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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5 18:03

승천과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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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문은 필자가 섬기고 있는 한길교회의 주일예배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손재익 목사 

객원기자/ 한길교회




설교본문낭독: 마태복음 28장 20절; 마가복음 16장 19절 
                      (참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6-49문답)
 설교제목: (성찬설교) 승천과 성찬



      서론

     지난 5월 14일 목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승천절”(昇天節, Ascension) 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승천절’이란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서구의 많은 나라들은 오랫동안 ‘승천기념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날을 공휴일로 지키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40일 동안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파하시다가 비로소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죽음 후 3일만의 부활, 그 후 40일 뒤의 승천. 그래서 부활절 이후 40일이 되는 날을 승천절로 지킵니다. 지난 4월 12일을 많은 교회들이 부활절로 지켰습니다. 그러니 그 날로부터 40일째 되는 5월 14일이 승천기념일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지켰다면, 승천기념일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부활만이 아니라 주님의 승천도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절기를 이상하게 지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로 “성탄절-부활절-맥추절-추수감사절” 등을 지키는데, 그러나 제대로 지키려면 “성탄절-부활절-승천절-성령강림절” 등의 순서로 바르게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우리는 특별히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침 오늘은 성찬이 있는 주일이기에 승천과 성찬의 관계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찬을 주님의 죽음과만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성찬은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의 모든 것을 이 성찬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찬은 주님의 죽음 뿐 아니라 주님의 승천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의 승천과 성찬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은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곧 성찬에 함께 하신다.”입니다. 





     본론

     Ⅰ. 성경에서

     승천(昇天, ascension)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6장 19절을 보시면,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승천을 잘 기록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은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1절을 보시면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승천 사실을 기록한 누가는 자신이 쓴 또 다른 책인 사도행전에서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절 이하에 보면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라고 언급한 뒤에 9절에서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해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일 뿐 아니라 부활 후 승천까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유일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의 몸과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지금 현재 땅에 계시지 않으시고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오늘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 오르셨고”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늘에 오르셨고”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몸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하여 분명해 진 것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 올라가심을 분명하게 확증하시기 위하여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임재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하신 말씀에서는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마가복음 16장 19절 말씀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그 말을 하신 것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곧바로 ‘너희’들인 제자들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입니까?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예수님이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난을 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짓을 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거짓을 말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은 하지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범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시지만 죄를 범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분의 신성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듯이 예수님에게는 2개의 구별되는 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 하나의 위격에 2개의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신성)이시면서 사람(인성)이십니다. 신성과 함께 인성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2개의 구별되는 본성을 가지신 예수님. 우리 주님은 그분의 인성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지만, 그분의 신성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약속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Ⅱ. 신앙고백서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49문답의 가르침
     지금까지의 내용을 우리의 신앙고백에서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18주일’은 사도신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늘에 오르셨고”라는 부분, 즉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46문답에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유익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제47-48문답에서 다른 내용을 먼저 다룬 뒤에 제49문답에 와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유익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유익에 대해 설명하기 전 제47-48문답에서는 어떤 내용을 다룹니까? 바로 좀 전에 제가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 본문을 통하여 말씀드린 내용을 그대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제47문답을 보십시오. 

      47문: 그렇다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4) 마 28:20

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누가 봐도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분명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했는데 올라가셨으니 이런 질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기를 

      답: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人性)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의 신성(神性)divinity과 위엄majesty과 은혜grace와 성령Spirit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5) 마 26:11; 요 16:28; 17:11; 행 3:21; 히 8:4   6) 마 28:20; 요 14:16-18; 16:13; 엡 4:8,11   

라고 해서 예수님의 두 본성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48문답에서 두 본성에 관한 내용을 좀 더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들 역시 예수님의 승천과 그분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모순점을 바로 예수님의 두 본성으로 해답을 찾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에 따라 예수님의 함께 계신 약속이 바로 그분의 신성으로 임재하심을 통하여 이 땅 가운데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약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비록 그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로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신적 위격에 2개의 서로 구별되는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이 비록 하늘로 올라가셨으나, 그분의 신성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니, 예수님의 약속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은 지금 오늘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그의 신성으로 우리들의 교회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오히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보다 더 풍성하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신 말씀은 헛되지 않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임재의 방식
     그렇다면, 이렇게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좀 더 공식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1) 교회 공동체
     먼저, 교회 중에 임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자주 부릅니다. 이 교회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아주 중요한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함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면, 교회에 속하지 않고 나 혼자서 집에서 생활한다고 한다면 주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하여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산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여 있으므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소망합니다. 
      2) 성찬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심을 잘 보여주는 것 중에 또 다른 하나,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성찬입니다. 성찬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드러냅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성찬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는 더 나아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먹고 마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가 곧 주님의 몸임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이렇게 성찬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이 땅 가운데서 드러내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찬은 곧 하늘에 계신 몸을 땅에서 체험하는 예식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 몸을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체험하는 예식이 바로 성찬입니다. 
     앞서 설교의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성찬을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과만 결부시킵니다. 그것만을 의미하고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의 죽으심과 함께 그의 부활과 승천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의 몸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썩어 없어진 몸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의 몸을 말입니다. 승천하신 그 분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신령한 떡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요 6:33,51,58). 

     설교의 주제 되새김
     이제 오늘 설교의 주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은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곧 성찬에 함께 하신다.”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한길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늘에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합니다. 드러냅니다. 경험합니다. 온 몸과 영혼으로 느낍니다.
     성찬은 단순히 상징이 아닙니다. 영적 실재입니다. 인성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의 신성으로는 온 세상에 충만하셔서 당신의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며, 그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계심을 성찬을 통해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의 몸인 교회가 다함께 그의 몸을 먹음으로 그 분의 임재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Ⅲ. 교회사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그리고 신조인 요리문답서를 통하여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교회사 속에서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동안 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의 어떤 주제에 대하여 우리가 살펴나가는 순서에 있어서 “성경 - 신앙고백 - 교회사” 라는 순서로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것과 연결됩니다.

      교회사 속 성찬 논쟁
     교회 역사에 보면 성찬과 관련하여 중요한 논쟁이 있습니다. 크게 4가지의 서로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화체(化體)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성찬을 행할 때에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의 본질과 같은 본질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의 본질에 형이상학적 변화가 일어나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substance)로 변하게 된다(trans-)는 견해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임재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루터파의 주장은 공재(共在)설(consubstantiation, 문자적으로 with the substance)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빵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빵과 포도주 안에(in), 그것들과 함께(with), 그리고 그 아래(under),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 한다는 주장입니다.1)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 presence)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견해는 화체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기념설(Symbolic Representation)이라고 하는데,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뿐이라고 봅니다.
     이 모든 견해에 반대하여, 칼뱅실제적 영적 임재설(Real Spiritual Presence)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 곧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 시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그 능력과 권능 가운데 자기의 임재를 보여주시며, 마치 몸으로 계신 것처럼 언제나 자기 백성 중에 계시며, 그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그들 속에 사시며 그들을 지탱시키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활력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주장 중에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칼뱅이 주장한 ‘실제적 영적 임재설’의 주장을 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주장은 예수님의 인성이 성찬 가운데 함께 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분의 승천과 관련하여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인성이 어떻게 성찬 가운데 함께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이 두 주장은 아예 깊이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념설은 왜 틀렸을까요?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분명 성찬을 행할 때에 예수님을 기념하지 않습니까? 다함께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을 보십시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는 말이 24절과 25절에 각각 한 번씩 해서 두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이 구절만 보면 마치 기념설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찬에 있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는 성찬에서 예수님을 기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설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것은 기념하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념설은 여기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을 기념합니다2) 기념설은 예수님의 인성이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마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념설을 넘어 “실제적 영적 임재”를 믿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신성이 성찬 가운데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분명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성찬은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수준을 넘어, 그분의 신성에 함께 참여하는 예식입니다. 비록 그분의 인성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만, 그분의 편만한 신성이 성찬에 함께 하여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실 때에 실제적으로 영적으로 임재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실제적 영적 임재를 믿는 것은 그분의 승천이 그분의 신성마저도 다 올라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성찬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는 주님의 신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시는 구주 예수님을 기념하며 그분의 영적 임재를 체험합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성찬은 죽으신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영광중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땅에도 계신 예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은 단순한 기념의 식사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의 식사입니다. 함께 성찬을 나누는 성도들과의 교제 이전에, 여기에서 당신의 신성으로 임재하신 주님과의 교제의 식사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지금 여기 계시는 주님과 교제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께서 지금 막 승천하신 것처럼 그리고 잠시 후에 곧 다시 오실 것처럼 임하되 또한 동시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 논쟁의 본질
     그렇기에 종교개혁 당시에 있었던 성찬에 관한 논쟁은 겉으로 볼 때에는 성찬에 관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성찬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주님의 두 본성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찬에 임하시느냐?” 하는 문제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과연 어디에 계시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인성이 마치 지상에서도 임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반면, 쯔빙글리의 주장은 그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여, 예수님의 인성이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잘 강조하였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부분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칼뱅은 예수님의 인성은 편재하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늘에 계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또 다른 본성인 신성이 성찬에 함께 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가 성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의 승천과 성찬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 주님의 승천과 성찬에 대해 함께 살피는 것은 매우 성경적일 뿐 아니라 신학적이며, 나아가 교회사적 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성찬과는 연결시키면서 정작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승천을 성찬과 연관 짓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승천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승천과 성찬을 연관시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승천에 관하여 제46문답에서부터 제49문답에까지 총4개의 문답에서 다루고 있으니, 주님의 부활에 관한 부분은 제45문답 단 하나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3)



     Ⅳ. 적용
     사랑하는 한길교회 성도 여러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당신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교회로 하여금 당신의 임재를 기억케 하는 성찬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일 때에 성찬을 행함으로 하늘에 계신 주님의 몸이 여기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신성으로서의 주님을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하늘에 계십니다.4) 그의 인성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47문답). 그러나 그의 몸인 교회가 다함께 그의 몸을 먹음으로 그 분의 임재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인성의 편재성(Ubiquity)이 아니라 신성의 편재성이 성찬에 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은 우리가 매주일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통하여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 즉 신적인 본성(Divine Nature)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교회에 함께 하시며, 주님의 만찬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말씀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성찬을 행함으로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확인합니다. 그 약속이 절대로 거짓이 아님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셨지만 그의 제자들과 이 땅 위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역사의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찬은 주님의 고난을 물론이요 부활과 승천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재림까지도 함께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찬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단순히 성찬에 관한 논쟁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논쟁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성찬에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성찬이 진정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살찌우는 영적 음식임을 기억함으로 우리에게 실질적인 유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일입니다. 이 날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주님의 부활 뿐 아니라 주님의 승천하심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주일에 우리 모두가 다함께 성찬에 참여함으로 교회와 성찬 가운데 충만하시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을 경험하면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입시다. 
     우리는 그 몸을 생각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는 그저 일반적으로 우리가 식사시간에 먹는 떡이나 세상 사람들이 마시는 포도주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그 몸을 생각하면서 먹고 마실 때에 떡과 포도주는 이 땅에서 누리는 하늘의 몸이 될 것입니다. 승천하셨으나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그 주님을 이 성찬을 통하여 맛봅시다. 아멘.



설교 질문
1. 오늘 설교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2. 마가복음 16장 19절; 누가복음 24장 51절; 사도행전 1장 9절 말씀에 있는 내용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3. 앞의 질문에 나온 내용과 마태복음 28장 20절의 모순은 무엇이며, 그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4.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5. 교회 역사에 있었던 성찬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을 정리해 봅시다.
6. 승천과 성찬의 관계를 정리해 봅시다.
7. 오늘 우리가 성찬에 임할 때에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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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9장 7절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0문답은 “안에 함께, 혹은 아래에in, with, or und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2) 유해무, 『개혁교의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521.
3) 이는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파와 칼뱅파의 예수님의 위격과 관련한 논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Fred H. Klooster, A Might Comfort: The Christian Faith according to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1990), 이승구 역,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서울: 토라, 2004 개정역), 102. 이와 관련해 자세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Fred H. Klooster, Our Only Comfort: A Comprehensive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vol 1,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2001), 592-5. 
4) 칼뱅은 institutes, Ⅳ. xvii. 12. 16-18. 26-31에서 공재설을 비판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은 강하게 비판하면서도(HC 78, 80문답) 형제 교회의 가르침인 루터의 공재설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47,48,76문답에서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 인성의 편재론은 명백히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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