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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지난 2016년 8월 3일 부산동교회당에서 있었던 제5회 개혁정론 여름 포럼에서의 강의에 대한 강의안입니다.  -편집장 주-
 

 

 

 

 

 

 

성경과 과학, 접점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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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은 교수

(서울대학교, 안양강변교회)

 

 

1. 문제의 핵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과학시대는 물질적 풍요를 주는 대가로 우리에게서 다른 중요한 것들을 빼앗아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인정하는 과학의 특성상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들, 인간의 영혼, 천사나 마귀 같은 영적 존재 등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당 부분 우리 삶의 영역에서 추방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 기쁨, 고통 같은 감정들을 동물적 욕망의 진화된 결과라거나 인간 몸 안의 화학적 반응의 결과로 해석하여 그 풍부함과 깊이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까지 여기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성경 해석에까지 영향을 미쳐 성경 중에서도 과학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만 받아들이고 기적이나 성육신 같은 것은 거짓이라고 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거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는 과학의 힘을 빌려 한없이 풍부하고 깊은 창조 세계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한정시킴으로써 너무나 좁고 편협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신앙인인 우리조차도 이 시대의 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있다. 말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기적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우리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합리적 대비책을 마련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역시 그런 태도의 한 예일 것이다. 그런 영향력은 과학적인 시대정신을 이겨보려는 노력에서조차도 보인다. 과학적인 시대정신에 맞서려 할 때도 그들과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여, 즉 성경을 과학적으로(혹은 인간의 이성으로) 체계화하여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면 이 역시 과학시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창조-타락-구속으로 체계화하여 세상을 공격하거나 세상의 공격을 막는 세계관 운동이나, 성경의 내용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해보려는 창조과학(창조론)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서 근대 사상이 가르쳐준 이성의 방법을 총동원하여 성경의 무오성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자칫 성경을 과학적으로(혹은 이성으로) 보는 시각을 우리 속에 자리 잡게 만들어 성경을 성경의 논리 그대로 받지 못하고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부분처럼 보이는 부분은 불편해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성경 속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나 내용들 뿐 아니라 성경 속의 시와 같은 문학적인 전달방식에 대한 이해에도 엄청난 결핍을 드러낸다. 이런 것들 역시 과학시대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과학시대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처럼 좁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우리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몰아내려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고 풍성하게 지어진 우리조차 좁고 편협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폐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우리를 눈에 보이는 좁은 틀 속에 가두어 신령한 세계나 하나님의 존재, 온갖 추상적인 것들의 깊이와 풍성함을 잊게 만들고, 우리를 아주 좁고 편협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과학시대에 맞서는 길이 있는가?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을 싸우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풍성함을 훼손시키고, 우리의 싸움을 눈에 보이는 세계에 국한시켜 하나님의 말씀의 많은 부분의 본질을 축소, 왜곡시키는 이 시대정신에 맞서는 싸움이 눈에 보이는 외적 싸움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여러 형태의 신령한 싸움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에베소서 6장 11-12절) 대한 싸움이다.  따라서 우주의 나이가 몇 살이냐 혹은 진화냐 창조냐 하는 과학의 논리와 그들이 제시한 주제에 갇혀 그들과 갑론을박을 주고받는 일은 자칫 싸움의 본질을 흐리려는 그들의 전략에 말려 우리의 힘을 쓸 데 없는 데 낭비하는 꼴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시대정신과의 싸움이 영적 전투라는 인식은 이 싸움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이며, 또 이 싸움을 어떻게 싸워나가야 할 것인가와 관련된 싸움의 방법을 결정짓는 중요한 출발선이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신령한 전투의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유일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되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살피고 낮추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면서 이 싸움에 임해야 한다.

  성경과 과학의 논쟁도 항상 그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 논쟁이 타당한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악한 자가 우리 시대 가장 인기 있는 과학을 통해 끊임없이 신자를 미혹하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 개개인을 미혹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게 악한 자의 의도라라는 데 이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강의에서는 성경과 과학의 중요 주제인 시간과 생명을 통해 이 점을 같이 생각해 보려 한다. 

 

 

2. 성경과 과학의 접점을 찾으려는 예

 

  최근 중앙일보에 아래와 같은 취재 기사가 실렸다. “기독교인들이 좋아할 기사가 실렸다”며 필자의 친구가 읽어 보라고 보낸 기사이다. 정말 우리가 좋아할 기사일까? 

 

“지구 나이는 6000년…노아 방주에 공룡도 탔다” (중앙일보 2016년 8월8일자)

 성경과 과학은 공존이 가능할까. 기독교적 창조론과 현대 과학은 상호 보완적일까, 아니면 양자택일의 문제일까. 최근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한국창조과학회’ 안팎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창조론’을 둘러싼 과학적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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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0일부터 7일간 미국 서부를 돌면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사실이다”는 전제 하에 구약 창세기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미국창조과학 연구소의 입장을 취재했다. 창조론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들의 주장에는 반박하는 ‘점진적 창조론’, 그리고 신(神)과 진화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 등 다른 주장들도 함께 살펴본다.

◆노아의 대홍수=구약 성경에는 ‘노아의 대홍수’가 기록돼 있다. 지구상에는 약 320개의 대홍수 전설이 내려온다. 미국창조과학 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17년째 300회 이상 ‘창조과학 탐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지질학 전문가 이재만 선교사는 “노아의 대홍수는 지구를 물로 뒤덮은 ‘전지구적 사건’이었다”며 “창세기에도 ‘땅에 물이 크게 불어나서, 온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높은 산들이 물에 잠겼다’는 구절이 있다. 이건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주장했다. 대홍수 때 지구가 통째로 물에 잠겼고, 이후 해저 지진 등에 의해 땅이 솟으면서 바다와 육지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이 선교사는 “당시 미처 바다로 빠지지 못한 물들은 고원 위에 한반도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호수를 형성했다. 그 호수의 둑이 터지면서 쏟아진 거대한 저탁류(물과 함께 이동하는 고밀도 퇴적물의 흐름)가 땅을 깎으면서 생겨난 게 그랜드 캐니언의 지형이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는 ‘젊은 지구론’을 주장한다.

 1981년 한국창조과학회 창립을 주도하며 ‘창조 과학’ 대중화에 기여했던 물리학자 양승훈(캐다나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교수는 2008년 학회를 탈퇴했다. 양 교수는 ‘젊은 지구론’에 맞서 ‘오래된 지구론’을 주장하고 있다. ‘젊은 지구론’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지구상에 노아의 홍수 외에도 여러 차례의 격변이 있었다”는 ‘다중격변론’을 제기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 이전에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운석의 충돌에 의한 다중격변이 지구상에 있었으며, 노아의 대홍수는 신생대 홍적세 지층을 만든 마지막 격변이라고 반박한다.

◆고대 식물과 공룡=아담 창조 이전에 지구상에 생물이 있었을까. 창조론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오래된 지구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담의 창조 이전에 여러 차례의 창조와 멸종이 있었다고 본다. 반면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 성경에 반하는 주장”이라고 받아친다. 미국 창조과학연구소는 “노아의 방주에는 공룡도 함께 탔었다. 공룡은 인간과 동시대에 살았다. 대홍수 이후에 찾아온 빙하시대와 해빙 때 공룡이 멸종했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룡에 대한 성경적 이해’다.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 결과에 대한 입장도 갈린다.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을 과학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오류가 많다는 이유다. 이 선교사는 “화석을 ‘고생대·중생대·신생대’ 등으로 나누는 지질시대표는 이들 화석에 대한 연대측정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론인가, 진화론인가=창조론자들은 “진화론에는 아킬레스건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적 존재에 대한 아무런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본다. “자바인과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의 유골은 중간단계가 아닌 사람의 것으로 판명났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유골은 현존하는 원숭이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단계 생물로 여겨졌던 시조새도 최근 학계에서 “시조새는 조류다”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든, ‘오래된 지구론’을 주장하든 창조론자들은 “인간의 출발점은 진화가 아닌 창조에 의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반면 신(神)과 진화론을 모두 끌어안는 ‘유신론적 진화론’ 혹은 ‘진화론적 유신론’의 입장을 취하는 진영도 있다. 천체물리학자 우종학(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창조과학’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을 우상시하는 성경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기독교’다.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해석의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물리학계에서 제시하는 138억 년이란 우주의 역사와 진화론적 발전 과정을 수용한다.

 이처럼 기독교 안에서도 ‘창조와 진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갈린다. 상대를 단죄하는 종교재판식 논쟁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생산적 토론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킹맨(미국)=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이 기사를 읽으면 마치 성경과 과학이 ‘6천 년과 138억 년’ 혹은 ‘창조와 진화’라는 주제를 놓고 대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기사는 기독교 내의 논쟁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성경과 과학의 논쟁이다). 물론 성경과 과학을 이야기할 때 이것이 우리의 가장 주된 관심사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는 그런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할 때조차도 차분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의 맥락’을 말한다. 그것이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과학 시대의 시대정신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이 의도하는 ‘혈과 육’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는 길이다. 다소 이르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기사는 성경과 과학에 대한 바른 논쟁을 다루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런 논쟁이 자칫 성경을 과학의 수준으로 낮추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점을 살펴보자.

 

 

3. 시간: 6천 년과 138억 년?

 

  성경은 이 세상이 6천 년 전에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138억 년 전에 시작되었는가에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것은 우리의 관심을 더 중요한 데로 돌리기 위함이다. 시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눈을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향하게 한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게 하는 책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살 나라가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자는, 또는 이 세상은,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관심을 끊임없이 이 시간에 두려 한다. 시간은 피조물이고 타락한 이후에는 이 세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과학과 같은 이 세상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시간이란 참 신기한 존재다. 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이라는 이 존재가 우리를 끌고 가서 나이를 먹게 한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존재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나라에 사는 매미는 땅속에서 6년간 애벌레(굼벵이)로 있다가 정작 땅 위로 나와서는 매미로서 짧은 생활을 하고 죽는다. 미국에는 13년 만에 땅위로 나오는 매미도 있고, 심지어 17년 만에 나오는 매미도 있다. 매미가 6년, 13년, 혹은 17년의 그 시간을 어떻게 알까? 시간을 과학에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갈릴레오(1564-1642)로 알려져 있다. 뉴턴(1642-1727)에 이르러,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며 누가 측정해도 동일하다는 보편성 절대성, 불변성, 독립성, 중립성, 그리고 균일성이 확정되었다. 오늘날 시간은 세슘 원자가 만드는 빛이 9,192,631,770회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초로 정의하여 사용할 정도로 정밀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현대 과학에는 시간이 포함된 수많은 물리량과 과학 법칙들이 있다. 또한 시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한결같은 어떤 흐름으로 여겨져 왔다. 즉 세상이 다 없어져도 시간은 남는다는 시간의 영원성을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이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한 이가 아인슈타인(1879-1955)이었. 상대성 이론(혹은 상대론)이라고 부르는 그의 이론은 현대 과학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상대성 이론은 두 가지로 나뉜다. 1905년에 발표된 특수 상대성 이론은 절대적인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흐름이 늦어진다고 주장한다. 10년 뒤 발표된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별과 같은 무거운 물체는 공간을 휘게 하고 시간을 늦춘다. 현대 과학은 이 상대성 이론에 기초해 시간은 절대적이 아니라 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시간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의 시작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현재 여러 과학적 증거들을 통하여 검증됨으로써, 이론이 아닌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 우리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거나 자동차로 길을 찾아갈 때 널리 사용하는 네비게이션(차량항법장치, GPS)에서 이 상대성 이론이 이용되고 있다. 휴대폰이나 네비게이션에 위치 정보를 보내 주는 인공위성은 지구 바깥 하늘 높이에서 아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 인공위성은 하루 동안 상대성 이론에 의한 지구와의 시간 차이 38마이크로 초를 매순간 보정해 지상과 시간을 똑같이 맞추어 사용하고 있다. 이 작은 시간을 보정하지 않으면 자동차 운전 중 우리가 찾아가려는 위치가 하루에 10km, 순간적으로는 10m의 오차를 내어 큰 혼란을 줄 것이다. 즉, 우리가 사는 땅 위와 인공위성 속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시간이 이렇게 다른 것은 인공위성 속의 시계의 기계적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본성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주장하는, 빠른 우주선을 타고 가면 늙지 않는다는 얘기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사실인 것이다. 또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지구 중력이 좀 덜 미치는 고층 빌딩에 살면 시간이 좀 더 빨리 흘러 아주 작은 정도이지만 좀 더 빨리 늙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논리로 중력이 큰 별에서는 나이를 천천히 먹을 것이다.

현대 과학은 이 상대성 이론에 기초해 시간은 절대적이 아니라 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시간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는 현대 과학이 밝힌 시간과 공간 개념을 더 풍성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을 만드시고 그 안에 피조물을 두셔서 시간의 흐름 속에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인 이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언제나 ‘현재(I am)’이신 영원하신 분이시다(출 3:14, I am who I am). “태초에도 나요(I am)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I am)(사 41:4).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 before Abraham was born)(요 8:58). 시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을 설명할 길이 없어 하나님은 자신을 언제나 ‘현재’로 계시하신다. 시간에 대한 현대 과학의 발견 덕분에 우리는 시간과 시간 바깥의 ‘영원’에 대한 개념을 좀 더 추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 무수히 많이 나오는 ‘영원’은 피조물인 시간과 상반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쉽게 잘 설명한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의 다음 글을 읽어보자.

 

(“시간과 시간 너머”, 『순전한 기독교』(1952)(장경철, 이종태 역, 홍성사, 2001))

  어떤 사람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건 하나님이 어떻게 수백만 명의 기도를 동시에 듣느냐 하는 점입니다.”

  자, 먼저 주목할 점은 그 ‘동시에’라는 말에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는 시간이 무한히 많으니만큼, 아무리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도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다 들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삶이 한 순간씩 다가옵니다. 한 순간이 지나가야 다음 순간이 다가올 수 있으며, 각 순간은 아주 짧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전 우주와 하나님 또한 우리처럼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려 듭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살지 않는 존재들도 있다는 개념을 처음 소개한 이들은 신학자들이었습니다. 후에 철학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과학자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간에 매여 살지 않으신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삶은 연속되는 순간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밤 10시 30분에 100만 명이 동시에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10시 30분’이라고 부르는 짧은 순간에 그 모든 기도를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10시 30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는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조종사가 드리는 그 찰나의 기도를 들으실 여유가 영원 무궁히 있는 것입니다.

  꼭 들어맞는 예는 아니지만 비슷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합시다. 저는 “메리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문장을 쓰려고 합니다. 소설 속 가상의 시간 속에 사는 메리에게는 이 일들이 순간이라는 시간 간격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메리의 창조자인 저는 그 가상의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첫 문장을 먼저 써 놓고 두 번째 문장을 쓰기 전 세 시간 동안 메리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보낸 시간은 메리의 시간(소설 속의 시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완벽한 예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사실로 믿고 있는 바를 어렴풋하게나마 보여 줄 수는 있습니다. 작가가 소설 속 가상의 시간에 쫒기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주의 시간 흐름에 쫒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실 여유가 무한히 있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할 일을 알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내가 내일 할 일을 알고 계신다면, 나에게는 그와 다르게 행동할 자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우리처럼 시간 흐름에 매여 사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은 앞일을 미리 안다는 점에서만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시간의 흐름 밖, 그 위에 계시는 분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지금’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어제 한 일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어제가 이미 지나가 버렸지만 하나님께는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는 내일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내일 할 행동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내일에 계시면서 당신을 지켜보시는 것일 뿐입니다.

 

  위의 글에서 루이스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시간 넘어 영원에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가 어떻게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동시에 미치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몇 시간의 그 고통이 어떻게 무한한 고통이 되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현재’로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이 피조물인 시간 안에 제약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다 불경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성육신의 일은 지극히 자신을 낮추신 사건으로서, 신비 중의 신비요 사랑 중의 사랑이다.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피조물인 시간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 또한 신비이다(요 3:16).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영원하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신자가 이 시간 속을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영원을 사모하는 우리가 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354-430)의 예를 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면서 주님 안에서 안식할 미래의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았다. 『고백록』 11권에서 시간과 영원을 다루면서 시간과 영원이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가와 시간은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임을 논하고 있다. 현대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본받고 그의 권면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제11권 시간과 영원”, 『고백록』)

  만일 아무 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 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 있지 않을 것이며, 아무 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 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해서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이 항상 현재로 남아 있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비존재에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날(시간)은 오자마자 지나가고 맙니다....한번 지나가버린 과거는 다시 회복할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지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을 때는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이미 왔을 때는 우리는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연구』, 『하나님의 도성』 (『시간과 영원』(선한용, 성광, 1986)에서 인용))

  나는 모든 피조물의 운동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경험한다. 영원한 진리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없고 다만 현재만이 있다. 그러나 피조물에서는 그러한 불변성을 찾아볼 수 없다. 사물의 변화를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 거기에서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을 명상해 보아라. 그러면 거기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없는 "있음"만 있는 현재만을 경험할 것이다. 그 현재를 경험하기를 원하면 너 자신이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라. 그러면 어떻게 시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능력의 범위를 초월할 수 있단 말인가? 바라기는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요17:24)"고 아버지께 기도한 그 분(그리스도)이 우리를 그곳으로 올리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자신은 영원자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소망을 주셨다. 이 사건보다 더 인자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 곳이 어디 있는가? 그의 인간성의 매개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영생하시고, 불변하시며, 의로우시고, 복되신 그 분에게 올라갈 수가 있다.  

 

현대 과학은 우주의 나이를 약 138억 년으로 규정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서는 빅뱅 이론 혹은 우주의 진화에 대한 근거를 대기 위해서 길고 긴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된 우주의 실제 나이와는 무관한 시간이다. 다만 150억 년 정도의 아주 긴 시간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십억 년의 긴 시간 후에 우주가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며 성경의 종말을 부인한다. 성경을 믿는 우리로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한 폭발 이후로 긴 시간이 흘러서 오늘날의 세상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실제로 이 세상을 24시간으로 된 6일 만에 만드셨는지, 아니면 오랜 시간 동안 만드셨는지 그 답은 명확히 주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으로 과학을 보되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대하여 늘 겸손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와 공저를 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포이트레스 교수와 캐나다 개혁교회의 코넬리스 반 담 교수의 조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으로 본 과학』(성약, 2015))

(창세기 1장의 날에 대한) 여러 대안들을 아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호의적이든 아니든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입장들도 있는데, 그중에 유비적 날 이론이 특기할 만하다. 또한 우리가 관찰한 것처럼 이론들이 오류의 소지가 있다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모든 이론은, 그것이 주류 과학의 이론이든 창조의 날들에 대한 설명이든, 모두 오류의 소지가 있다. 주의 말씀만이 세세토록 있다(벧전 1:25; 참조. 사 40:8; 마 24:35). (베른 포이트레스 교수)

 

오늘날 유행하는 과학 이론에 성경이 부합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요구 조건에 자신의 성경 이해를 굴복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마치 무대에서 경쟁하듯이 상대주의와 맞서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성경이 최우선적이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지닌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인다. 역사나 신학이나 과학이나 그 외에 참되다고 하는 다른 어떤 지식의 분야들로부터 온 그 어떤 ‘증거들’도 필요하지 않다. 결국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일 뿐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고, 과학의 이론들은 이론일 뿐이며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코넬리스 반 담 교수)

 

  세상은 우주가 138억 년 되었다는 빅뱅 이론이나 지구가 45억년 되었다는 진화론으로 성경이 옳다 그르다 평가하지만 결코 이 과학으로 시간 넘어 영원을 가르쳐주는 절대적 진리인 성경을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수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수억 원, 심지어 수조 원이라는 돈이 하찮게 이야기하는 것도 그 원인일 것이다. 1억 년이라는 시간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속임이다. 1초에 한 개씩 1년을 꼬박 세어도 우리는 약 3천만 개 밖에 못 센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1초에 한 개씩 3년 이상을 꼬박 세어야 셀 수 있는 수가 1억이다.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하루 8시간씩 쉬엄쉬엄 세면 100년은 걸려야 1억이라는 수를 셀 수 있다. 사람이 과학을 빌어 138억 년을 말하니 마치 인간이 큰 능력을 소유한 것 같지만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결코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수가 아니다. 과학이 138억 년을 말하니 성경보다 더 영원을 생각하는 것 같다. 기독교는 고작 6천 년을 말한다고 조롱할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본대로 성경은 과학이 말하는 시간을 논하는 책이 아니다. 시간을 넘어선 영원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책이다. 성경과 과학을 논할 때 이 점을 명심하고 필요 없는 싸움에 끌려들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6천 년과 138억 년의 논쟁으로 보는 것은 문제 자체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4. 생명: 창조와 진화?

 

현대 과학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생명의 원리를 규명하고 있다. 복잡한 생명체를 물질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자는 주장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 양자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던 슈뢰딩거(1877-1961)『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년)에서  ‘살아 있다’와 ‘살아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를 물으면서, 이제 살아 있는 생명체를 분자와 원자 같은 물질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가 왔다고 주창한다. 즉, 산 것과 죽은 것 모두 똑같은 물리와 화학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 이 주장에 동조한 젊은 학자들 중 왓슨과 크릭은 생명체 속의 물질 구조를 분석하여 1953년 DNA(Deoxyribonucleic acid의 약자, 디옥시리보핵산) 분자의 두 가닥 실타래 즉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다. 대체로 이를 현대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보는데, 생명 연구에서 DNA 분자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생명현상을 DNA라는 화학 물질이 주도한다. DNA는 복잡한 화학 분자이다. DNA는 나사처럼 꼬여있는 가느다란 두 가닥의 실로, 이 두 가닥 실을 줄사다리처럼 무수히 많은 연결 고리가 연결하고 있다. 이 연결 고리들은 A, C, G, T라는 약자로 표시되는 네 가지 서로 다른 물질로, 그 임의의 배열이 곧 생명에 대한 정보가 된다. 컴퓨터는 00111010……처럼 컴퓨터 안에 있는 반도체에 0과 1 두 숫자의 임의의 배열로 정보를 저장한다. 마찬가지로 생명체는 ACAGGACGTCAC……와 같이 세포핵 속에 있는 DNA에 A, C, G, T 네 문자의 임의의 배열로 정보를 저장한다. 컴퓨터와 생명체의 정보 저장 방식에서 차이점은 2진법 언어냐 4진법 언어냐 하는 것에 있다. 이처럼 생명체는 4진법 언어를 사용하는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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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의 DNA에 대하여 현대 과학이 알아낸 것은 참으로 신비하다. 20세기 중반 0과 1의 이진법을 사용한 컴퓨터의 발명은 인류 역사에서 획시기적 사건이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한 모든 지식 정보량보다 최근 2년간의 정보량이 더 많다고 한다. 이것이 다 컴퓨터 덕분이고, 현대인의 삶은 이 컴퓨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태초에 이미 하나님은 생명체를 4진법 정보로 작동하는 컴퓨터처럼 창조하신 것이다. 생명체의 생명이 DNA 내에 네 종류 물질, A, C, G, T의 4진법 배열로써 유지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정보가 자식에게 전달되어 그 종족이 유지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을 만드셨고, 이를 이용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살도록 하셨다.

DNA는 물질에 불과하다. 현대과학은 이처럼 물질이라는 관점으로 생명을 다룬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물질에 초점을 맞춘 생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현대과학의 연구는 다른 생명체에서 논의하는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생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이제 인간의 마음(정신)까지 그 연구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 작업은 자연과학을 넘어 인문학까지 그 범위를 넓히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현대과학이 말하는 생명과 다르다. 성경은 처음부터 영원한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둔다. 성경은 현대과학이 자연적 현상으로 보는 죽음이 인간의 타락으로 왔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영생)을 복음으로 들려준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다. “영생(영원한 생명)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사람의 창조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 맞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또한 자신의 형상,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6문)로 설명한다. 같은 요리문답 제58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문: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내가 이미 지금 영원한 즐거움을 마음으로 누리기 시작한 것처럼 이 생명이 끝나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완전한 복락을 얻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에 대해 이 점을 가르쳐주고 이 생명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책이다. 따라서 생명을 물질로 접근하는 현대과학과 성경의 생명을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피조물인 물질로 표현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 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물질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이 물질을 넘어선 영원한 “하늘” 나라로 초청한다.

 

현대 과학은 우주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생명, 특히 인간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 ‘신 다윈주의’라고 명하는 소위 현대 진화론이 인간 기원론의 핵심이다. 이 신 다윈주의의 내용은 유전적 변화를 추가한 것 외에는 1859년 다윈(1809-1882)이 『종의 기원』에서 발표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이 자연에 잘 적응한 우수한 특성을 가진 종을 지속적으로 선택한다는 적자(適者) 생존과, 시간이 가면 한 종이 완전히 다른 종으로 변할 수 있다는 주장에 있다. 그는 자연은 어떤 속성이 바람직한지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종의 기원』에서는 논쟁을 피하려고 인간의 기원에 대해 직접 논하지 않았지만, 1871년에 출판한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했다는 주장을 분명히 한다.

진화론은 많은 실험과 관찰, 증거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과학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과학은 추측이나 추론이 아니고 이론의 검증(설득력 있는 증거)과 반증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화석, 현재 인간의 해부 구조, 인간의 성장 과정의 잔재들, 생물지리학, DNA의 유사성 등을 그 과학적 증거로 제시한다. 반증 가능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1973년 이후 펴낸 10만여 편의 진화론 관련 논문이 반론과 답변의 심사과정을 거쳐 출판되었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그러나 여전히 ‘진화론이 과학이냐?’ 하는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진화의 결과임을 밝히려고 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개미 집단의 행동을 연구하여 사회 생물학이라고 이름을 붙인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에드워드 윌슨을 들 수 있다. 그는 지난 수천 년간 있어 왔던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생물학적인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주창했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종교조차도 생물학적 인간의 한 특성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대중화시킨 대표적 인물로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리처드 도킨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기적 유전자』 등 많은 책들을 통해 ‘인간은 태초부터 다른 생명체의 몸을 빌려 명맥을 이어온 DNA라는 화학 물질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는 자극적인 주장을 펼치면서, 인간 정신을 물질의 산물로 격하시킨다.

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물질에 불과한 뇌에서 어떻게 정신이라는 특이한 현상이 나오는지를 진화의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즉, 초기 생명체의 행동에서 원형 정신을 거쳐 정신으로 진화했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인간의 정신을 신비롭게 생각하려는 시도들이 다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인공 지능 연구의 창시자인 미국 MIT 교수 마빈 민스키는 정신이란 서로 포개어진 다수의 비정신적인 상위 프로그램과 하위 프로그램의 산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에 동조한다. 이제 인공 지능이나 사이버 인간, 의식을 가진 로봇 등이 낯선 주제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체세포 복제를 통해 또 하나의 나를 만든 다음 나의 뇌 정보를 디지털화하여 이식하거나 혹은 이 디지털화한 나의 뇌 정보를 로봇의 몸에 업로드할 경우에 나란 존재는 결국 무엇이겠는가를 묻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이런 시대 앞에 서 있다.

현대의 정신(마음) 이론은 이러한 진화론적 사고와 융합되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정신은 뇌 속의 진화된 DNA에 의해 좌우되므로 자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행동에서 정신으로 진화했으므로 정신은 행동이나 학습 혹은 문화에 종속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정신이란 컴퓨터의 데이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들이 그러한 예다. 오스트리아 진화윤리학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우리가 도덕 체계를 설정하려 할 때에 이상주의적인 인간상에 꿰맞추려 하는 대신에 인간의 생물 사회적인 본성이라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왜 죽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베를린 자유대학교 데틀레프 간텐은 “인간은 원시 상태로 야생에서 잡혀 먹지 않고 30세 이상 살아남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진화 과정에서 200년이나 500년을 견딜 수 있는 몸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고 변호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이론의 주장인 철학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결국 마음의 진화에 대한 주장은 인간의 영혼과 영원한 나라를 부정할 뿐 아니라 마음을 그저 인간의 육체가 사라질 때에 함께 사라질 물질의 소산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마치 컴퓨터가 망가지면 그 안의 정보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에 진화론은 성경과 명백히 다르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진화론은 생물이 스스로 새로운 종류로 진화할 수 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까지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하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동물과 차이가 없다. 그리고 자연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주장이긴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정신도 그 몸이 진화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적 인간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영원한 생명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 길이 없는 그들의 형편에 대해서는 동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진화론이 우리의 싸움의 궁극적인 대상인 것도 아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알 길이 없다. 로마서 1:23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으니 창조 세계 속에서 더 무엇이 보이겠는가? 또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는 진화론적 인간론은 타락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도움을 주는 점이 있다(롬 1:26-31). 진화론의 이 주장은 세상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이 동물을 신으로까지 높여 숭배한 전력이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진화론은 인간이 하등 생물보다 특별히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면서 인간을 낮춘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을 가장 높이는 시대이다. 진화론은 이렇게 인간을 높이는 시대에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박테리아나 물질의 수준까지 끌어내림으로써 인간의 정체성을 미궁에 빠뜨려 버렸다.  

이런 점에서 성경으로 진화론을 볼 때 진화론을 대단한 과학인 양 대할 필요가 없다. 세상과 인간의 기원에 관해 과학이 할 말은 사실 많지 않다. 과학적 증거를 내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인문학적(철학적) 성격이 강하다. 사실 진화론은 과학 안에서도 그 비중이 높지 않다. 생물에서 한두 장(chapter) 다루어지는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도 진화론을 대할 때 과학에서 다루는 만큼만 대응하고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학이라기보다는 철학에 가까운 이론에 불과한 진화론을 과학의 주류인 양 과하게 대하는 것은 그 이론에 필요 없는 과학적 위상과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사실 진화론의 과학적 위상을 높여 준 것에는 기독교의 과도한 대응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태도일까? 다시 C. S. 루이스의 글을 살펴보자. 러시아가 첫 우주선을 쏘아 올렸을 때 사람들은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살지 모른다하면서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에 대한 루이스의 대응을 읽어보자.

 

   (“보는 눈”(1963), 『기독교적 숙고』(1967))(양혜원 역, 홍성사, 2013)

  우주여행이 이루어진다면 제가 신경 쓰일 부분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단순히 감상적인 혹은 미학적인 부분입니다. 어느 달밤에 희미한 달을 올려다보면서 ‘아 그래, 저기 왼쪽이 러시아 영역이고 저기 오른쪽이 미국 영역이지. 그리고 저기 위쪽이 바로 현재 영토 분쟁이 발생할 조짐이 보이는 부분이지’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그 달밤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신화와 시인과 연인들의 달, 그 태고의 달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정신의 일부가, 우리의 정서적인 부요함의 거대한 덩어리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르테미스라 불리든 다이애나라 불리든, 그 은빛 행성은 그렇게 모든 인류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 달에 가장 먼저 도달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서 이것들을 빼앗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만약 다른 행성에서 이성적, 지적 존재들을 발견한다면 더 실제적인 문제들이 생길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제게는 참으로 반가운 것인데,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인류가 다른 외계의 지적 존재와 만나는 것이 저는 별로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백인들이 어떻게 흑인들을 다뤄 왔는지를 보았으며, 심지어 문명화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우주의 깊은 곳 어디에서, 순진하고 호감은 가지만 기술적으로 우리보다 뒤진 종족을 만난다면, 똑같은 역겨운 역사가 반복될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노예로 삼고, 속이고 착취하고 멸절시킬 것입니다. 하다못해 우리의 악으로 그들을 타락시키고 우리의 질병을 그들에게 감염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다른 세계를 방문할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로운 영역마저도 그렇게 감염시켜야겠습니까?

   물론 우주에서 우리보다 더 강력한 종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만난 셈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파멸을 심판이 아니라 우리의 불운으로 여길 것입니다.

   공상과학 소설에 제 나름의 자그마한 기여를 하고자 했던 첫 번째 동기는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 그 장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다른 우주의 주민들은 괴물로, 그리고 지구에 사는 자들은 선한 존재로 그렸습니다. 제 소설(「우주3부작」) 이후로는 그 반대의 설정이 비교적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와 같은 변화에 제가 조금이라도 기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셋째는 바로 이것입니다. 단 하나의 지적 존재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지적 종족이 우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생각에 어떤 사람들은 걱정하고 어떤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두 감정 모두 그와 같은 발견이 기독교 신학에 치명적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신학이 하나님의 성육신을 인간의 타락, 구원과 연관시킨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학은 우리의 종과 이 작은 행성(지구)을 우주 역사의 중심에 놓게 해주는데, 만약 수백만 개의 행성에 지적 존재들이 살 경우 그러한 신학은 신뢰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적 존재들이 발견될 경우 생길 수 있는 신학적 난제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지적 종족에 관한 가설에 대해 우리가 현재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처럼 지적이지만 우리와 달리 무죄한 종족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도 없고 아무런 사악함도 없이 오직 평화와 좋은 친구 관계만 있는 종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종족이 성육신이나 구원의 이야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해도, 심지어 그들이 우리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조차 힘들어한다 해도 당황스러워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세계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종족으로부터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을 터이며 그들에게 가르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그들의 발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멸절시킬 이유를 만들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처럼 선과 악이 모두 있는 종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어떤 구원의 길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 역사의 어느 시점엔가 위대한 간섭이 있었을 것이고,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초자연적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잃어버린 세계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처럼 구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구원이 주어지지 않은 종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어느 그리스도인이든 그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부족을 처음 만나는 경우보다 근본적으로 더 어려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극도로 악마적인 종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선함이 조금도 없는 모두가 철저히 뼛속까지 왜곡되어 치료 불가능한 종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존재가 있음을 잘 압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런 존재는 육체가 없는 영적 존재들이지요. 그렇다면 육체가 있고 없고의 그 사소한 부분만 조정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환상적 추측의 영역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다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심지어 다리를 놓아야 할 강이 있는지 알기도 전에 다리부터 건너려 하고 있습니다.

 

  C. S. 루이스의 이 글은 우리로 통찰력을 얻게 한다.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 앞에서 그는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님을 알기에 여유 있게 대응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지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보다 더 지혜로운 태도를 취하곤 한다. 필자는 진화론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에서 그 점을 많이 보곤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의 열심이 자칫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알게 모르게 좁고 편협한 시각으로 성경을 과학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데 동조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궁금한 점에 대해 다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있다. 세상이 언제 창조되었는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주께서 다시 오신 후 영원한 나라를 살아갈 때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만 인내하고 기다리면 될 문제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의 풍성함과 하나님이 창조한 다양한 세계를 잘 배워 성경과 과학의 문제를 여유 있게 보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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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고] 한국교회의 낯 뜨거운 현실: 목사안수와 서리집사

    한국교회의 낯 뜨거운 현실: 목사안수와 서리집사 황대우 교수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녀의 아버지가 최태민이고 목사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에서 안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종합총회는 ...
    Date2016.11.05 By개혁정론 Views1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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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고] 산전검사와 낙태, 그리고 장애

    산전검사와 낙태, 그리고 장애 이춘성 목사 (유성광명교회 협동목사) (고신대 기독교윤리학 박사과정 중) 1. 전통적인 장애 인식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레위기 21장에서 레위인들 중에 제사장이 될 수 없는 부정함의 항목들 속에 다양한 장애의 형태들이 포함 ...
    Date2016.10.19 By개혁정론 Views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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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기고] “천국 상급”이란 무엇인가?

    “천국 상급”이란 무엇인가?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천국 상급”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보통의 용법에서 성도가 죽어서 가는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는데, “낙원”이라고 부르는...
    Date2016.10.14 By개혁정론 Views2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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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SFC 관련 최근의 사태에 대한 SFC 총동문회 임원회의 제안

    제66회 총회는 몇 개 노회가 발의한 SFC 문제에 대해 SFC지도위원회와 임원회를 중심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SFC 총동문회 임원회가 아래와 같은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편집장 주- SFC 관련 최근의 사태에 대한 SFC...
    Date2016.09.29 By개혁정론 Views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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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기고] 신학이 목회에 적용되고 있는가?

    신학이 목회에 적용되고 있는가?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 담임)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 즉 신학은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이며, 나아가서 그렇게 해석한 결과를 교회에 적용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이에 목사는 신학 공...
    Date2016.09.19 By개혁정론 Views2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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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기고] “아르뱅주의”가 가능한가?

    “아르뱅주의”가 가능한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 우병훈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의학) 아르뱅주의? 칼뱅주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 받기 때문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가...
    Date2016.09.16 By개혁정론 Views14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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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성경과 과학, 접점은 있는가?

    아래의 글은 지난 2016년 8월 3일 부산동교회당에서 있었던 제5회 개혁정론 여름 포럼에서의 강의에 대한 강의안입니다. -편집장 주- 성경과 과학, 접점은 있는가? 성영은 교수 (서울대학교, 안양강변교회) 1. 문제의 핵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과학시대는 물...
    Date2016.08.29 By개혁정론 Views7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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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기고] SFC 문제, 이렇게 해결하자

    SFC 문제, 이렇게 해결하자 황원하 목사 1. 교회와 SFC 사이의 갈등 필자는 몇 년 전에 “SFC가 과연 교회를 위한 단체인가”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에 그 글은 그 매체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글이 되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
    Date2016.08.20 By개혁정론 Views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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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기고] 보편적 교회를 믿사오며

    보편적 교회를 믿사오며 이충만 목사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유학중) 지난 6월 19일 크레타 섬에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제7차 보편공의회) 이후 최초로 개최되는 동방정교회의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과 필자가 유학하고 있는 네...
    Date2016.06.27 By개혁정론 Views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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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침묵과 겸손으로 순례자의 삶을 사셨던 故 오병세 목사님을 추억하며

    침묵과 겸손으로 순례자의 삶을 사셨던 故 오병세 목사님을 추억하며 • 오재경 목사 (조카손자, 향상교회-LA 선한청지기 교회 공동유학목사)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예수라는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
    Date2016.06.20 By개혁정론 Views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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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No Image

    삶으로 보여주시던 아버님; 고 오병세 박사에 대한 회상

    삶으로 보여주시던 아버님 - 고 오병세 박사에 대한 회상 정현기 원장 (고 오병세 박사 맏사위, 거제교회 장로, 세계로병원 원장) 고 한석 오병세 박사는 2016년 6월 8일 저녁 7시 55분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90의 장수를 누리시다가 노환으로 큰 고생...
    Date2016.06.14 By개혁정론 Views3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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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故 오병세 교수의 삶의 여정

    故 오병세 교수의 삶의 여정 이상규 교수 (고신대 신학과) 고 오병세 교수는 홍반식, 이근삼 교수와 더불어 1960년대 이후 고신 신학을 이끌어 온 신학자였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에서 출생하신 오병세 교수(1926-2016)는 유가적(儒家的) 기풍과 군자...
    Date2016.06.11 By개혁정론 Views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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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성령강림절, 어떻게 충만할 것인가?

    성령강림절, 어떻게 충만할 것인가?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성대한 부활 절기 이후의 날들, 이후의 주일들을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좋을까? 고대 교회는 부활주일 이후의 날들까지 부활의 기쁨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부활 이후의 50일간으로 확대했다. 우리...
    Date2016.05.13 By개혁정론 Views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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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기고] 성령강림절 즉 오순절은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인가?

    성령강림절 즉 오순절은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인가? 황대우 교수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개혁주의 교회는 모든 교회력을 폐지했는가? 아니다. 16세기 츠빙글리의 도시 취리히는 개혁 이후에도 최소한 6개의 주요 교회력을 지켰는데, 그것은 12월 25일 ...
    Date2016.05.08 By개혁정론 Views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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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기고] 대교리문답과 통일

    *. 이 글은 “SFC동문영역포럼”(2016.4.1.대구명덕교회)에서 발표한 글로, 우병훈교수(고신대)의 “개혁파신조에서 읽어낸 공공신학”에 대한 논찬이었음을 밝힙니다. 대교리문답과 통일 김동춘 대표간사 (전국 SFC)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이웃사랑의 실천과 통일 ...
    Date2016.04.15 By개혁정론 Views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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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신학과와 신대원의 6년 연계 교과과정 실천으로 신학교육의 비정상화를 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이 글은 2016년 4월 9일(토)에 있었던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송영목 교수가 발표한 논문의 요약본입니다. 신학대학원과 신학대학의 교육과정의 연계를 통해 신학교육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논지입니다. 교단의 신학교육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
    Date2016.04.14 By개혁정론 Views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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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부활 주일을 기다리며,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가?

    부활 주일을 기다리며,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가?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들어가며 부활 주일이 다가왔다. 부활 주일 이전 40일을 많은 교회들의 교회력에서는 “사순절”(四旬節, 헬라어-“테사라코스테이”)이라고 하여 절기로서 지킨다. 그...
    Date2016.03.23 By개혁정론 Views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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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방문기

    고려신학대학원 학생들이 네덜란드 캄펀신학교와의 양해각서에 의해 지난 2016년 2월에 네덜란드 캄펀신학교에 방문한 것을 기행문 형식으로 적은 글입니다.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방문기 임모세 (고려신학대학원 제70회 졸업생) 2014년 6월에 고려신학대학원...
    Date2016.03.02 By개혁정론 Views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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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기고] 이단, 이슬람, 안티기독교 강사들을 보호하자!

    <CFI 목회칼럼> 이단, 이슬람, 안티기독교 강사들을 보호하자! 최병규 박사 CFI 원장 교회사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은 주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여 의의 길로 가게 하며 악한 영의 세력들로부터 보호...
    Date2015.12.23 By개혁정론 Views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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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기고] 금수저, 은수저, 교회 안에는 없는가?

    금수저, 은수저, 교회 안에는 없는가? 손재익 목사 (객원기자 / 한길교회) 2010년 8월 31일 외교통상부의 5급 사무관 특별채용에 1명이 최종합격했다. 그런데 그 1명이 다름 아닌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인 유명환 씨의 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오해를 받을 만...
    Date2015.12.03 By개혁정론 Views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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