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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설교는 세월호 참사 관련, 2014년 4월 27일 명덕교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 편집자


장희종 목사
대구 명덕교회 담임목사
개혁정론 자문위원

본문: 눅 24:17-20, 31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11번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님 자신이 살아났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요, 그의 구원의 사역을 온 세상에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슬픔에 잠겨있는 사랑하는 자들을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사건에도 이런 요소들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침몰한 세월호에 갇혀 비명으로 죽어가는 자식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선진국이라는 자만심이 있습니다. 반도체,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 산업이 세계 선두권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금번 사태를 야기한 조선사업과 해운사업 역시 세계 1위였고, 전자는 주요 국제비교지표1)에서 장기간 세계 1위였으며, 속도의 상징인 통합전자정부지수와 인구 백만 명당 인터넷 가입건수도 세계 1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박한 인간 위기 상황이 도래하자 모두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안전지침, 초기연락, 위기대응, 인명탈출안내, 구조작업, 정부의 합동대처는 리더십과 책임감, 신속성과 첨단성, 통합지휘체계의 어느 것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우왕좌왕하는 상태에서 배가 가라앉았고, 생명들이 죽어가는 실제상황을 눈뜨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먼 바다도 아닌 우리의 앞 바다에서 죽어가는 저들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우리는 저들을 도와 줄 수 없는 우리의 무능, 그로인해 오는 슬픔과 비통함을 삭힐 길이 없습니다. 세계 경제 10대 강국, IT 강국이라고 자랑하던 우리의 실상이 온 세상에 낱낱이 발가벗겨지고 있습니다. 자식과 가족을 잃을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온 국민이 집단 죄책감, 집단 우울증, 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성도들이여! 부활하신 주님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걷는 자들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온 국민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분노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특별히 찾아와 주실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오늘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희생자 가족들에게와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셔서 충격적인 슬픔과 절망감에서 새로운 소망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슬픈 자에게 찾아오신 부활의 주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누구에게 찾아오셨으며 어떻게 치료하시는지 살펴봅시다. 한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한 낯선 사람이 나타나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잡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 때문에 나누던 불행한 이야기를 중단하고 침묵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그들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질문하며 참견합니다. 질문을 받은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가던 길을 중단하고 머물러 섰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13절에는 “그날에 그들 중 둘이”라고 했는데 18절에 보니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다른 한 명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19:25; 막15:40)로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함께 동행할 뿐 아니라 함께 한 집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과 십자가에 달려서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자들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고 두려움과 슬픔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자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글로바 부부는 너무 슬프고 충격이 컸기 때문에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 낯선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참견하지 말라는 투로,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절)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입니다. 그 낯선 사람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19절). 글로바는 슬픔을 안겨준 사건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19-21절). “나사렛 예수의 일인데 그분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분을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판결 받도록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할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우리는 다시 그분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이런 슬프고 두려운 일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이들이 가진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끔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별의 슬픔을 간직한 것입니다. 민족의 해방에 대한 꿈을 꾸어오다가 좌절되어 버린 절망감을 간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권력에 대한 분노와 힘없는 백성으로서의 한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자들입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우리 모두는 지금 이런 참담하고 슬픈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비명소리를 들으면서도 구해주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 때문에 너무 분하고 슬픕니다. 거듭되는 재난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대처할 준비를 하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더욱 억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과 탐욕과 무능과 어리석음이 우리의 자식들을 죽였다고 하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스스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스스로의 생각과 싸워야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슬픔을 안은 자에게 찾아와 주신 사실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 끔찍한 십자가 처형의 자리에 있었던 여인들에게 먼저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요19:25, 20:16-17).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과 욥은 끝까지 하나님 신뢰의 끈을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단련하시는 데는 반드시 기한이 있고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련 이후에는 순금같이 찬란한 한 때가 주어진다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주의 진단 

둘째, 이제 이들의 마음을 슬픔과 절망이 지배하게 된 원인을 봅시다. 22-24절을 보면, 이들은 함께 하던 여자들 때문에 더욱 슬픔이 가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여자들이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 갔는데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을 봤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서 확인했는데 여자들의 말대로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대화를 통해서 이들의 슬픔과 절망을 가중시킨 원인을 밝혀 주셨습니다. 첫째는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하면서 그들은 생각이 경직되어 버린 것입니다. 충격으로 받은 선입견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그 충격에서 실망으로, 실망에서 슬픔으로, 슬픔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우울증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상태에 빠진 자는 슬퍼하고 절망해야 할 이유가 많습니다. 어떤 다른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가 왜 절망해야 하는지 그 이유만 붙잡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오직 자기가 절망해야 하는 이유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글로바의 마음은 무엇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악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훼손하고 시체까지 훔쳐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장례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에는 마지막 소망도, 살아갈 의욕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오직 슬픔과 절망만이 극대화되고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본대로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가능성도 받아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빈 무덤”,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시체는 없더라” 이런 확실한 정보를 접하면서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슬픔과 절망을 더욱 가중시키는 이유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기쁜 소식인지 슬픈 소식인지 분간을 못한 것입니다. 모든 사실을 오직 자기 편견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중병입니다. 이런 정신 상태는 치명적인 중병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기 전에 죽으실 뿐 아니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거듭 예고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언의 말씀에 비추어 빈 무덤을 생각했더라면 그들은 슬퍼할 것이 아니라 흥분하며 할렐루야 함성을 지르고 춤이라도 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당황하고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슬픔과 절망의 근본 원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밝혀내신 것입니다.

둘째, 이들은 성경을 너무 몰랐습니다. 25절에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속사역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예수의 고난이 필요했음을 성경을 통해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채워주신 것이다. 우리도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에 고통과 좌절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성경을 모르면 엉뚱하게 상처받고 슬퍼하며 고통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무지했기 때문에 슬픔과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성경에 밝혀진 자기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슬픔과 좌절을 겪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밝혀주신 이들의 슬픔과 절망의 원인은 유연해야 할 생각이 경직되어 버린 것이요,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슬퍼하고, 고통을 당하고, 좌절의 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처방

셋째, 이제 예수님의 진단에 대한 처방을 봅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슬픔 중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와 관계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17절에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예수님의 접근에 글로바는 무례하게 반응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절).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의 언어는 언제나 비평적이고, 시비조입니다. 예수님은 집요하게 그 마음의 상처를 자기 입으로 말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아셨기 때문에 질문을 계속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들을 도우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의 문제를 정직하게 의사이신 예수님께 드러내 보일 때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슬픔과 고통 중에 절망하고 있는 분은 주님 앞에 나와 입을 여십시오. 당신의 마음의 문제를 정직하게 쏟아 내십시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당신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풀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하는 슬픔과 고통이 성경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구속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처형되자 가졌던 희망이 깨지고 슬픔과 좌절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성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민족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의미에서의 구속자가 아닙니다. 민족적인 해방보다 더 큰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해 주실 구속자이십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풀어주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거기에 보면 1-9절까지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던 여호와의 종이 10-12절에서는 살아나서 다스리는 예언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풀어주신 성경말씀을 들으면서 성경이 이해되고 마음이 점점 더 흥분되고 뜨거워지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여기에 주목해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문제들이 성경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만나게 될 모든 문제의 근원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고통스런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 뜻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듣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의 바람이 불 때는 먼저 성경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버티고 설 반석이 있고 피할 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29-31절에 보면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라고 합니다. 그들은 엠마오에 가까이 왔을 때 이 낯선 분께 함께 유하자고 강권했습니다(29절). 이들은 이 낯선 분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대접하기를 귀찮게 여기고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면 얼마나 큰 손실이었겠습니까! 이들은 준비한 식탁에 그분을 모시고 축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30-31). 예수님은 떡을 받아들고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분이 예수님인줄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여! 예수님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신비한 방식으로 자신의 임재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들은 각기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경험했음을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적인 슬픔과 고통 중에, 어떤 사람은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은 예배 중에, 기도 중에,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에게 고통의 문제가 치유된 것입니다.

주님 처방의 결과 

이제 끝으로 주님의 치료 결과를 봅시다. 첫째로,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31절)라고 했습니다. 참 진리를 진리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어둠이 걷히고 슬픔이 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보인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가 보인 것입니다. 영적 지성이 정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라고 했습니다. 식어져 버린 마음에 온기가 생기게 되니 새 생명의 맥박이 뛰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새로운 힘이 솟는 것입니다. 정열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시들어지고 메말랐던 영적 정서가 정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셋째로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33절)라고 했습니다. 한밤중입니다. 당시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어나 두려움 없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29절) 했을 때 주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들어와 유해 주신 것입니다. 병들어 나약해졌던 의지가 정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인격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 하더라”(35절) 라고 했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절망 중에 있던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이 평안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길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죽음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예수님 부활을 알리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동일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우리도 고침을 받고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아픔을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정직하게 아뢰어야 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입을 열어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마음의 아픔을 입을 열어 말할 때 고침 받고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새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경은 생명의 젖이요, 양식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소성시키며”,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해 주닙니다. 그래서 그 값은 순금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그 맛은 송이꿀보다 더 단것입니다(시19:7-10). 부활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생의 길이 끝날 때까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굳게 붙들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1) 수주량, 수출액, 수주 선박당평균 표준화물선 환산톤수에서(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박명림2014.4.2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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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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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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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