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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해방파 교회의 신학교인 캄펜신학대학과 기독개혁교회의 신학교인 아펠도른신학대학은 합병을 위해 분주하다. 2017 9월부터 개혁주의신학대학교 (de Gereformeerde Theologische Univesiteit)’라는 이름으로 합병된 신학대학교가 개교한다합병의 원칙은 신학 학부 교육은 통합교육을 실시하고 신대원 교육은 두 교단의 특성에 맞게 교육한다는 것이다합병을 위한 노력 중에 새롭게 설립될 학교의 부지선정이 중요한 이슈이다이와 관련하여, 1835년에 분리측’ 교회가 만들어진 이후 네덜란드 신학교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기사가 ND에 실렸다 ***


 


                                                                                                             

 

분리측은 암스테르담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2016-4-4, ND

Willem Bouwman

번역 이충만

 


캄펜신학대학교와 아펠도른신학대학교가 합병하여 설립하는 ‘개혁주의신학대학교(de Gereformeerde Theologische Universiteit)’는 대학부지 선정에 분주하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은 논외에 있다. 이는 신학교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해방파 교회의 목사였던 브렘머 (Bremmer)가 1961년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을 때 캄펜의 교수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위트레흐트


캄펜신학대학교와 아펠도른신학대학교가 합병하여 ‘개혁주의신학대학교’를 설립한다. 새로운 신학대학교가 위치할 장소로 위트레흐트가 거론되고 있다. 이로써 두 신학교는 현재의 도시를 떠나게 될 것이다. 두 신학교육기관은 오래된 역사와 풍부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캄펜에 신학교가 세워진 것은 1854년이다. 당시 ‘분리파’ 교회가 캄펜에 신학교 (de Theologische School van de Christelijk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를 개교하였다. 이 ‘신학교’는 헤르포름더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들을 위한 목사양성학교였다. 1836년에 ‘전문대학교(hogeschool)[1]가 되었고 1887년에 ‘대학(universiteit)’이 되었다. 1896년부터 이 대학의 선생들은 ‘교수(hoogleraar)’라는 직함으로 불릴 수 있었다. 아펠도른신학대학 역시 유사한 역사적 발전을 경험하였다. 처음에는 ‘신학교’로 시작하였고 ‘전문대학교’, 그리고 ‘대학’ 인가를 받았다. 대학교 건물은 1919년 5월 6일 이후 현재까지 아펠도른 빌헤르미나파르크에 위치하고 있다.

두 신학 교육기관은 ‘분리’측 교회와 ‘기독개혁교회’의 유산이다. 두 교단의 교인들은 이들 신학교육기관을 ‘교회를 위한 학교’로 인식하였다. ‘신학교의 날 (Schooldag)[2]의 풍경이 신학교와 교회간의 밀접한 관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수 천명의 교단 교인들이 각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교 교수들의 신학강좌에 참여하였다. 교인들은 캄펜과 아펠도른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을 가졌고, 신학교가 제공하는 교회를 위한 신학적 봉사를 늘 감사하였다. 1919년 기독개혁교회의 신학교가 아펠도른에 안착했을 때 교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자”라는 덕담을 주고 받았다. 두 신학교육기관이 캄펜과 아펠도른를 떠난다는 것은 교인들에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콕(Kok)과 브뤼멜캄프(Brummelkamp)


1834년에 ‘분리’가 이루어지고 1854년에 캄펜에 ‘신학교’가 세워지기 전 20년 동안 ‘분리’측 교회는 다양한 분파들의 이견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분파들은 설교 방법, 직분, 총회의 권위 등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상이한 관점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목사양성소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안토니 브뤼멜캄프(Anthony Brummelkamp)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분파는 아른헴(Arnhem)에 학교를 가지고 있었고, 볼터르 콕(Wolter Kok)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분파의 학교는 호허페인(Hoogeveen)에 위치했다. 통합되지 않은 학교들은 상호간 불일치를 부추겼고, 교육의 수준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브뤼멜캄프 목사를 중심으로 분리파 교회는 기존 목사양성학교들을 합병하여 하나의 신학교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문제는 신학교 부지 선정이었다. 이는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양한 지역과 도시들을 대상으로 15년간 논의가 진행되었다. 경제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여 흐로닝언(Groningen), 아센(Assen), 스밀더(Smilde), 메펄(Meppel), 그리고 쯔볼러(Zwolle)와 같은 도시들도 고려되었다. 암스테르담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는데, 암스테르담은 교회의 교사들이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을 민첩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무리들은 대도시의 급변하는 문화로부터 신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방도시를 선호하기도 했다.

신학교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1849년 총회가 개교할 신학교의 위치로 프라너커(Franeker)를 선정하였을 때, 프라너커의 교회들과 성도들은 감격했다. ‘모든 성도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감격이 역력했다. 많은 사람들의 눈물은 이 감격을 보여주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프라너커 교회들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학교 설립을 위해 프라너커가 적절하지 않다는 반대의견이 제기 되었고, 부지 선정을 위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1854년 총회는 끝내 캄펜을 선정하였다. 캄펜은 흐로닝언, 아른헴, 그리고 암스테르담과 달리 분리파 교회내 분파들 간의 논쟁으로부터 중립적인 지역이였다. 도시세금 또한 저렴하였다. 이는 영세한 분리파 교단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합 신설된 신학교는 학문적 허세를 배제하고 목회자양성학교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총회는 교수(professor)라는 직함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대신 총회는 신학교에서 목회자 양성을 위해 일할 교원을 ‘선임교육자 (hoofdonderwijzer)[3]라고 호칭했고, 모든 제반 사항에 있어 일반 목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캄펜신학교는 빠른 시간내에 교회의 학교로 자리매김 하였고, ‘분리’측 교회에 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캄펜신학교를 찾아야만 했다.


 

암스테르담으로 가지 않다


1880년 아브라함 카위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자유대학교가 설립된 후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 ‘새 교회(de Nieuwe Kerk)’에서 자유대학교 설립기념집회가 개최되었을 때 캄펜신학교의 교원들은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캄펜신학교는, 자유대학교가 ‘순전한 개혁파 교회(분리측 교회)’와의 직접적 관련성이 없었기에, 자유대학교의 개교를 ‘주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오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캄펜신학교 신학생들 중 일부는 이러한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고 1881년 자유대학교로 편입한다.

이후 카위퍼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헤르포름더 교회(국가교회)를 1886년에 떠나, 1892년 분리측 교회와 연합하여 ‘네덜란드 개혁교회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만들었다. 이 연합 이후 캄펜신학교는 더 이상 자유대학교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고수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캄펜신학교와 자유대학교 신학부와의 합병에 대한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때도 역시 연합된 신학교의 위치 문제가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였다. 캄펜에 남을 것인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갈 것인가?

캄펜신학교의 선생이었던 헤르만 바빙크(Hermann Bavinck)는 1896년 교수직함을 얻었고, 두 신학교육기관을 합병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상호불신과 이기주의는 합병을 방해하였다. 1902년 총회는 캄펜신학교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전하는 것을 결정하였으나, 분리측 인사들은 자신들의 캄펜신학교를 잃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고, 이에 총회 결정은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바빙크는 캄펜신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자유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으며 27명의 학생들이 그를 따랐다. 캄펜의 동료들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학교에 대한 공격으로 느꼈고, 환멸을 느낀 목사들은 바빙크가 배신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캄펜은 그들에게 여전히 애정 어린 곳이었고, 암스테르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면, 자유대학교는 캄펜신학교가 목사양성학교이며 학문적 연구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캄펜신학교를 무시하였다. 캄펜신학교의 학사학위는 자유대학교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캄펜신학교는 당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학교이지 학문을 위한 학교가 아니었기에, 박사학위 수여자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이는 아펠도른신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캄펜신학교와 아펠도른신학교 모두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러나 두 학교 모두 이후 박사학위 수여자격을 얻었고 대학이 되었다).

 


캄펜의 “신학교의 날 (Schooldag)


캄펜신학교는 바빙크와 그의 동료인 비스터르펠트(Biesterveld)가 떠난 후 사태를 무난히 수습하였다. 그러나 캄펜과 자유대학교간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소수의 캄펜신학교의 교수들이- 호닝, 리데르보스, 그리고 흐레이다누스-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캄펜은 분리측 교회의 정신적인 유산을 이어가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신학교의 날’이 대표적이다. 1901년부터 매년 캄펜신학교는 ‘신학교의 날’을 개최하여 교단 교인들에게 신학교와 신학강좌를 개방하였다.  자유대학교의 ‘신학교의 날’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이 날외에 매년 개최되는 ‘대학교의 날 (Universiteitsdag)’ (이를 ‘칼빈주의자들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도 자유대학교를 위해서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캄펜과 암스테르담 사이의 간격은 쉽게 메워질 수 없었다. 목사가 자유대학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는지 혹은 캄펜에서 공부하였는지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성도들은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그들이 어디에서 공부하였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 두 학교 사이의 골은 1930년대 더욱 깊어졌다. 당시 캄펜신학교의 교수였던 클라스 스킬더가 카위퍼의 신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스킬더와 자유대학교의 두 교수, 헤르만 카위퍼(Herman Kuyper)와 팔런테인 헵(Valentijn Hepp) 사이의 논쟁은 교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끝내 교회 내 분열이 발생했고, 스킬더는 교단으로부터 쫓겨났다. 캄펜에서 공부하였던 많은 목사들이 당시 스킬더를 따라 나섰다.

스킬더와 그의 지자자들은 자신들의 신학교육기관을 캄펜의 브루더르베흐에 설립하였다 (이것이 현재 해방파 교회의 캄펜신학대학교이다). 신학적으로 이 학교와 자유대학교 사이의 간격은 좁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그 간격은 수광년의 것이었다’). 해방파 교회의 목사였던, 롤프 브렘머가 1961년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하였을 때, 캄펜은 이를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캄펜의 몇몇 교수들과 목사들은 브렘머가 보내 준 그의 박사논문을 열어 보지도 않은 채 반송 했다.  반면, 비록 자유대학교가 분리측의 유산이 이었던 캄펜신학교를 학문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겼으나, 자유대학교와 이 캄펜신학교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었다. 1950년에 캄펜신학교가 박사학위수여 자격을 얻어 박사학위를 수여하자 학문적 열등감은 점차 누그러졌다.

 


위르크 (Urk)


아펠도른신학교도 역시 분리측 교회의 전통에 서 있었다. 이 학교는 분리측 교회와 애통측 교회의 합병이 이루어지고 난 2년 후 1894년에 개교하였다. 아브라함 카위퍼의 세례와 중생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여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수 천명의 분리측 교회의 교인들이 애통측과의 합병을 찬성하지 않다. 이들은 새로운 교단인 기독개혁교회(de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를 만들었고, 초창기 두 명의 목사가 일하였다: 프레이더릭 판 링언(Frederik van Lingen)과 요하너스 비서(Johannes Wisse). 캄펜신학교의 학생이었던 피터르 더 브라윈(Pieter de Bruin)도 분리파와 애통파의 합병에 찬성하지 않았기에, 당시의 캄펜신학교를 떠나 비서 목사 밑에서 신학교육을 이어갔다. 기독개혁교회의 신학교는 1894년 덴 하흐(Den Haag)에서 개교하였고, 1899년에는 레이스베이크(Rijswijk)로 이전하였으며, 1919년부터 현재의 아펠도른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로테르담과 두스뷔르흐(Doesburg)도 신학교 부지로 거론되었고, 위르크(Urk)도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아펠도른이 네덜란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기차를 이용한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선정되었다.

아펠도른신학교 역시 캄펜신학교와 마찬가지로 목사양성학교였다. 1930년대 분리측 캄펜신학교의 교수 다섯 명이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었고, 아펠도른의 선생들은 박사학위가 없지만 학식이 뛰어난 목사들이었다. 구약학자였던 B.J. 오스터르호프(B.J. Oosterhoff) 목사가 1953년에 기독개혁교회의 최초 박사학위를 취득한 교수가 되었다. 그는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1949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역시 위트레흐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J. 판 헨더런(J. van Genderen)이 1954년 두번째로 박사학위를 소지한 교수가 되었다. W.H. 페일러마(W.H. Velema) 교수, W. 판 엇 스페이커르(W. van t Spijker) 교수, 그리고 J.P. 페르스테이흐(J.P. Versteeg) 교수는 모두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7년, 1970년, 그리고 1971년). 페르스테이흐 교수가 1971년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아펠도른의 모든 교수들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되었고, 그 중 대다수는 자유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쳤다.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이는 해방파 캄펜신학대학교와 비교할 때 큰 차이였다. 여전히 해방파 신학교는 자유대학교와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대학교의 뛰어난 신학자였던 헤릿 베르카워 (Gerrit Berkouwer)는 스킬더를 해임시킨 총회의 좌장이지 않았던가? 그에게 박사지도를 받은 하리 카위터르트(Harry Kuitert)와 헤르만 비어싱아(Herman Wiersinga)는 성경비평학을 옹호하였다.

해방파에게 자유대학교는 단지 반면교사였다. 브루더르베흐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박사학위를 대체로 자신들의 대학에서 취득하거나 간혹 위트레흐트, 레이던, 흐로닝언, 혹은 아펠도른에서 취득하였지만, 자유대학교에서 취득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변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1944년 이후 자유대학에서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해방파의 교수는 G. 하링크 (George Harinck)이다. 하링크는 2003년 동대학의 신학부가 아니라 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해방파 캄펜신학대학교 교수 중 세 명은 자유대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해방파 신학교는 더 이상 암스테르담을 꺼려하지 않고, 자유대학교와의 거리감도 예전과 같지 않다. 만약 암스테르담이 개혁주의신학대학교의 부지로 거론된다 하더라도, 이는 더 이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1] 네덜란드의 학제는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 ‘전문대학교(hogeschool)라고 번역한 단어는 한국의 대학제도를 따르자면 마땅한 번역어를 찾기가 힘들다. 이는 한국의 현재 전문대학교가 아닌 일반대학교와 동일하지만, 네덜란드에서 대학(universiteit)’ 학문성에 강조를 두는 반면, 전문대학교(hogeschool)는 실천성에 강조를 둔다는 정도로 구분할 있겠다.

[2] 신학교의 이라고 번역한 단어도 마땅한 번역어를 찾기가 힘들다. 날은 개교기념일(Dies natalis) 다르다. ‘신학교의 신학교가 속한 교단의 일반성도들이 교단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에 방문하여 신학교를 살펴보고, 신학생들을 만나고, 신학교수들의 공개신학강좌도 경청하는 날이다. 이로써 신학교가 교회로부터 독립된 상아탑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학교로서 교회와 밀접한 관계 안에 있음을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행사이다.

[3] 이 화란어 단어는 현재 초등교육과정의 교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신학교 선생들을 위해 당시 총회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는 달랐다. 마땅한 번역어를 찾는 것이 힘들기에 ‘선임교육자’라고 번역하였다. 당시 신학교의 선생은 신학교육에 은사를 가진 자로서 총회에서 선임하여 파송한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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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해외칼럼] 집으로 가는 메뚜기: 초기 근대의 노인학 개념 중 시의적절한 사례 하나

    개혁신학의 과제 III 캄펜신학교 프랑크 판 더르 폴 (Frank van der Pol) 교수 (교회사) 은퇴강연 집으로 가는 메뚜기: 초기 근대의 노인학 개념 중 시의적절한 사례 하나[1] 저자 : 프랑크 판 더르 폴 (Frank van der Pol) 교수 번역: 구본승[2] 1. 탐구영역...
    Date2015.12.21 By개혁정론 Views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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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해외칼럼] 선명하게 빛나는 신비

    선명하게 빛나는 신비 저자: 타드 빌링스 (J. Todd Billings, 웨스턴 신학대학원 교수) 번역: 박재은 목사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시편 102편의 기도는 곧 나의 기도였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
    Date2015.12.11 By개혁정론 Views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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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해외칼럼] 살아있는 교회: 조직과 공동체 사이에서

    살아있는 교회: 조직과 공동체 사이에서 작성자: 마리너스 더 용[1] 번역: 이충만 지난 10월 9일, 네덜란드 캄펜신학교에서는 “살아있는 교회: 조직과 공동체 사이에서”라는 제목의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아펄도른신학교와 캄펜신학교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
    Date2015.11.26 By개혁정론 Views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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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해외칼럼] 교회 갱신을 위한 설교

    교회 갱신을 위한 설교 저자: 케이스 돈보스 (Keith Doornbos, 갱신 연구소 프로그램 디렉터) 번역: 박재은 목사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 과정 중) 21년 전 문제에 직면한 한 교회로부터 설교 요청을 받았다. 교회 내의 평신도 지도자 그룹과 더불어...
    Date2015.11.20 By개혁정론 Views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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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