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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지난 10월 27일 고려신학대학원 대강당에서 있었던 신대원 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70년 역사 회고와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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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순 길 박사

(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 전 원장)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11:3)

 

 

들어가는 말

 

1, 고려신학교 초기; 수난의 시대(1946-1951)

 1) 고려신학교의 정체성

 2) 고려신학교가 받은 수난

  (1) 경남노회 안의 대적들의 공세

  (2) 전국 총회 교권의 횡포

 

2. 고려파 교회 내의 갈등(1952-1960)

 1) 교회당 확보를 위한 소송 문제

 2)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남(1960)

 

3. 장신 승동측과의 합동과 고려파 교회와 신학교 역사의 단절(1960-1963)

 1) 장신 승동 측과의 합동(1960)

 2) 고려신학교의 총신에로의 폐합(1962)

 3) 고려신학교의 복교와 고려파 교회의 환원(1962,10)

 

4. 정체성을 잃어가는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교회(1964-1987)

 1) 가 이사회(假理事會) 조직 사건(1967)

 2) “고신대학”으로의 교명 변경 사건(1980)

 3) 고신대학 학생들이 일으킨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운동권 학생들의 폭력

 

5. 고려신학교의 “고려”라는 고유 명칭의 실종과 회복

 1) “고려”라는 명칭의 실종

 2) “고려”라는 명칭의 회복

 

마감하는 말

 

 

 

들어가는 말

 

1946년 9월 20일에 개교한 우리 “고려신학교”는 “고려신학대학원”의 이름으로 금년에 설립 70주년을 맞았다. 70년이란 상당히 긴 세월이라고 할 수 있고, 짧은 세월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고려신학교는 개교 후 일제의 강압 아래 신앙과 생활이 무너진 한국교회 안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터”를 새로이 다지고, 개혁운동의 선도적인 위치를 점함으로 아름다운 역사를 드러내고 수년간 그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 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귀한 “터”를 떠나 정체성을 잃으면서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남긴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솔직하게 뒤돌아보게도 된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터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의 고려신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보다는 변질되어 온 역사의 흔적의 사실을 살핌으로 미래의 역사를 써 갈 여러분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고려신학교 초기; 수난의 시대(1946-1951)

 

1) 고려신학교의 정체성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은 설립 시 신학교 명칭을 “고려신학교”라고 했다. 이 “고려”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은 큰 뜻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이 명칭은 해방 후 우리나라가 아직 세계로부터 독립 된 나라로 인정받지 못하고 미군정 아래 살던 시대에 이 땅에 설립된 신학교의 분명한 정체성을 온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서방 세계에 “대한민국” 혹은 “조선” 같은 이름으로가 아니라 “고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이 이름은 외국과의 관계가 활발했던 고려왕국시대인 13세기부터 유럽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차츰 온 세계가 지칭해 오는 말로 사용되었다.(Coree, Korea, Corea)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때에 설립자들은 세계 속의 코리아라는 나라에 있는 신학교(Korea Theological Seminary)라는 안목을 가지고 이 명칭을 택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 고려신학교는 출발부터 그 신학의 터와 방향이 분명했다. 신학교는 목사 후보생들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신학교는 어떤 신학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느냐가 중요하다. 고려신학교 설립취지문에 따르면 이 신학교는 “정통신학”으로 “칼뱅주의 신학”을 수립하고 가르침으로 우리나라 장로교신앙 사상의 혼란을 교정하고 통일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1)

 

1938년 한국 장로교회 총회(27회)가 일제가 요구하는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후 정통 신학을 가르치던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곧 1940년에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신사참배를 하면서 신학을 하는 평양에 “평양신학교”와 서울에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의 전신)이 세워졌다. 결과 한국교회는 이때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5년 동안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해방 후 1946년 6월 12일에 모인 첫 번째 모인 소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쳐 오던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으로 한다.”라는 결의를 했다.2) 이로써 한국의 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로 자리를 잡아버렸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교회에는 정통신학을 가르쳐 칼뱅주의 신학으로 한국교회의 길을 바로잡는 것이 긴급했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항거로 옥고를 치르다 해방이 되어 출옥한 주남선, 한상동 목사와 신학자 박윤선 목사는 서둘러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돈 없이, 집 없이, 인물 없이”3) 경남노회의 인가를 받고 지원을 얻어 오직 믿음으로 사설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46년 9월 20일에 개교했다. 결과 고려신학교의 신학의 터와 방향은 정통신학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칼뱅주의 신학이었다.

 

다음으로 고려신학교의 교육이념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고, 장로교회의 신조를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 “생활의 순결과 순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 양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4) 순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가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고 순종하는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신학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고(Sola Scriptura), 말씀이 요약된 교리인 장로교회의 신조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당시 고려신학교만이 가지고 내외에 선포한 견고한 터요, 정체성이었다.

 

고려신학교는 출발부터 신학은 “칼뱅주의”, 교육 이념은 “생활의 순결과 순교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 양성”이었다. 고려신학교 초기 고려신학교를 사랑하는 분들은 누구나 “고려신학교” 하면 이 두 가지를 기억했다.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고려신학교를 사랑하는 분들은 누구나 칼뱅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이들에게는 “고려신학교”라는 이름 자체에서 이 신학교의 정체성을 찾았고 고려신학교를 정말 사랑했다. 주일 공기도 뿐 아니라, 수요일 기도회, 새벽기도회, 심지어 금요 구역기도회에서도 고려신학교를 잊지 않았다.

 

2) 고려신학교가 받은 수난

 

당시 고려신학교는 경남노회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유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다음으로 총회의 교권 세력에 의한 타도운동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음으로 험로를 걸어야 했다. 저들 거의 모두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했기 때문에 교회의 개혁과 정화를 기치로 내세운 고려신학교를 좋아 할 리 없었다.

 

(1) 경남노회 안의 대적들의 공세

 

고려신학교는 설립 후 4년 동안 경남노회 안에 있는 저들에 의해 두 번 인가취소를 당했다. 저들은 고려신학교 설립을 인가한 1946년 7월 진해 임시노회 후, 곧 반대 세력의 결집에 나섰다. 그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가 신사참배를 한 처지에 있었으므로 저들을 자기들 편으로 끄는 것은 매우 쉬웠다. 진해 임시노회 후 5개월만인 그해 12월 진주 봉래교회에서 제8회 경남 정기 노회가 모였다. 이때 친일 자유주의자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도 총회시 부회장이었고, 총회 총대들의 신사참배를 이끌었던 김길창이 노회장이 되고, 그의 동료들이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노회는 지난 7월에 노회가 인가한 고려신학교의 인가를 취소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당시 경남노회 안에 있는 교회들이 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곧 경남노회 내의 주도적인 68 교회가 고려신학교 인가취소 결의에 항의하여 성명을 내고, 교권주의자들의 부패성을 규탄하는 일에 나섰다. 결과 저들은 자기들이 한 일에 역풍이 너무 거센 것을 의식하고, 다음 임시노회에서 임원들이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이때부터 경남노회에는 고려신학교를 적극 지지하는 측과 강력하게 반대하는 측(김길창 편)과 중도의 길을 걷는(노진현 편) 3파가 생겼다.

하지만, 이로써 저들이 시작한 고려신학교 타도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있던 약 5개월간(1947.10-1948.4) 저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가 고려신학교를 이탈하자 다시 힘을 얻어 고려신학교 타도운동에 적극 나섰다. 한국의 저명한 정통신학자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 저들에게 큰 힘이 되고 타도의 이유가 되었다. 저들은 1948년 9월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부산중앙교회에서 다시 고려신학교 인정취소를 결의했다. 고려신학교 타도운동이 대세를 이룬 듯 보였다. 이것이 경남노회가 행한 두 번째의 고려신학교 인가취소였다. 그러나 이로써 고려신학교는 문을 닫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2) 전국 총회 교권의 횡포

 

이후 고려신학교를 타도하려는 세력은 이제 경남노회 범위를 넘어 장로회 전국총회로 확대되어갔다. 그동안 경남노회 안에서 궁지에 몰린 자유주의자 김길창과 그 동료들이 경남노회와는 “신앙과 신조”가 다르다는 이유로 1949년 3월에 새 노회를 조직하여 경남노회 안에 분열을 일으켰다. 저들은 분명히 총회적으로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자유주의 세력과 동조하여 고려신학교를 타도하려는 심사에서 노회 분열을 획책한 것이었다.

 

1949년 4월 제35회 총회에 경남노회와 김길창이 조직한 새 노회가 각기 총대를 보냄으로 총회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 교권주의 자들로 형성된 총회는 정치적인 의도로 이와 무관한 고려신학교 문제도 함께 다루었다. 이제 교회의 정화, 개혁을 주장해온 고려신학교는 총회 내의 자유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의 묵시적 연대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총회는 불법하게 조직된 새 노회(김길창 중심)를 원래의 경남노회로 복귀하도록 명함으로 쉽게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를 대상으로 다루어 갔다. 총회는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와 관계하는 일은 “총회의 결정의 위반”이라고 하고, 전권위원 5명을 선정 파송하여 경남노회 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5)

 

이 전권위원들은 경남에 와서 경남노회의 분열을 해결하기보다 김길창의 세력을 키워주고,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의 세(勢)를 분산하는 계책을 세워 진행했다. 저들은 경남노회를 삼분(三分)할 것을 결의하여(경남노회=부산지방, 경중노회=마산, 통영지방, 경서노회=진주, 거창지방) 그 소집책임자들을 김길창 편의 사람들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때 경남노회 170여 교회 중에서 약 50 교회만 이 삼분 노회 조직에 가담했을 뿐이었고, 3분의 2 이상의 교회가 거부했다. 결과 당시 경남에는 다섯 노회가 생겨났다. 기존 경남노회는 “법통”노회로 그대로 있고, 삼분된 세 노회와 거기 가담하지 않고, 다른 중립노회를 조직한 그룹의 노회(노진현 중심)가 생겨난 것이다.

 

이 전권위원들의 삼분 노회 추진은 경남노회 내의 일반신자들의 큰 반대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경남노회 내 111 교회의 신자들이 1949년 8월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신도대회를 열고 총회 전권위원들의 불법적인 처사를 규탄하고 노회 삼분 결의의 철회를 요구했다.6)

 

이듬해인 1950년 4월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제36회 총회가 모였다. 이 때 총회전권위원들이 추진해온 경남 삼분 노회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이때는 총회에 김재준 중심의 자유주의 조선신학 측과 박형룡을 중심으로 세워진 장로회신학 측 양자 간의 세력 확보를 위한 투쟁이 경남노회의 삼분오열 문제와 연관되어 나타나 회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나흘 만에 총회는 “경남노회 전권위원회의 보고를 기각하고 다시 특별위원을 보내기로 가결”을 했다. 이때 장내가 소란해져 회의의 진행이 불가능함으로 총회장은 비상 정회를 선언하게 되고,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했다. 총회개회 5일째 총회는 다시 7명의 특별위원을 선정하여 이들에게 지난번 경남노회 전권위원들이 만든 경남지역의 삼분 노회의 합병, 조직, 해벌권을 맡기고, 1950년 9월 5일까지 정회를 했다.

 

이 특별 위원들도 지난번의 총회 전권위원들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름이 없었다. 이들이 1950년 경남에 와서 발표한 세 가지 가운데 첫째가 “고려신학교 관계자는 총회결의에 불복종한 자복서를 내고 총회에 관계를 맺기까지 회원권을 중지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다음 결의가 경남에 나눠져 있는 다섯 노회들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통합노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6월 7일 부산진교회에서 노회를 소집하기로 하는 것이었다.7) 특별위원들의 이런 처사는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를 어떤 방법으로라도 제거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당시 경남에 있는 178 교회 중에 138 교회가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했고, 나머지 50 교회가 삼분노회와 중립에 속했다. 6월 7일 부산진교회에서 통합노회 조직을 위해 모였지만 경남(법통)노회는 거기 참석할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참여하지 않았다. 기존 법적인 노회가 엄존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통합노회를 조직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모임은 기존 경남(법통)노회가 참석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1개월 후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6.25 사변이 일어나므로 모이지 못하고, 이듬해 3월에 제36회 총회 속회를 앞두고 모이게 되었다. 이때 특별위원들은 경남(법통)노회를 제쳐 두고 소위 “통합노회”를 조직했다.

 

총회의 특별위원회가 한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려신학교를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일을 진행하였다. 제36회 총회가 1950년 4월에 정회하고, 1950년 9월 5일에 속회하기로 했으나, 그해 6월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사변이 일어나게 되어 속회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51년 5월 25일에 피난지가 되어 있는 부산 중앙교회에서 속회하게 되었다. 이 총회는 미리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법통)노회를 총회에서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경남(법통)노회 총대들에게는 총회장에 입장도 허락하지 않고, 소위 “통합노회” 총대를 받아드렸다. 결과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의 문 외로 쫓겨나게” 되었다.8)

 

총회 교권주의자들은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함으로, 이 노회가 스스로 해체되고, 이로 말미암아 이 노회의 지원을 받는 고려신학교도 문을 닫게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의 정략에 따라 취해진 경남(법통)노회의 축출은 이 노회가 더욱 하나로 뭉쳐 고려신학교 지원과 건설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게 만들었다.

 

고려신학교는 외부의 적이 강하게 등장하고 공격해 올 때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이 학교를 지원해온 경남노회 경내 교회들뿐 아니라, 이 신학교를 사랑하는 전국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이 학교를 위한 적극적인 기도와 지원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회 강단 주변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라는 말씀이 적힌 현수막을 걸고 충성을 다짐하고 신학교를 위해 기도하며 도왔다.

 

1951년 5월 총회로부터 축출을 당한 경남노회는 이제 주변에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다른 교회들과 함께 제도를 재정비하고 새 역사를 써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52년 9월 11일 경남(법통)노회는 진주에서 총노회 조직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신학교의 개혁 정신에 동조하는 교회들의 조직인 “고려파 교회”가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파 교회는 고려신학교의 칼뱅주의 신학과 교육 이념에 적극 동조 협력하는 교회들의 강력한 연합체였다.

 

1956년은 고려신학교의 설립으로 교회 개혁운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고려파 교회는 이제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할 단계에 이르렀다. 1956년 9월 20일에 부산 남교회에서 6개 노회가 모여 총회로 개편하게 되었다. 이때 교회의 수는 565 교회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에 크나큰 발전의 복을 받았다.

 

2. 고려파 교회 내에 일어난 갈등

 

1) 교회당 확보를 위한 소송 문제

 

고려파 교회가 새 출발을 함으로 고려신학교를 타도하려는 외부의 대적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이제 고려파 교회 안에 차츰 내적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1951년 장로회 총회 측은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한 이후 이 노회에 속한 교회건물을 접수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 결과 경남노회에 속한 교회들 가운데는 교회건물을 잃지 않기 위한 법적 투쟁에 나서는 교회가 있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마산 문창교회였다. 이로 인해 해방 후 처음으로 문창교회는 싸우는 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곧 고려파 교회 안에는 교회당을 확보하기 위한 법정소송문제에 대한 찬반양론이 일어났다. 마산 문창교회를 담임한 송상석 목사는 교회당을 확보하기 위한 법정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고려신학교의 교장인 박윤선 박사는 처음부터 진리운동을 하는 우리가 교회건물을 소유하기 위해 믿는 사람들끼리 다투고, 법정에 가는 것은 신덕을 잃는 일이라 보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전 6:7)고 주장하며 소송을 전적으로 반대했다.9) 그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고려파 교회의 진리 운동의 차원에서였다. 교회 대부분 지도자가 박윤선 박사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여기면서도 법정 투쟁이 교리적으로 정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지를 않았다. 한상동 목사도 자신은 초량교회를 장신 총회 측에 넘겨주고 빈손으로 나와 삼일교회를 세웠지만 이에 대해 침묵했다. 몇 년 동안 이 문제 때문에 고려파 교회 내에 의견이 나누어지고 총회 안에 불안이 조성되어 갔다.

 

1957년 2월에 박윤선 박사는 이 소송문제에 대한 항의로 이사회에 교장직 사표를 제출하고, 서울에 가서 개혁신학원을 세우기까지 했다. 법적 투쟁이 계속되는 한 교계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사회와의 협상으로 9월에 고려신학교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는 여러 해 동안 고려신학교 이사 회원들 중에는 박윤선 교장을 고집 센 학자로, 함께 일하기에 거북한 분으로 보는 분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동안 박윤선 교장처럼 법정소송을 반대해오던 주로 월남 교역자들로 이루어진 경기 노회가 충현교회(김창인 목사 시무)에 모여 1957년 10월에 총회가 예배당 소송을 그만두게 할 때까지 총회와의 행정관계를 보류한다고 결의하고 떠나가 다시 고려파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다.10)

이 모든 일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국교회 내에 10여 년 동안 진리운동, 개혁운동을 해온 고려파 교회의 내분을 의미했고 정체성이 흐려졌음을 의미했다. 이는 곧 칼뱅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순교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내세운 고려신학교의 터가 차츰  흔들리고 정체성이 흐려졌음도 의미했다. 고려파 교회는 그 정체성이 흐려짐으로 그 원색을 차츰 잃어가게 되었다. 이것이 고려신학교 설립 10주년이 막 지난 때였고, 고려파 교회가 출발한 지 겨우 5년이 지난 때였다.

 

2)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남(1960)

 

이런 일들이 있은 지 3년이 되던 해인 1960년에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교회에 큰 위기가 오게 되었다. 신학자 박윤선에게 주일 성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1960년 7월 어느 주일 안식년을 맞은 미 정통장로교 선교사(A.B.Spooner)가 주일 날 아침 갑자기 배로 부산항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급히 택시를 불러 타고 부산항에 전송하러 나가게 되었다. 전송하고 나오니 시간이 늦어 그 날 오전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사회에 알려지고 이사회는 그에게 주일 성수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는 이사회에서 주일을 범한 것으로 책임 추궁을 당했다. 이때 그는 주일에 “사세부득한 일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 혹은 선한 일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고(마12:11, 12), 우리 장로교 교리(소교리문답 60)”라고 주장했다.11) 하지만, 이사회는 어떤 면으로라도 도의적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라고 강요했다. 이때 그는 주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이사회는 그에게 중대한 조처를 내렸다. 교장직을 해임하고, 교수직은 도의적 책임을 지는 표시가 있을 때 까지 중지한다는 결정을 하고 그에게 통고한 것이다.11) 이 통고문을 받은 박윤선 교장은 교수회와 학생들 앞에서 이 사실을 알리고 바로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15년 동안 고려신학교에 칼뱅주의 신학의 터를 다지고, 이것으로 고려파 교회의 신학을 주도해 오던 신학자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교회를 영영 떠나가고 만 것이다. 당시 이사회가 교리와 신학문제가 아니고, 한 시대의 특수한 환경에서 생긴 지나친 주일성수의 관습을 잣대로 저명한 신학자를 퇴출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었고, 이것이 고려파 교회에  큰 위기를 초래하였다. 당시 이사회는 성경과 신조보다는 그 시대의 일시적 현상인 주일성수의 관습과 정서에 지배를 받았다.

 

이후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교회는 정체성을 잃을 뿐 아니라, 그 근본부터 흔들리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박윤선 없는 신학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개교 시부터 15년간 지켜온 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1960년 10월 그가 떠난 고려신학교는 빈집 같았다. 졸업반에 있었던 우리는 완전히 허탈감에 젖었고 가을학기에 별 수업도 받지 못하고 이듬해 2월 졸업을 해야 했다.

 

3. 장신 승동 측과의 합동과 고려파 교회 역사의 단절(1960-1963)

 

 1) 장신 승동 측과의 합동(1960)

 

박윤선을 내어 보낸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전 교회는 말없이 허탈감에 빠졌다. 이사회가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이상했다. 위기에 부딪힌 교회지도자들(이사회)은 그가 남긴 빈자리를 채우고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교회가 나아갈 출구를 찾아야 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 이때 한 원군(援軍)이 나타났다. 장신 측이 W.C.C. 찬반 문제로 1959년 총회가 양분되고 분열되어 W.C.C. 반대 측인 승동 측이 큰 궁지에 몰려 있었다. 사실 승동 측이 보수를 주장했으나 석연치 않은 정치 문제들(박형룡의 3천만 원 사건 등)이 관련되어 있어  보수라고 주장할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승동 측 지도자들은 고려파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 한국교회 보수 세력의 결집을 위해 합동을 하자고 읍소하다시피 해 왔다. 모든 한국교회가 정통으로 공인하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할 때, 한국교계에서 자기들도 보수라는 떳떳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교회들이 따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승동 측의 대표적인 두 인물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후 반년(1947.10-1948.4)을 넘기지 못하고 이탈하여 장로회신학교를 세운 박형룡 박사와 부산에서 고려신학교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목사로 봉사하면서(부산 중앙교회)도 고려신학교를 도운 적이 전혀 없었던 교회정치의 귀재 노진현 목사였다. 노진현 목사는 1951년 장로회 총회가 경남노회를 축출한 뒤 주일에 목사들을 이끌고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는 초량교회를 접수하기 위해 와서 강단을 점령한 인물이었기도 하다. 그러니 이 분들은 위기를 만난 고려파 교회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진정한 원군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때 고려파 지도자들은 누구 한 분 반대 없이 저들의 청원을 주저 없이 받아들여 합동을 추진했다. 벽에 부닥친 고려파 지도자들은 너무 쉽게 위기의 탈출구를 찾은 것이다. 특별히 지난날 저들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보아온 한상동 목사가 저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게 된 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8월 저들과 회동한 후 9월 총회에서 양측 총회가 합동추진 위원들을 내고, 12월 1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로 모여 합동을 하게 되었다. 합동이 제안된 지 4개월 안에 두 교파의 합동이 마무리되었다.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로 합동이 추진되었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미래를 내다보지 않은 졸속한 합동이었다.

 

고려파 교회 지도자들이 밖으로 보수신학을 쫓는 교회들의 결집이란 좋은 명분을 내세우고 합동을 급하게 서둘렀지만 실상 그 참된 동기는 고려파의 신학을 주도한 박윤선을 퇴출한 후 빈 집같이 되어버린 고려신학교의 당면한 문제의 해결과 허탈감에 빠져있는 교회의 분위기의 반전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신학교 이사회 이사장인 한상동 목사를 위시한 고려파 지도자들(이사회 회원들)은 저명한 박형룡이 있는 총신 측과 합동함으로 박윤선이 남긴 큰 빈자리를 충분히 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게 된다. 합동 후 고려신학교의 총회 신학교로의 폐합에 많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한상동 목사가 남긴 역사에서 이를 잘 짐작할 수 있다.

 

2) 고려신학교의 총신에로의 폐합(1962)

 

교회생활은 언제나 신학교가 중심이다. 그러니 고려파 교회가 승동 측과 합동할 때에 신학교 문제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사실 고려신학교는  설립 이후 이 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교회의 기도와 지원을 받아 왔지만, 사립학교로 운영되어 왔었다. 이사회가 있지만 설립자 한상동 목사가 언제나 이사장으로 주인 격이었고,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이사회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승동 측은 장신의 전통을 따라 총회 직영 신학교제도를 유지했다.

 

합동할 때에 승동 측은 원래 총회 직영의 단일신학교를 원했으나, 고신 측은 합동원칙에 “신학교는 총회의 직영의 신학교로 일원화(一元化)”한다는 원칙을 주장하여 이를 합동총회가 합동원칙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정치적 예지를 가진 송상석 목사가 합동 후에도 상당기간 총회신학교는 서울에, 고려신학교는 부산에 이전처럼 유지해야 한다는 뜻에서 주장하여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1960년 합동총회를 지나 1961년 9월 합동 후 첫 번째 총회가 열렸을 때, 이 “신학교 일원화”라는 합동원칙은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승동 측에 속한 호남지방 70명 총대가 “신학교를 연내로 단일화”해 달라는 청원을 하게 되고, 의외로 부산노회도 “총회 산하 각 신학교를 단일화해 달라.”는 헌의를 했다.12) 이와는 달리 이를 미리 알아챈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를 부산에 존속”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하지만 총회는 이 청원을 무시하고 단일화를 먼저 결정해버렸다. 이때 총회장이 합동 총회를 할 때 회장이었고, 이어 다시 총회장으로 선출된 한상동 목사였다. 총회장은 이에 대해 아무 거부감 없이 회무를 이끌어갔다. 교회 정치에 능한 승동 측 분들이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계속 두 번이나 총회장으로 높이 띄어 올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총회는 지난 총회에서 받은 합동원칙을 일 년 안에 깨뜨렸을 뿐 아니라, 경남노회가 청원한 “고려신학교 존속” 청원을 먼저 다루지도 않고 신학교 단일화를 결의해버렸다. 이 때 경남노회 총대들은 총회가 합동원칙을 파괴했다는 항의표시로 총회로부터 퇴장했다.

 

당시 고려신학교 학생들은 신학교 단일화 결정에 대한 소식을 듣고 총회장소인 부산 남교회에 나가 성명서를 내고, 고려신학교 폐합 반대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1961년 12월 총회 신학교로의 고려신학교 폐합은 강행되었다. 부산 송도에는 고려신학교의 간판이 내려지고 대신 “총회신학교 분교”라는 간판이 걸렸다. 결과 15년 역사를 가진 고려신학교는 역사현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신학교 학생회는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요, 이사장이었던 한상동 목사에게 강하게 항의했지만 이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리 없었다. 다음 학년도에 신학교 3학년 학생들은 서울로 올라가고, 1, 2학년 학생만 부산에 남게 되었다. 다음해 신입생은 서울에서만 뽑기로 되었다. 2년 후면 부산 송도의 신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처지였다. 고려신학교가 내세운 칼뱅주의 신학과 순교자적 교역자 양성이란 이념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려신학교의 터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3) 고려신학교의 복교(1962,10)와 고려파 교회의 환원(1963)

 

그런데 신학교를 폐합한 지 겨우 10개월을 지나서 누구도 예기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1962년 10월 17일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의 경건회가 끝났을 때, 학교의 폐합을 강력하게 추진해온 고려신학교 설립자였던 한상동 목사가 학생들 앞에서 돌연히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을 했다. 이것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폭탄선언이었다. 누구와도 상의 없이 혼자 결행한 일이었다. 결과, 전 고려파 교회에 속한 지도자들 사이에는 복교를 적극 지지하는 편과 강력하게 반대하는 편이 생겨나 내적 분열이 일어났다. 이것이 교회생활에서 교권이 몇몇 특정인들에게 집중되거나, 교회가 특정인을 지나치게 의뢰하고 지날 때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합동 후에 외국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총회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사하던 교수들 간에도 복교 방법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홍반식, 오병세 교수는 모교를 돕자는 뜻을 모아 1963년 2월에 복교한 고려신학교로 돌아왔다. 당시 이근삼 교수는 칼빈학원 원장으로 있다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결과 고려신학교는 10개월 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촌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고려신학교가 복교되자 곧 뒤따라 전 고려파 교회에 속한 교회들 속에서 고려파 교회 환원운동이 일어났다. 1963년 9월 17일에 환원총회가 열려, 합동한 지 34개월 만에 고려파 교회가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합동 당시 590 교회였던 교회의 수가 환원할 때에는 445 교회로 줄어들었다. 거의 3분의 1을 잃어버렸다.

 

고려파 교회는 합동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많은 수의 교회와 목사들을 잃었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것은 고려신학교가 그 귀중한 터(정체성)를 잃게 되고, 고려파 교회가 그 원색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이제 고려파 교회가 한국 교회 앞에 자부심을 가지고 등장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고려파 교회는 원칙을 따라 바른길을 걷는 생활을 등한하게 되고 편의주의적 실용주의적 길을 걷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고려파 교회는 초기 10년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표어를 내걸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생활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이 생활이 여지없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충성이란 말(pistos)은 신실(信實)을 의미하고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제 고려파 교회 안에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4. 정체성(터)을 잃어 가는 고려 신학교와 고려파 교회(1964-1987)

 

환원 총회 후 1964년 제14회 고려파 총회가 부산 삼일교회에서 열렸다. 이때 몇몇 노회로부터 사립 고려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해달라는 청원이 들어왔다. 고려신학교의 폐합, 복교 등의 비합리적 과정을 겪은 후 이제 한상동 목사가 주도하는 사립학교로서의 운영은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동안 고려신학교가 고려파 교회들의 적극적인 기도의 지원과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으나 실은 개인의 소유처럼 운영되어 왔었다. 설립자요 이사장이 교수로서 항상 교수회에 참석해 온 것이 그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상동 목사는 신학교 재산 일체를 총회에 기부한다는 각서를 내게 되었다. 학교설립 18년 만에 사립 고려신학교가 총회직영신학교로 바뀌었다. 교회가 신학교를 직영하는 것은 일찍부터 개혁교회생활의 원리였다. 이제 교회생활이 바른 방향으로 정리되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곧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교회는 큰 시련에 부닥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죽도록 순종하고 충성하려 노력해 왔던 지난날의 생활에 변화가 온 것이다.

 

1) 가 이사회(假理事會) 조직 사건(1967)

 

먼저 고려신학대학의 설립과정에서 일어난 가(假) 이사회 조직 사건을 들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대학설립을 목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칼빈학원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4년 고려신학교 부속 대학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사립학교 이사회가 아니라 총회 직영으로 새로 구성된 이사회는 1964년 총회유지재단을 구성했다. 신학교 측에서는 대학부 4년제 예과를 대학으로 승인받는 일을 추진하기 원했다. 당시 유지재단 이사장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1966년 총회에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총회 유지재단을 교육재단으로 명의변경 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총회는 이 일을 이사회에 맡겼다. 하지만 이 총회에서 이사들이 대폭 교체되고 송상석 목사가 유지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송 이사장은 교육재단으로 변경하는 일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 교육재단 설립추진이 속히 진행되지 못했다.

 

이때 송상석 목사의 교육재단 설립 추진을 참고 기다리지 못한 신학교 측은 현 유지재단 측의 동의를 얻지 않고, 가(假) 이사회를 조직하여 학교재단 설립인가를 받은 후 이를 본 이사회로 넘기기로 각서를 작성하고 이 일을 추진했다. 당시 가 이사진과 감사에는 신학교의 모든 전임 교수들이 포함되었다.13) 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목적이 선하면 목적을 이루는 방법도 선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 생활원리이다. 개혁(칼뱅주의)신학을 터로 하고 “생활의 순결과 순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고려신학교 교수들이 이 일에 예외 없이 가담했다. 고려신학교의 본래의 교육이념과 목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이는 바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을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범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난날 순교적 삶을 산 한상동 목사가 이 가 이사회의 이사장으로 이름이 올려져있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 6년 전 박윤선 박사가 선교사 전송 때문에 제 4계명인 주일 성수를 범했다고 퇴출했을 때 그가 중심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성자(聖者)가 없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최상의 선행조차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다”(제62문답)고 했다. 이제 고려신학교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곧은 길을 벗어나 편의주의, 실용주의 생활을 좇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고려신학교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고 자기 터를 허문 것이다. 서로 대화하고 인내하며 주의 뜻과 인도를 기다리지 못한 인간적인 다급함에 지배를 받아 인본주의적 해결방법을 택하였음이 분명했다.

 

이 문제가 곧 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1967년 5월 1일부로 학교법인 고려학원 인가가 나게 되고, 이것이 일간신문에 공표되었다. 신문을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지재단 이사장 송상석 목사는 즉시 이사회를 소집하고 이사회 밖에서 가 이사회를 조직하여 학교재단 설립인가를 추진한 일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상동 목사와 송상석 목사 간에는 지난 어느 때보다 심각한 긴장 관계가 조성되고, 그 후유증은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경남노회 측과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학교 측의 대립 상으로 나타났다. 이 대립이 1969년까지 이어졌다. 교수회는 송상석 목사의 이사장 퇴임을 요구하고 부산 국제신문에 총사퇴 결의서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개혁주의 생활원리와는 거리가 먼 혁명적인 거사였다. 결과 신학교는 문을 닫을 입장까지 온 것이다.

 

이런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목사의 극한 긴장 관계는 양자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이사장 송상석 목사로 하여금 한상동 목사를 신학교 교장으로 영입하도록 교섭하여 이것이 성사됨으로 외형상 극한 상호 간의 긴장 관계는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인 협상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교회적인 해결방법도 아니고, 권징을 참교회의 표지로 내세우는 개혁주의 교회의 생활을 따른 해결 방법도 아니었다. 1년 후인 1970년 12월 31일에 “고려신학대학” 설립인가가 나오므로 신학교에 부속됐던 대학부가 칼빈학원으로 출발한 지 15년 만에 그 목적은 이뤄졌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적이고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이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에 복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대학부가 대학 인가를 받은 후 고려신학대학이라는 틀 속에서 잠정적으로 신학교는 “신학 본과”로, 대학과정은 “대학부”라 부르고 지났다.

 

고려신학대학 설립과정에서 고려신학교는 “가 이사회”라는 방편을 통해 그 뜻을 이루어 편의주의를 택함으로 속화의 길을 자초했다. 이 학교가 인간만이 지배하는 기관이었다면 계속된 파란 속에서 역사로부터 사라졌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은혜의 하나님은 인간의 과오로 점철된 이 역사 속에서도 그의 불가해한 섭리 속에서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교회가 한국 교회 안에서 할 일이 있다고 보시고 보존하시는 그의 불가해한 자비를 나타내어 주셨다.

 

2) “고신대학”으로 교명 변경 사건(1980).

 

소위 “가 이사회”조직 사건이 일어난 후 거의 10년이 지난 때였다. 그동안 고려신학대학은 신학과 외에 교회봉사와 연관된 기독교교육학과, 종교음악과를 증설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학 당국은 지난날 품었던 칼빈대학 설립의  뜻을 이루어 일반 기독교 대학으로의 변신을 원했다. 하지만 지난날의 칼빈대학의 구상은 교회로부터 독립된 기독교 사립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 고려신학대학은 교회의 직영이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교회들은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의 원리를 따라, 신학교는 교회가 직영하지만, 대학은 교회제도 밖에서 신자들의 협의체에 의해 독자적으로 설립 운영되고 있다. 교회는 주께로부터 선교의 사명을 받았지 문화영역의 사명을 직접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학원 이사회는 대학 당국의 뜻을 수용하여 1978년 총회 전에 “본 신학대학을 일반대학으로 변경하기로 가결”하여 그 명칭을 “고신대학”으로 하기로 하고 이를 총회에 보고했다.

 

하지만 1978년 9월 제28회 총회가 이에 대해 표결한 결과 재적 114명 중 찬성이 36표, 반대가 74표, 기권 2표로 절대다수로 부결되었다. 이듬해 1979년 제29회 총회에는 의과대학 설립의 건의가 들어왔다. 이는 고신대학을 의학과를 포함하는 일반 기독교 대학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총회는 고려신학대학을 개편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이를 추진하도록 하고 이를 허락했다. 이는 고려신학대학은 그대로 존속하게 하고, 의학과를 포함하는 기독교 일반대학은 따로 설립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고려신학대학을 일반 기독교대학으로 변신시키려는 법적인 수속은 총회의 결의와는 상관없이 이사회와 대학 당국에 의해 지속되었다. 총회의 결의는 전 교회 대표들의 공약이요,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지 않는 이상 수용하고 지켜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교회의 공회와 거기서 한 결의가 아무런 가치도 권위도 없게 된다. 1980년 9월 제30회 총회가 모였을 때 지난 총회 결정에도 불구하고 고신대학으로의 교명 변경 수속이 이사회와 학교당국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이 알려졌다. 이사회와 대학 당국은 지난날 가 이사회 사건 때처럼 교회질서와 법을 어겨서라도 일단 기정사실화 시켜놓으면 총회는 수용하고 말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 일을 진행한 것으로 보게 된다. 이것은 교회적인 방법이 전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총회는 이런 불법적인 일의 진행에 대한 것을 듣고 크게 놀라지 않았다. 총회는 “교명 변경에 대한 것은 학장이 즉석에서 사과하니 받기로 하고 박수”로 받았다고 한다. 2년 전 총회에서 절대다수로 부결된 결의가 아무 효과 없이 무시를 당해도 총회는 별것 아닌 듯 수용한 것이다. 이는 교회법과 질서를 무시한 편의주의가 고려파 교회 안에 자리를 잡아버렸음을 의미했다. 이 총회가 불법을 범한 학교 당국자들에게 어떤 책임도 묻는 일 없이 불법으로 되어진 일을 기정사실로 수용하고, 이에 대한 책임자의 사과를 박수로 환영하고 지나갔다. 이런 일이 교회의 정화와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표방해 온 고려파 교회 총회와 “생활의 순결과 순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 양성”을 목표로 내 세운 신학교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전혀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 어느 나라의 개혁교회의 교회적인 회의에서도 볼 수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곧 고려파 교회생활의 속화를 의미한 것이었다. 1980년 10월 2일 문교부로부터 고신대학으로의 교명 변경이 승인되어 공표되었다.

 

3) 고신대학 학생이 일으킨 “미 문화원 방화사건”과 운동권 학생들의 폭력

 

고려신학대학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일반기독교 “고신대학”으로 방향을 튼 후, 바로 1980년대 초에 기독교 대학답지 않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남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세속적인 혁명의 이념의 물결이 이 학교를 덮은 것이다. 당시 반미, 민족 중심, 통일을 주장해 오는 학생 운동권에 영향을 받은 고신대학 학생들(5명)이 1982년 3월 18일에 미문화원에 방화를 일으켰다(소위 문부식 사건). 이 사건은 바로 전국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전 고려파 교회를 경악에 사로잡히게 했다. 혁명과 폭력을 정죄하는 개혁주의 교회 세계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학교를 직영하고 있는 고려파 교회 총회의 총회장과 이사장이 전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과하고, 학장(이근삼)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어 1980년대 후반에 운동권 학생들에 의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학내 민주화 운동이 예외 없이 고신대학에서도 일어났다. 고신대 운동권 학생들이 학교행정 참여, 학교신축공사의 비리 등 다양한 항목을 내세우고, 수업을 거부할 뿐 아니라, 학장실, 재단사무실을 점거하고, 집기를 파손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기독교 문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운 대학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4월 한 달 동안 수업이 완전히 중지되고 이런 분위기가 수개월 계속되었다.

 

이때 고신대학교에 뿌리내린 세속화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노조는 한국 노조 가운에 가장 반기독교적 사회주의적 폭력적 노조인 민주노총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다. 정통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주장해온 고려파가 직영하는 기관에 반 기독교적 노조 단체가 엄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다. 총회도 이사회도 고신대 대학당국도 이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 세계 다른 나라 개혁교회들에게 이런 반기독교적 노조에 가입하는 회원은 권징의 대상이 되어있다. 10여년 전 이런 노조에 대한 비판의 글을 기독교보에 장문으로 낸 일이 있다. 하지만 고려파 교회 내 어느 기관이나 어느 누구로부터도 반응이 없었다. 이뿐 아니다. 최근 부산지역 다섯 곳 대형병원 가운데 의사 12명이 리베이트 부정사건으로 기소를 당했는데 이 가운데 반 이상인 7명이 고려파 교회가 직영하는 고신대학교 복음 병원 의사라는 사실이 대중 매체를 통해 알려졌다.  이것이 고신교회의 속화의 일면이 아니고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앙은 말하면서 생활이 없는 고려파 교회의 현실을 보게 된다.

이런 모든 것은 교회의 영적 영역과 세상 문화의 영역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고, 대학을 교회의 직영으로 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공회인 총회의 결의를 외면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고려신학대학을 기독교 일반대학으로의 변신을 해온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5. 고려신학교의 “고려”라는 고유 명칭의 실종과 회복

 

1) 고려라는 명칭의 실종

 

1980년 10월 2일에 고려신학대학이 고신대학으로 개명이 되고, 이어 11월 3일에 고려신학교가 고신대학에 속한 특수 대학원으로 인가되었다. 결과 신학대학원은 공식적으로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곧, 지난 35년 동안 불리던 명칭 “고려”라는 명칭이 폐기된 것을 의미했다.

 

“고려”라는 명칭은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뜻 없이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다. 고려라는 명칭 속에는 고려신학교의 신학과 이념이 담겨 있었고, 고려파 교회의 요람으로 그 역사가 담겨있으며, 온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고려신학교(Korea Theological Seminary)”를 한국의 정통신학, 칼뱅주의 신학의 요람으로 인정해 왔다. 고려신학교를 지원해 온 교회들도 “고려파 교회”로 불렸다. 고려파 교회 신자들은 “고려신학교” “고려파 교회”라는 명칭을  자부심을 가지고 불러왔었다. 그런데 고려파 교회 지도자들은 이 “고려”라는 명칭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고신”이라는 말로 대체하고 슬쩍 폐기해 버린 것이다.

 

명칭은 사람이나 어떤 학교나 그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한번 가진 명칭은 거의 바꾸는 일이 없다.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가 1812년에 설립되었다. 200년이 지났어도 그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1929년에 개교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곧 백 년의 역사를 맞지만, 그 명칭에 변동이 없다. 우리는 이 학교들의 이름만 들으면 그 신학교의 신학의 실체를 생각하고 그 정체를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고려파 지도자들은 “고려”신학교라는 명칭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슬쩍 폐기해 버린 것이다. 1980년 고신대학의 개명 후 “고려”라는 말은 역사의 뒤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아름다웠던 “고려신학교”의 정체와 역사를 잊어버리는 환각 속에 지내왔다.

 

2) “고려”라는 명칭의 회복

 

 1980년대에 고려파 교회 일반 신자들은 “고려신학교”의 이름이 사라지고 “고신대 신학대학원“으로 바뀌었지만 이를 “고려신학교”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 고려신학교 교수들이 연이어 고신대학 학장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그 변화를 전혀 알아챌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교수 중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려신학교”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분이 없었다.

 

그동안 호주 자유개혁교회의 목사로 봉사하며 10여년 동안 떠나 있다 1987년 여름 신학교의 교수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이 상황을 직감하고 그 변화에 놀랐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내게는 현실이었다. 송도와 영도의 캠퍼스에 폭력이 난무하던 때, 교수들이 간담회로 모여 현실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신학대학원이 “고려”라는 명칭을 되찾아 정체성의 회복에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그래서 교수들에게 그동안 “고려”라는 명칭이 실종되었는데 이 명칭을 되찾아  신학대학원을 “고신대학 신학대학원”이라 부르지 말고, “고려신학대학원”이라 부르자고 했다.  잠정적으로 신학대학원과 고려파 교회 안에서 이 명칭을 사용하면서, 차츰 신학대학원을 고신대학교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작업을 하자고 했다. 다행히 대학 당국과 교수들이 이에 찬동하고 수용해 주었다.14)

 

1988년 9월 신대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후  거의 10년 동안 대학으로부터의 신대원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나섰다. 그 해 9월의 제36회 총회가 “본 교단 신학대학원과 고신대학의 분리 운영을 허락하기로 가결”함으로 마침내 교회적인 차원에서의 신학대학원 독립은 성취되었다. 신대원은 1989년부터 재정, 행정, 학사, 인사 면에서 대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신학대학원을 가칭 “고려신학대학원”으로 불러 오던 것도 몇 해 동안 계속 문교부에 학칙변경을 통해 청원한 결과 1997년 9월 2일부로 이것이 승인되었다.15) 결과 신학대학원은 잊어버린 “고려”라는 명칭을 회복하여 당당히 “고려신학대학원”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1992년 교단 발전 연구위원회는 총회에 “이사회를 양분하여 총회는 신학대학원에 전력을 쏟”을 것을 제의하고, 다음 해 총회(1993, 제42회)에는 신학대학원을 위한 이사회를 별도 구성할 것을 제의하여 이를 이사회에 맡기기까지 했다.16) 그러나 이 일은 당시 법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교회 내에는 이로 인해 고신대학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줄어들게 된다는 정서가 대학 측과 일부 지도자들의 마음의 저변에 깔려 있어 적극적으로 진행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1998년 고려신학대학원이 천안에 독립된 새 건물을 지어 옮김으로 고신대학으로부터의 독립이 한 걸음 더 진전을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신학대학원의 독립성이 차츰 줄어들고, 어떤 면에서 차츰 고신대학교의 통제 하에 들어가는 퇴행의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밖에서 감지하게 된다. 신학대학원이 대학교의 관할 아래 들어가는 것은 신학대학원과 고려파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신학의 속화, 자유화를 자초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역사가 이를 증거 해 주고 있다.

 

마감하는 말

 

고려신학대학원에 대한 기대

 

앞서 고려신학교 역사를 중심으로 고신교회의 역사의 일면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회고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자랑스러운 것만 말하고 듣기를 좋아한다. 오늘의 이 강의를 듣거나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비판적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줄 안다. 하지만 개인이나 어느 공동체나 역사를 뒤돌아보아 오류와 실패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미래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의 역사에서 발전한 점도 있지만 우리 선배들의 연약과 실수로 비틀걸음을 걸어오면서 자기 고유한 터를 무너뜨리고 원색을 잃어왔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반성하고 옛 터전을 다시 찾고, 원색을 회복하여 곧은 역사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너진 터를 다시 다져 세우고 그 터를 사수하는 길에 나서야 한다.  특별히 다음  세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며 기대하고자 한다.

 

첫째, 고려파 교회는 “고려신학교”에서 배태되고 탄생했다. 이 신학교가 지향하는 신학은 개혁주의 칼뱅신학이었고, 신학교의 목표는 “생활의 순결과 순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 양성”이었다. 이것이 고려신학교의 터였다. 이 때문에 교회들이 고려신학교를 도왔고, 총회 교권에 의해 쫓겨나는 것을 개의치 않았으며, 결과 고려파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오늘의 고려신학대학원은 이 터를 다시 찾아 정체성을 확실히 해야 한다. 한국에 많은 신학교들이 있는데 왜 고려신학대학이 있어야 하는가? 이 터를 찾아 정체성을 나타낼 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고려신학대학원은 잃었다 다시 찾은 “고려”라는 귀중한 명칭을 지켜 가기 바란다. 이 명칭 속에는 앞서 말한  고려신학교의 원래의 신학적인 터전과 신학교육이념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명칭이 변하면 뿌리도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불려야 한다는 분들이 있다고 들린다. 이를 경계하기 바란다.

 

셋째, 고려신학대학원이 대학교로부터 법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대학원대학교”가 되도록 계속 기도하고 노력해 가야 한다. 그래서 이 신학대학원은 고려파 교회에 의해 운영되고 감독을 받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고려파 교회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은 강조하면서 개혁주의 생활원리인 영역주권을 무시하고 대학교운영(병원 포함)을 교회가 스스로 지고 옴으로 교회의 속화를 초래해 오고 있다. 이는 교회의 미래를 위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말씀을 통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받았지 문화적 사명을 직접 받지 않았다. 이 문화적 사명은 신자 개개인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언약의 자녀들을 받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책임 있는 교육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여 교회제도(당회, 노회, 총회) 밖에서 이루어 가야한다. 영역주권의 혼돈은 교회의 속화를 초래하고야 만다. 이것이 오늘 우리 고려파 교회의 현실이다.

현재 현실적으로나 법적으로 독립된 “신학대학원 대학교” 설립목적 달성이 어렵다 하여 뒤로 물러서거나 목적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한국에 주님의 참된 교회 건설을 위해 필요하면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에 반드시 허락해 주실 줄 믿는다.

 


1) 이상규, 최수경 편집, 『한상동 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부산: 글마당, 2000), pp.311-313 “高麗神學校 設立趣旨書”;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서울: 도서출판 영문, 2008), pp.350-352 참고. 

2) 金良善, 『韓國基督敎 解放十年史』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p.32.

3) 韓尙東, 『파수군』 65호, 권두언, “神學10年 回顧함”(p.6).

4)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p.354.

5) 총회 제39회 총회록, 1949, p.58.

6) 『고신교회사 사료집』 제1권으로부터(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 소장).

7)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p.391 참조.

8) 金良善, 『韓國敎會 解放十年史』, p.158.

9) 『파수군』 제51호(1957) 3, pp.8-18.

10) 총회(고신) 총회록(제1회-10회), p.166.

 

11) 『파수군』 104호(1960년 11월호), p.16(이사회가 보낸 통고문 참조).

12) 총회 제47회(1961) 회록, p.64.

13) 가 이사회는 이사장 한상동, 이사 홍반식, 도군삼(당시 학교총무), 주경호, 김진경, 감사: 오병세 이근삼으로 되어 있었다.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p.518 각주와 南永煥, 『韓國 敎會와 敎團』 (소망사, 1988), p.507 참조.

14) 제313회(1988. 8. 18) 고신대학 교무회의 회의록 참조.

15) 교육부 문서번호 학무 81412;1776, 1997,9,2.

16) 총회 제43회 회의록(1993),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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