대해서 일종의 ‘클리닉’을 받을 기회가 없다. 이런 기구가 제도적으로 예컨대 신대원 안에 설립되어 필요할 경우 몇몇의 대표 설교를 보내어 여러 측면에 걸쳐 자신이 하고 있는 설교가 얼마나 건강한지 체크를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와 관련해서는 신대원에서 설교클리닉을 운영하여 일선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를 도울 수 있는 길

설교토론은 대부분 지나간 설교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데 국한된다. 그럼에도 이것이 필요하나 이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1년 또는 2, 3년의 설교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작성하는 과정에 장로들과 성도들의 참여가 가능하다면 현재 한국교회에서 시행되는 설교보다 훨씬 나은 설교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일상 속에서 성도로 살아갈 때 무엇으로 고통하며 무엇으로 실패하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장로들과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주일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은 구체적인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목회자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설교 계획이 선다면 한 주나 두 주 전에 할 설교 원고를 교회 장로들과 세대별 대표 성도들과 함께 읽고 함께 미리 토론하는 모임을 정례화하는 것이다. 설교 가운데 사용할 본문이나 예화, 사례, 그리고 구체적인 질문과 답 등을 성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토론하여 최종 설교 원고를 만드는 것이다. 일종의 ‘설교사역팀’을 교회 안에 만들어 최소한 주일예배 설교라도 성도들과 소통하는 설교가 되도록 노력하면 지나간 설교를 두고 토론하는 것보다 교회에 훨씬 더 좋은 유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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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교회회의입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회의가 있는데, 이런 회의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회의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회의가 필요없고 모든 것을 은혜로 하자고 하는 이들도 있고,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으기가 힘드니까 회...
    Date2016.03.16 By개혁정론 Views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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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교회 회의] 노회: 장로교 회의의 꽃

    이번 기획기사는 교회회의입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회의가 있는데, 이런 회의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회의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회의가 필요없고 모든 것을 은혜로 하자고 하는 이들도 있고,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으기가 힘드니까 회...
    Date2016.03.14 By개혁정론 Views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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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교회 회의] 회의는 누가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가?

    이번 기획기사는 교회회의입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회의가 있는데, 이런 회의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회의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회의가 필요없고 모든 것을 은혜로 하자고 하는 이들도 있고,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으기가 힘드니까 회...
    Date2016.03.11 By개혁정론 Views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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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교회 회의] 당회, 그리고 제직회와 공동의회

    이번 기획기사는 교회회의입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회의가 있는데, 이런 회의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회의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회의가 필요없고 모든 것을 은혜로 하자고 하는 이들도 있고,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으기가 힘드니까 회...
    Date2016.03.09 By개혁정론 Views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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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사설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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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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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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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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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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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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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