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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기도’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 그들의 신께 기도합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들도 어려움을 당하면 누구에겐가 기도를 합니다. 힌국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도하면 다 된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그냥 기도하면 되지 왜 말이 많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이번 기획기사를 통해 기도를 잘 배워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 편집장 주-

 

 

기도는 섭리신앙의 시금석인가? 은혜를 받는 방편인가?

 

 

성희찬.jpg

성희찬 목사

(마산제일교회)

 

 

 

1. 기도는 섭리신앙의 표현 혹은 시금석인가? 아니면 은혜를 받는 방편인가?

 

   기도는 섭리신앙의 표현인가? 은혜를 받는 방편인가? 이는 신자의 영적 생활에서 중요하면서도 미묘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신자는 섭리신앙의 표현으로 생각하고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풍년의 때 흉년의 때나 비가 올 때든 가뭄이 올 때든 이 모든 때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섭리라 여기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 즉 은혜의 방편으로서 기도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경우 즉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으로서 감사의 기도만을 드리는 자는 예수님이 비유 중에 책망하신 바리새인의 기도에 비교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가슴을 치며 죄를 고백하는 세리와 달리 감사의 기도를 하였지만 책망을 받았다.

   반면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대한 감사의 기도는 전혀 없이, 오직 은혜를 얻기 위해 결사적으로 간구하는 기도를 한다, 이것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섭리신앙의 표현인가? 은혜를 받는 방편인가? 이 질문에 대답을 얻기 위해 먼저 다음의 주제에서 시작하자.

 

 

2. 기독교와 교회의 위기, 신앙의 위기는 기도의 부족에서 무엇보다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나아가 기독교 신학에서 기도를 다루지 않은 것에서도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 아펠도른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다가 은퇴한 판 엇 스페이커러 교수는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의 위기, 신앙의 위기를 무엇보다 기도가 부족한 성도와 교회의 현실에서 찾았다. 나아가 신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교의학(조직신학)에서도 기도를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 실례로 심지어 헤르만 바빙크 같은 훌륭한 개혁주의 진영의 신학자조차도 그의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기도를 다루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작정(예정)과 섭리를 말할 때에 겨우 기도를 언급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 논점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는데 기도가 왜 필요한가?”이다. 바빙크는 그의 책 “개혁주의 교의학” 제2권 §39 <하나님의 섭리>를 다루는 항목에서 하나님의 작정은 목적 뿐 아니라 수단도 포함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기도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작정과 연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뭄에 비를 내리기로 작정하셨다면 그 분은 자기 백성이 그것을 위해 기도할 것을 작정하셨고 또한 동시에 그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친히 비를 내리실 것을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황대우 역, 기도 묵상 시련, 37).    

 

   벌코프(H. Berkhof)는 기도가 교의학에서 거의 잊혀진 것은 바빙크 뿐 아니라 칼빈 이후 나온 대부분의 교의학 교과서에 해당한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인 유해무 박사가 두커스(L. Doekes)의 책을 인용하여 벌코프의 이런 발언이 어느 정도 과장된 발언이라고 변호하고 있기는 하다(개혁 교의학, 526). 두커스는 “기도하는 교회”라는 논문집에 기고한 그의 논문(“칼빈 이후 개혁의 교의학에 나타난 기도”)에서 개혁주의 진영에서 기도가 지속적으로 신학의 주제였고 또 경건생활에서도 지속적으로 존중되었음을 강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바빙크와 카이퍼는 기도를 신학이 아니라, 윤리학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로 보았고, 오히려 벌코프(H. Berkhof)나 칼 바르트 같은 이들이 기도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도를 신학이 아니라 윤리학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기도를 신자가 하나님께 마땅히 행할 의무로만 보았다는 점이다. 이는 기도를 은혜의 방편, 즉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으로 본 칼빈과 청교도들의 입장과 크게 달리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기도는 은혜의 방편 이전에 우선 은혜의 증거요 은혜의 열매이다.

 

   무엇보다 기도는 은혜의 방편 이전에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은혜의 증거요 은혜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 이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마치 영혼이 살아 있는데 그 영혼이 숨을 쉬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기도가 없는 곳에는 은혜가 아니라 영적 죽음이 머문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한 장면을 보면 하늘의 빛이 그를 강하게 비추었을 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주님께서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에게 증거해 주셨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사도행전 9:10). 기도하는 바울을 지적하면서 이만큼 회심의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안심하고 그를 찾아가라고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중생의 생활에서 여러 증거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가장 분명한 증거는 기도다. 기도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가장 큰 증거요, 중생 받은 마음의 증거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증거요, 은혜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기도와 중생의 관계에서 볼 때 기도는 은혜의 열매이지, 은혜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중생의 은혜는 기도해서 주어진, 기도의 열매가 결코 아니다. 즉 중생의 은혜가 먼저 있고, 그 증거로서 주어진 것이 기도다.

   또 신자가 드리는 기도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라는 은혜 아래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요 열매이다. 행복할 때든 불행할 때든 모든 시간과 모든 때와 모든 상황에서도 천부의 섭리를 믿는 신앙의 시금석은 신자가 드리는 감사 기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신자도 때로는 죄 중에 있을 때 마치 약하고 병든 자가 숨을 잘 쉬지 못하듯이 기도의 영적 호흡이 참으로 약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자가 호흡을 할 수 없듯이 영적으로 죽은 자는 결코 작은 호흡도 할 수 없다.

 

   기도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8:26을 보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의 뜻은 성령께서 신자를 통해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가 연약 중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을 통해 신자가 기도한다는 뜻이다.

 

 

4. 그럼에도 기도는 은혜의 증거요 열매일 뿐 아니라 또한 나아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우리 고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154), 소교리문답(88문답)은 말씀과 성례와 함께 기도가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교회가 그 분의 중보의 은덕을 전달하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고 할 때 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유해무 박사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는 방편이자,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우리 기도가 오직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에 우리 기도의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떤 기도보다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또 기도가 신자의 의무요 신앙의 응답 이전에 은혜의 방편으로서 은혜의 또 다른 방편인 ‘말씀’을 효력 있는 방편으로 삼아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죄인을 책망하고 회개케 하시며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소교리문답 89). 또 중보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효력 있게 적용하시어 우리가 그 구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소교리문답 29). 

   따라서 기도가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천부의 은혜를 구하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기도는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요,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방편이요 그래서 은혜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고 할 때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오로지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의 방편을 사용한다면 다른 종교의 기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둘째,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은 기도가 신자의 영적 생활을 강화시키는데 중요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칼빈과 청교도의 기여라고 유해무 박사가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 제3권 20장의 표제에서 기도를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은덕들을 받는 방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금 제단에 드려진 거룩한 향기라고 말하였다(계 5:8). 이는 시편 141:2의 말씀과 부합되는 말씀이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이 말씀은 신자의 기도가 하나님의 눈에 볼 때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견고한 망대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잠 18:10), 주님 앞에 우리의 심정을 통한 것이며(삼상 1:15), 또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히 4:16)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우리 염려를 주께 다 맡기는 것(벧전 5:7)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도는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명령이요 신자의 경건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의 영적 생활을 강화시키는 최상의 유익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점은 기도와 기도응답의 관계를 성경이 아주 긴밀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성경이 이같이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서 우리의 경험에서도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신자에게 최고의 때는 곧 신자가 기도생활을 최고로 할 때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들숨과 날숨을 통해 신선한 공기를 마시어 건강하듯이, 우리 영혼도 기도를 통해 성령의 숨이라는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영적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기도를 쉬지 말라고 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5,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기도가 은혜의 증거로서 섭리신앙의 표현이면서 또 신자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방편이라는 점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사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16문답은 기도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요소를 잘 정리해서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첫째,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였다. 이는 기도가 신자가 은혜를 받은 증거요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기도를 신자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은혜 아래에 있는가 하는 시금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기도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또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기도가 은혜를 받은 방편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둘이 서로 교리적으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기도가 은혜의 증거요 열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것일까? 즉 한편으로는 은혜가 먼저 나오고 기도가 나중에 나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도가 먼저 나오고 은혜가 나중에 나온다. 과연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기도가 은혜의 증거요, 열매라는 것은 신자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중생을 얻는 자로서 또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라는 은혜 아래에 있는 신자의 ‘존재’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고, 반면 기도가 은혜를 얻는 방편이라는 것은 신자가 새로운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것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신자의 ‘존재’와 관련해서 기도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은혜의 증거이다. 그러나 신자의 생활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과 관련해서 볼 때 기도는 은혜의 방편이다.

 

 

6. 결론

 

   결론을 내린다면 신자는 기도를 통해 신자로서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믿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여부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다른 한편 그럼에도 신자는 날마다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얻어서 신자로서 영적 생활을 유지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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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나갔습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회복하였을까요? 행사만 요란했지 세습을 포함하여 개혁에 역행하는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한국이 복음을 받은 지 130여년 후에 교회는 이 민족에게 길을 제시하기는커녕 스스로 ...
    Date2018.01.26 By개혁정론 Views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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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2017년 국제사회 5대 뉴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2017년에는 고신교회와 한국교회, 한국사회와 세계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 편집장 2017년 국제사회 ...
    Date2018.01.03 By개혁정론 Views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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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사설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공적 금식과 공적 기도를 선포하자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