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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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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기사는 '설교'입니다. '설교하지 마'라는 말처럼 설교가 희화화된 시대입니다. 목사들은 설교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설교에 목숨을 걸라'는 말마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웃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도 목사의 설교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설교여야 합니까? 지금도 여전히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을까요? -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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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외래교수


개신교회의 예배 특징을 말한다면 단언컨대 ‘설교’이다. 설교를 빼고는 개신교회의 예배를 생각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예배의 위치로나 설교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중심에 위치한다. 개신교회 어디를 가나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절대적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로마 교회의 형식적인 예전보다 말씀, 곧 설교를 강조한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설교만 한다고 자동적으로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가 제대로 된 설교여야 한다는 조건이 반드시 붙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가 설교답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설교 시간에 설교자가 자신의 신변잡기를 늘어놓거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예화들로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으로 만들거나 단순한 교훈을 주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설교가 아니다. 그러면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종으로서 말씀을 전달하는 봉사를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철저하게 말씀의 봉사여야 한다.

교회 역사에서의 설교의 위치

설교는 언제나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전에는 설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말씀이 중요했지만, 4세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예배에 변화가 찾아왔다. 예배는 점차 형식적인 성례(주의: sacramentalism)로 전락했다. 예배는 말씀의 비중이 약화되고 눈에 보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평신도는 예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사라지자,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과 그림과 장식에 의존해야 했다. 웅장한 건물은 하늘의 영광이 땅에 내려온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은 마치 천국에 온 듯한 착각을 주었다. 이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이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압도할 만큼 높은 천장은 인간을 한 없이 작게 만들고 겸손하게 했다. 예배당 이곳저곳에 수많은 성상이나 성화가 걸려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인격이 거룩해 지는 것 같았다. 예배의 모습을 그려보자.

“예배가 시작된다. 거룩한 예복을 입은 사제가 등장하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와 어린 아이들의 천사 같은 목소리의 찬양이 울려 퍼진다.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 예배의 분위기는 무르익는다. 사제가 제사장으로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주문 같은 라틴어를 읊조리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다. 교인들은 빵 조각을 받아먹음으로 하늘의 은혜가 육체로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그들의 구원은 보장받았다고 착각한다.”

이 예배의 특징은 말씀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감각적인 예배 형식이 전면으로 나선 것이다. 성직자는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교훈적인 설명을 하는 것으로 설교를 끝낸다. 성직자들은 성경을 연구하지도 않아도 된다. 성인들이 쓴 글을 읽기만 하는 정도이다. 교회의 구조는 설교를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목소리가 울리니 사제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사제가 하는 대부분의 말들은 모국어가 아니라 라틴어이다. 그들은 라틴어가 거룩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성도들은 성경은 잘 알지 못해도 구원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일곱 성례에 충실하게 참여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중세 1천년 동안 이런 예배를 했다. 제대로 된 설교가 없는 예배를 했던 이 시대를 ‘암흑의 시대’(Dark ages)라고 부른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설교가 없으니 말이다. 중세에 설교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설교가 있는 예배를 따로 만들어 하기도 했다. 물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종교 개혁자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어두운 시대에 이 말씀의 예배를 통해 종교 개혁을 준비하신 것이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은 예배에서 설교의 의미를 중심에 놓고 중요하게 여겼다. ‘느끼는 예배’에서 ‘말하는 예배’로 개혁했다. ‘보는 예배’에서 ‘듣는 예배’로 개혁했다. 종교 개혁교회는 성찬이 이루어지는 성찬대보다도 설교단을 더 높게 놓았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건물에 표현한 것이다. 교회 건물에서 성상과 성화를 가능한 없앴다. 건물은 아주 단순하게 설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었다. 종교개혁 교회는 설교단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설교를 중심에 놓는 예배의 개혁은 독일의 루터가 먼저 했다. 루터는 설교야말로 모든 시대의 기독교회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설교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이 나눠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신 복이 분배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설교는 구원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시간이라고 했다. 예배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제대로 선포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만약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지 않는다면 찬송도 의미 없고 성경을 읽는 것조차 의미 없으며 교회로 함께 모이는 것도 의미 없다고 말할 정도로 설교를 강조했다. 칼뱅도 마찬가지다. 칼뱅에게 있어서 설교가 중요한 까닭은 설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설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으신 구원에 대한 것이며, 그 분을 섬기는 것에 관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예배에서 설교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 전통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종교 개혁가들에게 감사해야 할 부분이다.

설교란 무엇인가?

그러면 과연 설교가 무엇인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설교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다. 개신교인은 적어도 이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도 없지 않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에이, 또 설교하네!” “제발, 설교하지 마세요!” 이 때 사용된 ‘설교’라는 말은 ‘잔소리’라는 뜻이다. 듣고 싶지 않은 데 또 들어야 하는 반복되는 긴 훈계를 의미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에서 설교보다는 찬양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찬양을 위해 온갖 악기를 동원한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결여되어 있다. 사람들은 점점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간증을 더 좋아한다. 심지어 설교를 ‘이야기’(narrative)라고 말하기도 한다. 설교를 ‘이야기’라고 하면, 간증이 훨씬 더 ‘이야기’ 형태이다. 간증이 훨씬 더 많은 감동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설교가 제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설교만으로는 안 된다고 공공연하게 외친다. 소그룹을 통해 인간관계(성도의 교제라고 말하면서)를 돈독히 하지 않으면 현대인은 교회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관계가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온 관심이 집중된다. 혹시 주보에 자신의 이름이 잘못 나오면 삐치는 일도 있다. 주일에 옷을 잘 입고 값비싼 것들로 치장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면 설교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설교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살펴보자.

설교 = 말씀의 봉사

우리는 설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설교를 ‘말씀 사역’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이 말이 나오게 된 계기는 이렇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의 설교로 수적으로 점점 커졌다. 3천 명 혹은 5천 명씩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자, 예루살렘 교회는 통제가 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문제가 구제와 관련된 일이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게 되자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게 되었다. 열두 사도가 모여 회의를 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에 집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명을 택해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러면서 사도들이 집중할 일에 대해 얘기할 때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을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사도들이 ‘말씀 사역’에 힘쓰기로 한 것이다. 이 말씀 사역이 바로 설교에 해당된다. 말씀 사역이라고 하니 뭔가 좀 딱딱해 보인다. 대체로 ‘사역’이라는 말은 억지로 시켜 하는 일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역’이라는 단어는 ‘사람이나 동물 등을 부리어 일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서 사역을 자주한다. 그것은 하기 싫은 힘든 일을 의미한다. 군대에서의 사역은 군인의 본래 임무 외에 임시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역이라는 단어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말씀 전하는 것’이라고 번역했고, 표준번역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가장 좋은 번역은 ‘말씀의 봉사(섬김)’(diaconia tou logou)이다. 의미도 가장 적절하다. 영어 성경은 ‘the ministry of the word’로 번역했다. 이 영어 번역은 헬라어와 라틴어에 가장 가깝다. 영어 ‘ministry’도 ‘봉사’ 혹은 ‘섬김’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유추해 영어로 목사를 ‘미니스터’(minister)라고 부른다. 물론 한 나라의 행정부의 장관에게 붙이는 이름도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하는데 그것도 ‘봉사자’, ‘섬기는 자’라는 의미이다. 나라를 섬기는 자가 곧 ‘장관’이다. 국가의 장관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종종 그 의미와는 달리 왜곡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분명해졌다. 설교는 ‘말씀의 봉사’이다. 몰론 그냥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가 하나님 말씀을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이 ‘좋은 봉사’이고 ‘훌륭한 섬김’이고 ‘바른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에 개인적인 얘기나 세속적인 예화를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이고 섬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교인들의 귀에 듣기 좋은 것을 골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싫은 죄와 회개에 관한 것도 설교해야 한다. 성도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다. 이런 잣대로 보면 요즈음 제대로 된 설교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현실에 길들여진 교인은 바른 설교를 오히려 무시하고 형편없고 지루하고 교인들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고루한 목사의 설교라고 평가절하한다. 

성도는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설교를 인간 목사의 개인적인 얘기로 생각하고 뱉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 직분자(목사)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목사를 말씀의 봉사자로 세우셔서 그의 전인격을 사용해 교회에 말씀을 전하도록 하신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목사라는 이름을 ‘하나님 말씀의 종’(VDM: verbi divini minister)이라고 부른다. 목사의 직무가 설교만이 아니라 목양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역이 말씀의 봉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 그러면 ‘설교’ 곧 ‘말씀의 봉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설교: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

성경에 의하면 설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적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우리 편에 알릴 때 사용한 단어이다. 그것은 ‘좋은 소식을 전한다’(유앙겔리자스타이, euaggelizasthai)이다. 영어 ‘evangelize’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약 성경 이사야 52장 7절에 나오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위로하신다는 기쁜 소식이야 말로 ‘복음’이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설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구원하심에 대한 소식이야 말로 복음이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설교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유앙겔리온’(euaggelion)이라고 했다. 이 말에서 ‘이반젤리스트’(evangelist)라는 단어가 나왔다. 우리는 이 단어를 ‘전도사’로 번역하고 있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설교를 하셨는데 그것이 곧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사 61:1-2; 42:7; 58:6; 49:8).

설교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설교는 도덕적 훈화가 아니다. 설교는 심리학적인 치유가 아니다. 설교는 감동적인 공감이 아니다. 설교는 야단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설교가 좋은 소식이지만 그렇게 듣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설교가 정말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꽤 괜찮은 존재라고 착각한다. 자신의 비참과 죄에 대해 알지 못한다. 더구나 모든 사람의 모범이며 모델이고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는 더 그렇다. 자신에 대해 매사에 긍정적이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설교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매주 반복되는 소위 ‘설교’(잔소리)일 뿐이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설교는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신의 죄와 비참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설교가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냥 지적 만족이나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다. 설교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설교가 어떤가? 정말 설교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인가?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는가? 설교는 비참한 죄로 인해 사탄의 노예가 되어 고통하고 있는 영혼에게 ‘복된 좋은 소식’이다. 구원 받은 자에게도 여전히 설교는 ‘좋은 소식’이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여전히 우리도 자격 없는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교는 좋은 소식이다. 이 설교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듣고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린다.

설교: 선포하는 것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로서 ‘선포’의 의미가 있다. ‘선포’의 특징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외친다는 의미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듣는 자의 반응과 상관없이 ‘외친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 ‘선포’이다. 성경은 이런 선포로서의 설교에 대해 많은 곳에서 말씀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길에서 여러 얘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어 한 마을에 들어가 그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전파될 것’이라는 말은 ‘선포될 것’(to be proclaimed)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죄 사함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열 두 사도를 통해 성령님이 오심으로 난 곳 방언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님이 오시자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베드로는 조용히 앉아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 아니다. 세미나를 한 것이 아니다. ‘서서 소리를 높여’ 선포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라고 요구한 것을 보면 자신이 뭔가 ‘선포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다. 예수님이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예언한 것처럼 바로 그 복음을 베드로가 백성에게 선포한 것이다. 들어 보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

바울이 선포한 것은 설교이다. 그 내용은 ‘복음’이다. 좋은 소식을 전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것이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선교 여행 중에 들르는 도시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다. 나중에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인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듣고 죄 용서를 받게 되는지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

여기에서 ‘전파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케류세인’(kerussein)인데 전하는 자의 적극적인 전달의 의미가 포함된 ‘선포하다’라는 의미이다. ‘전파’와 ‘선포’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는 ‘선포’가 ‘전파’로 많이 번역되어 아쉽다. 여기서 ‘선포’는 ‘설교’를 의미한다. 설교를 통해 복음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포로서의 설교는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선포로서의 설교를 사용하신다. 똑같은 단어를 세례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했고(막 1:4), 예수님이 회당에서 전도하셨다(막 1:39)고 번역하거나 전파했다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번역은 ‘선포하다’이다.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를 보자. 그것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through the folly of what we preach)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자, 자세히 보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오해하고 곡해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전도는 미련하고 무식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례한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전도를 할 때 공격적으로 하는 경우이다. 열심히 지나쳐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로 전도하는 것이다. 기차역에서 메가폰을 매고 큰 소리로 전도하는 경우일 수 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는데 복음전도는 무식하고 미련해 보이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법은 주로 열심히 특심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이런 방법은 좀 소극적인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부담과 가책 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저 정도의 열정이 없어. 난 미련하게 전도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이 구절은 전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에 사용된 ‘전도’라는 단어는 ‘선포’이다. ‘선포의 미련한 방법으로’라는 뜻이다. ‘선포’는 바로 ‘설교’이다. 설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미련한 방법을 사용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선언이다. 바로 이것이다.

바울 시대도 복음의 선포는 미련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특별히 당시 문명인이었던 헬라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선포하는 설교를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문명은 민주주의가 잘 발달되어 있어 모든 문제를 회의와 의논을 통해 결정하고 인간의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지 스스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로마 문명의 문학과 예술 작품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조각상들을 보라. ‘인간’,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다 인간이다. 완벽해 보이는 남자와 여자! 근육질과 각선미!

영국 런던에 있는 대영 박물관에 가면 빼앗아 온 고대 유물들을 공짜로 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 문명을 잘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조차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들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처럼 인간을 신뢰하고 믿고 있는데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으면 얼마나 큰 죄인임을 전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선포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방식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는 당시 그리스 사람들에게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지혜’(소피아)이다.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자랑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말장난을 하면서 기쁨을 누렸다. 논쟁, 토론, 연극 같은 것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였다. 그들은 그것을 지혜라고 여기며 사랑했다. 그것이 ‘필로소피’, 철학이다. ‘소피아’(지혜)와 ‘필레오’(사랑)가 합쳐진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다. 세상 철학은 말의 지혜를 사랑한다. 

그러나 바울은 ‘말의 지혜’나 ‘지혜의 아름다운 것’ 혹은 ‘지혜의 권하는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리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인 웅장한 웅변이나 달변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비밀)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실제로 바울은 말에 능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선포’, 곧 ‘설교’의 미련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혹시 말솜씨가 형편없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담고 있는 내용이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면 바울이 전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설교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한 것이었다. 곧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죽으신 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복음이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 곧 복음 설교를 듣고 죄인들이 믿어 구원을 받았다. 그 복음은 교회 역사를 거쳐 오늘 한국 이 땅에까지 선포(설교)되었다.

현대에는 설교를 선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다. 설교를 ‘설득’으로 이해하려 하거나, 큐티 ‘나눔’(sharing) 정도로 생각한다. 권위주의적인 설교에 대한 반발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다른 인간적인 신변잡기나 예화와 간증 같은 것을 설교라고 하니 설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최근 지하철에서 받은 서울의 모 교회 전도지에 실린 설교문을 읽어 보았다. 제목은 “마음의 소원”이다. 성경 본문은 시편 20편 1-4절이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는 것이다. 설교 내용 가운데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마음의 소원이라는 것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가능성이 낮거나 비록 불가능할지라도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바라고 노력하며 애를 쓴다면 거기에 대한 성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마음에서 결정되는데 무엇이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천국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롭게 결심하며 소원을 가지고 여러분의 개인의 앞날과 사회,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그 소원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영국 속담에는 “하늘에 성실하면 그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내 할일 열심히 잘 하면 때가 되어서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다. 세상 지식을 가지고 설교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설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설교는 선포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말씀을 전파하라’는 ‘선포하라’는 말이다. ‘설교하라’는 뜻이다. 설교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계속 이어져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설교는 ‘말씀의 봉사’이다. 말씀의 봉사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말씀의 봉사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설교를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가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설교를 통해 보존하시고 세워 가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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