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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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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선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열심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금에 선교의 폐해가 심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선교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해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장 주 


 


선교 현장에서 만나는 일들



김주만.png

김주만 목사

(KPM 태국선교사)



1. 다른 것이 틀린 것인가?


     타문화 선교를 함에 있어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단일 민족(지금은 단일 민족을 벗어나고 있지만)과 단일 언어라는 배경을 가진 한국 사람이, 독특한 영적 부흥과 경제 성장을 경험한 세대 가운데 자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학과 신앙 훈련을 받고 선교사가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장단점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타문화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타문화 선교 (Cross-Cultural Mission)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른 종교를 따르고 있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타문화 선교에서 다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건전하면서도 열매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서구 선교를 들여다 보면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선교사가 다 그렇게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볼 때, 당시의 타문화 선교의 특징은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제국주의적 선교는 주로 식민지에서 수행된 선교였습니다. 이 선교는 선교사 혹은 선교사 파송 국가(혹은 파송 교회) 중심적 선교였습니다. 이 당시의 선교 경향은 서구문화 = 기독교 문화였기 때문에, 비서구 식민지 국가에 서구문화를 심는 것이 곧 기독교 선교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선교는 그들이 나(혹은 우리)처럼 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선교사 혹은 선교의 주체인 서구 교회가 선교지 사람과 문화가 가지고 있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로 접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개한 비서구 문화의 사람들에게 서구인과 같이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우고, 서구사람들과 같은 형식으로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으며, ‘상황화’ (Contextualization) 혹은 성육신적 선교’ (Incarnational mission)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선교적 관점은 선교사 혹은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아닌 선교지 중심의 선교를 강조합니다. 나와 다른 문화에 대해 틀렸다가 아니라 다르다라는 관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선구 문화 =기독교 문화라는 등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더 이상 서구화를 따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즉 서양사람처럼 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서구형 교회당을 짓지 않고, 서양 사람들의 예배 의식을 따르지 않아도 충분히 바른 교회 공동체를 세울 수 있고,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 신학적인 문제점들과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사역을 바르게 수행하는데 있어서 긍정적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관점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된 관점(상황화 혹은 성육신적 선교)들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의 선교는 현지인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선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진리는 여러 가지일 수 있는가?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


     20세기 말을 지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를 정의 내리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부질 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 대한 폭력이요 억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리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이 현재의 동성애 문제라든지, ‘종교적 상대주의혹은 혼합주의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손아귀 아래 놓인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에 대한 구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 얼마든지 양보하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변경 가능한 상대적 진리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진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상당히 배타성을 지니며, 타협할 수 없는 것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해석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말로 묘사되고 설명되어진 진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쉽지 않습니다. 대신 말로 묘사되거나 설명된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재로 경험을 통해 체험되어질 때, 그것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입니다. 따라서 어떤 진리에 대해 논리적 설명 혹은 감동적 이야기와 함께 그 진리가 삶 속에서 표현되고 체험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은 선교지(특별히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의미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현대 철학이나 사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더라도, 이미 과거부터 형성되어온 혼합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물들어 있는 불교인들이나 힌두교인들에게 복음으로 도전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말씀의 체험과 경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적 진리로서의 복음이 그들의 삶 속에서 절대적 진리로서의 복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내적 확신과 함께 외적인 체험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많은 선교지에서 오순절 교회가 부흥하고 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체험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교사 자신이 진리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바르게 가지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교지에서 상대적인 진리 혹은 성경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문화적 종교적 요소들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절대적 진리라고 선포하고, 전도하고, 가르치려면, 선교사는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그 진리를 증명(?)하고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필자는 선교는 삶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희 경험상 선교지 사람들은 저의 입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저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합니다. 또한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문화적 측면을 띄고 있는 것들을 절대적 진리로 강조하고 강요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새벽기도회를 하기 때문에 선교지에서도 새벽기도회를 꼭 해야한다고 강조하든지, 예배를 11시에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질의 문제에서 벗어난 주장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일환으로서 새벽이나 저녁에 기도를 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마치 절대적 진리인양 강조하고 그것을 하도록 강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진리가 전달되고 있는가?


     선교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통해 선교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땅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교사는 선교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전도와 제자훈련 그리고 예배와 설교 등을 포함하는 아주 포괄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 사역에 대해 좀 더 포괄적 이해, 즉 복음전도와 사회봉사 이 모두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기관인 교회를 세우는 일이 선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는 진리를 전달하는 전달자’ (Communicator)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도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일을 위해 선교사는 전문적인 전달자’ (Communicator)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는 먼저 사역하는 대상자들의 문화와 언어를 익히고,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베이스를 소홀히 하거나 잘 갖추지 못하면, 머지 않아 그 열매를 선교사 자신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마치 뿌리가 약하거나 병든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언어 훈련과 선교지를 이해하기 위해 보내는 시간들은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5 10년 이상의 장기적인 사역을 하다보면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선교사는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 사역을 하던지,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사는 한 책의 사람, 즉 성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의 중심 메시지를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사회복지사가 아닙니다. 선교사는 필요에 따라 직업을 가지거나 다른 일들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돈버는 셀러리맨이 아닙니다. 선교사는 우물을 파기도 하고 교회를 건축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필요들을 채우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건축가도 아니며, 사업가도 아닙니다. 선교사는 복음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자로서 성경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훈련 없이 선교사로 나가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좀 엄격한 잣대로 말하면 선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선교사가 타문화 선교 상황 속에서 효과적이면서도 분명한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여러 가지 선교 사역(ministries)을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과정입니다.


 

4. 배경과 시각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몇 해 전에 한국의 한 존경받는 목사님이 오셔서 태국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사역자들이 사역을 할 때 어떤 자세로 헌신해야 할지를 강조하셨습니다. 그 때 자신의 삶에 대한 간증을 하셨는데, 그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가족들과 바닷가에 놀러를 가도 놀지 않고 호텔 방에 앉아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아마 이 목사님은 목사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태국 사역자들에게는 이 말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태국인 사역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목사님은 언제 가족들과 함께 하십니까?”

     사실 태국은 부부관계, 가족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많은 나라입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모범적인 가족관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역자들에게 좀 극단적인 예를 들면서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헌신하고 사역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국 성도님들은 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의 교회를 방문하면,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사역자들에게 혹은 성도들에게 얼마라도 돈을 주고싶어 합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발동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섬기고 있는 태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라는 개념이나 감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돈 많이 주는 한국 교회가 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으로 사랑으로 지워준 아주 작은 돈이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분쟁과 싸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단기선교팀이 와서 현지인과 함께 민박을 할 때, 절대 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자그마한 선몰을 준비해와 감사를 표현하라고 합니다.

 

     수년 전에 한 신학교를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그 신학교의 한 직원과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식사를 하려고 앉자 마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선교사님~! 한국 선교사들은 왜 태국 신학생들과 사역자들에게 화를 내고 뺨을 때리기까지 합니까? 한국 선교사님들이 우리 태국 사역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마치 저를 시험하려는 질문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이 무례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야단을 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더 잘 되고, 성숙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 선교사 그 신학생이나 사역자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화를 낸 모양인데, 그 마음이 전달이 안된 것 같습니다.”

     이처럼 타문화 선교를 할 때, 우리의 좋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 정으로 주는 마음이 선교지 사람들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고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그들 사이의 문화적, 정서적, 종교적, 경험적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개인의 관계의 문제에서부터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사역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차이점들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은 선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선교지의 문화적, 종교적, 정서적, 경험적 시각과 배경의 차이점을 이해할 때, 우리는 좀 더 효과적인 선교를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고, 선교사와 선교지 사람들, 선교사와 한국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들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 그들의 본심은 무엇인가?


     선교지에 도착한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경험한 일입니다. 태국의 롭부리라는 작은도시에서 언어공부와 현지 적응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아내 박경화 선교사가 한 태국인 여자 교사를 길에서 만나 짧은 태국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긴 대화는 아니었지만, 즐겁게 이야기하고 나서 아내는 그 태국인 여자 교사를 우리 집으로 식사초대를 했습니다. 그 태국인 교사는 내일 만나자는 약속을 흔쾌히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아내는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몇 가지 음식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약속한 태국인 여자 교사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태국인 교사는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많이 실망한 마음으로 아내의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왜 태국인 교사는 우리집에 오지 않았을까요? 먼저 새내기 선교사인 우리는 태국인의 식사대접 문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태국인들은 귀한 손님이 오면 집이 아닌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주로 합니다. 그것은 더운 날씨와도 관계가 있고, 그들의 의식주 생활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으니 그들의 문화와는 좀 맞지 않는 초대였습니다. 오히려 식사보다는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 부담없이 교제하면서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순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둘째로 그들의 일반적인 태도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태국인들은 모른다는 말과 거절하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체면을 세워주고, 말하는 사람을 실망스럽게 만들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태국인들에게는 사실 (혹은 진실)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이 편안하냐아니면 불편하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물어보면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이리로 가라던지 저리로 가라고 길을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엉뚱한 길을 가르쳐 줄때가 허다합니다. “내일 우리 교회에 오세요.”라고 초청하면 네 갈께요. 예배 몇시에 합니까?”라고 관심을 가집니다. 하지만 주일날에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태국 사람을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예의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태국인 교사도 거절하기 보다는 알겠다고 초대에 응하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결국은 실망을 했지만.), 자신의 미안한 국면도 피해간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단순히 태국에서만 하는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여러 다양한 문화 속에서 다양한 것을 경험하면서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문화적 행간 속에서 그들의 본심을 읽어내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선교사에게는 필요할 것입니다.

 


6. 같은 구절 다른 이해! (불교인의 성경해석?)


     한 서양 선교사님이 불교인 학생들과 영어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져서 많은 물고기를 잡아 만선의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를 가지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은 후 보였던 태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서양 선교사님은 이 구절에 왔을 때 한 가지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집니다. “왜 베드로가 갑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했을까요?” 그러자 한 학생이 지체없이 손을 들고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많이 죽였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가 살생을 많이 해서 죄인이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전형적인 불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태국 학생의 대답에 서양 선교사님이 많이 당황했다고 합니다.

     불교는 죄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땅의 삶에 대해 성경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너무나 평범하고, 일반화되어 있는 성경의 가르침일지라도 불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태국의 한 승려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난 후에 기록한 책이 하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요한복음 316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태국어로 하나님이 프라짜오인데,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인격적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세상은 고통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해탈하여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또한 불교에서 사랑은 집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집착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집착인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불교적 가치관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집착하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서 오는 복음과 말씀에 대한 상이한 이해 혹은 오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그 길을 찾는 것이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말씀과 메시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이해없이 설교자 위주로 말씀을 전하고 메시지를 던져 놓고 그들이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가치관을 고쳐나가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이해되어지고 적실성있게 전할 것인지에 대해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자도 설교를 시작했던 초창기에 늘 가졌던 생각은, ‘그들의 머리 속과 마음 속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선교사가 가장 처절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은 상이한 가치관과의 싸움입니다. 같은 구절을 가지고 상이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끝없는 커뮤니케이션을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들려질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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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6.03 By개혁정론 Views6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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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찬송에 대하여] 예배에서 찬송의 위치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6.01 By개혁정론 Views2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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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찬송에 대하여] 공예배에서 악기 사용,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5.30 By개혁정론 Views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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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찬송에 대하여] 시편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5.27 By개혁정론 Views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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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찬송에 대하여] 시편찬송을 불러야 개혁교회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5.23 By개혁정론 Views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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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찬송에 대하여] 목사의 직무 중 '찬송을 지도하는 일'에 관하여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5.20 By개혁정론 Views2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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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찬송에 대하여] 찬송의 의미

    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
    Date2016.05.18 By개혁정론 Views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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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구원론] 구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뿐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구원론입니다. 구원에 관해 관심이 없는 종교가 있겠습니까? 종교인 중에 구원받기를 바리지 않는 이들이 있겠습니까? 신을 믿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의 구원은 다른 어떤 종교의 구원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자...
    Date2016.05.16 By개혁정론 Views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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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구원론]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구원

    이번 기획기사는 구원론입니다. 구원에 관해 관심이 없는 종교가 있겠습니까? 종교인 중에 구원받기를 바리지 않는 이들이 있겠습니까? 신을 믿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의 구원은 다른 어떤 종교의 구원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자...
    Date2016.05.02 By개혁정론 Views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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