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소식 4] 직분에 대한 신중한 결정을 하기로
- 권도사(勸道師) 제도에 대해서
손재익 객원기자
고신총회는 직분에 대한 결정을 함에 있어서 신중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첫째 날 저녁 ‘유안건 보고’를 통해 다뤄진 ‘권도사 제도’에 대해서 총회는 허락하지 않기로 가결하였다.
작년 제65회 총회에서 미래정책연구위원장 전 태 목사가 교회 여성 지도자(신학대학원 출신)들을 위한 총회 차원의 제도 마련(안수 등)을 발의하였는데, 제65회 총회는 신학위원회가 새로 구성할 여성안수연구위원회에 맡겨 1년 간 연구하여 보고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 그래서 제66회 총회에서 유안건을 통해 다루었는데, 신학위원회는 변종길 고려신학대학원장에게 연구 의뢰하여 제출 받은 “신학대학원 졸업 여학생을 위한 호칭 문제”(아래에 전문을 실음)를 참고하여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권도사 고시 및 교육을 받은 여성 지도자의 명칭은 권도사(勸道師)라고 칭한다”는 의견을 포함해 총회 헌법 교회정치 제34조 (교회 임시 직원) 등의 교회정치 개정 등의 의견을 제시했다.
신학위원회의 보고에 대해 서부산노회 이성구 목사는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데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권도사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낯설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강도사라고 해도 되지 않느냐는 논리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결정을 공교회가 함부로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권도사 제도는 결국 여성안수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이기에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자인 변종길 고려신학대학원장이 설명을 하였다. 변 원장은 디모데전서 2:12의 가르침을 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데, ‘강도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의미하므로, 그에 적절한 용어로 ‘권도사’(勸道師)라는 표현을 제안해 보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연구는 신학위원회에 요청에 의한 연구자의 제안임을 전제했다.
신학위원회와 변종길 원장의 설명을 들은 후 총회장이 가부를 물었으나, 총대들의 대부분은 권도사 직분을 신설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권도사 제도의 도입 논의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여학생들이 입시와 교육에 있어 남학생과 동일한 자격으로 목회학석사(M.Div) 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위한 제도 마련이 필요한 것이기에 법제위원회와 신학위원회가 1년 간 더 연구하여 보고하도록 가결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변종길 원장의 연구 보고서는 총회 보고서에 첨부되지 못했지만, 본보가 입수하여 그 전문을 아래와 같이 싣는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학위원회 제출(2016년 6월 1일)
신학대학원 졸업 여학생을 위한 호칭 문제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장)
I. 현재의 상황
현재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여학생들에게는 강도사 자격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강도사(講道師)’란 호칭이 말씀을 강론하는 자, 가르치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preacher”로 설교하는 자란 뜻이다. 따라서 ‘강도사’이든 ‘목사’이든 설교한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여성에게 강도사 또는 목사 자격을 주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사도들은 전부 남자들이었으며 여자들은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또한 고전 14:34-35 참조). 성경에서 ‘가르친다(didaskein)’는 것은 단지 지식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서 지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마 23:8 참조). 그래서 이것은 12절에 이어서 나오는 ‘주관한다(authentein)’는 단어와 내용상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여자에게 ‘강도사’ 또는 ‘목사’의 자격 또는 호칭을 주게 되면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질서에 어긋나게 된다(고전 11:3, 7).
II. 여성의 교회 봉사
그러나 이것이 여성의 교회 봉사를 봉쇄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열두 제자를 섬긴 여자들도 있었으며(눅 8:1-3),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혹 ‘집사’로 번역할 수도 있음)인 ‘뵈뵈’가 있었다(롬 16:1). 또한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을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내어놓은 ‘브리스가(브리스길라)’가 있었다(롬 16:3; 고전 16:19; 행 18:2, 18, 26; 딤후 4:19). 골로새교회에는 빌레몬의 부인으로 생각되는 ‘자매 압비아’가 있었고(몬 2절), 라오디게아교회에는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놓고 섬기는 ‘눔바’가 있었다(골 4:15). 또한 초대교회에는 남편이 죽고 과부된 자로서 성도들을 섬기는 ‘참과부’가 있었다(딤전 5:3-16). 한국 교회는 오래 전부터 ‘여자 서리집사’와 ‘권사’ 제도를 두어서 교회를 섬기게 하고 있으며, 또한 여자신학교를 운영하여 ‘여전도사’를 양성하고 있다. 그런데 소수이긴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서 남학생들과 함께 3년을 같이 공부한 여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남학생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강도사’가 되지 못하고 그냥 졸업하거나 아니면 교회에서 ‘(여)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여학생들에게 ‘강도사’는 아니지만 적절한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가 2년 전에 총회에 제기되어 신학위원회에 맡겨 연구하도록 하였다.
III. 권도사
이에 우리는 ‘권도사(勸道師)’란 호칭을 제안해 본다. 이 호칭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에 낯설긴 하지만 ‘강도사(講道師)’란 호칭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있다. ‘권도(勸道)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권한다, 권면(勸勉)의 말씀을 한다는 의미이다. ‘권도(勸道)’란 말은 개역한글판에서 고린도전서 7장 6절에 사용된 바 있는데 ‘명령(命令)’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곧, 바울처럼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은데,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다 따라야 ‘명령’이 아니라 ‘권면’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suggnōmē)는 원래 ‘함께 생각하는 것, 공통의 생각’이란 뜻이었지만 ‘허용(concession)’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cf. Bauer 사전). 중세에서는 ‘계명(praecepta)’과 ‘권도(consilia)’로 구분하면서 ‘계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따라야 하는 규범인 반면에, ‘권도’는 헌신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에게 권하는 ‘가난, 순결, 순종’의 덕목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단어(suggnōmē)보다도 바울 서신에서 많이 나타나는 ‘권면하다(parakaleō)’라는 단어에서 ‘권도사’의 의미를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의 복음을 설명한 후에 그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할 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한다(롬 12:1; cf. 빌 4:2; 살전 4:1 등).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권위를 가지고 훈계하는 명령이 아니라 사랑으로 형제에게 권면의 말을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큰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은혜받은 자이니만큼 마땅히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자는 권면이다. 그래서 바울의 윤리는 그 기본성격에 있어서 권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 사랑과 긍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권도사’란 호칭은 권위적이 아니라 형제자매로서 서로 권면하는 사람이란 부드러운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금하고 있는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호칭이 될 수 있다. ‘권면’은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IV. 브리스가의 예
우리는 여성으로서 이와 비슷한 사역을 한 사람으로서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가(브리스길라)를 들 수 있다. 그는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었는데(행 18:1-3), 바울을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내어놓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롬 16:4).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갈 때 이들 부부도 따라갔다(행 18:18). 바울은 얼마 안 있어 에베소를 떠났지만,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남았다(행 18:19-21). 아마도 바울이 시작한 복음 전파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볼로가 에베소에 와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행 18:24-25).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렀다”고 한다(행 18:26). 여기에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보아 브리스길라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면 여성인 브리스길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는 데에는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 보면 ‘그들(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있는 교회’란 표현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바울의 3차 선교여행 기간 동안에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머물면서 자기 집에서 교회로 모였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끝부분에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해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부른다(롬 16:3). 그리고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말한다(4절; 개역개정판의 ‘저의 집에 있는 교회’는 정확하지 않은 번역임). 이는 곧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 돌아와서는 자기들 집에서 교회로 모였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아마도, 아직 교역자가 없는 초기 교회 상황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교회를 인도하고 섬겼을 것이다.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브리스가가 주도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우리는 초대교회의 정확한 상황을 모르며 예배 형태가 어떠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신도인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인 브리스가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생각된다.
V. 화란개혁교회의 사례
이처럼 ‘설교’와 ‘권면의 말’을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은 화란개혁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목사를 ‘설교자(predikant)’ 또는 ‘주의 말씀의 종(Verbi Domini Minister)’으로 부른다. 그래서 ‘설교’란 말은 엄격하게 임직 받은 목사가 공예배에서 전하는 말씀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장례식에서 간단히 하는 말은 ‘권면의 말’ 또는 ‘위로의 말’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신학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화란개혁교회에서는 신학 공부를 거의 다 마쳐가는 신학생을 청해서 말씀을 듣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 경우엔 ‘설교’라고 부르지 않고 ‘권면의 말/말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신학 공부를 다 마치고 노회에서 목사고시에 합격한 목사의 ‘설교’를 존중하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원리를 우리 한국 교회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신학대학원 3년 공부를 무사히 마친 여학생 교역자에 대해 ‘강도사’(설교자)라 부르지 않고 권면의 말을 하는 ‘권도사’라고 부르는 것도 좋아 보인다. 물론 끝에 스승 ‘사(師)’ 자가 붙은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이 글자는 특별히 ‘가르친다’는 의미라기보다 존칭으로 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여전도사(女傳道師)’란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전에는 ‘조사(助師)’란 말도 사용했는데 이 경우에 ‘사(師)’는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권도사(勸道師)’라고 할 때에 ‘사(師)’ 자를 존칭으로 이해하고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권면의 말/말씀을 하는 사람’이란 뜻의 ‘권도사’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VI. 실제적 유익 몇 가지
물론 이 호칭이 한국 교회에 아직 사용된 예가 없어서 생소하다는 점이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점을 고려하여 아직 수용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이 호칭을 좋게 여기고 적절하다고 판단한다면, 이것은 실제적으로 몇 가지 유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여성으로서 신학대학원에서 말씀을 잘 배워서 풀어 설명해 주는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교회 안에서 적절하게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재도 여전도사로서 심방과 주일학교 봉사 등을 할 수 있지만,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졸업한 여성에게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당회에서 적절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수요예배나 새벽기도회 인도 등을 가끔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라는 용어가 좀 걸린다고 생각되면 ‘권면’, ‘권도’, ‘강론’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둘째로, 여성 안수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는 오늘날 시대에 ‘권도사’라는 호칭은 성경적 원리를 유지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 한 방안이 될 것이다. 화란개혁교회가 여성에게 ‘집사직’을 줄 수 없다고 오랫동안 버텨왔지만, 결국 많은 교회가 성경의 원리를 포기하고 시대상황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오래 전부터 ‘서리집사’ 제도를 활용하여 여성인력을 활용함으로써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후에는 ‘(여성) 권사’ 제도도 도입하였다. 물론 이런 직분들이 너무 남용되고 계급화 되는 폐단은 있지만 크게 보아서 기여한 바도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정식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신학대학원에서 3년간 정식 교육을 받은 여성인력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교회뿐만 아니라 교육기관이나 사회복지기관 또는 기타 특수기관에서도 나름대로 유익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자신학원을 나온 ‘(여)전도사’와는 구별되는 직무에 종사하거나 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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