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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최근 강영안 교수가 [읽는다는 것](IVP)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책 출간과 더불어 한겨레 신문 종교전문 조현 기자와의 인터뷰가 실렸다(관련기사: http://hani.co.kr/arti/well/people/948620.html?_fr=fb#cb). 
하지만, 원래 작성했던 답변이 많이 누락이 되었다. 이에 본보는 조현기자와 강영안교수의 허락을 받아 원본을 싣기로 했다. 이 글은 인터뷰 전문이다. - 편집장 주


 

 

 

조현 기자: <읽는다는 것>에서 ‘자의적으로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일, 기복적인 잘못된 성경 해석, 부주의한 오독과 의도적 왜곡 등 성경 텍스트에 대한 폭력이 한국 교회에서 빈번히 나타나며 이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한다고 했는데, 한국 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오독되거나 왜곡되거나 남용되는 성경 구절은 어떤 것이고, 그 구절들의 본의는 무엇인가?

 

강영안 교수: 오독이나 왜곡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는 구절이 금방 떠오른다. 이 구절들이 모두 기복적인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

   모두 이야기 할 수 없으니 세 번째 인용한 구절만 보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구절은 자식과 재산을 잃은 욥을 보고 욥의 세 친구 가운데 빌닷이 한 말이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하나님은 정의를 실현하고 공의를 세우는 분이니 죄 없이 고난을 당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니 만일 네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네 자식들이 죄를 지었다. 하나님을 찾고 그 분에게 기도하면 네가 평안해질 것이고 시작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끝은 잘 될 것이다.” 빌닷의 말은 지혜로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욥의 고난과 관련해서는 잘못된 진단이고, 잘못된 처방이다. 욥이 받은 고난은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은 고난이 아니다. 하나님이 천상에서 ‘대적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사탄’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여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이 없느니라”고 한 말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욥기 마지막 부분을 보라. 욥은 고난 가운데 친구들과 논쟁하면서 자신이 미처 깨닫지도 못한 일,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에 관해서 마치 아는 척 말한 것에 대하여 회개한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 가운데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와 네 친구 두 사람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기 42:7) 하나님은 욥이 옳고 욥의 세 친구가 옳지 못했다고 판단하신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은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말로 흔히 쓰이지만 욥기의 의도와 전체 내용을 볼 때는 그런 방식으로 사용될 수 없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빌닷조차 이 말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단순히 경건한 마음으로 내뱉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현 기자: 특히 한국 개신교만큼 한국의 분단, 남남갈등 등의 국면에서 보수 진보로 나뉘어 첨예하게 맞서는 종교도 없다. 왜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성경을 읽는데, 극적인 차이를 빚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강영안 교수: 한국 개신교의 주류는 신앙적으로 보수에 속한다. 대부분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이른바 ‘복음주의’를 표방한다. 신앙이 보수이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에 관한 의식 면에서 보수일 가능성은 높다. 그렇지만 개신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반드시 보수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젊은이들이나 여성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다. 남북 분단을 보는 관점이나 남남 갈등에서 보수와 진보는 연령이나 교회 직분, 부의 정도와 사회 계층, 출신 지역이 훨씬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젊으면 젊을수록, 교회에서 아무런 직분이 없을수록, 소득이 낮을수록, 수도권 지역에 거주할 수록 진보적일 확률이 높은 반면, 연령이 높을 수록,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을수록, 소득이 많을수록 보수일 확률이 높다.

   오래 전 기윤실에서 한국기독교인 정치 의식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사회 변화에 관한 태도에서 교회 직분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보였다. 전도사들은 대부분 사회 변화를 적극적으로 바라는 반면, 장로들은 변화보다는 안정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소득을 비교하는 항목이 있었다. 전도사들이 가장 적었고 목사들이 중간이고 장로들은 월 소득이 훨씬 높았다. 소득뿐만 아니라 연령도 여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전도사는 대부분 20대 말이거나 30대초이고, 목사는 40대나 50대, 장로들은 대부분 50대거나 60대에 속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 읽기가, 나아가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현실의 삶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교회 생활에 열심일수록, 직분이 높을수록, 종교적인 일에 깊이 개입할수록 실제로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책에서 레슬리 뉴비긴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을 외우고, 인용할 뿐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지금 생각해도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을 만나 이 이야기를 들은 지가 35년이 넘었는데 지금 다시 새겨보니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가치를 평화에 둔다. 구원이 다름 아니라 평화, 곧 샬롬의 상태이다. 성경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를 꿈꾼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원하시는 관계가 샬롬이다. 정의 없이 평화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평화를 위해 정의를 이야기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말하는 정의가 우리말로는 ‘칭의’로 번역된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신다는 뜻이다. 의롭게 보심으로, 곧 정의롭다 생각하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가 세워진다. 이 관계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지구로 확대되어야 할 관계이다. 이 속에는 남녀의 차별, 인종의 차별, 빈부의 차별, 계층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성경이 담고 있는 이런 근본적인 가르침을 무시하고 구원을 개인 구원으로 한정해 보기 때문에 사회 의식이 보수에 머물게 된다고 생각한다.

 

 

조현 기자: 한국의 복음주의 교단의 강단을 지배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자신의 정치 사회적 지향에 따라 성경 구절을 유리한 부분만 발췌해서 사회적 소수와 약자를 공격하고, 배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경적으로 바른 설교와 그렇지 않은 설교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강영안 교수: 결국은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문제다. 한국 교회는 성경 읽기에 어느 나라 교회보다 열심이다. 성경 필사도 하고 한 주간에 성경 전체를 읽는 통독 모임도 한다. 성경에 집중하는 특별한 경험임은 틀림없다. 문제는 이렇게 한다고 해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느냐, 억울하게 하지 않느냐를 중시한다. 억울하게 하는 일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것이다.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되는 부류로 성경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언급한다. 고아와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피해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며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빈곤 때문에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성경은 나그네도 언급한다. 그런데 우리는 나그네를 그냥 길 떠나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는 사람으로 오해한다. 낭만적인 생각이 이 속에 들어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 할 때 이해하는 나그네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는 이방인, 외국인이다. 하나님은 이런 나그네를 돌보고 그들을 수용하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외국인은 쉽게 사회적 약자, 사회적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명기 10:19), 스가랴 선지자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스가랴 7:10)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도 나그네와 관련된 언급들이 많이 있다. 이 가운데 아마도 대표적인 경우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예수께서 심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는 구절이 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는 일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돌보는 일이다. 이들을 일컬어 성경은 ‘의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저주받은 자들’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성경은 고아, 과부, 가난한 사람, 나그네가 억울하지 않도록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억울함을 당할 때 억울함을 풀어주라고 이야기한다. 오늘의 용어로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그들이 사람 대접 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해 주라는 말이다.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한 교회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이 아니다.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영접하고 돌보는 일은 곧 예수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과 같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몇 년 전 우리나라를 찾아온 예멘 난민들의 난민 지위 부여에 일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했는가?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결과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제대로 설교가 될 수 없다.

 

 

조현 기자: 한국 기독교 일부 목회자들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탐욕으로 인한 비리와 세습, 성폭력, 언어폭력 등 도덕성 문제가 한국교회의 위기로 이어진다. 성경읽기와 인격적 성숙이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을 긋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강영안 교수: 안타까운 일이다. 종교의 타락은 역사상에 언제나 있었다. 어떤 종교이든 포교 초기에는 타락을 찾아볼 수 없다. 타락은 한 종교의 말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우리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커다란 변곡점이 한국 전쟁이라 생각한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 시기에 기독교는 지금, 여기에서 용기를 가지고 생존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와 더불어 반공 사상이 기독교와 밀접한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70년대에 들어와서 기독교는 단순한 생존에 그치지 않고 생존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도록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부추겨 주는 데도 성공했다. 경제 개발과 더불어 도시 확장이 일어났고 대형 교회와 중형 교회도 들어섰다. 생존과 경쟁의 모델이 이 가운데 작동했다. 이 가운데 목회자 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탁월한 경영자 모형이 자리 잡았다.

   오래 전 경험이다. 암스테르담에 한국 목사들이 스물다섯 분 오셨다. 한인 교회에서 같이 예배를 드렸다. 암스테르담 한인 교회 교인들은 그곳 상사에 파견된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교회에 익숙한 분들이 아니었다. 많은 목사님들을 한꺼번에, 한 자리에 만난 교인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목사님 같은 분은 안 보이네요. 모두 사업가 같아요!” 가톨릭교회나 불교에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수행자들이 있다. 개신교에는 이런 전통이 없다. 성과를 내는 데 훨씬 더 익숙해 있다. 그러는 사이에 신앙생활은 종교 생활에 한정되고, 종교 생활이 곧 신앙생활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종교는 삶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종교 생활에는 열심이나 실제 삶에서는 악행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오늘 한국 교회가 귀 기울여야 한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적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5-17)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같은 내용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종교 생활을 넘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행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이다. 종교가 ‘업’이 되어 버리면 이 가치는 무시된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나 현실적으로는 무신론자가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을 오늘 우리는 목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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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기자: 이 책에서 교수님은 자전거 타기의 비유와 야고보서의 ‘거울’ 말씀 등을 통해 행함이 없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며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에 따라 믿음만 강조하며, 도덕성이나 덕행이나 실천, 사회정의를 무시하는 경향이 복음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어떤 괴리가 이런 현상을 가져왔다고 보는가?

 

강영안 교수: 이신칭의는 16세기 교회 개혁 운동의 중요한 기치(旗幟)였다. 선행을 통하여, 내가 한 일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신칭의는 심각한 오해를 자아낸 교리가 되었다.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천당간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은혜가 무엇인가? 입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마음으로, ‘옳다’고, ‘그렇다’고 승인하는 것인가?

   교회 개혁에서 중요한 루터와 칼빈을 읽어보면 우리의 이해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루터는 믿음이 가진 효력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가 믿음으로 인해 죄인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의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관계가 평화로운 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이다. 둘째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는 의롭게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믿음으로 삶 속에서 선한 삶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롭게 됨에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통해 실제로 선한 일을 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한국 교회에서 하고 있는 가르침을 보면 첫 단계에서 멈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칼빈은 구원의 의미를 칭의에 한정하지 않는다. 구원 속에 성화도 포함시킨다. 칭의와 성화를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중 은혜’(duplex gratia, double grace)라고 부른다.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의 회복에 있다. 이 둘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동시에 시작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말로는 성화를 거론하지만 구원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니 그냥 열심히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줄 안다. 잘못되었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삶을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소망과 사랑의 삶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개신교에서 중요한 루터나 칼빈, 요한 웨슬리는 다같이 이것을 가르쳤다. 대부분의 우리 한국 개신교 전통이 이들의 가르침에서 나왔지만 이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조차 사실은 깊이 공부하지 않았다. 루터나 칼빈, 웨슬리는 그들의 사역에서 누구 못지 않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불의한 제도를 개선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영혼 구원만 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혼은 몸으로 사는 우리의 삶의 전체와 너무나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현 기자: 성경은 성경이고, 예수는 예수이고, 그냥 신으로 경배하고 기도할 대상이지 내가 본받고 따를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보편화된 것은 진정한 신심보다는 결국 욕망의 승리, 즉 맘몬의 승리를 말해주는 징표는 아닌가. 자기에게서 찾는다고 한 주희의 반구제기가 성경읽기에서 잘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강영안 교수: 성경은 성경, 예수는 예수로 보는 것은 기독교가 전형적인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징표이다. 기독교도 분명히 종교이다. 그러나 종교를 초월하려는 몸부림이 기독교 안에는 언제나 있었다. 사람을 ‘종교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다. 기독교는 만물의 근원이고 살아있는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지향한다.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개인이나 공동체가 그로 인해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자유롭지 않으면 참됨(진리, 진실)을 추구하고 누릴 수 없고, 자유롭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진실과 진리가 없이는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이는 정의도 없다. 정의가 없이는 평화도 없다. 그러므로 자유가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는가? 무지가 원인일 수 있고, 욕심이 원인일 수 있다.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분노와 시기와 질투도 원인일 수 있다. 종교마다 이러한 현실을 경험한다. 벗어나는 길은 다르다. 기독교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무엇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가?

   기독교는 ‘죄’를 이야기한다. 죄가 무엇인가? 존재와 삶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와 ‘소외’가 죄의 본질이다. 이로 인해 죄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과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분리와 소외, 단절을 가져오는 ‘행위’요, ‘힘’이며, ‘상태’이다. 삶의 근원과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소통이 부재하기에 사람은 피조 세계와 자신의 욕망에 얽매이게 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것을 극복하여 무엇보다도 존재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과 만물을 다시 연결시켜 화해와 평화를 누리게 한다. 이 결과로 얻는 삶의 상태가 죄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주변 환경을 돌보는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이다. 자유는 결국 형제 자매와 이웃을 섬기기 위한 자유이다.

   이 자유를 누리고 자유 안에서 살아가려면 성경을 그냥 남의 책 읽듯이 읽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 낸 책에서 주희 이야기를 한 까닭은 책을 읽을 때 언제나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읽으라는 그의 충고 때문이다. 돌이켜 자기에게서 모든 것을 찾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삶과 분리된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베푸시는 자유의 이야기, 해방의 이야기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경험이 없이는 맘몬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신앙의 기쁨을 체험할 수 없다.

 

 

조현 기자: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고난을 자처하였고, C.S. 루이스도 고통이 우리를 정화시키는 수단이라고 했는데, 이 책에서 언급하듯 복음주의자들은 부와 건강과 성공만이 신심의 징표이고, 고통은 벌처럼 느끼게끔 기복적 간증이 넘치는데, 무엇이 이런 현상을 낳는 것인가?

 

강영안 교수: 기복 신앙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조건과 뗄 수가 없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살아야 할 존재이다. 단지 살 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남보다 더 부유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타인과 비교를 통하여, 타인이 가진 것을 자신의 손에 넣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지배한다. 더구나 사람은 생로병사의 현실에 직면한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종교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쓰였다. 우리는 종교가 지닌 이 기능을 부정할 수 없다. 기복은 유한한 인간의 욕망에 뿌리를 둔 종교의 본질일지 모른다.

   기독교도 기복과 위로, 마음의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기독교는 사람의 종교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건강이나 물질, 성공의 축복보다 기독교는 오히려 고난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인간의 종교적 본성과 거리가 멀다. 예수의 산상설교를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청결한자, 핍박받는 자를 오히려 복되다고 한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고 하였다. 자신을 부인하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삶이 참된 삶임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로부터의 철저한 탈중심화가 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난도 기쁨으로 감수하는 삶이 탈중심화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어느 사이 한국 기독교에는 재산이 늘어나고 건강이 유지되면 신앙의 복을 받은 것이고 경제적 어려움이나 건강 문제, 직장 문제가 있으면 저주받은 것인 양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이 자리 잡았다. 이렇게 보면 고난은 하나님의 벌이다. 이런 관점으로는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의 고난도, 바울과 베드로가 받은 고난도 이해할 수 없다. 의로운 일을 위하여 고난받고 그로 인해서 초래된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복이 된다. 사회에 존재하는 악이나 횡포,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받는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다. 베드로는 각 지역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베드로전서 3: 17)고 권면한다.

 

 

조현 기자: 크리스천 스미스의 말을 빌어 미국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의 신앙행태를 전통적인 기독교가 아닌 ‘도덕적 심리치료 이신론’으로 규정해 기독교 신앙이 개인적 위로와 감동, 자기 계발, 성공, 삶의 처세를 강조하는 시대정신과 맞물려 자기만족과 위로의 종교로 변해가는 것을 지적했는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강영안 교수: ‘치료사회’(therapeutic society)란 표현은 미국을 포함해서 서구 사회의 전반적 흐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인간 관계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고, 지적인 세계관보다는 감정을 중시하며, 역량 강화를 위해서 코치에게 의존하며, 문제가 있을 때는 심리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치료사회’라고 부르지 않나 생각한다. ‘자기도취 사회’와 ‘소비사회’도 연관된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분노 조절을 포함한 나의 감정이며 나의 성공이다.

   신앙도 이러한 자기 관리에 도움이 되는 한, 관심의 대상일 뿐 실제로 신을 내 삶에 개입시켜 신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에는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 종교는 자기 관리의 수단이며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나를 위로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공급하는 한 종교는 유효할 뿐 나의 삶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초월적 가치는 의미 없다.

   이렇게 이용되는 종교는 철저하게 내재화한 종교이다. 이 속에는 초월이 없다. 종교뿐만 아니라 타인, 타자, 다른 생각, 다른 삶의 방식도 내재화의 틀 속에 가두고자 하는 경향이 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나름 다양하고 다층적인 삶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바깥을 향한 초월은 불가능하다. 랭보가 표현했듯이 “참된 삶은 어디엔가”라는 물음이 나의 내면 속에서 솟구쳐 오른다고 해도 비집고 나갈 틈이 어디에도 없다. 여기서 나는 기독교의 본질을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독교는 나의 세계를 밖으로부터 깨뜨려 주는 타자와의 만남을 가져다 준다. 그 타자는 다름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누가 뭐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선다 싱이 있다. 선다 싱이 어느 날 자신의 교수와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자네 무엇을 발견했는가?”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그건 내가 아네. 예수 그리스도 말고 그를 통해 무슨 원리, 무슨 진리를 발견했는가?” “교수님, 제가 발견한 것은 어떤 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조 기자님이 저에게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도 비슷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가 누구이며, 그가 어떤 존재이며, 그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어떤 세계가 열리는지, 어떻게 만유가, 만물이 그 속에서 회복되는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우리 자신의 존재와 관련해서 이야기 해야 기독교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환원할 수 있는 존재, 나의 욕망 충족의 도구일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와 하나되어,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 이제 그가 나의 삶의 중심이 되고 내가 오히려 그의 주변이 되어 나의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이 그리스도와 관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 관계는 나에게만 그치지 않고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일어나며 이 가운데서 모두 하나되어 진리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고자 열망한다. 이 삶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누리는 삶이 ‘영생’이다. 이 삶은 하나님이 지은 자연과 인간과 만물이 함께 연결된 삶이며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나님과 이웃과 형제 자매와 주변 사물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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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기자: 혈육을 떠난 형제애와 사랑을 제시한 예수의 말씀과는 달리 현대 한국인은 자기 중심, 가족 중심의 사고가 지배한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에 따른 기독교적 처방이 있다면 무엇일까?

 

강영안 교수: 자기 중심과 가족 중심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모든 관계와 삶이 여기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서 처음 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가정을 세우는 일이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양육되고 한 인간으로 성숙한다. 한 개인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주의나 가족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 그 말을 듣고 예수께서 무엇이라 하셨는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마가복음 3:32)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고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4-35)고 하셨다. 예수님이라고 한들 어디 가족을 무시하시겠는가? 그러나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곧 형제 자매요, 어머니라고 가르친 것이다.

   자기 중심주의와 가족주의는 복음의 이 측면에 감동을 받아 생각과 삶이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 제거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나와 내 가족의 안위 때문에 전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삶을 위해 복음이 선포되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 속에는 나의 필요와 욕구보다는 형제자매와 이웃의 욕구와 필요가 우선한다. 복음이 들어가 제대로 뿌리 내린 곳이면 어느 곳이나 자기 중심의 생각과 가족주의가 깨어졌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이렇게 ‘뿌리 채 뒤흔드는’ 복음(radical Gospel)에 대한 무감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복음 없는 교회’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할 정도로 개신교회는 우리 사회 속에 자리잡은 물질주의와 현세주의, 성공주의, 극단적인 정치 이념에 사로 잡혀 있는 듯 하다. 성경을 다시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발견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철저하게 순종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읽되, 우리 자신의 성품이 이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도록 읽어야 한다. 이번에 낸 책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준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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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원 2020.06.14 08:20
    왜 한겨례 기자는 목사들 가운데 성경을 알고 읽고 가르치면서도 불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이며, 비인권적이며 무엇보다 비성경적인 북한 독재자의 만행에는 침묵하면서도 성경을 들먹이며 종북, 친북적 성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가?

    어느 사상이나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이나 추종은 당연히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일반언론이나, 교계 언론까지 '대형교회, 대형교회 목사, 보수적 그리스도인, 자유주의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을 매도하지 못해 안달이 난거 같다. 좋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려면 성경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나라 진보성향의 목사와 들의 성경 해석도 얼마나 성경의 원의에서 벗어나 있는지도 같이 언급해야 한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환경신학, 페미니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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