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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명예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비방이 큰 문제가 됩니다. 십계명에 9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잘못된 풍문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되는 사회였기에 그런 계명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일본사회에서는 명예자살이란 것이 유행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무라이 전통에서 온 것이기도 합니다. 낭인들이 싸우다가 상대방에게 지면 그 수치심 때문에 자결했습니다. 그런 전통이 남아 있어서 일본의 기업가들이 사업에 실패하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남들로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비방을 당하면 참을 수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비방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왜 남을 비방하겠습니까? 비방의 심리학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보였기 때문에 비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보기에 명백하게 잘못한 것이 보였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나보다 잘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소위 말해서 뜨는 사람이 있으면 왜 저렇게 뜨나, 터무니없는 것인데 하면서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생겨서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비방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덩달아 욕하기 시작합니다. 남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그 비방에 가담하기 시작합니다. 비방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큰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비방 받았다는 말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의 비방거리가 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비방을 받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시인이 세 가지로 인해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 비방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성전을 향한 열심 때문에 사람의 비방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셋째는 금식하고 애통해 하는 것 때문에 비방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1. 주의 이름 때문에 받은 비방

성도들이 받는 첫 번째 비방을 보겠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시인이 사람들의 비방거리가 된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손해나 피해를 끼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인이 비방을 듣고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입에 달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못 봐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렇게 큰 비방거리입니까?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툭하면 자신은 하나님 때문에 핍박 받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있으니까 원래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방이 일차적으로 다윗이 듣고 있는 비방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이 비방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은 참 황당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양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집에서 사환이 와서 부친이 부른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집에 가 보니 이스라엘의 그 유명한 제사장 겸 선지자 사무엘이 와 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 형들이 일제히 자기를 째려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무엘이 다짜고짜 자기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는 휑하니 떠나 버립니다. 다윗은 그 기름부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택하셔서 왕으로 기름 부으신 것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형들의 차가운 시선이 목덜미에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의 애처로운 눈길이 마음에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때부터 다윗은 이미 가족에게서 낯선 존재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안 왕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애매하게 비방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부모와 형들도 다윗 때문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버젓이 있는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일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비방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신 직분 때문에 비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었으면 억울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직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은 할 수만 있으면 무르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할 수만 있으면 물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택하셨다고 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가보다 하고 있는데 왕 사울이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이 세상의 비난거리가 됩니다. 믿는 이들이 선택 이야기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웃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인 자신을 선택하셨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선택하셨다면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것이냐?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선택했다는 말이냐?’ 라고 묻습니다. 우리도 모르지요. 우리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섰습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난거리가 됩니다.

믿는 사람은 세상의 비방과 비난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걸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만큼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만큼 안심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분에게 걸어 놓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다니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담스럽습니다. 행동의 제약이 따릅니다. 교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때문에 비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비방거리가 됩니다. 별종의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지난 주일 살펴보았듯이 가족들조차도 낯선 사람 취급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2. 성전 사랑 때문에 받은 비방

이제 성도들이 받는 두 번째 비방을 살펴보겠습니다. 9절에 나와 있듯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9절에 삼켜진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확한 표현입니다. 자신이 무엇에 대해 인간적인 열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에 삼켜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됩니다. 조롱거리가 됩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금방 성전을 위하는 열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언약궤를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던 예루살렘에 매어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처음에 그 언약궤를 레위 제사장들이 어깨에 매고 올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큰 낭패를 당합니다. 이후에 하나님의 규례를 깨닫고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매어 올리면서 왕의 체면과 위신을 다 내려놓고는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국의 가까이 찾아오신다고 생각하니 그 기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고깝게 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자신의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갈이었습니다. 미갈이 자신을 고깝게 보았다는 것을 알고는 다윗이 그녀의 태를 저주합니다. 그래서 미갈은 자녀를 생산할 수 없게 됩니다.

시편 84편을 보면 다윗의 이 놀라운 열성을 이어받은 신자들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새가 성전에 둥지를 터는 것을 보고는 참새가 참 부럽다고 말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왕궁입니다. 이것은 아는 성도는 성전에서 하루 머무는 것을 세상 그 어떤 영광의 장소에서 평생 머무는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다고 한 이 애절한 고백은 바벨론 포로생활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었습니다. 예배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귀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자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성전 짓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집을 짓는 일에 급급합니다. 학개 선지자가 바로 이런 백성들을 향해 성전을 지으라고 독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는구나. 성전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들은 판벽으로 된 집에 살고 있느냐?” 학개 선지자의 직설적인 독려와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적인 메시지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 짓는 일을 시작합니다. 방해하는 무리들이 일어납니다. 안팎으로 일어납니다. 안으로는 귀족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등골을 휘게 만듭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짭니다. 밖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이 성전건축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하는 것이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를 반역하는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려고 할 때도 대적들이 일어납니다. 그 대적들이 조롱합니다.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을 위한 열심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성전을 위한 온전한 열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은 성전에서 끊임없이 제사를 드리면서도 정작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켜 버렸다’고 한 이 고백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고는,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분노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성전 뜰에서 내어 쫓으십니다. 장사치들이 차지하고 있던 뜰은 이방인의 뜰이었을 것입니다. 그 장사치들은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는 것을 보고는 바로 이 시편 69편 9절을 떠올렸습니다. 요한복음 2장 17절에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제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읊조리던 시편 69편 9절 말씀을 진정으로 노래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때에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깊이를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셨다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성전 자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어 쫓으신 것은 이제 예수님이 성전을 대신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의 패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는 고소를 당합니다.

3. 금식과 애통으로 인해 받은 비방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듣는 비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욕을 듣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건행위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엎드린 것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절도 보십시오.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시인은 자신을 포함하여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한 곤란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합니다. 자신을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일한 자리에 세우고는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이 그의 조상들과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고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금식하는데,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엎드렸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욕을 합니다. 공격거리로 삼습니다. 하나님께 바짝 엎드린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우선 그들이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겪은 일 말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예가 되어서 생활하는 유대인들이 금식하고 통곡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서 웃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울고 불고 징징 짜 보아도 소용없다. 우리들의 수호신이 너희들의 수호신을 짓밟아 버렸는데 그 수호신에게 빌어본들 응답하겠냐? 우리 수호신의 발가락이나 핥아라” 라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의 경건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조롱이 교회 내에서 벌어진 조롱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12절을 보십시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는 이스라엘 내로 국한시켜 보면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장로들은 성문이 열리는 시간이면 나가서 성문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성문에 앉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송사를 듣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곳으로 나와서 자기들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 송사합니다. 장로들은 그 문제를 듣고는 시시비비를 가려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문에 앉은 이들이 하나님을 소망하는 시인을 비난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직분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성문에 앉은 자가 독주에 취한 무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직분자가 성령에 충만하지 못하고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설움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경건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래 봐도 소용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 혼자 잘났냐? 외식하지 말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당한 욕과 조롱은 그대로 예수님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세우신 직분자들이 아닙니까? 유대의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을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했다고 몰아갑니다. 그들이 사주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자 예수님을 따르던 민중들이 한 순간에 돌변하여 소리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태복음 27장 41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합세하여 조롱합니다. 민중들이 자기들 편으로 돌아섰다고 확신하고는 소리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남을 구원한다고 나대지 말고 너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너나 구원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받은 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는 것마다 사람들이 일일이 물고 늘어지면서 온갖 욕을 듣는 시인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명예가 가장 중요한 사회에서 이 시인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 시편은 다윗 개인이 받은 조롱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후에 이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한 욕, 특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조롱과 비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약시대라고 예외겠습니까? 교회는 늘 세상의 조롱과 비방거리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불경건한 자들의 술안주감입니다. 어쨌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자고 해 보십시오.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요구를 결코 충족시켜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즘에는 믿는 사람들이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믿는 사람들을 향한 요구가 한없이 낮아져서 우리가 편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성 때문에 조롱거리가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교회 간다고 하면, 교회 일이 있어서 조금 일찍 퇴근해야 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도대체 뭘 잘 보이려고 저렇게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하도 교인들은 교회에 자주 불러 모았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주의 집을 향하는 열성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향한 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한번이라도 확연하게 나타났으면 하는 갈망을 말합니다. 그 갈망이 다름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갈망이었습니다. 게다가 신자는 애통해하는 자들이기에 세상은 밥맛 없다고 생각하면서 조롱합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온갖 욕을 듣지만 13절 이하처럼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를 향해 등을 돌리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반겨 맞아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우리 주님이 바로 그 모든 비방과 조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열하게 싸우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시편이 예수님의 시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큰 투쟁이었습니다. 욕을 욕으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신 가장 큰 사랑의 투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방과 조롱거리가 되셨던 바로 그 분을 이 성찬의 상에서 높일 것입니다. 그 온갖 비방과 수치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을 보십시오. 어린이를 위한 질문 3번 문장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욕)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주의 이름으로 인해, 주의 교회로 인해, 경건한 삶으로 인해 비방 받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욕을 들을 때에, 도무지 참을 수 없다 싶을 때 한번 크게 쉼 호흡을 하고 침을 꿀꺽 삼킨 후에 그것을 기도로 올려 드릴 때, 그때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사람들이 비방하게 되는 심리에 관해 말해 봅시다.
2. 다윗이 받은 비방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말해 봅시다.
3. 구약 성도들의 성전사랑의 예를 들어 보세요.
4. 예수님의 성전사랑에 관해 말해 보세요.
5. 신자의 금식을 조롱하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조롱을 말해 봅시다.
7. 욕을 들으신 주님을 기리는 성찬의 은혜를 삶에 적용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세상은 하나님의 선택을 비난한다, 맞습니까?
2. 교회에 대한 열심이 지나친 것도 비난받을 일이다, 맞습니까?  
3. 그리스도와 함께 (   )을 들을 때 하나님의 (     )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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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교회가 흔히 묵상하는 시편이 시편 22편입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시면서 내내 묵상하셨던 시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
    Date2014.04.29 By개혁정론 Views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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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공적 금식과 공적 기도를 선포하자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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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