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요한 기자
7월 8일(화) 서울시 동교동 소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현대기독연구원이 주관한 “20세기 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세미나 네 번째 시간이 있었다. 주제는 “복음주의자는 어떻게 자기 신앙을 변증했는가”, 즉 변증학에 관한 것이었고 강사는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이재근 박사(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 Ph. 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였다.
이 박사는 복음주의권 활동에 영향을 미친 근대 계몽주의 및 계몽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을 고찰하고 미국과 영국의 20세기 변증가들을 소개하였다.
▲ 이재근 교수 ⓒ 설요한
이번에도 강연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였다. 아래는 해당 내용이다.
20세기 복음주의의 특징은 세계화인데 비해 변증이라는 주제는 지역적으로 영국과 미국에 한정된 논의를 다룬다. 변증학이라는 것이 18세기 이후 서구사회 내에서의 지적 운동이라는 면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영어 표현에는 내재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는 이미 성경에 나타나 있다. 창세기 1장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는 표현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 그리고 상식철학파(Philosophy of Common Sense)의 토머스 리드(Thomas Reid)나 듀걸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등이 등장한, 북부의 아테네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 지역에 있는 한 공공도서관 입구에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쓰여 있다. 도서관은 계몽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하는데, 18세기 에든버러가 세계 계몽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할 때 도서관에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새긴 것이다.
계몽주의는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RenéDescartes)에 그 기원이 있다. 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 라는 표현은 출애굽기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의 재편이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은 신본주의 체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로 대변되는 사고체계는 인본주의 체계다.
계몽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이성의 시대
2) 세상의 모든 것을 주체(인간)-객체(사물) 구조로 분석한다.
3) 기계론적 인과율을 도입한다.
4)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5) 종교적, 주관적 편견이 배제된 객관적 지식을 발굴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모든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이 사실적, 가치배제적, 냉정,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6) 세상의 모든 문제는 원칙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라 인식한다.
7) 사람을 신, 자연, 운명에서 해방된 자율적 개인으로 규정한다.
계몽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
이 계몽주의 체제 아래에서 기독교는 살아남기 위해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대응의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1) 이성을 기독교의 적으로 보고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경건과 경험과 감정에 근거한 신앙을 추구한다.
2) 기독교 신앙을 공공화하지 않고 사유화하여 스스로 고립시킨다.
3) 계몽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이성을 취한다. 신앙을 과학화해서 저항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일반적으로 ‘변증학’이라고 일컬으며 구 프린스턴(Old Princeton)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나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 등이 대표적이다.
4) 이성에 의한 세속화를 수용하자는 흐름이 있다.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나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등이 나타난다.
복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 적대적 동반자?
일반적으로 보면 기독교 신앙과 계몽주의를 조화시킬 수 없을 것 같지만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 수용, 일부 타협 모두 이미 형성된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 안에서 나타났다. 즉 근대 기독교 역사는 계몽주의와 적대적 동반자 관계를 이루고 있던 것이다. 신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학을 하기 위해 일반적인 방법론을 배우고 그 틀 안에서 신학을 한다.
복음주의의 시작은 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부흥운동은 감정적, 체험 중심적이고 지적 운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복음주의가 계몽주의에 대해 무조건 저항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복음주의 시기(1차 대각성 및 감리교 운동)는 무의식적인 계몽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신앙에서의 감정의 위치를 강조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이성적이었다. 에드워즈 자신이 이미 이성적 이해를 강조하는 칼뱅주의자였다.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 웨슬리 형제(John & Charles Wesley) 역시 부흥의 주역이었지만 그 자신은 옥스퍼드(Oxford)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절제되고 세련되고 질서 있는 부흥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복음주의가 세계적으로 전파된 시기인데 이 계기를 만든 것이 선교운동이다. 그런데 이 선교운동 역시 계몽주의 사상 아래에서 나타났다. 현대 서구 개신교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선교는 계몽주의 시대의 낙관적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캐리의 모토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시도하라.” 였다. 이 시기의 선교는 선교가 갖는 순수한 신앙의 요소가 분명히 있지만 동시에 계몽주의가 갖는 사고방식의 종교적 표현으로서의 선교이기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세기 후반 아서 피어슨(Arthur Pierson)은 D. L. 무디(D. L. Moody)와 함께 선교집회를 하며 집회에서 결단하는 사람들을 해상으로 선교 모집을 한다. 이러한 집회는 학생자원운동(SVM)으로 연결되고 아서 피어슨은 학생자원운동의 총재가 된다. 이 학생자원운동은 1888년에 시작되어 1920년대까지 미국에서 매우 강력한 선교운동의 원천이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의 70% 정도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결단하게 되었으며 당시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의 많은 수가 80% 정도는 학생자원운동 출신이었다. 아서 피어슨이 1888년에 했던 중요한 구호 중 하나는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였다. ‘이 세대’라고 했지만 아서 피어슨의 구상은 1900년 이전까지 세계를 복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의 기저에 있는 것이 계몽주의였다. ‘우리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수많은 자원단체(voluntary [para-church] societies)가 등장한다. 20세기의 수많은 선교단체의 뿌리가 19세기에 나타났다. 노예해방, 성경번역, 금주, 주일학교, 문서선교, 고아원, 장애인, 폭력가정 지원, 정신병자, 해방노예 귀향 등의 사회선교단체 및 수많은 지역별, 교단별, 성별, 특수목적별 해외선교 단체가 등장한다. 이러한 자원단체의 활동에는 ‘내가 스스로 자원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선언’이 담겨 있다. 이 역시 계몽주의의 영향이다.
신학적 차원에서 대각성운동을 보는 사람은 1차 대각성 운동은 칼뱅주의적 부흥이었고 2차 대각성부터는 인간이 스스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상, 즉 아르미니우스주의적 혹은 신인협력적인 운동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평가는 일견 맞는 부분이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인 성취라는 면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고 실제 2차 대각성 운동에는 그런 측면이 나타난 활동이 있었다. 세상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자원단체운동이 있고 그 정점에 선교운동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계몽주의의 인간중심적 사상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이 유행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에 인간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계몽주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 20세기 복음주의 변증학의 역사와 흐름에 관한 강연이 진행 중이다. ⓒ 설요한
영미 개신교 복음주의 변증학의 배경
변증학은 기독교 신앙을 지적, 이성적, 합리적으로 설득하려는 것이다. 변증가들이 20세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도 변증가가 있었다. 당시 변증가들이 이용한 방식은 헬라(그리스) 철학을 이용한 것이다. 20세기의 많은 변증가들은 계몽주의 시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계몽주의를 이용했다. 물론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변증을 통해 ‘전도’를 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변증학이 미국과 영국에서 나타난 양상은 조금 다르다. 미국에서 변증의 역할을 했던 사람은 신학적으로 개혁파 혹은 칼뱅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구 프린스턴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로 이어지는 신학자들이다. 영국에서 변증학을 주도한 복음주의자 그룹은 성공회(Anglican Church) 그룹이다. 미국에서의 변증학은 논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분리적인 성향을 갖기도 하고 칼뱅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지주의적인 성향도 있다. 영국에서의 변증학은 목회적이고 설교적인 성향이 강하다. 존 스토트(John Stott)의 책은 지적으로 탁월한 것은 아니지만 성공회적이고 목회적이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변증서는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선교적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변증을 해낸 사람이다.
미국에서의 칼뱅주의 변증학의 원천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구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나 벤자민 워필드 등의 신학이다. 당시에는 칼뱅주의 신학교가 아니더라도 이들의 책을 교과서로 쓸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또 하나의 원천은 네덜란드 개혁파 계열이다. 미시간(Michigan) 지역에 정착하여 교회, 학교 등을 건설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이식할 수 있었던 이 사람들의 특징은 칼뱅주의적 신앙을 가정과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적용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가정과 교회에서 신앙고백적 교육을 받으면서 교육기관을 통해서는 사회에서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을 갖춘 학생을 키우려고 하였다.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앨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등의 지성이 네덜란드 개혁파들이 세운 칼빈 칼리지(Calvin College)를 통해 나왔다. 네덜란드 개혁파 사람들은 복음주의권 내에서 숫자는 매우 적지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의 변증가들: 반틸, 카넬, 헨리, 쉐퍼, 플란팅가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역시 미국 칼뱅주의, 개혁파 계열에 속하는 사람이다. 반틸은 복음주의권 내에서도 다른 학자들에 비해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반틸의 변증학을 ‘전제주의적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이라 한다. 반틸에게 있어서 프린스턴 신학의 증거주의, 명제주의적인 변증은 계몽주의 아래에 있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19세기 변증학이 계몽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계몽주의를 빌려온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전제주의 변증학의 핵심은 타락한 인간 이성에 중립적인 영역(공유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의 합리성을 찾아 논증하려는 전통적 증거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가톨릭의 변증학은 잘못된 것이다. 반틸에게 있어서 기독교 변증은 불신자, 가톨릭, 아르미니우스주의 등의 잘못된 체계는 기독교의 체계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두어야 성립할 수 있다. 반틸은 그레셤 메이첸(Grasham Machen) 사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을 장악하였고 많은 복음주의자가 이 영향 아래 들어오게 된다.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 역시 반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에드워드 카넬(Edward Carnell)은 침례교 신학자로서 휘튼 칼리지에서 고든 클락(Gordon Clark)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코넬리우스 반틸을 사사했다. 그리고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와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교수진으로 합류하게 된다. 카넬은 1950년대 이후 성경의 명제들이 그 자체로 진리라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영적 반응을 보일 때 진리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레셤 메이첸 및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보수 복음주의 주류 계열에서 이탈하였다. 카넬은 성경 무오성에 대한 풀러 신학교의 기존 입장을 부분적으로 이탈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다.
칼 헨리(Carn Henry)는 미국 신복음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휘튼 칼리지에서 고든 클락을 사사했고 윌리엄 젤레마(William Jellema)와 코넬리우스 반틸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근본주의권에 대해서는 반대하며 풀러 신학교의 창립멤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초대 편집장이 된다. 그가 쓴 6권짜리 『신, 계시, 권위』(God, Revelation, and Authority)는 20세기 복음주의권의 신학대작이다. 하지만 칼 헨리는 변증학보다는 근본주의에 저항한 사람, 신복음주의 운동의 창시자이자 인도자로서의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즉 그의 『신, 계시, 권위』보다는 『현대 근본주의자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한역서 제목은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세속 문화에 대한 복음주의 대중 변증가로 알려져 있다. 쉐퍼의 인생은 세 단계(근본주의자/문화변증가/은퇴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쉐퍼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정통장로교단(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이 갈라지는 일이 생긴다. 쉐퍼는 근본주의자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의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와 성경장로교단(Bible Presbyterian Church) 교단에 합류한다. 그리고 ACCC/ICCC(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의 파송 선교사로 유럽에 가게 된다. 쉐퍼가 유럽에서 선교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근본주의적인 방식의 기독교는 유럽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쉐퍼는 스위스 라브리(L'Abri)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고 문화변증을 하게 된다. 쉐퍼의 대중적인 변증은 주목을 받았지만 전문적인 학자들이 보기에는 허술한 면이 있었다. 말년에 쉐퍼는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근본주의와 회귀하는데 신우파 운동과 관련하여 정치에 참여하면서 젊은 사람들의 지지를 상실하게 된다.
앨빈 플란팅가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함께 복음주의 신학의 경계를 넘어서 세속 철학계에서도 인정받는 네덜란드 개혁파 철학자로 개혁파 인식론의 학문적 신뢰성을 보증하는 데 공헌한 학자다. 조지 마스덴, 네이선 해치(Nathan Hatch), 마크 놀(Mark Noll)과 같은 역사가와 더불어 복음주의자의 학문적 수준을 보여 주었다.
영국의 변증가들: 뉴비긴, 루이스
레슬리 뉴비긴은 원래 잉글랜드 장로교인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선교사로 인도에 파송된 후 1947년 남인도교회 창립 주교 중 한 명이 된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의 전신인 세계선교연맹(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총무, 세계교회협의회 세계선교화 분과 총무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여한다. 그런데 1968년 웁살라 대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식적으로 구원의 개념 중 회심의 개념을 포기하고 구원을 인권의 문제로만 귀속시키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고 총체적 복음을 제시하는 복음주의자로 부분적 전향을 하게 된다. 뉴비긴은 1974년 영국으로 돌아와 서구문화의 세속화를 바라보며 이것이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뉴비긴은 지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으로 계몽주의의 허약함을 지적하는 방식의 변증을 하였고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C. S. 루이스는 원래 비신앙인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연구원 시절(31세)에 회심을 하는데 그 자신은 이를 ‘마지못한 회심’(reluctant conversion)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중세 및 현대 영문학의 신비적인 상상력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하는 시도를 한다. 즉 합리적 논증보다는 상징과 은유에 담긴 메시지를 활용하는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나니아 연대기). 루이스는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한 적이 없고 성공회 내에서도 고교회주의자(High Church)에 해당한다. 루이스는 영국에서도 유명했긴 했지만 오히려 미국의 복음주의자에게 20세기 최고의 인기작가이자 변증가로 등극하게 된다.
설요한 기자 juicec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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