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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황대우 저, 『칼빈과 개혁주의』에 실린 글을 일부 다듬은 것이며 저작권과 출판권은 필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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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목사
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부흥을 생각하며

부흥(復興)이란 “쇠퇴했던 것이 다시 일어남”을 의미한다. 부흥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revival도 “산” “살아 있는”을 의미하는 “vival”에다가 “다시”를 의미하는 “re-”의 접두어가 합성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revival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구약 및 신약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책 참고. 윙키 프래트니, 『기독교 부흥운동사』, 권혁재 역(서울: 나침반, 1997), 12-22.)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독교 전문 용어 가운데 부흥이라는 단어와 가장 유사한 단어를 찾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부활(復活)”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요, 잠자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 바로 부흥이기 때문이다.

찰스 피니도 부흥에 대해 이와 유사한 정의를 하고 있다. “부흥은 그리스도인들이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 결과 죄인들에게 각성이 일어나서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한 지역의 부흥은 타락했던 교회가 깨어나며, 살아나서 선포를 하며, 또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크게 각성하여 하나님의 선포에 경청하는 것이다.”(챨스 피니, 『진정한 부흥』, 홍성철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93), 12-13.)

부흥은 기독교 신앙의 부활

하지만 필자가 부흥에 대한 피니의 정의와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피니는 부흥이란 자연의 힘을 초월한 어떤 종류의 기적과도 연루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부흥에는 정상적인 자연의 힘을 초월한 것이 하나도 없다. 부흥은 자연의 힘을 옳게 사용한 것에만 존재한다. 부흥은 이런 것이지 결코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피니, 10) 즉 그는 “부흥이 적절한 수단을 옳게 사용한 결과”라고 본다. 따라서 피니의 결론은 이렇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곡물이 적절한 수단을 사용한 결과로 생긴 것처럼 부흥도 적절한 수단을 사용한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피니, 11)

부흥에 대한 피니의 이러한 정의와 주장은 심각하게 성경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 피니에게 있어서 부흥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기술에 불과한 반면에 성경은 피니의 주장과는 달리 부흥을 인간의 뛰어난 기술과 수단에 의해 발생하는 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과 거의 모든 신앙 위인들이 가르치는 것은 부흥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점이다.

필자는 부흥이란 기독교 신앙의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부흥은 그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와 같은 부흥의 의미는 낯설다. 우리는 이 부흥을 굉장히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부흥을 “수적 증가” 즉 “외적 성장”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흥이란 일차적으로 “내적”인 것, 즉 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다시 사는 것과 숫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상 직접적으로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물론 간접적으로나 결과적으로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닐 수 있겠지만.

실제적인 변화의 결과로서 외적 성장이 따른다면 그것은 분명 부흥의 한 단면이겠지만 실제적인 변화 없이 외적 성장만 나타난다면 그것은 부흥과 무관한 현상일 것이다. 찰스 피니조차도 이와 같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개인의 실제적이고 건강한 영적 변화보다는 전체적이고 가시적인 변화를 먼저 기대하거나, 때로는 그것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사실상 총제적인 부흥 운동

16-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이 식은 후에 침체된 교회의 영적 갱신을 주도한 것이 18세기의 부흥운동이다. 여기서 부흥을 다른, 좀더 쉬운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변화”일 것이다. 부흥은 분명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흥이 가져오는 결과 역시 일종의 변화일 것이다. “부흥이 이 땅에서 가져오는 장대한 결과는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를 철저하게 쇄신시킨다’는 것입니다.”(W.B. 스프레이그, 『참된 영적 부흥』, 서문강 역(서울: 엠마오, 1984), 253.)

종교개혁은 16세기의 일이고 부흥운동은 16세기 후반을 지나 17세기 청교도 운동과 경건주의 운동 이후, 즉 18세기의 일이라 볼 수 있다. 실로 16세기 이전의 부흥을 논하자면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일컫는 르네상스(Renaissance)를 무시할 수 없다. 이 르네상스 역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18세기의 “부흥”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라는 말 앞에는 항상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문예”라는 단어이다. 르네상스가 문예와 깊은 연관을 가진 것이라면 부흥은 신앙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실상 부흥은 르네상스보다는 오히려 종교개혁에 훨씬 가까운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물론 16세기의 종교개혁시대에는 18-19세기에 상용화된 “부흥”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고 요구한 것은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의 개혁은 18-19세기의 부흥과 크게 다르지 않다.

18-19세기에 영어권에서 부흥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들을 여럿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흔히 사용된 단어를 꼽으라면 아마도 awakening과 revival일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다는 의미의 awakening이란 단어가 아마도 종교개혁 시대의 성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현대적 용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잠에서 깨어야 한다, 근신해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등의 문장은 신약, 특히 바울 서신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문장들이다. 이러한 성경적 사상이 18-19세기 부흥의 기초라고 한다면 16세기의 종교개혁 역시 결코 이 부흥과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리라. 다만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만 아니라 당시 사회 전체에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18-19세기의 부흥보다 훨씬 광범위한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부흥 이해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부흥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revival”의 어근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를 단 한 번 사용했는데, 그것은 3권 20장 23절에 나타난다. 여기서 칼빈은 에스겔 14장 14절을 해석하기 위해 그 단어를 “다시 살아나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 라틴어 단어는 reviviscere(=revivisco)라는 동사이다. 이 단어는 “다시 살아나다”를 의미하는 revivere(=revivo)라는 동사에 “~하기 시작하다”를 의미하는 “-sc-”가 삽입된 동사로서 엄밀하게 따지자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두 동사 reviviscere와 revivere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으며 둘 다 “다시 살아나다”, “소생하다”, “활기를 되찾다”, “부흥하다” 등을 의미한다.

칼빈 역시 16세기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신학과 사상 속에서 18-19세기에 유행한 부흥이란 단어를 적용하기에는 어색함이 없지 않다. 하지만 칼빈뿐만 아니라 16세기의 모든 개혁가들이 18-19세기에 나타난 것과 같은 부흥이라는 것에 결코 무관심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그 부흥을 개혁이라는 용어로 이해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만 본다면, 18-19세기의 부흥과 크게 다르지 않다.

16세기 종교개혁을 18-19세기 부흥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면 단연 “각성”(awakening)일 것이다. 각성은 회개를 동반한다. 각성과 회심을 통해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이 18-19세기 부흥운동의 공식일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각성과 회심은 일어났다. 우리는 칼빈의 “갑작스러운 회심”(conversio subita) 이야기를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만날 수 있다. 여기서 “conversio”(콘베르시오)란 라틴어 명사는 “돎, 회전, 바뀜, 전환, 변화” 등을 의미하는 versio라는 단어에 “함께 혹은 철저히”를 의미하는 접두어 “con-”이 결합된 단어로서 “철저하게 바뀜, 완벽한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subita란 단어는 “갑작스러운, 돌발적인, 즉흥적인” 등을 의미하는 형용사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3장 5절에서 “회개”(poenitetia)를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돌이킴”(tota ad Deum conversio)으로 이해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회개는 울부짖는 한 순간의 고백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철저히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의 참된 돌이킴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인데, [돌이킴]이란 하나님에 대한 순전하고도 진지한 두려움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요, 우리 육신과 옛 사람을 죽이는 것과 영을 살리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기독교 강요』 III.3.5: “sic poenitentia definiri poterit, Esse veram ad Deum vitae nostrae conversionem, a sincero serioque Dei timore profectam, quae carnis nostrae veterisque hominis mortificatione, et spiritus vivificatione constet.”)

칼빈이 시편 서문에서 말한 자신의 갑작스러운 회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 회심을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경험했던 것처럼 한 순간에 일어난 급격한 신앙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 속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회심에 대한 칼빈 자신의 견해를 고려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회개에 대한 칼빈의 공식은 회개가 곧 “돌이킴”(conversio)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식은 칼빈이 만들고 제공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로 돌아오라!”(사 44:22; 렘 3:12, 14, 22, 4:1; 욜 2:12; 슥 1:3-4)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식이요, 이 말씀을 전하면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사 55:7; 호 14:1)고 외친 선지자들의 공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이건 자신에게서 떠난 자들을 찾으신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 3:7)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기도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발생하고 진행된다. 그리고 그 돌이킴의 내용은 옛 자아를 죽이는 것과 동시에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즉 돌이킴이란 죽임(mortificatio)의 사건인 동시에 살림(vivificatio)의 사건인데, 이 두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는 장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는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 즉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죄가 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십자가 사건을 거룩한 교환이라 불렀다. 

이성의 시대와 ‘부흥’이라는 단어

성격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종교개혁은 분명 18-19세기의 부흥 사건들과 차이가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시대적 환경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신앙의 자유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국가나 영주나 시의회에 속한 일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종교개혁 시대이다. 즉 이 시대부터 개인이 사회 전체에 속한 하나의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범한 개인의 신앙적 자유가 18-19세기만큼 보장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심이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은 것은 아마도 노예해방운동을 전후한 19세기일 것이다. 18세기에 가장 주목받던 역사적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인권”일 것이다. 16세기 이후 꾸준히 성장해오던 개인에 대한 존중심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질적인 변화를 겪었으며 그 결과 노예해방운동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를 “계몽”(Enlightenment) 시대라 부르는 것은 이 시대부터 신 중심의 신앙적 세계를 본격적으로 벗어나 이성이 역사의 중심적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 중심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를 다른 말로 이성주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부흥”이라는 단어가 교회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주목받았던 이유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유럽 역사 가운데 이성이 신앙의 영역을 벗어나 독립적인 역할을 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회의를 품고 신앙의 자리에서 급격하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합리성이 가장 큰 관심거리였던 시대가 18세기였다. 이 시대의 신학자들과 신앙적인 철학자들은 이성과 부합되지 않는 신앙적 요소, 즉 종교의 비합리적 요소들이 무시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16세기 종교개혁과는 달리 18-19세기 부흥운동은 교회의 신앙이 합리적 이성과 사투를 벌이던 시대의 산물이다. 16세기 서구 사회는 이성보다는 신앙이 지배적이었던 반면에 18-19세기 서구 사회는 신앙보다는 이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즉 16세기는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이 한 말,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라!”(crede, ut intelligas!)와 중세 신학자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이 한 유명한 문구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이 지배하는 시대였지만 18-19세기는 오히려 “믿기 위해서라도 먼저 이해하는 것”(intelligere ut credere)이 요구되는 시대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교개혁 이해

단순하게 비교하자면 16세기는 신앙의 지배하는 시대였던 반면에 18-19세기는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18세기 대표적인 개신교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조차도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 18세기 에드워즈는 분명 16세기 칼빈과는 다른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에 대해 자신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예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에드워즈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의 영의 사역을 구분하는 표지들”(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하나님의 뛰어난 은혜인 열심(zeal)이 때론 교만과 인간적인 열정과 혼합되기 쉽기 때문에 때론 도에 지나친 엄격함으로 비상식적인 일을 발생시킨다고 보았는데, 종교개혁가들의 열심도 결코 예외가 아니며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칼빈이 그런 일을 저지른 대표자인 것처럼 지적한다.

“그와 같이 종교개혁 시대의 저 영광스러운 종교 부흥에서도 열심은 많은 경우에 매우 부당한 엄격함으로 나타났고, 어느 정도의 박해로도 나타났는데, [이런 현상은] 가장 뛰어난 몇몇 종교개혁가들에게서도 나타났으며, 특별히 위대한 칼빈에게서도 그렇다. 또한 활력 넘치는 종교가 꽃을 피운 그 시대에는 신성에 대한 견해가 몇 가지 점에서 달랐던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죄가 난무했다.”(Edward Hickman ed.,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II(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265. 다른 한글번역 참고.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7권. 부흥론』, 양낙흥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05), 315.)

18세기 이성의 시대를 산 에드워즈의 눈에는 16세기 신앙의 시대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그 신앙적 열심을 과도하게 발휘한 것으로 보였다. “열심”에 대한 에드워즈의 판단에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그의 노력이 돋보이는데, 이것은 그가 18세기의 인물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성이 지배하는 18세기의 시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을 보면 종교개혁가들의 열심은 편협하고 지나치며 균형을 상실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16세기의 시대정신을 충분히 고려한 정당한 판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16세기 사회는 신앙이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신앙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믿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신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곧 사회적 범죄행위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에드워즈가 이런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했더라면 아마도 칼빈을 비롯한 여러 종교개혁가들을 자신의 시대정신에 투영하여 평가하는 우(愚)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믿음으로 산 신학자답게 감정(affection)의 문제를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었다. 그는 신앙적 감정이야말로 무미건조한 이성의 철옹성을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균형 잡힌 합리적 이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결코 이성이 제공할 수 없으며 종교만이 제공할 수 있는 신앙적인 감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태동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16세기 칼빈과 18세기 에드워즈가 가진 공통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신학자 모두 “종교”(religion)란 단어를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christianity), “기독교 신앙”(christian faith), “기독교 경건”(christian piety)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에드워즈가 사용한 “종교 부흥”이라는 것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다면 “기독교 부흥”, “신앙 부흥”, 또는 “경건 부흥”이 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16세기 종교개혁을 “영광스러운 종교 부흥”(glorious revival of religion)으로,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를 “활력 넘치는 종교의 만개 시대”(days of flourishing of vital religion)로 정의한다. 즉 그는 종교개혁을 기독교 역사에서 부흥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대로 평가한다. 이런 에드워즈의 시각으로 본다면 18세기의 부흥과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결코 다른 성질의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부흥의 역사이다. 18세기 부흥이라는 관점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을 논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에드워즈의 시각은 굉장히 중요하다.

에드워즈의 말대로 종교개혁은 영광스러운 부흥의 역사이다. 이러한 부흥은 결코 사람이 일으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18세기 에드워즈의 부흥 논리는 19세기 피니의 부흥 논리와 다르다. 이것을 단순 비교한다면 18세기 부흥과 19세기 부흥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에드워즈가 본 18세기의 부흥은 근본적으로 19세기의 부흥보다는 오히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동질의 사건이다. 16세기 종교개혁과 18세기 부흥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부흥 사건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우리 인간은 그 현상의 결과만 경험할 뿐이다.

하지만 19세기 피니 식의 부흥은 분명 이와 다른 성질의 것이다. 피니의 시각에서 본다면 부흥은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것이고 인간이 준비한 만큼 거둘 수 있는 계획된 일의 철저하게 수행할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일 뿐이다. 마치 농부가 얼마나 열심히 계획을 세워서 그 계획대로 씨를 뿌리고 가꾸느냐에 따라 그 수확물이 달라지듯이 부흥의 역사 역시 사람이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피니는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에드워즈의 논리와 확실히 다르다.
(이런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 책 참조. 이안 머리,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서창원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05). 이 책은 피니의 부흥 논리가 가진 문제점들을 잘 분석하고 지적한다.)

한국 교회의 부흥 인식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만연한 단어 “전도”는 오직 하나의 목표, 즉 부흥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혹자는 이 부흥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부흥하기 위해, 즉 교회 성장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전도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부흥을 통해, 교회 성장을 통해 확장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만일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한국교회의 반역자요, 나아가 기독교 자체의 반역자로 낙일 찍힐 것이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이러한 교회성장 논리를 뽑아낼 수 있는 근거가 성경 어디에 있는가? 교회의 수적 성장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공식은 성경 어느 구절에 근거한 것인가? 대부분의 한국 장로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빈과 에드워즈를 내세우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찰스 피니의 부흥 논리로 실리를 채우고 있다. 이 피니 식의 부흥 논리가 한국 교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 초대 교회의 부흥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의미까지도 왜곡하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전도는 결코 부흥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도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 구원의 도를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전도를 통해 교회가 부요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교회의 부요는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한국교회는 21세기인 지금도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하자’는 구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직도 19세기 피니 식의 부흥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세기 부흥과 피니의 부흥 논리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필자가 앞에서 했던 것처럼 단순 비교를 통해 강력한 설득력을 얻고자 할 경우 18세기의 부흥과 19세기의 부흥을 극단적으로 대조할 수는 있다.

18세기 부흥은 19세기 부흥보다는 오히려 16세기 종교개혁에 더 가깝다. 18세기 부흥 사건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주체는 모두 하나님이신 반면에 19세기 피니 식 부흥운동의 주체는 인간이다. 이 둘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이 교회 현장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는 분명 가시적 현상의 종교가 아니다. 성경도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가시적 현상, 즉 결과만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만일 이러한 태도가 소수의 사람들이 우려하는 목소리처럼 인간적인 욕심이 잉태한 결과물이라면 분명 한국 교회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며: 부흥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

이 글은 결코 19세기 부흥운동을 폄훼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다만 피니 식의 부흥 논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그것이 전 교회 역사 속의 건전한 부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와는 대조적으로 18세기의 부흥운동과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이 동질의 역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부흥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하나님의 역사이다. 어디 부흥뿐이겠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모든 일이 그와 같을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8) 이것이 최고의 전도자 바울의 자세이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기를 바란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즉 가시적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고의 기독교 윤리 즉 겸손의 철학이 숨겨 있다. 진정한 부흥은 어느 시대이건 신앙적 겸손과 용기가 함께 만나는 장소에서만 일어난다. 또한 그 두 은사를 함께 소유한 사람을 통해 일어난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18세기 에드워즈가 그러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겸손과 용기를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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