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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목사
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1. 서론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까이뻐르)라는 이름은 네덜란드 수상을 지낸 목사요,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를 설립한 개혁파 신학자로 유명하다. 분명 카이퍼는 당대 네덜란드에서 사랑받는 설교자이자 목사요, 교육가요, 정치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카이퍼는 네덜란드 수상이 되기 전에 먼저 주간지 “드 헤르아우트”(De Heraut)와 일간지 “드 스딴트아르트”(De Standaard)의 편집장이자 주필로서 맹활약을 펼친 인기 저널리스트였다. “드 헤라아우트”를 통해서는 교인에게 건전한 신학과 바른 신앙인의 길이 무엇인지, “드 스딴트아르트”를 통해서는 국민에게 기독교 정치의 위대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미국 칼빈주의자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동시대의 네덜란드 칼빈주의자 카이퍼에 대해 “네덜란드 교회에서나 국가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2.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카이퍼의 성은 실제로 까위뻐르(Kuijper)이다. 그는 1837년 10월 29일 네덜란드의 마아스슬라위스(Maassluis)에서 개혁교회 목사인 아버지 얀 프레더릭 까위뻐르(Jan Frederik Kuyper)와 어머니 헨리에뜨 휘버르(Henriëtte Huber) 사이에 세 번째 자녀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얀은 영어에 능통했고 어머니 헨리에뜨는 불어에 능통했으므로 그는 어릴 때부터 영어와 불어에 익숙했다. 

아버지 얀이 1841년에 청빙을 받아 제이란트(Zeeland) 주의 수도 미덜뷔르흐(Middelburg)로 이주했고 1849년에는 레이든(Leiden)으로 청빙을 받았기 때문에 카이퍼는 청소년 시절 대부분을 이 두 곳에서 보냈다. 레이든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대학 예비 과정인 김나지움(Gymnasium. 오늘날 중고등학교 과정에 해당)을 6년 동안 다녔다. 1855년 9월에는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 레이든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고전어 등을 섭렵하여 1858년 4월에는 최고성적(cum laude)으로 신학준비과정을 마친 후, 그 해 11월 24일 만21세의 나이로 레이든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1862년에는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카이퍼의 1862년 신학박사학위 논문은 1860년 흐로닝언(Groningen) 대학의 공모논문에 당선된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요아네스 칼빈과 요아네스 아 라스코의 교회론을 상호 비교한 역사적 신학적 연구>(Disquisitio historico-theologica, exhibens Joannis Calvini et Joannis àLasco de ecclesia sententiarum inter se compositione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라틴어로 작성되었고 지도교수는 교의학을 담당한 스홀떤(J.H. Scholten)이었다. 이 논문은 인본주의적인 흐로닝언 신학과 “중재신학”(Vermittlungstheologie) 등과 같은 근대주의적 시대정신이 반영되었고 아 라스코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던 반면에 칼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연구의 결과로 카이퍼의 눈에는 칼빈이 ‘엄격한 교조주의자’였던 반면에, 아 라스코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을 강조한 보다 더 융통성 있는 사람’이었다. 아 라스코를 향한 카이퍼의 열정은 1866년 아 라스코의 작품 전집을 편집하여 출간한 것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1863년 7월 1일에 요한나 헨드리카 스하아에이(Johanna Hendrika Schaaij)와 결혼한 후 베이스트(Beesd) 마을의 목사로 청빙을 받아 갔다. 4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1867년 위트레흐트(Utrecht)로 청빙을 받아 떠나기 전 마지막 고별설교에서 그는 자신이 회심 없이 목회를 시작했다고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첫 목회지에서 카이퍼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자신에 대해 독신녀 발투스(Baltus)처럼 순수한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들의 반감과 불평에 부딪히면서 점차 정통 개혁파 목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카이퍼의 두 번째 목회지인 위트레흐트 교회의 당회는 정통파였다. 당시 이 교회가 겪고 있던 두 가지 문제는 세례를 베푸는 세례 방식 문제와 시찰회 소속 목사 대표들이 총회법에 따라 지역교회를 방문하여 교회를 감찰하는 문제였다. 카이퍼와 위트레흐트 당회는 세례 방식 문제에 대해서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만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고 다른 형식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시찰회의 교회 시찰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과 총회 감독자들의 신앙고백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감찰 받는 일을 거부했다. 삶과 교리에 있어서 건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투쟁했던 카이퍼는 고별설교에서 진정한 보수주의란 가장 귀한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1869년 5월 18일 저녁, 위트레흐트 돔 교회에서는 카이퍼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획기적일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그가 당대 정통 기독교 정당이자 공인되지 않은 정당 반혁명당의 수장이었던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Groen van Prinsterer)를 만난 사건이다. 그는 “군대 없는 장군”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5년 후 카이퍼는 이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동역자가 되었다. 아니 그의 영적 아들이 되었다.” 두 사람은 당시 국립학교법에 반대하여 자유 기독교 학교의 설립 정당성을 위해 각각 투쟁했는데, 이 투쟁이 두 사람의 만남에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이후 카이퍼는 반혁명 세력이 공식 정당으로 설립되기 전부터 프린스떠러르를 이어 수장을 맡게 됨으로써 카이퍼는 교인들을 위한 한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국가의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1870년에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Amsterdam)으로 청빙을 받아 갔다. 이 교회에 카이퍼가 부임할 당시 교인들과 당회가 겪고 있던 문제는 그들이 성경의 기적과 부활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목사들의 설교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하고 시찰회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시찰회가 이것을 묵살하자 17명의 장로들이 그 목사들이 설교하거나 성찬을 집례하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카이퍼는 이러한 교회 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모든 국민이 자동적으로 교인이 되는 ‘국가교회’와는 달리, 하나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하는 자들만이 교인이 되는 ‘자유교회’를 세우기 위해 투쟁했다. 카이퍼의 소망은 형식적인 예배의 죽은 교회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예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살아 있는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1874년에는 반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덕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국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정치인 둘 다를 겸할 수 없도록 규정한 헌법 91조에 의해 목회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최대의 정당은 자유당과 보수당이었으므로 그의 당선은 그들에게 못마땅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첫 하원의원직은 1877년까지 4년간만 유지되었다. 카이퍼는 1879년에 자신이 수장이었던 반혁명당(Anti-Revolutionaire Partij = ARP)을 공식 정당으로 발족했다. 1816년에 네덜란드 왕 빌름(Willem) 1세는 법령으로 모든 교육기관과 교회를 정부에 합병하여 국가법의 통제 아래 두었는데, 이것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싸웠고, 그 결과물로써 카이퍼는 1880년에 드디어 국가의 통제와 국가교회의 간섭으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천명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을 설립하게 되었다. 1886년에 카이퍼는 국가교회의 비기독교 신앙 상태를 개탄하며 국가교회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돌레앙찌”(Doleantie. 슬픔)라 부르는 일군의 무리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고, 결국 1892년에는 당시 “기독교개혁교회”(Christelijk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과 연합함으로써 새로운 교단 “네덜란드개혁교회”를 탄생시켰다. 

카이퍼는 1894년에 다시 하원의원으로 피선되어 1901년까지 정치활동을 하다가 1901년에 로마가톨릭 세력과 연합함으로써 수상이 되었으나, 1905년의 선거에서 패배함으로써 수상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1908년에 다시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1912년까지 활동했고, 1913년에는 상원의원이 되었고 그의 정치 활동도 치명타를 입고 약화되긴 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박동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카이퍼는 1920년 11월 8일에 임종을 맞이하여 덴 하악(Den Haag) 즉 헤이그(Hague)에 장사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3. 아브라함 카이퍼와 언론의 관계

카이퍼는 목사로서 공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874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목회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의 정치생명도 1905년 수상직에서 물러남으로써 사실상 급격한 내리막길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언론인으로서 그의 활동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육신의 죽음 이외에는 그 어떤 환경의 변화와 위기의 순간도 그의 손에 들린 펜의 힘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주간지 “드 헤르아우트”지와 일간지 “드 스딴트아르트” 신문의 편집장직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19세기 네덜란드 최초의 기독교정당 반혁명당을 조직하기 시작한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는 1850년 7월 1일에 “네덜란드 새 위트레흐트 신문(De Nederlander, Nieuwe Utrechtsche Courant)라는 이름으로 시험적인 신문을 발행했으나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5년만에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폐간할 수밖에 없었다. 1855-1857년에는 “드 바자윈”(De Bazuin. 나팔)과 “드 벡스뗌”(De Wekstem. 깨우는 소리)이라는 이름의 신문이 전국적으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반혁명당은 공식적인 정치 기관이 아니었다. 

1858년에는 기독교인이 된 유태인 이삭 다 꼬스따(Isaac da Costa)의 격려로 “드 헤르아우트”라는 주간지가 만들어졌다. 당시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편집장이었던 슈바르츠(Schwartz. 스흐바르츠) 박사의 업무였으나 이 일이 그에게 너무 과중했기 때문에 1869년 10월 29일부터는 카이퍼 박사가 대신 그 일을 맡게 되었다. 1870년 8월 25일에 편집장이 갑자기 사망하자 1871년 1월 1일부터 카이퍼가 대신 편집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카이퍼는 죽을 때까지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그의 주요 저술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곳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것들이다.

한국어로는 “전령”, 영어로는 “헤럴드”(herald)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가 “드 헤르아우트”이다. 카이퍼가 편집장이 된 후 이 주간지는 1월 6일자로 처음 발행되었다. 1887년에는 “드 헤르아우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간된 네덜란드 개혁교단의 주간 교단신문이 되었는데, 이 새로운 교단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당시 분리(Afscheiden) 교회들과 연합함으로써 1892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교단 주간지 “드 헤르아우트”는 1913년부터 “네덜란드 개혁교단을 위한”(voor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이라는 부제가 첨가되어 1945년까지 존속했다. 카이퍼는 1920년 사망할 때까지 이 교단 주간지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는 1832년에 처음 출판되기 시작한 자신의 “네덜란드 사상”(Nederlandsche Gedachten)을 1869년에 자신의 일간지로 재개했다. 1872년 3월 7일 모임에서 일간지 “드 스딴트아르트”를 창간하고 카이퍼를 편집장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카이퍼는 이 신문의 최초 편집장일 뿐만 아니라, 이 신문의 창간자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카이퍼는 일간지를 “사탄의 작품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로 간주했다. 당시 주간지 “드 헤르아우트”는 새로운 일간지 “드 스딴트아르트”로 통합하기로 하였고 “드 스딴트아르트” 매주 토요일자 신문의 종교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일간지의 창간호는 1872년 4월 1일에 출간되었는데, 그 날은 네덜란드가 정치적 독립을 위해 스페인과의 80년 전쟁 중 마아스(Maas) 강변의 도시 덴 브릴(Briel)을 점령한지 30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다. 이 일간지 덕분에 카이퍼는 반혁명 세력을 새롭게 규합하고 조직하여 확장하는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1873년 선거에서 반혁명 세력은 비록 자유당에 패배했지만 1871년 득표수의 약 3배에 달하는 유권자를 얻게 되었고 카이퍼는 1874년 1월 21일 하우다(Gouda) 지역 선거에서 승리하여 하원의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어 “스탠다드”(standard) 즉 ‘표준’을 의미하는 일간지 “드 스딴트아르트” 신문은 반혁명당과 네덜란드 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의 대변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아브라함 카이퍼(=까위뻐르)를 네덜란드 수상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편집장직은 1920년 카이퍼 사망 후 그의 후계자였던 헨드리쿠스 꼴레인(Hendrikus Colijn)에게 넘어갔다. 이 신문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의해 점령된 2차 세계대전 동안, 정부에 순종하라는 로마서 13장 1절을 근거로 새로운 독일 정부에 순종했는데, 이것을 못 마땅히 여긴 개혁파의 일부가 1943년부터 불법법적 신문 “뜨라우”(Trouw)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자, 결국 1944년에 “스딴트아르트” 신문은 폐간되고 “뜨라우” 신문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뜨라우”는 ‘신뢰’ ‘옳곧음’ ‘충실’ 등을 의미하는 단어다.

4. 아브라함 카이퍼의 언론관

카이퍼는 “드 헤르아우트”지에 정치적 이슈를 책임지게 된 1869년 10월 29일 이전, 즉 비망록 형식의 5월 14일자 기록물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단상을 기록해두었다. 

사회 문제에 관하여. 나는 제안한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역할은 지대하다. [...] 사회 문제에 관한 모든 사실들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 ‘더 데일리 The Daily’지(신문)는 이 문제의 끔찍한 결과와 위험한 부분, 엄청난 중요성을 숨기지 말고 제대로 보도해야 하며, 이 문제와 혁명적인 외교술과의 밀접한 연결고리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언론은 국민들의 눈을 열어 정부가 한편으로 어떻게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피를 불러 올 것임을 보게 해야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 불러일으킬 사회 현상들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울 것인지, 이런 방식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거의 살기 어려울 정도의 삶을 살도록 강요할 것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언론은 반드시 오직 자연의 법칙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제도만이 삶의 사실들을 보증하고 삶의 필요들을 만족시키며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음을 밝혀야 한다.
(루이스 프람스마,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그의 시대>, 이상웅 & 김상래 역 (서울: 복있는 사람, 2011), 141-142.)

1870년에 카이퍼는 당대 신학적 십볼렛이었던 예정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칼빈주의자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카이퍼의 정치 활동은 이처럼 칼빈주의적 세계관에 뿌리 내린 것이었으므로 자신이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1874년에 <칼빈주의, 우리의 헌법적 자유의 기원과 보장>(Het calvinisme, oorsprong en waarborg onzer constitutioneele vrijheden)이라는 책자를 당당하게 발간할 수 있었다. 

카이퍼가 칼빈주의자라는 사실과 그가 언론인이요 정치가라는 사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카이퍼는 하나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세상의 모든 것, 즉 어떤 시대도, 사건도, 사물도, 영역도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이것은 우주적 자연과 질서를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으로 비유한 칼빈의 개념과 유사하다.

위에 언급된 카이퍼의 단상에서 그의 언론관을 엿볼 수 있는데, 크게 4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로, 언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이다. 카이퍼는 사회 문제들을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그 파급효과도 지대한 것으로 본다. 사실 보도와 관련하여 둘째로, 공정보도의 중요성이다. 언론이란 사회 문제들을 은폐하거나 호도하지 않고 공정하게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문제의 현실적인 결과의 부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예측되는 결과의 파급효과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다른 사회적인 문제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고 연관될 수 있는지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언론을 통한 국민 계몽의 중요성이다. 언론은 독자의 눈을 열고 현실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깨우는 역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선도하는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사회적 문제를 단순히 인식하는 단계를 넘어서 그 문제를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대처 능력까지 배양하는 것을 언론의 역할로 간주한다. 실제로 노동착취 문제와 열악한 노동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공론화하여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청소년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개혁 법안을 상정했다. 또한 국가와 국가교회의 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교육의 불합리성을 개선하고 개혁하여 교육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교육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언론의 중요성이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언론은 기독교적, 성경적, 개혁주의적일 때 가장 공정하고 효과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카이퍼는 자연뿐만 아니라, 사회와 경제와 정치 분야와 학문과 예술 분야 등까지, 영혼 구원 이외의 모든 분야를 일반은총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언론 분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언론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의 법칙”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만 하는데, 이 두 기초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언론의 자리는 기독교 신앙과 사랑 안에서 발견된다. 이와 같은 카이퍼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머리도 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그의 일반은총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반은총의 영역 가운데서도 카이퍼는 특히 세 가지 영역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론이었다. “카이퍼는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들의 왕을 영화롭게 하라고 끊임없이 촉구했다. 교회생활을 제외하고 우리 삶의 세 가지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고 카이퍼는 주장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을 통해서다. [...] 두 번째 영역은 기독교 정당이었다. [...] 세 번째 영역은 출판계이다. 조금 넓은 용어를 쓰자면 대중매체이다.”(프람스마,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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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16.08.01 By개혁정론 Views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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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선교] 한국교회 선교의 진단과 평가, 그리고 과제에 대해

    이번 기획기사는 선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열심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금에 선교의 폐해가 심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선교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
    Date2016.07.29 By개혁정론 Views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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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선교] 선교 현장에서 만나는 일들

    이번 기획기사는 선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열심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금에 선교의 폐해가 심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선교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
    Date2016.07.25 By개혁정론 Views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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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선교] 고신총회 세계선교회의 선교정책과 과제

    고신총회 세계선교회의 선교정책과 과제 (지역선교부 개편과 선택과 집중 정책을 중심으로) 고신총회 세계선교회(Kosin Presbyterian Mission, KPM)는 교단의 선교업무를 주관하고 실행하는 총회적 기구다. 따라서 교단선교의 전략과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
    Date2016.07.22 By개혁정론 Views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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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선교] 선교지의 신학 교육에 대한 평가와 과제

    이번 기획기사는 선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열심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금에 선교의 폐해가 심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선교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
    Date2016.07.20 By개혁정론 Views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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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선교] 종교개혁자들에겐 선교개념이 없었는가?

    이번 기획기사는 선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열심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금에 선교의 폐해가 심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선교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
    Date2016.07.18 By개혁정론 Views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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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선교] 선교사는 누구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선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열심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금에 선교의 폐해가 심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선교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
    Date2016.07.15 By개혁정론 Views2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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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찬송에 대하여] 21세기 찬송가의 문제점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7.06 By개혁정론 Views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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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찬송에 대하여] 성가대가 꼭 필요한가?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7.01 By개혁정론 Views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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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찬송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실까?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6.07 By개혁정론 Views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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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찬송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떤 찬송을 좋아하실까?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6.03 By개혁정론 Views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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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찬송에 대하여] 예배에서 찬송의 위치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6.01 By개혁정론 Views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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