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종교개혁기념학술세미나 후기
주제: 종교개혁과 프랑스개혁교회
황대우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원장 이신열 교수)은 매년 2회의 세미나를 개최하는데, 상반기에는 “칼빈학술세미나”, 하반기에는 “종교개혁기념학술세미나”라는 이름으로 개최한다. 지난 2015년 10월 8일 오후 2시에 고신대학교 비전관 손양원 기념홀에서 제10회 종교개혁기념학술세미나를 ‘종교개혁과 프랑스 개혁교회’ 주제로 열었다.
1부 예배를 위해 신인범 목사(제2영도교회)가 기도를, 이상규 목사(신학과 교수. 전 개혁주의학술원 원장)가 축도를, 조성국 목사(고신대 교목실장. 기독교교육학과 교수)가 설교를 맡았다. 조성국 목사는 다니엘 6장 3-5절과 10절을 본문을 통해 다니엘이 스스로 실력을 갖춘 성실함과 허물없는 삶을 “생활의 순결”로 해석하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한 습관을 “신앙의 정통”으로 해석하면서 진정한 개혁을 위해 고신 정신의 원리로 무장할 것을 강조했다. 예배 후 고신대학교 전광식 총장의 인사말이 이어졌고, 또한 한국개혁주의신학회(회장 주도홍 교수)와 개혁주의학술원(원장 이신열 교수)의 MOU 즉 교류협정체결식을 가졌다.
2부 강의의 첫번째 강사는 프랑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 소재한 쟝꺌뱅(Jean Calvin)신학교 명예교수인 폴 웰스(Paul Wells)였다. 그는 해석학을 전공했으므로 자신의 학교에서 교회사가 아닌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의 강의는 “17세기 프랑스 교회들의 교회정치”에 관한 내용으로,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 교회들의 역사와 그들의 교회정치를 다룬 것이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프랑스 위그노들은 1598년의 낭트칙령으로 열망하던 종교의 자유를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자유는 개혁교회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비극적 운명의 시작이었다. 이유는 지나친 종교적 관용과 중용의 분위기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낭트칙령이 철회될 무렵에는 약 600명의 목사들과 수만 명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다.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프랑스 개혁교회는 472개만 남았고 목사도 180여명뿐이었다. 낭트(Nantes)칙령의 해인 1598년부터 1628년까지는 3년마다 총회가 개최되었으나, 이후부터 낭트칙령이 철회된 1685년까지 총회로 모인 것은 모두 4회뿐이었다. 이 시기에 발생한 다양한 신학논쟁은 프랑스 개신교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7세기 프랑스 개혁교회의 총회 개최는 왕실의 재가를 받아야 했고, 총회석상에는 왕립위원들이 대표로 참석해야 했다. 이런 제약 때문에 낭트칙령을 철회한 퐁텐블로(Fontainebleau)칙령 이후 프랑스대혁명까지 총회는 단 한 번도 개최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프랑스 개혁교회의 총회들은 개신교 귀족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으며, 그 신학자들은 오로지 귀족 지도자들과 후견인들이 수용할만하고 그들에게 호감이 가는 내용만을 주장하는데 몰입하게” 되었다.
1598-1685년 사이에 낭트칙령이 인정한 프랑스 위그노교회는 700개 정도였는데, 이들의 교회정치 형태는 개교회의 당회와 지역 단위의 노회와 전국적인 총회로 구성된 것으로 반계급적이면서 동시에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구조는 “민주적 중앙화”(democratic centralism)로 불렸다. 회중과 당회 사이의 미묘한 갈등관계, 그리고 당회와 노회 및 총회 사이의 갈등관계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회중주의가 아닌, 장로회주의로 정착했다. 지역교회, 즉 개체교회는 당회의 조직 여부에 따라 당회가 없는 개척교회 즉 미조직교회와 당회가 있는 기성교회 즉 조직교회로 분류되었다. 당회는 교인들로부터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으므로 직접적 통치권을 가진다. 프랑스 개혁교회에서는 당회와 노회 및 총회의 치리권한이 동일하지 않다. 당회와 달리 노회나 총회는 연합된 교회들이 파견한 대표들에 의해 합의된 신앙고백이나 권징조례에 근거한 권위, 즉 간접적 통치권만을 갖는다.
이런 노회와 총회의 권위는 근본적으로 목사 위에 목사 없고, 교회 위에 교회 없다는 프랑스 개혁교회 권징조례의 대원칙에 따른 것으로, 노회나 총회가 결정한 것을 개체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회와 노회와 총회 가운데 당회의 치리권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장교교회가 겪었던 보편적인 문제, 즉 치리회 상호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폴 웰스가 강의한 내용은 오늘날 한국장로교회가 배우고 고민해야 할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두 번째 강의는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의 동료 귀욤 파렐(Guillaume Farel)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글이었고, 강사는 현재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서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주도홍 박사였다. 그는 기독교통일학회를 설립하여 최근까지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근자에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강의안에서 주도홍 박사는 칼빈이 가장 존경하고 따른 파렐과의 서신교류가 파렐의 파격적인 결혼 이후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두 강의 후에는 논평과 질의 토론이 30분 정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번 “종교개혁기념학술세미나”가 10번째라는 것은 이 세미나의 역사가 벌써 1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10년은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다. 개혁주의학술원이 10년 동안 버텨온 것은 순전히 개혁신학과 신앙을 사랑하는 몇몇 고신교단 교회들과 학술원 이사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 덕분이다. 개혁주의 학술원은 고신대학교 내에 있지만 고신대학교로부터 한 푼의 후원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학술원이 설립된 이후로 조교와 간사를 지원했지만, 최근 재정적인 이유로 조교 자리가 사라지고 5년간 근무해온 간사도 지난 달로 해임되어 지금 학술원 운영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종교개혁기념학술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조금 과장한다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현재 임시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해임된 간사의 고통스러운 수고 덕분이기도 하다. 개혁주의학술원은 이번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참여한 모든 분들께는 물론이고, 또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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